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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기경량 교수라는 분이 <중앙일보>를 통해 <조선구마사>를 강제종영시킨 '과도한 애국주의'를 비판했다. 그러면서 <링컨 : 뱀파이어 헌터>의 예를 들었는데, 요지를 발췌하면 이렇다.

 

"미국에서 링컨은 위대한 지도자로 추앙받는다. 하지만 그가 실은 흡혈귀 사냥꾼이고, 도끼로 이들을 때려잡고 다니다가 심지어 나중에는 흡혈귀가 된다는 설정의 소설과 영화도 만들어졌다.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이런 것을 ‘역사왜곡’이라고 비판한다면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에이브러햄 링컨의 삶을 보면 이건 너무 근본없는 비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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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컨 : 뱀파이어 헌터>에는 역사적 사실을 배신하지 않는 맥락이 있다. 링컨은 하층민 출신이었고 어려서부터 강인한 신체능력으로 소문이 난 사람이다. 그는 아버지의 명령에 의해 매일같이 도끼질을 하는 아동노동에 시달렸는데, 링컨이 도끼로 나무를 벨 때면 사람들이 몰려와 구경했다. 그의 도끼질은 일반적인 장정보다 4배나 빨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변호사 출신 대통령이라는 타이틀이 현대인에게 주는 느낌과는 반대로 링컨은 체격, 힘, 성품 모두 타고난 무투파였다. 링컨의 싸움실력은 자타가 공인하는, 말하자면 국가적인 인정을 받는 수준이었다. 일 대 여럿의 길거리 싸움에서도 승리한 전적이 있다(포위되지 않도록 움직이며 침착하게 한 명씩 쓰러트렸다.).

 

링컨이 성장하고 변호사로 활동한 시대엔 아직 총기 대신 맨몸격투가 듀얼(맞대결)의 대세였다. 총기 듀얼은 다름 아닌 그가 결행한 남북전쟁의 여파로 미 전역에 총기가 보급되면서 보편화되기 시작했으니까. 물론 부와 권력을 가진 명사들은 우아하게(?) 권총 듀얼을 선호하긴 했지만(대표적인 인물이 제7대 대통령인 앤드루 잭슨) 링컨에게는 해당사항이 아니었다. 당시의 미국 변호사란 세련된 문과생이 아니라 만능 해결사에 가까웠기 때문에 듀얼 실력은 성공에 중요한 조건이었다.

 

또한 한때 링컨의 직업이 프로레슬러였다는 사실도 잊으면 안 된다. 그는 12년 동안 단 한 번만 패배했으며, 일리노이주 챔피언이었고, 현재 미국 레슬링 명예의 전당에 올라 있다. 당시의 프로레슬링은 요즘으로 치면 무규칙 지하격투 정도에 해당하는, 영국의 베어너클 복싱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날것의 싸움이었다. 그것도 단단한 맨바닥에서 했다. 죽거나 불구가 되는 일은 흔했다(참고로 링컨의 피니셔는 상대를 들어서 거꾸로 매다꽂는 동작이었는데, 패배자들의 구체적인 운명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여기까지가 역사적 사실이다.

 

강력한 격투실력과 도끼라는 아이템, 대통령이 되기 전까지의 고단하면서도 신비로운 생활, 우울증을 오래 앓은 그의 침울한 분위기는 영화의 판타지적인 설정과 맥락을 같이한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영화의 맥락을 링컨의 실제 삶에서 연상되는 상상의 줄기를 따라 맞춘 것이다. 이 정도면 거의 뱀파이어 헌터라는 설정만 추가해 넣은 수준이다.

 

그러므로 미국인들이 예술에 대해 우리보다 훨씬 관대해서 뱀파이어 때려잡는 링컨을 용납했다는 말은 이치에 맞지 않다. 오히려 충무공 이순신이 개그캐릭터로 나와 주접을 부리는 <천군>이 훨씬 관대하다. 미국인들은 사실 위인에 대해 우리보다 훨씬 보수적이라서, 링컨을 그렇게 찍었다간 난리가 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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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깊은 나무>의 세종대왕은 경박한 모습도 보이고 쌍욕도 한다. 밀본이나 밀원과 같은 판타지적인 반정부단체며, 광평대군(무려 왕자님!)이 원리주의자들에게 살해당하는 것이며, 천재적인 궁녀들이 비밀스럽게 군주의 언어혁명을 돕는다는 설정이며... 자체로는, 무리수이기 십상이다.

 

이런 요소들은 퍽 유치하고 제멋대로인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시청자들이 뿌나를 좋아한 이유는 판타지 요소 때문이 아니라, 그 요소들이 역사적 흐름과 잘 결합됐기 때문이다.

 

세종대왕의 언어혁명은 세상의 모든 소리를 대상으로 한다. 그러므로 쌍욕도 세종대왕에게는 표현수단이자 문자가 담아야 할 언어의 일부다. 애초에 그는 품위있는 말과 상스러운 말을 구분해 사용하는 단계를 넘어 언어 자체를 조감했던 인물이다.

 

천재적인 궁녀들의 모티브는 세종의 한글창제작업을 도왔던 그의 딸 정의공주다. 여기에 우리가 쓰는 한글 서체의 기본이 되는 궁서체가 여성들의 손에서 디자인되었다는 사실의 맥락도 추가된다. 광평대군 역시 의뭉스러운 사인으로 요절했으므로 이 캐릭터를 사용한 방식은 충분히 납득된다.

 

무엇보다 시청자들이 밀본-본원에 몰입할 수 있었던 맥락은 역사성과 그대로 맞아떨어진다. 조선이 이념적인 혁명에 의해 탄생한 국가라는 사실, 그것이 정도전의 이념이라는 사실, 정도전은 공식적으로만 역적이었지 왕들도 일정한 존경을 바쳐야 했다는 사실, 그의 후손들도 명예와 영향력을 유지한 채 존속했다는 사실, 그래서 조선이 군약신강의 나라였다는 사실 때문에 극중에서 정도전이 남긴 영향력은 판타지이되 사실적인 판타지다. 밀본이 결성된 모토는 당연히 정도전-조선건국의 이념과 일치한다.

 

물론 이와 같은 사실들을 시청자들이 일일이 알 리는 없다. 하지만 창작자들이 역사성을 훼손하지 않으려고, 혹은 되도록 전달하려고 기울인 노력은 소비자들이 반드시 느끼게 되어 있다. 그 느낌에서부터 몰입이 시작되는 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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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구마사>의 창작자, 제작자들이 얼마나 차이나 머니에 타락했는지는 모르겠다. 그들을 아는 사람도 아니고 드러난 증거도 없으니까. 한 가지 확실한 건 이 드라마는 설정부터 납득할 만한 맥락이 없다. 부제가 '괴력난신의 시대'라니... 조선 건국 자체가 이념상 괴력난신을 철저히 부정하면서 출범하지 않았는가.

 

최근 십여 년 간 평균 이상의 성공 가능성을 꾸준히 보여준 시대와 인물군 세트가 있다. 여말선초 그리고 최영-이성계-이방원-세종(feat 정도전, 정몽주) 라인이다. <조선구마사>는 어느 정도 성공이 보장된 시공간과 인물 라인에 구마라는 자극적인 소비재를 넣어본 흥행 기획이 아닌가 싶다.

 

<뿌리깊은 나무>는 한글 대개봉

<정도전>은 혁명

<육룡이 나르샤>는 삼한제일칼빵

<나의 나라>는 비정규직 청춘남녀
<순수의 시대>는 계급 헬반도

 

등등...

 

이 판에서 <조선구마사>는 - 인터넷에 도는 중국 관련 루머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로 보면, 여기에 구마 패치를 붙인 거다. 그런데 왜 조선 초기와 그 인물들이어야 하는지는 전혀 설명이 안 된다.

 

사실 그래서 <나의 나라>와 <순수의 시대>는 잘 안됐다. 두 작품의 주제는 계급적이고 개인적이다. 그래서 '역사에 이용당하고 짓이겨지는 개인'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 개인들은 언제나 있어 왔다. 그런데 어쨌거나 조선 건국은 한계가 있을지언정 개인의 권리와 불공정 문제가 진일보한 사건이었다.

 

씹고 뜯겨지는 비운의 개인사는 여말선초에도 있었겠으나, 그 이야기의 배경이 굳이 여말선초가 되어서 당대의 역사적 맥락이 낙동강 오리알이 될 이유는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혁명이고 뭐고 민초들은 예나 지금이나 다 짓밟혀왔다는 걸 몰라?'

 

라는 얼핏 진지하고 현실적으로 보이는 주제가,

 

'와아, 세종대왕께서 백성을 위해 문자를 창조하셨대!"

 

라는 낭만적인 서사보다 현실성과 몰입감이 떨어지게 된다.

 

<조선구마사>의 구마 설정은 너무나 맥락을 배신하는 뜬금포여서, 애초에 망삘일 가능성이 너무 농후했다고 보는 게 맞다. 그냥 조선의 어느 불특정 시대 어떤 창작인물들이 등장하는 이야기였다면 참신했을수도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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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구마사> 논란에서 창작의 자유를 인정할 수도 있고 비판자들의 편에 설 수도 있다. 뭐 각자 맘이지. 그런데 우리 안의 촌스러운 애국주의, 민족주의 따위를 반성하고 세계시민으로 거듭나자는 따위의 준엄한 자기검열이 대체 왜 시도 때도 없이 필요한지 모르겠다.

 

그것도 어떤 미국 영화가 증명한 가치를 따라 반성하자는 문화식민지스러운 관념은 너무 철지난 정신적 습관이 아닌지. <조선구마사>에 대한 오해가 다 진실일 수는 없겠다. 구리기도 할 거다. 그렇다고 국민감정을 비판해야겠다며 신사유람단이 될 이유는 뭔가.

 

'과도한 애국주의'를 비판할 순 있는데, 그 근거가 자신의 '과도한 뇌피셜'인 건 웃긴 일이다. '너희는 나와 달리 미국 물을 덜 먹어서 아직 부족해!'라는 샤우팅에 불과하잖은가. 정작 자기는 링컨에 대해서도 잘 모르는 것 같은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