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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FX 기사를 쓰다가 문득 떠오른 작전 하나가 있었다.

 

『에버레디 계획(Plan Eveready)』

 

미국의 이승만 제거 작전이다(노파심에서 말하지만, 이승만을 찬양하기 위한 게 절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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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은 한국전쟁을 치르는 동안 미국의 눈 밖에 났다. 시작은 1952년 5월 26일 있었던 부산 정치파동. 1950년 5월 30일 선거로 야당이 압승을 하자, 이승만의 재선이 어려워지게 됐다(당시 대통령 선거는 간선제였다). 의원들은 내각제를 주장했고 이대로 가다간 대통령 자리를 빼앗기게 될 게 뻔했다.

 

이승만은 1952년 5월 25일 계엄령을 선포한 다음, 5월 26일 내각제를 주장하는 야당의원 50여 명을 ‘버스 채로’ 헌병대로 끌고 갔다. 이들 중 12명을 대한민국 정치사의 ‘전형적인 수법’인 빨갱이 공작으로 구속한다.

 

얼마 뒤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한 정부안과 내각 책임제를 주장한 국회안을 적절히 혼합한 발췌개헌안을 만들어 통과시켰다. 이승만 독재 정권의 시작이었다.

 

뉴라이트 계열들이 이걸 보고,

 

“험난한 전시상황에서 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해 대통령 직선제를 추진한 이승만은 진정한 민주주의자!”

 

라고 말하는 걸 보면서 실소를 터트린 적이 있다. 당시 국민들의 교육수준과 의식수준을 생각하면, 직선제는 곧 이승만을 위한 거였다(민주주의가 괜히 어려운 게 아니다). 정치에 관해 잘 모르던 이들은 무조건 가장 유명한 이들을 뽑게 돼 있었다. 김구 선생은 암살당했고, 김규식 선생도 6.25 때 북한으로 납북돼 거기서 돌아가셨다. 이름이 알려진 이들이 다 사라진 마당에 이승만이 출마하면, 당선은 떼놓은 당상이었다.

 

주한미국대사였던 무초(John J. Muccio)는 이승만에게 무리한 집권 연장을 하지 말라 경고했었다.

 

“한국은 어항 속의 물고기 같은 존재다.”

 

전 세계가 한국에 파병한 상황이었고, 전 세계의 언론이 한국에 와 있었다. 즉, 한국의 일거수일투족을 전 세계가 지켜보고 있다는 거다. 이게 상당히 큰 문제가 되는 게, 자국 군인들이 이름도 낯선 땅으로 와 민주주의와 자유를 위해 싸우는데, 정작 그 나라에서는 독재를 하겠다고 친위 쿠데타를 일으키면 파병했을 때의 명분 자체가 사라져버린다.

 

그러나 이승만은 친위 쿠데타를 강행했다.

 

부산 정치파동에 이어 이승만의 초강수가 바로 『반공포로 석방』이다. 이 이야기는 너무 다양한 측면이 있어서 섣불리 뭐라 단정할 수는 없지만, 이승만을 이해하기 위해서, 한미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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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전협상의 가장 큰 걸림돌은 '반공포로'였다. 상식선에서 보면, 서로의 포로를 교환하면 끝이다. 그런데, 돌아가지 않겠다는 포로들이 등장한 거다. 북한군이 진격해 내려올 때 점령지에서 강제로 징집했던 포로들(김수영도 이렇게 해서 거제도 포로수용소로 갔다)은 북한으로 가기 싫어했다.

 

더 큰 문제는 중공군 포로들이었다. 중공군 포로들 대부분은,

 

“중국 말고 대만으로 갈래요.”

 

이렇게 말했다. 이에 모택동은 노발대발 하면서 이들을 모두 제네바 협약에 따라 중국으로 보내야 한다고 말했다(중국과 북한은 제네바 협약에 가입하지 않았던 상태였는데, 제네바 협약에 의거해 포로들을 모두 송환하라 외쳤다).

 

이승만은 휴전을 원하지 않았다. 구호만 있었던 북진통일을 위함인지, 통일을 위한 마지막 기회라고 봤는지 모르겠으나 휴전 자체를 거부했다. 마지막에 가서 휴전을 하더라도 중공군은 다 나가야 하고, 미일안전보장조약에 준하는 ‘보장’, 즉,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먼저 체결해야지만 휴전에 동의하겠다고 뻗댔다.

 

(이 부분을 두고 다시 이승만의 위대함을 말하는 이들이 있는데, 이승만은 이렇게 해서 아무것도 얻은 게 없다. 휴전 체결 전에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원했으나 얻지 못했고, 중공군도 휴전 후에 철군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이승만의 공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미일안전보장조약처럼 자동개입 조항이 있지도 않았다. 이승만이 주도적인 역할을 한 부분은 인정한다)

 

반공포로 석방은 전 세계를 경악시켰다. 영국 수상 처칠은 면도 중 면도기를 떨어뜨렸고, 미국의 아이젠하워는,

 

“대통령 재임 기간 중 자다가 일어난 건 그때가 유일했다.”

 

라고 말할 정도였다. 아이젠하워는 로버트슨을 특사로 보냈다. 지루한 협상이 이어졌다. 아이젠하워는 이승만을 두고 ‘너무나 마음에 안 드는 동맹자’라고 표현했다. 이후 아이젠하워는 이승만이 집권할 때에는 한국에 오지 않았고, 이승만이 쫓겨난 후에야 잠깐 들렀다.

 

반공포로 석방 이후 약 한 달 후, 휴전조약은 체결됐다.

 

이후 미국 정가에서 한국은 ‘꽤’ 성가신 존재가 됐다(이승만 정권 이후에도!). 1970년대에도 한국은 골치 아프고, 성가신 존재였다.

 

태극기와 성조기를 들고 아스팔트를 가득 메운 분들을 보면 여러 생각들이 교차한다, 저렇게 일방적으로 구애를 해도 미국은 우리를 새침한 눈빛, 의심스런 눈빛으로 바라본다는 걸 그들은 알고 있을까?

 

전투기 개발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아무리 혈맹이라고 하더라도 이익 앞에서는 서로 각을 세우는 게 현실이다. 이스라엘의 라비가 그러했고, 일본의 F-2가 그러했다. 아무리 동맹이라지만 마지막에 가서는 자국의 이익을 우선한다.

 

그나마 이스라엘이나 일본의 경우는 어느 정도 항공 산업의 기반과 토대가 있었다. 물론, 한국도 아예 백지 상태는 아니다. 다만 힘들 거라는 것, 미국의 견제가 들어올 거란 걸 예상해야 한다는 거다.

 

(이승만 시절부터 한국과 미국의 관계는 덜그럭 거렸다. 따지고 보면, 냉전의 논리와 지정학적인 문제를 떠나서 보면 한국과 미국의 관계는 과히 그렇게 ‘친하다’고 말하긴 어려운 부분이 있었다)

 

한미공조, 동맹, 혈맹을 말하지만 결국 국제정치의 작동원리는 ‘약육강식’과 ‘이익의 교환’이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다. 이걸 두고 미국을 탓할 필요는 전혀 없다. 중국이 우리 반도체 기술자들을 빼내가 제품을 생산하는 걸 보며 우리는 그들을 성토했다. 우리가 70~80년대 어디서 기술을 빼왔는지는 스스로가 잘 알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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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문제는 전투기 개발이다. 우리는 돈도, 시간도, 기술도 부족하다. 그렇다고 맥 놓고 앉아 있을 수만은 없다는 판단에서 KFX를 시작했다.

 

KFX의 정치적 논리에 대해선 차치하기로 하자. 박근혜 시절 극적으로 타결됐다느니, 최순실의 개입이 있었다느니 하는 시중에 떠도는 이야기는 다 차치하고, 김대중 정부부터 한국형 전투기 개발에 대해서 고민하고, 연구했던 시간들을 더듬어 보자.

 

당위는 이미 가지고 있었고, 현실로 이뤄내느냐 마느냐의 정치적 판단만이 남아 있었다. 타당성 검토? 경제적 가치?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그건 정치적 판단 앞에서는 그냥 명분일 뿐이다. 타당성 조사는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라는 건 다 아는 사실이지 않은가?

 

정부 연구소인 KDI쪽의 결과는,

 

“경제성이 없다.”

 

였지만, 건국대 연구소의 사업 타당서 검토 결과는

 

"타당성이 있다"

 

였다. 분명 말하지만, 정치적인 판단이 서면, 나머지는 부차적인 문제일 뿐이다.

 

우리의 정치적 판단이 18조란 세금으로 치환될 거다. 그리고 결과는 10여 년 뒤에 우리 앞에 나타날 거다(순조롭게 끝난다면 2020년대가 끝나기 전에 그 모습을 보이겠지만). KFX가 지상시험을 끝내고 날아오를 때 쯤, 그리고 양산 결정을 내리기 전 즈음에는 개발의 성패가 나올 거다.

 

이미 시작하기 전부터 미국의 싸늘한 시선을 받았고, 예상했듯이 수많은 딴지가 들어왔다. 그걸 꾸역꾸역 헤쳐 나가는 게 지금의 KFX다.

 

정말 궁금한 게, 우리가 정말로 기술 확보를 한 건지 알고 싶다. 사업 시작과 거의 동시에 미국 측에 기술이전을 타전했고, 보기 좋게 거절당했으며, 자체 개발을 호기롭게 선언했다. 그 말인 즉슨 그 기술이 처음부터 없었고, 지금 개발 중이란 반증이다. SEAD(Suppression of Enemy Air Defenses : 방공망 제압)작전 능력 하나만 보더라도 미국 쪽의 거부로 우리는 자체개발로 돌아섰다. 이런 게 한두 가지일까? 회의론자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걱정이 앞서는 건 어쩔 수 없다. 

 

단군 이래 최대의 국방사업이라 불리는 게 괜히 붙은 게 아니다. 이게 알을 깨나가는 고통스런 과정이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