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잘라 드릴까요?”
소싯적에 미용실에서 이 말을 들으면 딱히 할 말이 없었다. ‘그냥 깔끔하게…’라고 대답한 게 거의 다였고, 조금 친해진 분에게 ‘최선을 다해주세요’하고 드립을 쳤던 적이 딱 한 번 있었다.
인테리어 견적 상담 준비를 하던 중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3천만 원에 샷시 포함해서 깔끔하게 해주세요’라는 딱 한 마디로 끝내면 참 쉽고 편할 텐데, 덤으로 최선을 다해달라고 한 마디 덧붙이는 것만으로 모든 눈탱이와 날림 시공의 가능성을 지울 수 있다면 참 좋을 텐데 하고 말이다.
내 주머니에서 꺼낸 큰 돈 쓰는 일에 이렇게 빡세게 공부까지 해야 하나 자괴감이 들다가도 문득 ‘내가 진짜 돈이 많았다면 어디 유명한 인테리어 디자이너에게 의뢰해서 스타일 상담이란 걸 받고서 내주는 견적대로 똬앗! 하고 공사대금을 꽂으면 그만이겠구나. 공부고 뭐고 다 필요 없었겠구나’하는 생각에 이르자 더 큰 자괴감에 빠져버렸다.
몇천 만원을 푼돈으로 대할 수 있었다면 이렇게 골머리 썩힐 일도 없었겠지. 나는 빡세게 공부까지 해가면서 큰돈을 쓰는 작은 자괴감에 최선을 다하기로, 본의 아니게 결심 당해버렸다.
인테리어 견적을 받는 베스트는 ‘실측’이다. 허나 한계가 있다.
인테리어 견적을 내는 가장 빠르고 확실한 방법은 업체에 공사 현장이 될 집을 보여주고 ‘실측 견적’을 받는 것이다. 평면도 상에 나타나지 않는 구석구석 공간의 실치수를 재는 작업이 당연히 필요하고, 집의 ‘상태’를 직접 확인하는 게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특히나 내가 이사할 구축 아파트의 경우에는 실측의 중요성이 더 커진다.
문틀과 문짝 상태에 따라 굳이 교체하지 않고 필름 시공만으로 대체 가능할 수도 있고(물론 의뢰인이 원한다면), 벽면의 상태나 바닥의 평활도에 따라 도배, 몰딩, 바닥 공사에 부수적인 작업이 필요할 수도 있다.
(그래서 제대로 확인 작업도 하지 않은 채 무턱대고 공사 견적을 싸게 부르는 업체를 조심해야 한다. 견적을 최소치로 잡아 계약 먼저 따내고 막상 공사에 돌입하면 이런 저런 추가 공사비가 붙을 가능성이 높다. 추가 공사비가 붙는다고 모두 눈탱이는 아니지만, 업체를 선택할 때 오로지 저렴한 견적만을 고려했다면 그 업체의 장점은 결국 장점이 아닌 게 되고 만다)
같은 아파트 평수라 할지라도 샷시의 개수와 사이즈가 천차만별이므로 이 부분에 대한 실측도 중요하다. 인테리어 비용에서 샷시가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큰 만큼, 실측 후 낸 견적과 평면도만 보고 어림으로 낸 견적의 차이는 무시 못 할 수준이다.
문제는 내가 인테리어 공사를 하고 ‘살 게 될’ 그 집은 현재 내 집이 아닌 다른 분들이 살고 계신 집이라는 점이다. 문을 열고 들어가 20~30분 동안 집안 곳곳을 들여다보고 치수를 재는 일을 지금 살고 있는 집주인분에게 아무 때나 횟수 제한도 없이 요청할 수는 없는 일이다(게다가 지금은 코로나 시국 아닌가).
인테리어 견적을 요청할 대상 업체가 대략 7~8곳이었으나 내가 양해를 구해서 실측하기로 한 횟수는 최대 두 번이었다. 이런 여건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은 실측 없이 7~8곳 업체의 견적을 받고 난 후에 최종 후보 두 곳을 정해서 실측을 맡기고 최종 견적을 비교하여 한 곳과 계약하는 것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분께서 주택 계약 후 인테리어 공사를 염두에 두고 있다면 매도인과 주택인도일 이전 실측 횟수를 조율해서 매매 계약서 특약사항에 넣는 방법을 추천한다. 내가 계약서를 작성할 땐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다)
실측 없이 1차 견적을 의뢰해야 하는 상황에서 나는 더욱더 구체적이고 자세하게 견적 의뢰를 해야만 했다. 원하는 공사 내용을 꼼꼼하게 전달해서 그만큼 상세한 견적을 받자. 실측 없이 낸 견적이라 최종 견적과는 차이가 있겠지만 적어도 어떤 업체와 진행하면 좋을지 추려내는 데에는 참고가 될 수 있다.
나는 이렇게 견적 요청 내용을 정리했다
그렇게 작성한 인테리어의 고작 ‘이응’만을 아는 본인의 견적 요청 내용 일부는 다음과 같다(특정 회사나 모델명은 방금 가렸다).
화이트 미니멀 인테리어의 극한이라 하는 무몰딩, 무문선, 무걸레받이 대신 2계단 마이너스 몰딩, 9mm 문선, 4센티 걸레받이를 택했다. 아예 없애버린 수준의 미니멀은 아니지만 그나마 ‘3무’ 보다는 시공 비용이 덜 드는 방식이라 한다.
붙박이장은 안방과 아이 방에, 거실은 확장 대신 폴딩도어를 택했다. 돌도 안된 아기와 함께 살 집이라 싱크대 장과 붙박이장 자재 등급은 가급적 E0, 조명은 메인등 없이 매립등만으로 하는데 쨍하고 하얀 주광색 말고 보다 아늑한 느낌의 주백색으로 정했다(색 온도에 따라 주백색, 주광색을 구분하는데 주광색은 사무실 조명처럼 무지 환하고 하얀 조명이고 주백색은 그보다는 약간 노르스름한 기운이 감돌고 조도가 조금 낮은 조명이다).
그 밖에 타일 사이즈, 강마루와 벽지의 브랜드와 색상, 샷시 브랜드와 모델명, 스펙까지 적었다.
인테리어 일자무식이 이제 막 벼락치기 눈팅 마구잡이로 머릿속에 집어넣은 정보를 토대로 정리한 내용이라 실제 여건과 차이가 날 수 있다. 최종 견적을 낼 때는 많은 것들이 바뀔지 모른다. 그럼에도 지금 내가 그려볼 수 있는 가장 구체적인 밑그림을 그렸다.
미용실에 찾아가 대뜸 원빈 사진을 들이밀며 ‘이거랑 똑같이 잘라주세요’ 했더니 손님은 원빈하고 두상이 이렇게 다르고, 이런저런 이유 때문에 별로 어울리지 않을 수 있고 무엇보다 니 얼굴이 원빈이 아니고… 뭐 이런 소리 들을 수 있겠지만 그래도 ‘깔끔하게’ 잘라 달라고 퉁치고 넘어가는 것보다는 서로에게 훨씬 낫지 않겠나.
꼭 이대로 하지는 않더라도 인테리어 업체에서 봤을 때 ‘음, 어떤 느낌을 원하는지 알겠군’ 할 수 있게, 나는 나대로 견적 비교를 하며 ‘음, 내가 원하는 인테리어를 하려면 대략 이 정도 비용이 드는군. 업체들 중에서는 이 집이 견적이나 포트폴리오, 상담할 때의 느낌을 봤을 때 제일 잘 맞네’ 하면서 선택할 수 있다면 베스트다.
한 가지 더 강조하고 싶은 것은, 가능한 한 견적 상담은 미리 받을수록 좋다. 인기 있고 잘하는 업체는 그만큼 공사가 많다. 요즘은 가뜩이나 인테리어 업계가 호황이라 사시사철 성수기인데, 잘하기로 소문난 곳은 공사 일정이 일찌감치 꽉 차기도 한단다. 못해도 원하는 공사 시작일에서 석 달 이상은 여유를 갖고 알아보자. 여유가 그리 안 된다면 주어진 여건에서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견적을 의뢰할 업체 선택에서 신경 썼던 부분들
그럼 이제 ‘어디에’ 견적 상담을 요청하느냐다. 뭐든 시작은 포털 사이트 검색이다. 당연히 엄청 많이 나온다. 홈페이지, 블로그나 인스타그램을 운영하지 않아 최소한의 포트폴리오 사진도 볼 수 없는 곳은 우선 제외한다. 암만 내가 보는 눈이 없어도 뭘 봐야 판단을 할 텐데, 아예 볼 건덕지가 없는 곳은 판단 자체가 불가능하다.
견적을 의뢰할 업체를 고르는 데에 신경 썼던 부분은 다음과 같다.
이미지 출처-<네이쳐의 삶>
1. 실제 시공 사례 사진을 많이 참고했다. 해당 업체가 작업 했던 결과물이니만큼 인테리어 디자인의 측면에서는 가장 확실한 근거가 되겠다.
2. 내가 원하는 인테리어 스타일의 포트폴리오가 많으면 더 좋다.
3. 인테리어 카페나 해당 지역 부동산 카페 글을 검색해 특정 업체를 추천한 글을 참고했다. 대놓고 홍보성이 아니라면 유용한 정보다.
4. 내가 이사할 아파트를 시공한 사례가 있는 업체를 찾아봤다. 경험이 있는 업체가 시공했을 때 얻을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아파트 단지 앞에 있는 인테리어 업체가 이런 부분에서는 점수를 따고 들어간다)
견적 상담을 요청할 일곱 곳의 업체를 정하고 연락을 돌렸다. 온라인 견적 요청을 받는 곳은 신청 양식을 채워 제출한 뒤에 연락했다.
지금 살고 있는 집에서 차로 2시간 가까이 가야 하는 곳이기 때문에 이틀 동안 모든 업체를 만나기로 했다.
인테리어 견적 상담기
이른 오전부터 오후까지 촘촘하게 동선과 시간을 짜서 첫날에 네 곳의 업체를 만났다.
A업체
A업체는 이사할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블로그에 포스팅되어 있는 시공 사례에 내가 살 아파트의 같은 평형이 있어서 고른 곳이다. 포트폴리오상 인테리어 디자인의 호감도는 10점 만점에 7점 수준이었다.
분명 합당한 금액을 지불할 의사를 갖고 공사 업체를 선정하기 위해 견적 상담을 받는 자리인데, 내가 무슨 대단한 갑질을 하겠다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잔뜩 주눅들 일도 아닌데 왠지 떨렸다. 드는 돈의 규모나 호갱회피 난도가 높기로 소문난 인테리어 공사, 서비스를 제공하는 측과 요청하는 측의 정보 격차가 심해서 주도권을 잡기는커녕 질질 끌려다니지 않으면 다행인 분야라고 생각하고 지레 겁을 먹은 탓이겠다.
이미지 출처-<국제신문>
업체 사무실은 적당히 넓고 깔끔했다. 업체 대표 외에 직원도 한두 분 따로 계신 것 같았다. 준비해온 견적 의뢰 내용 파일을 노트북에 띄워 말로 풀어서 설명했다. 중간중간 업체 대표님이 의견을 내기도 했고 내가 먼저 이것저것 묻기도 많이 물었다.
이때 얻은 한 가지 깨달음이 있다.
‘인알못에게 업체 견적 상담은 전문가에게 직접 배움을 얻을 수 있는 장이다’
인테리어 업체의 양심 탑재 여부에 따라 거짓 정보에 낚일 수도 있고 같은 업자라도 다 같은 의견을 가진 것은 아닐 테지만 나 같은 수준의 인테리어 무지랭이에게는 그분들이 ‘낫 놓고 기억’ 수준으로 쉽고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조차 감지덕지하고 챙겨갈 만한 정보가 된다.
폴딩도어를 시공할 때는 어떤 부분을 중점적으로 고려해야 하는지, 마이너스 몰딩을 만들기 위해 어떤 밑 작업을 해야 하며 6센티 걸레받이가 아닌 4센티 걸레받이를 구축 아파트에 할 때는 어떤 추가 작업이 필요할 수 있는지, 각기 다른 디자인 스타일 중 하나를 고를 때에는 어떤 장단점을 인지하고 선택해야 하는지, 그 밖에 기타 등등 그동안 혼자서 인터넷 검색으로만 배웠기에 모자란 부분을 상당 부분 채울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뒷 순서의 업체 상담으로 진행될수록 상담에 임하는 나 자신의 이해 수준이 점점 높아졌다.
A업체와의 상담은 대체로 무난했다. 3일 내로 견적을 보내주시겠다고 한다.
B업체
이곳은 블로그에 기존 시공 사례가 그닥 많이 올라와 있지는 않았다. 디자인 또한 그냥저냥 무난했지만 비교적 거리가 가깝고 지역 부동산 카페에 추천 댓글 몇 개가 눈에 띄어서 상담을 요청했다. (이곳과 세 번째 공사를 진행 중이라는 댓글이 결정적이었다)
아담한 사이즈의 사무실에는 업체 대표님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막 현장에서 작업을 하다 오신 것 같은 복장의 사장님이 나를 반겼다. 소위 말하는 전형적인 동네 인테리어(무시하는 표현 아니다) 사장님 스타일이었다.
자리에 앉아 다시 노트북을 꺼내 문서를 띄우고 A업체 때와 같이 설명을 이어나갔다(이 짓을 이틀 동안 하려니 그것 또한 고역이긴 했다). A업체 때와는 달리 별다른 메모도 하지 않고 듣기만 하시던 사장님이 중간에 한 말씀 하셨다.
“뭘 그렇게 많이 준비해왔어요? (웃음) 대충 얘기하면 우리가 다 알지”
그렇다. 이분은 전형적인 동네 인테리어 사장님이시다(다시 말하지만 무시하는 표현이 아니다. 상담기가 끝나고 더 알아보자). 그래도 친절하게 내가 여쭙는 말에 친절하게 알려주시고, 본인 의견도 많이 내주셨다. 견적서는 쿨하게 ‘다음날’ 보내주시겠단다. 이야기를 마치고는 곧장 ‘한 4천쯤 나오겠네’ 하며 예상가를 턱 하니 내놓으셨다.
C업체
C는 내가 원하는 화이트 미니멀 인테리어 스타일의 시공 사례가 많고 포트폴리오 사진도 마음에 들었던 곳이다. 가까운 지인 중에 ‘인테리어 제법 아는’ 사람 또한 이곳의 시공 사례를 보고 가격만 맞으면 여기랑 해보라고 권유했던 곳이다.
널찍한 사무실 안에는 몇 개의 책상이 놓여져 있었고 깔끔한 차림의 시크한 사장님과 미팅용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벽에 설치된 대형 TV에 내가 의뢰할 아파트의 평면도를 띄워 놓고 상담을 시작했다. 사람의 태도가 진정성을 그대로 드러낸다고 볼 수는 없지만 내가 상담에서 만난 인테리어 업체 대표님들은(혹은 실장님이거나) 대부분 뭐랄까 ‘다정’이나 ‘따뜻함’보다는 무뚝뚝하고 시크한 느낌이었다. 내가 지레 쫄고 들어가서 더 그런 것이리라. 그래도 상담 자체는 만족스러웠다. 무엇보다 이것저것 묻는 내 질문에 다들 귀찮아하지 않고 하나라도 더 알려주셨던 부분이 좋았다.
결론적으로 이날 상담한 곳 중에서는 C업체가 가장 마음에 들었다. 포트폴리오, 상담 내용과 사장님에 대한 내 개인적인 느낌을 종합한 결과다. 내심 견적만 가용 예산에 근접하게 잘 나와준다면 여기하고 진행하면 좋겠다 생각했다.
D업체
상담 첫날 마지막으로 만난 D업체. 디자인 포트폴리오가 가장 많고 가장 마음에 들었던 곳이다. 도착해서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사무실 넓이도 가장 넓고 책상 수와 직원 수도 많았다. 역시나 시크한 스타일의 대표와 마주 앉아 이야기를 시작했다.
오늘만 네 번째 같은 소리를 반복하는 내 이야기를 간단한 메모를 곁들여가며 듣던 그가 “평당 180 이상은 생각하셔야겠네요”라고 말했다. 평당 180이면 32평으로 환산했을 때 5,760만 원이다. 내 예산을 한참 초과한 금액이다.
이날 있었던 모든 견적 상담에서 내가 빼놓지 않고 했던 이야기 중 하나, 견적은 최대한 상세하게 내달라는 부탁이었다. 내가 생각하고 있던 예산보다 높게 나오더라도 선택과 포기를 통해 조율하려면 각 부분마다 소요되는 비용을 아는 편이 훨씬 낫다. 이것저것 다 떠나서 원래 견적이라는 거 자체가 상세할수록 좋기도 하다.
평당 180만 원이 예산 범위 밖이었지만 상세 견적을 받고서 조율해볼 생각으로 견적을 요청했다. 그런데 대표의 대답이 뜻밖이었다.
계약을 하기 전에는 견적을 내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상세 견적을 보지 않고 어떻게 계약 여부를 결정할 수 있단 말이지? 내가 원하는 인테리어 공사 내용을 듣고서 ‘평당 180 이상’을 부른 사장님은 컴퓨터 두뇌의 소유자여서 이미 머릿속으로 계산이 끝난다는 말인가. 아니면 ‘이 금액 이하로는 공사 못 한다’는 의미인가.
그러고 보니 처음 앉았을 때부터 뭔가 쌔한 기분이 들기는 했었다. 무시당했다는 기분마저 들었던 건 나의 자격지심이라 치자. 아무튼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는 내 꼴이 바다에 젖은 나비 같았다. 만약 이곳을 첫 순서로 잡았다면 다른 업체들 상담 다닐 맛이 뚝 떨어졌을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이곳이 오늘 마지막 일정이었던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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