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발단

 

그러니까 이 사건의 시작은, 봄기운이 살랑살랑 밀려오던 3월 어느 오후였다. 충정로 전설의 중국집 공화춘에서 짭짤고소한 간짜장 한 그릇씩 때린 본지 기자 근육병아리(이하 근병)와 편집장 죽지않는돌고래(이하 죽돌)는, 벙커1 앞 벤치에 앉아 햇볕을 쬐며 식후땡을 즐기려던 참이었다.

 

마침 아이코스 배터리가 떨어진 근병. 죽돌의 1타가 끝나길 기다렸다가 그에게 스틱을 빌려 찐 담배연기에 한참 뿅가고 있는데,

 

"띠링"

 

불현듯 스산하게 울리는 문자 수신음.

 

2013-10-13_18;23;01.jpg

 

근병 : 편집장님.. 저 조땠는데요..

 

다운로드.jpg

 

죽돌 : (해맑) 응? 왱? 머선 129?

 

SE-58f7fb52-02cb-489e-aef0-b7d1d0b5168a.jpg

 

근병 : 저 다니는 헬스장에 확진자 나온 듯..

 

평소 함부로 신속하게 움직이는 법이 없는 죽돌 편집장. 보건소 문자를 봄과 동시에 근병 손에 들린 아이코스 스틱을 스틸해 경쾌한 백스텝을 밟아 1미터 뒤로 몸을 날린다. 믿을 수 없는 그의 날랜 동작은 흡사 페이드어웨이를 시전하는 마이클 조던 같다.

 

unnamed.jpg

 

죽돌 : 다..당장 사라져!

 

전개

 

마스크를 기본템으로 장착하고 지낸 지 어언 1년. 코로나19와의 공존은 어느새 익숙해졌다. 아침마다 나오는 확진자 현황은 날씨나 미세먼지 예보처럼,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알람 같은 것이었다. 비가 오고 눈이 오는 것을 막을 수 없고 뿌연 미세먼지로부터 도망 다닐 수 없듯, 코로나 바이러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냥 '그렇구나. 오늘도 그렇구나.' 정도.

 

그런데 막상 바이러스가 곁으로 성큼 다가와 멱살을 움켜쥐니, 내가 할 수 있는 건 어리버리까는 것 밖에 없었다. 온탕에서 축축 늘어져 있던 부랄 두 쪽이 냉탕에서 옴팡 쪼그라들듯, 아찔한 긴장감이 와락 밀려왔다.

 

편집장이 창문으로 던져준 가방을 들쳐메고 일단 선별진료소로 출발했다. 회사와 집 사이에 가까운 선별진료소 위치는 숙지하고 있었다. 세 번의 대유행과 회사 주변에서 확진자가 나올 때마다 코로나 검사 후 집에 짱박혀 있으라는 총수의 특명으로 단골 냉면집마냥 자주 드나들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랬다. 전광훈이 광화문에서 생난리를 친 날 이후, 회사생활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사옥은 주기적으로 방역소독을 하고, 사무실 입구는 지문인식기 대신 보안 카드를 찍고 들어가게 되었으며, 꼭 필요한 인원만 출근하고 나머지는 자주 재택근무를 하는 통에 지난 여름 이후로 회사 동료들끼리 밥 한 번 제대로 먹은 적이 없었다. 수요일 아침마다 다스뵈이다 방청권을 얻기 위해 길게 줄 선 사람들의 풍경을 본지도 오래되었다. 항상 사람들로 들썩이던 딴지사옥은 요즘 자주 절간 같다. 

 

암튼 모두가 그렇게까지 근성 디펜스를 하고 살고 있었는데, 감염 주의보가 뜬 내가 오전 내내 회사를 휘젓고 다녔던 것이다. 순도 백프로 리얼 조오땠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KakaoTalk_20210319_101834743.jpg

 

우왕좌왕 지하철 계단을 내려가려다가, 문득 정신이 들었다. 선별진료소까지는 5 정거장. 게다가 한 번의 긴 환승이 필요하다. 잠재적 슈퍼전파자가 될 수 있는 상황에서,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택시를 기다리며 일단 톡으로 저녁에 있는 필진과의 미팅은 취소했다. 다시 또 아차 싶다. 만약 내가 확진자라면, 내 카드 결제 기록에 따라 지금 오고 있는 기사님에게도 오늘 내가 받은 문자가 날아갈 것이다. 짧아도 하루, 길게는 몇 주간 꼼짝없이 생업을 멈추어야 할지 모른다. 하루를 성실하게 보냈을 뿐인데. 아무것도 모르고 뒤이어 탄 다른 손님은 또 어쩔 건가. 아찔하다. 기사님께 전화를 걸어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콜을 취소한다.

 

최대한 사람이 없는 골목을 따라 걷는다. 존나 고독하다. 세상과 사람들에게서 최선을 다해 멀리 떨어지려는 걸음 하나하나가 발이 푹푹 빠지는 모래밭을 걷는 느낌이다.

 

지난 일주일간 만난 사람들을 떠올린다. 많다. 너무 많다. 회사 동료들, 취재원들, 필진들, 가족들. 그리고 출퇴근길 버스와 지하철에서 부벼댔던 수많은 이름 모를 사람들. 그들이 만났을 또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니 머리가 지끈거린다. 지하철에 들어가기 전에 택시 문을 열기 전에 정신 차렸기 망정이지, 오늘도 미안해질 사람들을 무더기로 만들 뻔 했다. 

 

절정

 

도착한 진료소. 평소보다 줄이 길다. 이미 서너 차례 코와 목을 쑤셔본 경력자로서 의연하려 했지만, 보건소의 다이렉트 문자를 받고 서있으려니 여전히 마음이 심란하다.

 

몇몇 익숙한 얼굴들이 보인다. 같은 헬스클럽 사람들이다. 과연 확진자는 누구였을까. 매일 수건을 목에 두르고 괴상한 동작으로 몸을 푸는 아저씨였을까. 아님 바벨이 휘어지도록 스쿼트와 데드리프트를 치던 언더아머맨 이었을까. 문제의 그날을 떠올려본다. 확진자는 또 얼마나 피 말리는 시간을 보냈을까.

 

이윽고 검진 차례가 되었다. 인적 사항과 핸드폰 번호를 적는다. 익숙한 곳이라 그런지, 주민센터 2층에 예비군 훈련받으러 온 기분이다.

 

"좀 아파요. 고개 뒤로 빼지 마세요"

 

기다란 면봉이 코 안쪽으로 쑤욱 들어간다. 아프다. 졸라 아프다. 아는 거라 더 괴롭다. 눈물이 찔끔 난다.

 

"고생했어요. 손 소독하고 출구로 가세요"

 

한여름 뙤약볕에서 땀을 뻘뻘 흘리고 있던 방호복 속 검사원이, 봄의 입구에서도 같은 인사를 한다. 지난겨울 영하 10도를 넘나드는 꽝꽝 어는 날씨에도, 이들은 여기에서 같은 옷을 입고 이렇게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세상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하고 있으면서 잠깐 얼굴 찡그린 나에게 고생했다니. 오늘 여러 번 쓰레기가 된 느낌이다.

 

식겁

 

집으로 걸어오는 길. 문닫힌 헬스장 건물을 지나친다. 코로나가 이렇게 가까이 다가온 것은 처음이다. 전 세계가 오랜 시간 유례없는 혼란을 겪고 있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게 내 곁으로 바짝 다가온 것은 완전히 다른 감각을 일깨운다. 정말 한순간이다. 팬데믹이라는 것은.

 

좀처럼 잠이 오질 않았다. 오세훈의 셀프 보상과 박형준의 특혜 분양 의혹 그리고 그들의 보스 MB가 옥중에서 아직도 '나는 정직하다'고 바락바락 외치고 있는 이 엄중한 선거 시국에, 딴지일보와 총수에게 문제가 생겨 다스뵈이다와 뉴스공장이 스탑된다면 나는 과연 이 땅에서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촛불시민에게 저지른 그 큰 죄를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

 

다음날 아침. 새벽에 겨우 잠들었다가 톡 알림음에 깼다.

 

SE-5264cc3b-f9d9-4e99-91f5-19de9b4e91c1.jpg

 

결과는 음성. 세상에 이렇게 반가운 네가티브는 또 처음이다. 어제 헤아렸던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당 못할 죄스러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무엇보다 그게 천만다행이었다.

 

그래도 전날 밤에 선잠이라도 잘 수 있었던 것은, 마스크 덕분이었다. 운동하다 숨이 찰 때 슬쩍 마스크를 내리고 싶은 충동이 매번 들지만, 잘 참았다. 핸드폰 기록을 따라 일주일의 행적을 복기해보니 타인과 있는 공간에서 마스크를 내린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그게 얼마나 다행스러웠는지 모른다. 한 번이라도 위험한 숨을 쉬었다면, 아마 한숨도 못 잤을 거다. 

 

사회적 거리두기 방침에 따라, 24시간 갈 수 있던 헬스장이 저녁 9시 30분이면 '이제는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 BGM이 깔리고, 50명 이상이 동시에 운동을 할 수 없어 사상최초 헬스장 입구뺀찌를 먹어봤으며, 거리 유지를 위해 운동 기구의 절반은 놀려야 하는 그 모든 불편들이 그날 밤 얼마나 위안이 되었는지 모른다.

 

SE-9ede81e1-b08f-46c2-ae22-7c345cb3fdf1.jpg

 

방어자와 발화자

 

지난 1년을 되돌아본다. 마스크를 구하러 약국마다 줄줄이 줄을 서던 풍경. 중국인 입국금지 구호가 찢어지는 확성기 소리를 타고 울려 퍼지던 광화문. 9시 이후로 인적이 사라지는 거리. 밥 먹기 전 의식이 된 방문 기록 작성과 체온계. 이제는 건물에 들어가기 전부터 미리 켜두는 QR코드. 그리고 시작된 백신 접종까지.

 

우리가 얼마나 최선을 다해 안전벽들을 만들어 세워왔는지. 그것은 얼마나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는지. 그 안에서 느낀 느슨한 익숙함은 또한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불안한 잠자리에 들며 여러 생각이 떠올랐다.

 

솔직히 그런 생각, 한 적 있다. 이렇게 출퇴근길 지하철에서 끈적끈적 부비부비하고 있는데 거리두기는 다 무슨 소용이며, 어차피 조금 있으면 마스크 내리고 쩝쩝댈건데 음식이 나오기 전에 마스크를 쓰고 앉아있는 것은 과연 의미 있는 짓 일까.

 

하지만 아니다. 무척이나 의미 있다. 코로나에게 멱살 잡혀보니 알겠다. 내가 쓰고 있는 마스크는, 무너지기 일보 직전의 둑 구멍에 넣고 있는 손가락 같은 것이라는걸. 내 소중한 가족과 이웃을 지키는 방어자가 될지 끔찍한 재앙의 발화자가 될지. 우리는 모두 그 기로에 서있다.

 

SE-5d303787-ee7d-4f0c-8845-36d3669c0b4f.jpg

 

지하철에서

 

얼마 전 주말, 지하철에서 있었던 일이다. 맞은편에 앉은 아주머니가 졸고 있었다. 고단했는지 꽤 깊은 잠에 빠졌는데, 지하철 진동에 그녀의 마스크가 슬쩍슬쩍 내려가기 시작했다. 코가 나오고 인중을 지나 아슬아슬하게 입을 가리고 있을 즈음, 다음 역에서 탑승한 지하철 보안관이 정중하고 작은 목소리로 그녀를 깨워 마스크를 고쳐 쓰도록 부탁했다. 누군가 신고를 한 것이다.

 

억하심정으로 신고했으랴. 깨우러 온 지하철 보안관은 또 얼마나 조심스러웠을까. 다급하게 마스크를 고쳐 쓴 아주머니는 또 얼마나 미안했을까. 신고한 누군가는 벗겨진 마스크에 걱정스러운 마음을 대신 전해줄 보안관을 믿었고, 또 보안관은 정해진 규칙을 잘 따라줄 아주머니의 시민의식을 믿었던 거다.

 

여기까지 코로나를 막아올 수 있었던 힘, 우리가 눈 떠보니 선진국 시민이 되어있는 이유. 서로가 성숙하고 양식 있는 이웃이라 믿고 있는 신뢰 덕분이다. 유식한 말로 그걸 신뢰자본이라고 하는 거 같던데, 여튼 우리에겐 가슴 웅장하게도 그게 있다.

 

맘 같아서는 정월대보름 쥐불놀이하듯 싹 다 모아서 짚불에 태워버렸으면 좋겠지만, 바이러스는 그렇게 사그라들지 않는다는 것을 모두가 잘 알고 있다. 우리는 당분간 코로나 현황을 들으며 아침을 준비해야하고, 선별진료소의 의료진들은 계속 자리를 지킬 것이다.

 

우리는 정말 최선을 다해왔다. 서로 간의 거리를 지키며, 각자의 삶을 줄여가며. 아이들이 선생님을 만나는 방법을, 부모들이 생업을 포기하지 않은 방법을, 어렵고 힘들고 턱없이 부족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강구하고 있다. 4명 이하로 만나 간단히 저녁을 먹고 10시가 되기 전에 귀가하는 풍경은, 방역과 삶의 지속이라는 서로 길이 다른 목표 사이에서 어렵게 내놓은 오늘의 답이다.

 

앞으로도 어렵고 복잡한 문제는 계속 등장할 것이지만 우리는 또 기어코 풀어갈 것이다. 마스크를 올려 쓰고 서로를 믿으며. 그것이 혹자들은 까내리려고 안달 나 마지않는, 코로나시대 세계 시민사회에서의 우리의 위치고 품격이다.

 

 

KakaoTalk_20210318_103033272.jpg

오늘도 평화로운 딴지 편집부

 

 

 



Prof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