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녘에 기사 한 꼭지 쓰고, 다시 이런저런 기사들을 읽다보니 소위 '한국'이라는 나라의 권력층에 대한 짜증이 물밀듯 밀려와 허탈해지던 찰나 이 글을 발견했다. 정말 우연하게 발견했는데, 두번이나 정독했다. 천안함에 가려 독도문제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지금, 이 글이 왜 이렇게 가슴을 치는 지 모르겠다.
노무현 대통령의 2005년 삼일절 기념사 전문인데 이걸 읽으면서 나는, 한 나라의 최고권력자에게 가장 중요한 건 이도저도 아닌 역사인식이라는 생각을, 새삼스럽지만, 했다.
주변정세도 심상치 않은 지금 과연 최고권력자와 그 주위에 있는 고위권력자들이 적절한 대응을 하고 있는 것일까 라는 의문도 들었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키스 스탤더 미 태평양해병대 최고사령관이 지난 2월 17일 도쿄를 방문해 비밀회합을 가졌다. 그는 이 자리에서 일본 방위성 고관들에게 오키나와에 주둔하고 있는 미 해병대의 역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오키나와 미 해병대는 북한때문에 주둔하고 있는 것이다. 남북한 충돌 가능성보다 김정일 체제가 스스로 붕괴될 가능성이 높다. 이 때 북한 핵무기를 재빨리 제거하는 것이 (해병대의) 최우선임무다."
웬만한 군사지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다 아는 사실일 테지만, 중요한 것은 이 말이 최고책임자 입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것보다 훨씬 중요한 건, 우리와 결부되는 이런 중요한 공식언급이, 그러니까 '한반도 상륙 전략'의 일환으로 나올 미 해병대의 전략에 대해 아시아태평양지역 미 해병대 최고사령관이 '일본관료들'과의 회합에서 처음으로 내 뱉었다는 말이다. 왜 우리 땅에 오는데 니네들끼리 만나서 이야기하냐 뭐 그런 심정. 구한말 역사책에서 많이 접하던 그런 시츄에이션. 차라리 내가 과대해석하는 거라면 좋겠다.
사실 일본 방위성 고위관계자들과 미 국방성 고관들이 최근들어 자주 만나고 있다. 올해 들어서 공식적으로 확인된 것만 하더라도 세번이다. 1월 15일, 16일 유서깊은 화이트하우스 옆의 위러드 인터컨티넨탈 호텔에서 열린 제16회 미일안보세미나에서는 다시 한번 "흔들림없는 미일동맹"이 강조됐다. 세미나에서 흔히 나오는 추상적인 언급으로 보기엔 출석자들 면면이 화려하다.
스타인버그 국무성 부장관, 베이더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아시아상급부장, 아미테지 전 국무성 부장관, 후지사키 이치로 주미일본대사, 다나카 히토시 전 외무심의관, 오카모토 유키오 전 수상보좌관 등등 여전히 미일정계에서 힘 꽤나 쓴다는 사람들이 대거 한자리에 모인 것이다.
각론으로 후텐마 기지, 오키나와 해병대의 역할 등이 논의됐고 이 안에서 의견도 나뉘어지긴 했지만 큰 틀에서는 "흔들림없는 미일동맹"에 전원일치를 봤다. 이건 중국과 북한이 "피를 나눈 동지적 동맹관계"라고 표현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 아닐까 한다.
성장하는 중국, 저물었다고 하지만 꼭 그렇지 만도 않은 미국. 그리고 일본과 러시아, 북한. 이들은 서로 견제하거나 혹은 합종연횡하면서 주판알을 열심히 튕기고 있다. 이런 이야기를 접하다가 문득 한국으로 눈을 돌리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초등학생들 같다. 좌파색출 술래잡기만 하고 있는 초등생들. 천안함이 침몰한지 6일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브리핑이 왔다갔다 하고 특히 독도영유권 표기한 일본 교과서에 관해선 전혀 관심조차 없다.
한나라당이 군대를 주둔시켜야 하니 어쩌니하는 매우 과격한 지방선거용 논평을 하기도 했지만 정당논평은 별 쓸모가 없다(군대를 주둔시키는 건 위험부담이 따른다. 분쟁지역으로 오해살 여지가 다분하다. 지금처럼 경찰병력이 가 있는 게 좋다). 독도교과서 문제는 문부과학성, 즉 일본내각의 문제이므로 이쪽에서도 청와대 등 행정부가 나서야 한다. 그런데 청와대는 외교부가 알아서 잘 할 것이라며 외교통상부로 책임을 떠넘겼다. 모순적이며, 또 비겁한 짓이다. 외교통상부가 책임질 수 없는 사안이다. 영토라는 국가적 이익이 걸린 문제다. 일개 부처가 멋대로 결정내릴 사안이 아니다. 그런데도 일개 부처보고 결정을 내리라고 한다.
결국 처음으로 귀결된다. 인식이 없는 것이다. 독도에 대한 역사인식도 없고, 영토에 대한 개념도 없다. 4대강에만 골몰했지, 주변 4대강국이 어떻게 움직이고 또 그것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과연 적절한 플랜이 있는지 전혀 모르겠다. 국가비밀이라 나같은 일개 서민은 모를 수도 있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좌빨색출 술래잡기가 너무 오래가는 것 같다.
암튼 답답했다. 그래서 세번째로 또 읽어보련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삼일절 기념사다. 군데군데 느껴지는 문체의 향기로 봐선 노 대통령이 직접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 당신들도 읽어보시길.
제86주년 삼일절 대통령 기념사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독립유공자와 내외귀빈 여러분, 여든 여섯돌 3.1절 기념식을 이곳 유관순 기념관에서 갖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그날의 감동이 더 생생하게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3.1운동은 참으로 자랑스러운 역사입니다. 인간의 자유와 평등, 나라의 자주와 독립의 권리를 천명한 3.1정신은 지금도 인류사회와 국제질서의 보편적인 원리로 존중되고 있습니다. 또한 상해임시정부에서 오늘의 참여정부에 이르는 대한민국 정통성의 뿌리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3.1운동의 위대한 정신을 이어나가고, 다시는 100년 전과 같은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는 것이 애국선열에 대한 도리이자 3.1절에 되새기는 우리의 다짐입니다. 나라를 위해 희생하고 민주주의와 번영의 초석을 놓아주신 애국선열들께 머리 숙여 경의를 표합니다. 독립유공자와 가족 여러분께 깊은 존경과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국민 여러분, 저는 지난 일요일, 독립기념관을 다녀왔습니다. 구한말, 개화를 둘러싼 의견차이가 논쟁을 넘어서 분열로 치닫고, 마침내 지도자들이 나라와 국민을 배반한 역사를 보면서 오늘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깊이 생각해보았습니다. 아울러, 우리 땅을 놓고 일본과 청나라, 러시아가 전쟁을 벌이는 상황에서 힘없는 우리가 어느 편에 섰던들 무엇이 달라졌겠는가를 생각하며, 국력의 의미를 다시 한번 되새겨보았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대한민국이 정말 자랑스러웠습니다.
이제 우리는 100년 전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아무런 변수도 되지 못했던 그런 나라가 아닙니다. 세계에 손색이 없는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을 이루고 스스로를 지킬만한 넉넉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동북아의 균형자 역할을 할 수 있는 국방력을 키워가고 있습니다. 선열들께서도 지금 우리의 모습을 대견스러워 하실 것입니다.
국민 여러분, 올해는 한국과 일본의 국교정상화 40주년이 되는 특별한 해입니다. 한편으로는, 한일협정 문서가 공개되면서 아직 해결되지 못한 과거문제가 되살아나 또 다른 어려움이 제기되고 있기도 합니다. 그동안 한일관계는 법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상당한 진전을 이뤄왔습니다. ’95년 무라야마 일본 총리는 ‘통절한 반성과 사죄’를 했고 ’98년에는 김대중 대통령과 오부치 총리가 신한일관계 파트너십을 선언했습니다. 2003년에는 나와 고이즈미 총리가 ‘평화와 번영의 동북아시대를 위한 공동성명’을 발표했습니다.
한일 두 나라는 동북아시아의 미래를 함께 열어가야 할 공동운명체입니다. 서로 협력해서 평화정착과 공동번영의 길로 나아가지 않고서는 국민들의 안전과 행복을 보장할 수 없는 조건 위에 서 있습니다. 법적, 정치적 관계의 진전만으로 양국의 미래를 보장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할 일을 다 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 이상의 실질적인 화해와 협력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진실과 성의로써 양국 국민들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마음의 장벽을 허물고 진정한 이웃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프랑스는 반국가행위를 한 자국민에 대해서는 준엄한 심판을 내렸지만, 독일에 대해서는 관대하게 손을 잡고 유럽연합의 질서를 만들어왔습니다. 지난해 시라크 대통령은 노르망디 상륙작전 60주년 기념식에 처음으로 독일 총리를 초대해서 “프랑스인들은 당신을 친구로 환영한다”며 우정을 표했습니다. 우리 국민도 프랑스처럼 너그러운 이웃으로 일본과 함께 하고 싶은 소망이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 정부는 국민의 분노와 증오를 부추기지 않도록 절제하고, 일본과의 화해 협력을 위해서 적극적인 노력을 해왔습니다. 실제로 우리 국민은 잘 자제하고 사리를 따져서 분별 있게 대응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동안의 양국관계 진전을 존중해서 과거사 문제를 외교적 쟁점으로 삼지 않겠다고 공언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이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과거사 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교류와 협력의 관계가 다시 멈추고 양국간 갈등이 고조되는 것이 미래를 위해서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일방적인 노력만으로 해결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두 나라 관계 발전에는 일본 정부와 국민의 진지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과거의 진실을 규명해서 진심으로 사과하고 배상할 일이 있으면 배상하고, 그리고 화해해야 합니다. 그것이 전 세계가 하고 있는 과거사 청산의 보편적인 방식입니다. 저는 납치문제로 인한 일본 국민의 분노를 충분히 이해합니다. 마찬가지로 일본도 역지사지해야 합니다. 강제징용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이르기까지 일제 36년 동안 수천, 수만 배의 고통을 당한 우리 국민의 분노를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일본의 지성에 다시 한번 호소합니다. 진실한 자기반성의 토대 위에서 한일간의 감정적 앙금을 걷어내고 상처를 아물게 하는 데 앞장서 주어야 합니다. 그것이야말로 선진국임을 자부하는 일본의 지성다운 모습일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과거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아무리 경제력이 강하고 군비를 강화해도 이웃의 신뢰를 얻고 국제사회의 지도적 국가가 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독일은 그렇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만한 대접을 받고 있습니다. 그들 스스로 진실을 밝히고 사과하고 보상하는 도덕적 결단을 통해서 유럽통합의 주역으로 나설 수 있었습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한일협정과 피해보상 문제에 관해서는 정부도 부족함이 있었다고 봅니다. 국교정상화 자체는 부득이한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언제까지 국교를 단절하고 지낼 수도 없고, 우리의 요구를 모두 관철시킬 수 없었던 사정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피해자들로서는 국가가 국민 개개인의 청구권을 일방적으로 처분한 것을 납득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늦었지만 지금부터라도 정부는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적극 노력할 것입니다. 국민 여러분의 의견을 모으고 국회와 협의해서 합당한 해결책을 모색해 나갈 것입니다. 이미 총리실에 민관공동위원회를 구성해서 여러 방안을 검토하고 있고, 좀 더 포괄적인 해결을 위해서 국민자문위원회 구성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청구권 문제 외에도 아직 묻혀있는 진실을 밝혀내고, 유해를 봉환하는 일 등에 적극 나설 것입니다. 일본도 법적인 문제 이전에 인류사회의 보편적 윤리, 그리고 이웃간 신뢰의 문제라는 인식을 가지고 적극적인 자세를 보여주어야 할 것입니다. 국민 여러분, 3.1운동의 정신을 되새기면서 선열들이 꿈꾸었던 선진한국의 미래를 향해 힘차게 나아갑시다. 일제의 총칼에 맞서 일어섰던 선열들의 용기와, 모든 것을 뛰어넘어 하나가 됐던 대동단결의 정신이 우리의 앞길을 이끌어 줄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2005년 3월 1일.
대한민국 대통령 노무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