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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확해진 전선

 

이번 선거 기간 동안 내가 주변인들에게 남긴 말이 있다.

 

‘이번 선거는 의외로 박영선 후보가 당선될 것이다. 상대 진영은 혼란에 빠진 상태로 그 혼란을 설명할 수 있는 논거를 찾으려 할 것이며, 역설적이게도 상대 진영 사이에서 뱅뱅이론이 거론될 것이다. 가세연에서 뱅뱅이론의 창시자 춘심애비를 찾을 때, 나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그것이 고민이다.’

 

농담이지만 반은 진담이었다.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무언가 있으리라 기대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그런 건 없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구속되던 날, 아버지와 한 대화가 있다. 참고로, 아버지는 한국형 중도(그러니까 전 인류적 기준에서는 합리적 보수)에 가까우신 분이다. 아버지께 있어 나는, 아버지 주변의 태극기 집회 참가인들과 정반대의 의견을 청취할 수 있는 취재원의 성격을 지닌다.

 

아버지 : 실제 잘잘못도 잘잘못이지만, 저렇게까지 몰아붙이면 이다음에 정권 바뀌면 어쩌려고 하는 거냐.

 

나 : 하하하. 아버지. 정권 안 바뀝니다.

 

그날의 대화가 너무도 사무쳤다. 그 당시 나의 논리는 이랬다. 극보수는 박근혜에 매몰돼 있다. 문제는 이들의 인구학적 비중이 20~30%는 된다는 것이다. 약 40%에 달하는 스윙보터는 박근혜에 학을 띈 상태다. 박근혜를 붙잡으면 40%를 잃는다. 40%에 다가가려면 20~30%을 잃는다. 어떤 상황에서도, 현 국민의 힘이 40%를 확보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당시의 나로서는, 너무나 명확하고 단순한 논리적 인과였다.

 

그러나, 결국 나는 틀렸다. 가능했다. 20~30%을 붙든 상태로, 40%의 스윙보터 중 대다수를 업어오는 상황. 뼈아픈 상황이다. 결국 역사는 다시 5년 전으로 퇴보하는가,라는 중차대한 고민의 시점이다.

 

이때, 오히려 명확해진 것이 있다.

 

시간을 돌이켜보자.

 

문재인 정부 5년은, 전선을 밝힌 5년이다.

 

남북 관계 : 저 진영의 주적은 북한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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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이 손을 잡고 판문점의 경계선을 사뿐히 넘나들던 그날을 기억하는가. 개인적으로 바로 그 시각, 나는 내가 창업한 회사의 원천기술에 대해 MIT 로봇공학박사님께 설명을 드리려던 자리였다. 내 인생의 중요 포인트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기술 소개 자료에 앞서 유튜브 라이브로 판문점의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 정도로, 그러니까 우리 각자 개개인의 삶의 단면보다 훨씬 중요한 이벤트라는 마음으로, 우리 모두는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 이후 벌어진 일련의 과정은, 마치 김정은이 문재인 대통령에게 눈물이라도 흘리며 당장이라도 안길 듯한 애틋함의 연속이었다.

 

그 절정은 바로 그 산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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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한 번이라도 불러본 사람이라면 빠짐없이 흡족했어야 했을 법한 상황이 연속적으로 벌어졌음에도 불구, 그들의 심기는 불편했다. 자국민보다 김정은을 이뻐하는 대통령이라는 허황된 논리가 난무했다. 이 과정에서 도출되는 결론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다.

 

그들의 주적은 북한이 아니다. 주적은 바로, 북한과의 긴장감을 해소시키는 것들이다.

 

그들에겐 그 긴장감이 더 중요했다. 나쁜 놈으로 규정지을 수 있는 단서가 계속 반복 생산되는 것. 똘이 장군의 한 장면처럼, 그들은 늑대나 돼지 따위의 얼굴을 한 존재라는 사실을 지속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이벤트가 연속적으로 발생하는 것.

 

북한과의 화해무드는, 그들에게 있어선 나이트클럽의 폐점 시간에 울려 퍼지는 퇴장송이었다. 그들은, 해가 뜨든 달이 뜨든, 그 파티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 더 중요했다.

 

그리고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것. 그들에게 있어 평화 따위의 가치는,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그따위 평화가 없는 상태, 그러니까 그들에게 익숙한 그 긴장감이 유지되는 상태가 더 중요한 것이다.

 

NO JAPAN : 실존하는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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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메이슨이 아직도 재계에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는 도시 전설이 있다. 독일 나치가 아직 유럽에서 실질적인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일종의 도시 전설처럼 끊임없이 재생산되다, 결국 실증적인 사건으로 국제사회에 충격을 남긴다. 비슷한 사례를 한국에서 찾자면, 친일파는 아직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사실 21세기에 아직 실존적인 ‘친일파’가 존재한다는 건, 네오나치보다는 프리메이슨에 가깝게 느껴지곤 했다. 하지만 NO JAPAN 운동이 일어나는 과정에서, 오히려 네오나치보다 더 실존적인 세력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노 재팬 운동은 과잉 국뽕이자 문화적 쇄국정책이자 구태의연한 민족주의다’라는 식의 주장을 펼쳤던 진보인사들은 그저 웃어넘기자. 그들은 그저, 자기가 좋아하는 일본 아티스트를 계속 좋아하는 것이 불편해졌다는 이유로, 실존하고 있는 친일세력의 정치적 영향력을 애써 과소평가하며, 계속적으로 좋아하는 일본 아티스트를 좋아한다는 표현을 하고 싶었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2가지다.

 

먼저, 1945년 이후 7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친일 세력은 실제 일본 내 정치세력과의 긴밀한 상호작용 속에서 한국 사회의 정치 경제적 엘리트 집단 내에서 명시적인 영향을 끼쳐왔다는 것이다. 일본 극우 재단의 지원을 받은 명문대 교수. 그 교수들과 한패인 정치인들. 언론. 재계 인사. 심지어 이들은 해당 사실을 대단히 부인하지도 않는다.

 

더 중요한 2번째는, 이 사실이 밝혀지는 과정에서 확인된 상대 진영 대중들의 반응이다. ‘그럴 수 있지’, ‘그게 별건가’, ‘그게 뭐 어쩌라고’ 정도의 수준에서 그쳐버리는 그 담대함. 그 속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애초에 그들에게 그런 문제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무엇이 중요한가.

 

K방역, K컬쳐 : 이마저도 중요하지 않았다

 

K방역은 미친 수준이다. 수십 년 후에도, 방역과 관련된 연구분야에서 2020년의 대한민국은 수없이 많은 학자들의 논문에서 인용될 데이터의 출처로서 자리하고 있을 것임이 분명하다. 인구의 밀집도 같은 환경 요소와, 같은 기간 경제지표의 상대적 비교치를 함께 고려할 때, 이러한 수준의 성과는 아무리 국뽕에 심취해도 모자람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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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기, 우리는 세계 대중문화의 블루칩으로서 확고한 발자국을 남겼다. 어떤 아시안도 하지 못한 미국 점령. 비틀즈 시절 브리티시 인베이젼 정도에 비교하는 걸 무리라고 생각할 사람은 있더라도, ABBA의 돌풍보다는 확실히 몇 수 위에 있음은 자신할 수 있다. 검은 머리 아시안으로서 미국에 그러한 족적을 남긴 첫 사례의 주인공. 엄청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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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마저도, 그들에겐 중요하지 않았다. 평생을 숭상하다시피 한 미국 시장에 우뚝 서고, 비슷하게 숭상한 일본을 내팽개친 이 사태에 대해, ‘아 솔직히 이건 좀 오바라고 생각해’ 정도의 태도. ‘우리가 잘한 게 아니라 쟤네가 이상했던 거지’ 정도의 겸손을 뛰어넘은 비합리성.

 

즉, 문화적 사회적 콤플렉스의 대상이었던 미국과 유럽과 일본을 아득히 뛰어넘은 것이 구체적 수치로 드러나는 이 상황에서도, 그들은 본질이 따로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 뭔가.

 

그 본질은.

 

부동산 정책 : 숫자보다 룰

 

여기서 그들의 입장을 정리해보자. 코로나 방역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던 사회 체계가 아무리 선진적이어도, K컬쳐가 아무리 문화적 경제적 성과를 내더라도, 문재인 정권은 인정할 수 없다. 그 이유는 바로, 집값이 너무 올라서.

 

하지만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문재인 정권의 부동산 정책이 즉각적인 부동산 하락을 불러왔다면 어떤 반응이었을지. 그들은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그 어떤 성과를 내더라도 인정할 수 없다. 그 이유는 바로, 집값이 너무 떨어져서.

 

경제를 외치지만, 실제론 그렇지 않다. 바보야, 중요한 건 경제가 아니야. 이게 결론이다. 그들에게 중요한 건 ‘룰의 유지’다.

 

주식이고 금이고 코인이고 간에, 한국 사회에서 수십 년간 이어져온 룰은 바로, 잘 고른 부동산이 가장 큰돈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출을 받아 집을 사고, 월세를 주든 전세를 주든 직접 살며 이자를 갚든 버티다 보면, 어느덧 집값은 대출금의 몇 배로 늘어있고, 그때 시세차익을 들고서 또 대출을 받으면 더 많이 오를 부동산을 살 수 있다는 법칙. 실제로, 서민층에서 중산층 이상 반열에 오른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동산 시세차익으로 자산의 근간을 이뤄왔다.

 

어려운 경제학적 논리를 가져오지 않더라도, 이러한 룰은 지속 가능성을 지니지 않는다. 그 땅덩어리에서 만들어지는 부가가치보다 부동산의 매매시세가 더 높아진다는 얘기는, 결국 그 부가가치의 수준에 맞게 시세가 조정되는 시점의 매도자에게, 모든 손실을 떠넘기는 폭탄 돌리기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들은 생각한다. 나는 그 폭탄 안 받아. 그걸 받는 건 나보다 무식한 등신들이지.

 

그들에게 있어, 이 게임의 법칙을 바꾸는 건 반칙이다. 게임의 법칙을 바꾼 나머지, 내가 예상한 나의 수익, 사실상 허황된 상상에 불과한 그 수익을 만들어낼 수 있는 바탕이 차단됐다고 믿는다. 그들에게 있어, 부조리란 이런 것이다. ‘아 이번 판은 내가 따는 거였는데 짭새가 들이닥쳤네’ 실제로 그 패를 돌렸다면 잃을 확률이 더 높았으리라는 실체적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그렇다면, 그들이 생각하는 그 룰은, 누가 만들었는가.

 

검찰, 법원, 언론, 재계 : 그들이 생각하는 룰 메이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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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에겐, 그 룰이 중요하다. 내가 익숙한 룰. 그 누구보다도 내가 놀랍도록 화려한 성과를 만들어낼 수 있는 계획이 있다고 믿게 만드는, 오랜 시간 유지돼온 그 룰. 그들에게 있어 그 룰을 유지해주는 이들이 실질적으로 이 사회를 지탱하는 힘이다. 그 룰을 바꾸려 든다면, 꺼져버리게 만들어야 할 대상이다.

 

우리는 그렇게, 조국 전 장관에게 빚을 졌다. 룰을 바꾸는 과정의 십자가를 맨 그는, 그렇게 만신창이가 되는 수모를 버텨내야만 했다. 그 결과 우리가 확인한 것은 이것이다. 도덕성은 공평한 잣대로 적용되지 않는다. 검증은 사람 봐가면서 이행된다. 그 척도는 바로, 그들에게 익숙한 룰을 바꾸려 드느냐, 아니면 그것을 공고히 하느냐, 그 차이다.

 

법원이 내리는 판결이 모순되더라도 중요하지 않다. 룰을 바꾸려 들면 철퇴를 날려라. 그 룰을 이용하려 했던 자는 적당히 넘기라. 그게 이 땅의 룰을 지탱할 방법이니. 그 룰이 지탱되어야, 나 스스로 보기에 그 룰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한 사람인 나의 옹졸한 계획이 실행될 수 있으니.

 

받아써재끼는 기자들은 위대하다. 돈을 주면 내가 원하는 기사를 써줄 테니. 감히 그들에게 기레기라는 모욕적 언사를 내뱉는 룰 브레이커들을, 검찰과 구속 수감하라. 법원은 실형을 선고하라. 그래야 나는 내 계획을 실행할 수 있으니. 그렇게, 내 계획에 영감을 준 위인들의 자재들을 보위하라.

 

결국 그들에게 있어 이 세상은 이런 것이다. 약삭빠르게 해 먹은 이들을 위인화하고, 그 위인들이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게 만드는 데에 일조한 검찰, 법원, 언론이 그 위인들의 양팔이며, 그들이 바로 내가 성공할 수 있는 룰을 유지해주는 룰 메이커다.

 

그리고, 그 외 모든 것은 꺼지시라 : 오세훈과 박형준의 당선

 

20대들의 게시판을 구경한 적이 있다. 재밌는 사실을 발견했다. 20대 보수파들 사이에서도 박근혜를 아직 사모하는 부류와, 박근혜를 부정하는 부류가 분리된다는 것. 박근혜를 사모하는 이들에게 있어서는, 윤석열도 적이다. 반대로, 박근혜를 부정하는 부류에겐 윤석열이 탄핵의 주역이다. 후자가, 머릿수가 더 많아 보인다.

 

즉, 그들에게 있어, 박근혜는 대대로 내려온 룰을 더럽힌 실패자이며, 그 오류를 바로잡은 영웅이 윤석열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볼 때, 상대적으로 박근혜와 직접적 연관성이 적은 오세훈과 박형준은 호감이다. 즉, 그 두 MB키즈들은, 룰 메이커들의 지침을 수행할 수 있는 좋은 인재다.

 

오세훈이 다시 당선되어, 수조원의 부채를 빠른 속도로 만들어내도 상관없다. 그는 그 룰 메이커들이 만든 룰에 따랐을 뿐이니. 그런 의미에서 그 부채는, 건전한 부채다.

 

그들은 고 박원순 전 시장에게 그다지 고마움을 느끼지 않는다. 아이러니하게도, 내 삶을 편하게 만들어줬지만, 내가 신봉하는 룰을 방해했기 때문이다.

 

다소 힘겹더라도, 그 룰 안에서 싸우고 싶기 때문이다.

 

남겨진 숙제 : 한 번 더 진화

 

한숨 크게 쉬며 다시 생각해보자. 그 룰이란 건 반드시 꼭 극우보수적 색채를 지녀야만 하는 건 아니다. 분명, 절대다수의 대중들은 기생충의 계급적 문제의식에 공감했다. 표창원의 날카로움에 환호했다. 알쓸신잡의 유시민에게 매료됐다. 발의발의박주발의 박주민에 친근감을 느꼈다. 

 

문재인 대통령의 당 대표 시절, 민주당이 완전히 바뀔 수 있었던 건 이러한 대중들의 마음을 끌어당길 수 있는 상징적 행보를 일관적으로 이어갔다는 점이다. 그 과정에서 명확해진 건, 기존 룰 메이커들이 바보같이 박근혜 최순실의 농간에 넘어가버린 것이 비해, 문재인이 이끈 민주당이 뭔가 기대할만한 모습을 비추어왔다는 것이다. 

 

그 이후, 앞서 살펴본 과정을 거치며 그들은 이질감을 느낀다. 그 틈을 비집고 기존의 룰 메이커들이 돌아온다. 너희에겐, 우리의 룰이 어울린다고. 

 

이 과정에서 우리는, 그러니까 민족정론지 딴지일보에 접속하여 갑갑함을 조금이라도 덜어내야만 하는 현실을 타개하고자 하는 우리는, 그 꼴 보기 싫은 룰 메이커들로부터 그들을 다시 빼앗아 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5년 전으로 다시 돌아간다. 

 

이렇게까지 전선이 명확해진 시점은 없었다. 이제 더 이상 지역주의도, 경제적 관점 차이도, 이념적 차이도 아니다. 친일, 대북강경, 보수언론, 검찰, 전관예우법원, 대기업 재계, 부동산 신화가 주는 익숙함, 그 익숙함을 깨트리려하는 이들에 대한 반감. 그 반감을 해체시키는 게 우리의 숙제다. 

 

이 숙제는 전통적 정치공학으로 해소될 수 없다. 진보 내지 합리적 보수의 숙제가 이렇게까지 구체화된 적은 없다. 이낙연이 중도보수에게 어필한다고 해도 그들을 끌어올 수 없다. 180석을 믿고 민주당 의원들이 입법을 밀어붙여 언론과 검찰과 법원과 재계에 타격을 준다고 해서 그 반감은 해소되지 않는다. 

 

이제 새로운 아젠다가 필요하다. 그리고 우리가 우려하듯, 문재인 대통령 이후 그런 아젠다를 설정할 인재는 현재로서 그다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 숙제는, 지지자들의 숙제가 된다. 그 숙제를 풀어낼 수 있는 방안을 찾아내고, 그 방향성에 합치하는 인물을 찾아내서, 그 인물에게 힘을 실어줘야하는, 마치 그 시절 우리가 문재인을 찾아내어 무대 위로 끌어올렸던 그때처럼, 우리가 해내야 할 일이다. 

 

해봅시다. 한 번 더.

 

그걸 해낸 2021년으로 기억할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