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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과 독은 본질에서는 같으나 용처와 용량에 따라서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 필리핀의 두테르테 대통령은 2016년 취임 이후 줄곧 파격적인 언행과 극단적인 정책으로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아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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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지도자들에 대한 막말과 함께 전통적인 우방이었던 미국과 서방세계를 멀리하고 적대관계였던 중국과 러시아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마약과 부패와의 전쟁’을 통해 불거진 인권유린 사건으로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되기도 했다. 

 

이제 임기를 1년 남짓 남겨둔 두테르테 대통령은 그의 통치가 필리핀 민주주의를 회복시켜 건강하게 만드는 약이었느냐, 아니면 더욱 악화시켜 권위주의 체제로 퇴보시킨 독이었느냐에 대한 평가를 남겨두고 있다. 

 

 

필리핀의 왜곡된 민주주의의 배경에는 불평등한 계층구조가 존재한다

 

필리핀의 민주주의는 ‘엘리트 민주주의’, ‘선거 민주주의’, ‘공허한 민주주의’ 등 국민이 주인이라는 민주주의의 본질에서 벗어난 왜곡된 민주주의로 평가된다. 

 

필리핀 민주주의가 이러한 특징을 가지게 된 배경에는 필리핀 사회의 불평등한 계층구조가 존재한다. 전체 국민의 약 1~2%에 해당하는 엘리트 가문이 필리핀의 정치와 경제 영역을 지배하고 있다. 

 

건전한 민주주의의 핵심 주체로 간주 되는 중산층은 약 7~8% 정도로 얇게 형성되어 있으며, 이들은 사회변혁의 원동력이 되기보다는 엘리트 계층이 구축해 놓은 사회구조 속에서 스스로 자족하며 기능적으로 봉사하고 있다. 그리고 나머지 대다수의 필리핀 민중들은 이러한 불평등한 사회구조를 힘들게 떠받치고 있는 하층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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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의 빈부격차를 보여주는 사진.

 

필리핀의 이러한 불평등 구조는 스페인 식민통치 시대부터 형성되었으며, 독립 이후에도 변하지 않고 유지되고 있다. 이러한 불평등 계층구조가 필리핀 민주주의를 공허하게 만드는 최대의 병폐로 간주되며, 마약과 범죄 등 다양한 사회적 문제의 배경을 제공한다. 

 

2016년 대선에서 지방 정치인이었던 두테르테를 필리핀 대통령으로 만들었던 것도 마닐라 중심의 엘리트 민주주의가 낳은 부패와 마약과 같은 사회적 병폐였다. 

 

사회경제적 불평등 구조를 극복하려는 노력은 인류의 역사 그 자체이기도 하다. 근대 이후 대표적인 방식이 사회주의 혁명이었다. 그러나 이상주의적 유토피아니즘에 기초한 공산주의는 이기적 인간 세계에서 실현되기 어렵다는 사실을 역사는 증명하고 있다. 

 

또 다른 극단적인 방식으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독재자로 전락하면서 더 많은 문제를 낳기도 했다. 결국, 모든 국민이 주인이 되는 진정한 의미의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방식은 민주적 방식에 따라 민주주의적 토대를 강화하는 개혁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필리핀 민주주의는 미국 식민지 시대 이식된 것으로 1946년 독립 이후에도 주기적 선거를 통해 지도자를 선택하는 절차적 정당성을 유지했다. 그러나 1972년 마르코스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하고 독재정권을 수립함으로써 민주주의 정치과정이 중단되었다. 

 

1986년 소위 ‘시민혁명’(People Power I)을 통해 되찾은 민주주의 정체체제는 필리핀 국민의 절대적 지지 속에서 오늘날까지 유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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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필리핀의 ‘시민혁명’. 200만 명 이상의 국민들이 참여하여 마르코스 정권의 독재와 부정 선거에 항의하여 평화적인 시위를 했다. 

 

민주화 운동의 결실로 획득한 1987년 민주헌법은 새로운 독재자의 탄생을 용인하지 않기 위해 대통령 단임제를 채택하고 있다. 이 규정은 필리핀 국민에게 있어서 필리핀 민주주의의 상징과도 같은 의미를 지닌다. 필리핀에서 단지 정치적 이유에서만이 아니라, 경제·사회적 이유로 인해 헌법개정의 필요성이 제기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필리핀 국민의 여론은 싸늘하다. 국민의 높은 지지를 받았던 라모스 대통령 임기 말에도 그랬고, 최근 90%에 달하는 국민의 지지를 유지하는 두테르테 대통령 아래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필리핀 국민은 강력한 지도자를 원한다 

 

<아세안서베이>라고 하는 국제적 여론 조사 기관의 수차례 조사에 따르면, 필리핀 국민은 민주주의를 독재보다 좋은 정치체제로 인정한다. 그러나 경제발전이 민주주의보다 더 중요하다는 응답이 그 반대보다 높게 나타난다. 

 

이는 필리핀 국민이 민주주의 체제 아래에서 경제적 문제를 해결도 해결해 줄 효율적인 정부를 원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필리핀을 포함한 대부분의 개발도상국가에서 효율적인 정부는 곧 강한 정부를 의미하고, 강한 정부는 강한 지도자에 의해서 만들어진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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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테르테의 ‘마약과 부패와의 전쟁’을 지지하는 필리핀 국민들의 모습. / 출처-<로이터>

 

이처럼 강한 지도자를 요구하는 이유에는 자신들의 문제가 기존의 제도와 일반적인 방식으로는 해결될 수 없을 것이라는 인식 때문이다. 필리핀의 정치체제는 엘리트에 의해 포획되어 저들에 의해 저들을 위해 작동하고 있다고 민중들은 인식한다. 

 

엄청난 자금이 필요한 필리핀 선거는 자금 동원력이 있는 일부 엘리트에게만 그 문이 열려있다. 이러한 엘리트 지배체제에 영합하는 전통적인 정치인(traditional politician)은 필리핀어로 ‘걸레’라는 의미를 지닌 ‘트라포’(trapo)로 불리며 부패하고 나약한 지도자로 낙인찍혀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대통령중심제를 채택하고 있는 필리핀 정치체제에서 대통령은 세계의 그 어떤 대통령제보다 강한 권력을 부여하는 것으로 평가된다. 이처럼 강한 권력을 부여받은 대통령의 권력은 국민이 부여한 또 다른 권력 기관인 의회에 의해 견제되어야 한다. 

 

필리핀 의회는 상하 양원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80%를 지역구에서 선출하는 하원은 대부분 지역 엘리트 가문의 자손들로 채워져 있다. 한편 전국적인 선거를 통해 선출되는 상원의 경우, 유명 운동선수나 연예인, 군부 쿠데타 주도자, 그리고 전국적 명망이 있는 엘리트 가문의 자손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은 대부분 대통령의 권력을 견제하기보다는 이에 편승하여 경제적 이권과 함께 차기 선거를 위한 기반을 마련하는 일에 열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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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의회

 

두테르테 대통령은 이러한 필리핀 정치현실에서 국민들의 개혁 의지를 대변하며, 필리핀 사회의 기득권 세력과 당당히 맞서는 인물로 평가받기도 한다. 필리핀 엘리트 권력의 배경이 되어 왔던 친미 세력, 가톨릭계, 보수적 언론, 그리고 이권추구 기업들에 대한 두테르테 대통령의 거침없는 언행이 필리핀 국민 다수의 마음을 사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두테르테 대통령에 대한 국내외적인 비판의 중심은 두테르테 자신을 필리핀 대중들에게 알리고, 결국 대통령 자리까지 오르게 만든 필리핀 사회에 대한 극단적인 처방이었다. 그는 필리핀 사회가 극단적인 처방 이외에는 치유할 방법이 없다고 진단한다. 

 

집권 직후부터 시작된 ‘마약과 부패와의 전쟁’ 추진 과정에서 불거진 인권문제는 그에 대한 비판의 초점이 되고 있고, 이를 방어하려는 그의 언행은 기존의 관행에서 벗어나 독단적이며 독재적인 모습으로 비추어지고 있다.

 

 

두테르테는 필리핀 민주주의의 약일까 독일까

 

이제 임기를 1년 남짓 남겨둔 두테르테 대통령의 지난 재임 5년간의 업적을 돌아보면 다양한 평가가 가능하다. 무엇보다도 그의 업적이 필리핀 민주주의의 질적 수준을 향상하는 방향으로 추진되었느냐가 중요한 평가의 기준이 될 것이다. 

 

두테르테는 민주적 선거를 통해 선출된 대통령으로서 정통성에 문제가 없다. 그리고 필리핀 국민은 그가 지방 도시 다바오에서 21년 간 시장을 지내면서 쌓은 업적과 명성에 환호했다. 

 

그의 방법은 절차적 정당성보다는 결과의 효율성을 중시하고, 개인적 인권보다는 사회적 질서를 통한 공동체의 안전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그의 극단적인 처방은 상당한 추진력을 발휘한 것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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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거된 마약범들

 

마약사범에 대한 무자비한 처단, 부패 공무원에 대한 강력한 징벌, 전임 정권에서 실현하지 못했던 무슬림 반군과의 평화협정 완료, 경제적 이권과 관련되어 추진이 어려웠던 환경 파괴 사업에 대한 폐쇄 조치 등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반면, 초법적 살해 사건, 저속한 언행, 비판적 언론에 대한 탄압, 살해 위협을 통한 공포 분위기 조성 등 다양한 부작용을 낳기도 했다. 

 

내년 5월이면 두테르테 대통령의 뒤를 이을 대통령 선거가 있다. 민주주의 체제에서 선거는 권력자에 대해 유권자가 정치적 책임을 묻는 기회이다. 많은 경우 그 결과에 따라 사법적 책임이 뒤따르기도 한다. 

 

필리핀의 경우 지난 3명의 대통령 모두 임기 종료 후 사법적 심판의 대상이 되었다. 두테르테 대통령의 경우 집권 후반기까지 국민의 높은 지지가 지속되고 있다는 점에서 자신의 정책을 계승할 후계자로 새로운 정권을 창출할 가능성이 크다. 

 

필리핀 국민은 필리핀이 가지는 사회적 병폐가 기존의 제도나 평범한 지도자에 의해서는 해결할 수 없는 구조적이며 심각한 것으로 진단한다. 그래서 좀 더 새롭고 극단적인 강한 대통령을 추구한다. 그렇게 선택된 대통령은 증상을 완화하고 치유하는 약으로 보이기보다는 상처를 파헤치고 고통을 심화시키는 독으로 보여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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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로이터>

 

이러한 강력한 지도자에 의해 사회적 안정과 균형적인 경제발전이 이루어짐으로 다수의 빈곤층이 중산층으로 편입될 때까지 필리핀 국민은 두테르테와 같은 극단적인 처방을 요구할 것이다. 이것이 개발도상국의 민주주의가 공고화의 길로 나가는 데 감내해야 할 진통이며 삼켜야 할 독과 같은 약일 것이다.

 

김동엽 (부산외대 교수 & 아세안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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