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지난 기사 요약

 

국민들의 압도적 지지를 받으며 국가개혁을 시도했으나 격렬한 기득권의 저항으로 인해 실패한 국가가 있다. 이후 국민들의 삶은 더욱 피폐해졌다. 라틴아메리카의 “과테말라” 이야기다. 

 

마지막 사진.jpg

 

스페인이 라틴아메리카에서 물러나면서 신지배자로 미국이 등장했다. 미국은 유럽과는 달리 경제적 예속 관계를 통해 지배했다. 이는 대부분 신생 독립국들의 ‘근대화’ 과정을 통해 이뤄졌다. 

 

과테말라의 기득권은 이런 미국과 결탁하며 자국 내의 지배체제를 공고히 했다. 근대화라는 명목으로 시행한 정책들은 현재 기형적인 과테말라 사회구조의 기틀을 제공했다. 양극단의 빈부격차와 대중 빈곤의 일상화로 점철된 현재 과테말라 사회의 신(新)봉건적 질서가 그 기틀 위에 세워졌다. 

 

과테말라는 역내 국가들과는 달리 금광산업이 아닌 토지 중심의 농업경제가 우세한 곳이었다. 그만큼 토지가 중요했다. 

 

이런 상황에서 1950년대 들어서는 전체 토지 72% 이상을 상위 2%가 소유했을 만큼 기득권들은 국내의 토지를 독점하거나 외국자본(특히, 미국)에 넘겼다. 미국 기업들은 토지 외에도 농산물, 철도와 교량에 대한 독점적 통제권까지 얻으며 경제의 주도권을 미국 지배하에 두었다.

 

과테말라 시티.jpg

▲과테말라의 수도 ‘과테말라시티’의 한 지역

 

민중의 삶은 점점 피폐해졌다. 이에 반독재 저항운동이 일어나며 과테말라 최초의 자유 선거가 실시되었다. 그 결과 1944년 세워진 민주주의 정권은 아레발로(Arévalo)정권-아르벤스(Arbenz)정권으로 이어지며 각종 개혁과 토지 개혁을 주도했다.

 

그러나 기득권들의 저항은 격렬했고, 1954년 미국과 공모한 과테말라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키며 개혁 정부는 무너졌다. 그렇게 10년 동안 진행된 개혁(일명 “10년의 봄”)은 물거품이 되었고, 정점에 달한 사회의 계급 갈등은 결국 36년간의 내전으로 이어졌다.

 

민중의 삶은 더욱 피폐해져만 갔다. 

 

(자세한 내용은 1편 링크)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지배계급의 선택, 외세와의 결탁

 

아르벤스 정부는 1951년 선거에서 전체 유권자의 64%가 넘는 압도적인 지지를 얻으며 시작된 개혁 정부의 제2기였다. 당연히 자유 선거를 통해 집권한 민주주의 정권이다. 그래서였을까. 

 

개혁 세력에 대적할 만한 정치적 아젠다는 고사하고 지지층 기반이 미약했던 과두 지배계급이 대중의 압도적 지지를 받는 정부로부터 정치 권력을 되찾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쿠데타였다. 그리고 ‘명분’ 없는 쿠데타의 구실로 ‘공산주의 망령’이라는 텍스트는 언제나 명료한 이유가 된다. 

 

당시 토지개혁법은 미국의 이해와도 전면 배치되는 것이었다. 때문에 미국도 과테말라의 개혁을 가만히 두고 보지 않았다. 

 

과테말라 토지의 상당 부분을 소유했던 미국 유나이트 프루트 회사의 주주이자 당시 미 국무장관 포스터(Foster)도 이후 노골적으로 쿠데타에 개입하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아르벤스2.jpg

▲아르벤스 전 과테말라 대통령 (재임: 1951-1954)

 

포스터 아이젠하워.jpg

▲미 국무장관 포스터(왼)와 대통령 아이젠하워(오) 

 

다수 국민의 지지를 받는 개혁 정권을 뒤엎을 작전을 도모할 능력조차 없던 보수 기득권의 선택은 미국과의 공조였다. 1954년 과테말라 쿠데타는 미국의 개입 없이는 불가능한 작전이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다음은 쿠데타 직전 CIA가 작성한 1953년 보고서의 내용이다. 

 

“과테말라 현 정부에 불만은 가진 세력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들이 정치적으로 세력화할 가능성은 현저히 낮다. 그뿐만 아니라 온두라스에 기반을 두는 까스티요 아르마스 장군(과테말라 출신 군인)의 군대도 고작 몇백에 지나지 않는 소수일 뿐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1952년 과테말라가 입법 추진한 토지개혁법은 당시 반봉건적 사회경제 질서 개혁을 위한 정책으로, 소위 혁명적이거나 급진적인 ‘몰수’와 ‘분배’가 아닌 지극히 온건한 형태의 유상몰수 방식이었다는 사실이다. 

 

즉, 토지개혁은 봉건적 경제질서를 청산하고 ‘근대적’ 자본주의 국가로 성장하기 위한 경제정책이었고 미국식 자본주의 국가발전과도 유사한 형태였다. 오히려 그 자체로 자본주의 원칙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가령 농사를 짓지 않거나 방치된 땅을 유상몰수 혹은 국유지를 농민에게 나누어 주는 방식이었는데, 이때 분배된 토지는 유상 몰수한 사유지보다 국유지 비율이 훨씬 높았으며, 전체 사유지의 10%에 정도에 불과한 면적만이 유상몰수되었고, 대부분 국유지를 대상으로 하는 개혁조치였다. 

 

토지개혁을 둘러싼 과테말라 내부 사회의 지배질서, 계급갈등, 그리고 개혁이 추진되고 결국 실패에 이르게 되는 단순하지 않은 이 역사적 과정은 현재 봉건적 사회구조와 그 질서를 이해하는 시작이다. 

 

디에고 리베라.jpg

▲미 국무장관 포스터와 과테말라 새 대통령이 악수를 하고 있다. 포스터의 왼손에는 미사일에는 아이젠하워가 그려져 있고, 미국 관리들이 과테말라 대통령을 둘러싸고 있다. CIA 국장이자 포스터의 형인 앨런이 포스터의 귀에 무언가 속삭인다. 그 외에 무장반란군, 피폐한 민중 등이 보인다. / 디에고 리베라의 'Glorious Victory' , 1954 

 

 

‘명분’ 없는 반공이데올로기는 민주 정부의 모든 개혁을 뒤덮었다

 

10년의 봄(1944~1954)이라 부르는 민중 세력의 개혁 의지와 시도는 결국 지배 엘리트 계층과 미국의 지원을 받은 군부 쿠데타로 중단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더 나아가, 라틴아메리카 근현대사를 통틀어 미국의 직·간접적인 군사 개입을 경험하지 않은 나라가 거의 없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가. 

 

라틴아메리카에 대한 미국의 군사 개입은 특히 1960년~1980년대에 이르러 절정에 달했다. 이 시기에 군부 쿠데타로 많은 민주주의 정권이 무너지고 군부독재 정권이 들어섰다. 

 

1974년 칠레 민주정권의 아옌데(Allende) 대통령은 미국 CIA 지원을 받은 군부가 대통령궁에 쏟아부은 비행기 폭격에 저항하다 사망했으며(관련 기사 링크), 칠레를 포함해 아르헨티나, 브라질, 파라과이 등지에서 미국의 지원을 받은 군부독재 정권들은 행한 암살, 고문, 살인 등을 일삼으며 정권 유지를 위한 정치적 탄압을 했다. 

 

이는 이른바 ‘콘도르 작전(Operación Condor)’이라 불리며, 남미 군부독재 정권 간 사이좋은(?) 공조로 이루어졌다. 

 

그 희생자가 수만에서 수십만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나, 현재까지도 그 수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비밀리에 이루어진 작전이었다. 이에 더해 군부의 엘리트들은 미국 본토에서 군사교육을 받은 이들로 채워졌다. 

 

과테말라 개혁 정부가 실각하는 1954년은 앞으로 라틴아메리카 대부분 국가에서 겪는 군부독재와 이를 감싸는 미정부의 노골적인 개입의 시작을 알리는 서막이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개입의 명분은 언제나 ‘공산주의’ 위협이라는 반공이데올로기였다. 

 

군사정권.jpg

▲CIA 요원과 과테말라 쿠데타의 주요 인물들.

 

당시 과테말라 정부가 추진한 토지개혁이 반봉건적 노동력 착취 관계를 청산하고 농업 생산력 증대, 더 나아가 자본주의적 근대국가 성장을 위한 것이었다는 것은 더는 중요하지 않았다. 

 

아르벤스 정부가 구상한 국가의 발전상은 근대 민족자본 형성을 통한 자본주의 국가로 성장하는 것이었음에도, 다수 국민의 지지를 받는 개혁 세력을 탄압하는 구실은 언제나 “공산화”의 위협이었다. 개혁 정부가 시행했던 국가의 미래를 위한 모든 개혁들은 이를 막으려는 기득권들의 “공산주의 위협”이라는 반공이데올로기를 외치는 선동에 가려 보이지 않게 되었다.   

 

먼로 독트린으로 증명된 남아메리카에 대한 미국의 관심은 풍부한 지하자원을 향해 있었고, 미래의 시장이었다. 따라서 그들의 경제적 이해관계를 해치지 않고 길들이기 좋은 정부라면  충분했다. 그것이 독재이든 군사정권이든 상관없었다. 

 

친민중적 노선의 개혁 정부는 어김없이 ‘공산주의’라는 패러다임에 갇혔고, 미국의 견제를 받으며 보수 기득권 세력의 저항에 부딪혔다. 반공이데올로기는 언제나 보수 기득권의 쿠데타 명분이었고, 미국의 내정간섭을 정당화하는 그럴듯한 핑계자 구실이었다  

 

 

성공하지 못한 개혁이 치러야 하는 대가는 언제나 혹독하다

 

라틴아메리카에 대한 미국의 강력한 통제 원칙과 토착 지배층과 매판 자본가들의 동맹 관계는 공고했고, 기득권 질서를 개혁하고자 했던 민주주의적 시도들은 번번이 좌절되었다. 개혁의 주체세력은 민주적 수단과 형식을 추구하였고, 기득권 세력은 물리적 폭력과 헌정질서를 파괴하는 저항 방식을 선택했다. 

 

이 과정은 언제나 외세의 개입과 묵인을 동반하기 마련이다. 1954년 과테말라에 머물던 체 게바라는 그들의 10년의 봄이 어떻게 미국의 개입과 쿠데타로 무너지는가를 직접 경험한 후 쿠바의 피델과 무장투쟁에 합류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진 바다.  

 

과테말라 퇴진시위.jpg

▲작년 11월, 과테말라 의회는 역대 최대규모의 예산안을 밀실에서 마련한 뒤 일사천리로 통과시켰다. 코로나19 대응 재정을 비롯한 보건, 교육, 인권 등 민생 복지 예산을 대폭 삭감하고, 대기업 지원을 위한 인프라 건설에 대부분 예산을 배정했다. 특히, 민생 예산을 대폭 삭감하며, 의원들의 식비 지원 예산을 증액해 통과한 것이 드러나며 민심이 폭발했다.

 

역사적으로 모든 사회가 그러하듯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변화를 꿈꾸지 않는 곳은 없다. 라틴아메리카의 굴곡진 근현대사의 단면을 채우는 수많은 개혁의 시도들은 좌초되었다. 그러나 번번이 좌절되는 꿈이 더는 희망이 아닐 이유는 없다. 

 

그래서일까. 우리가 흔히 ‘혼란’이라고 부르는 빈번한 정치적 갈등과 사회적 동요는 ‘을’들의 반란이 멈추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사회의 지배적인 질서를 바꾸는 일은 필연적으로 사회적 갈등을 불러온다. 새로운 변화를 원하는 세력만큼이나 기존의 지배 질서를 옹호하는 기득권의 저항은 언제나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공하지 못한 개혁이 치러야 하는 대가는 언제나 혹독하다. 

 

과테말라가 개혁실패의 대가로 36년간 긴 내전을 겪었고, 10만에 이르는 마야 원주민이 대학살 되었으며, 21세기 신新봉건질서의 기형적 사회구조와 지배 질서가 정착된 것처럼 말이다.        

 

정이나 (쿠바 아바나 의과대학, 중남미 사회인류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