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항만 하역업과 더불어 오늘날 말로 이른바 연예기획사, 코베예능사를 궤도에 올린 타오카 카즈오. 그가 코베예능사를 성공의 길로 이끌 수 있었던 비결은 “야쿠자성”의 배제, 그리고 연예인을 철저히 감싸주고 소중히 여기는 연예인 위주의 운영 방식에 있다 할 것이다(전편 기사 링크). 특히 '초(超)'를 붙여도 모자랄 슈퍼스타, 미소라 히바리(美空ひばり)를 대하는 태도 내지 방식은 연예인 위주라는 코베예능사의 기본 방침을 상징한다.

 

그러나 코베예능사의 뒷배에는 야마구치구미가 있고 코베예능사 사장 타오카 카즈오는 3대째 야마구치구미 쿠미쵸였다. 연예인들의 편의를 철저히 존중해주는 타오카이지만 한번 “가오”를 건드리면 평소 숨어들던 야쿠자성이 드러난다.

 

코베예능사의 네트워크와 야마구치구미의 무력(武力)이 서로 맞물리면서 야쿠자로서의 야마구치구미가 전국 조직으로 성장하는 길이 열린다. 이번에는 코베예능사 내지 타오카 카즈오가 보인 연예인 사랑, 그리고 평소에는 모습을 감추고 있으나 자칫하면 바로 발동되는 폭력성을 각각 상징하는 사연을 본다.

 

 

1. 미소라 히바리

 

Untitled-1.jpg

 

2019년, 일본 국영 방송 NHK가 AI 기술을 구사하여 한 국민 가수의 콘서트를 재현했다. 미소라 히비리, 서거한 지 30년이나 된 가수의 콘서트. 그녀가 전설적인 가수임을 엿볼 수 있는 에피소드다.

 

1937년생. 아홉 살 나이에 데뷔하자 천재 소녀 가수로 주목을 받았고 이후 가수로서는 물론 연기자로서도 그 재능을 발휘하며 눈부신 활약을 했다. 천재 소녀는 어느새 가요계의 여왕이라 불리게 되었다. 시대가 쇼와(昭和)에서 헤이세이(平成)에 접어들자 52년 짧은 생의 막을 내린다. 평생 발표곡이 1,035곡, 출연 영화 158편, 주연 무대 89작품. 여성으로서 사상 처음 국민영예상을 받았고 도쿄, 교토에 기념관이 개설되었다. 말 그대로 시대를 대표하는 슈퍼스타다.

 

 

2. 타오카의 온정이 끌어당긴 행운

 

타오카 카즈오가 미소라 히바리를 만난 경위에 관해서는 명확치 않은 부분이 많다. 하지만 확실한 에피소드를 종합해 보면 타오카의 “오야붕 기질”이 엿보이는 듯하다.

 

2차대전이 끝난 지 얼마 안 된 어느날, 타오카 카즈오는 예전부터 좋아했던 보드빌리언, 카와다 요시오(川田義雄)의 콘서트를 보러 갔다가 말을 잃었다. 타오카가 알던 카와다 요시오는 보드빌 밴드를 이끌며 무대를 밟을 때마다 관객을 매료하는 스타였다. 그러나 오사카극장 무대에 등장한 카와다는 휠체어에 앉은 채 힘없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만성 골염으로 뼈가 썩어 파괴되는 병이 생겼던 것이다. 병에 시달리는 스타의 모습은 참으로 안타까웠다. 그런데 타오카의 발상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이런 상태로 무대에 올라가다니 형편이 얼마나 어려운 걸까…”

 

타오카는 당시 요시모토흥업에 소속하던 카와다를 코베로 모셔 신카이치극장(新開地劇場)에 출연시키며 4만 엔의 출연료를 지급하게 했다. 대졸 초봉이 8,000엔이던 시대다.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나한테 4만 엔 주는 줄 알고 카와다에게 다 주게…”

 

타오카가 신카이치극장 측에 던진 카와다의 소개장이었다.

 

한편, 가수로 데뷔한 지 얼마 안 된 12살 짜리 소녀가 코베 소재 타오카댁을 찾아왔다. 코베 쇼치쿠극장(松竹劇場)에 출연하게 되었으니, 인사를 하러 요코하마 국제극장의 지배인이었던 후쿠시마 추진(福島通人)이 데리고 온 것이다. 소녀의 이름은 미소라 히바리.

 

“히바리, 아저씨를 위해 노래나 하나 불러 줄래?"

“네. 근데 아저씨, 어떤 노래를 듣고 싶으시나요?”

 

히바리는 당시 유행했던 후지야마 이치로(藤山一郎)의 “카게오 시타이테(影を慕いて, 모습을 그리워하며)”를 불렀다. 코베 공연을 성공리에 끝난 것도 그렇지만 미소라 히바리의 캐리어에 있어서 더 중요한 것은 타오카의 비호 아래에 있던 카와다 요시오가 공연을 봤던 것이다.

 

uta100-jlp01047249.jpg

 

카와다는 히바리가 가진 희대의 재능, 스타성을 간파하고 가진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요코하마 국제극장 공연에 발탁한 것을 시작으로 익년에는 영화 “슬픈 휘파람”과 동명의 노래가 히트를 친 것에 큰 보탬을 주었다. 1950년에는 하와이공연을 성공시키기도 했다. 미소라 히바리는 스타덤에 올랐다. 카와다는 추후에도 히바리를 귀여워하며 자신의 공연에 동반시키기도 했다. 카와다 요시오가 미소라 히바리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 히바리 본인도 훗날에 “하나 뿐인 스승”이라 할 정도였다.

 

히바리는 그 후 몇 개 소속사를 거친 뒤 1958년 4월, 타오카 카즈오의 코베예능사가 정식으로 법인 등기를 마친 것을 계기로 코베예능사 전속이 된다. 코베예능사가 당대의 슈퍼스타를 전속 연예인으로 획득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카와다 요시오가 타오카에게 받았던 은혜가 당연히 있었을 것이다. 연예인을 소중히 여기는 자세는 야마구치구미 2대째 야마구치 노보루 시대부터였다고 하는데 타오카의 코베예능사는 이 전통을 더 발전시켜 계승했으며, 그것이 또 코베예능사를 한층 더 발전시키는 초석이 되었다.

 

 

3. 타오카 카즈오의 “연예인 제일주의”

 

미소라 히바리의 남편이었고 본인 역시 영화계와 가요계의 슈퍼스타였던 코바야시 아키라(小林旭)는 이렇게 회상한다.

 

“(타오카 오야붕은) 이런 말씀도 하셨어. ‘우리 삶을 위해 힘을 내 주는 연예인들은 하나님 같은 거지. 더군다나 돈까지 벌게 해 준다면 더 이상 좋은 사람은 없지. 연예인을 소중히 여기기도 하고 그런 연예인 분들께는 난 고개를 숙이지' 하여튼 야쿠자 세계와 일반 사회를 구분해서 이치에 맞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었네. 실제로 사귀다 보면 착하고 섬세한 사람이고, 그것과 표리일체의 무서움도 있기는 한데 상대방에 따라 가려 쓰는 박력이 느껴졌지…”

 

또한 타오카 카즈오의 에피소드를 소개한 어떤 책은 그의 통큰 모습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가령 타오카의 고장인 코베에서 한 유행 가수가 다른 흥행사를 통해 공연에 나선다고 치자. 관계자는 타오카가 가만히 있어도 그의 꼬붕들이 시비를 걸어올까 떨기 마련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타오카한테 큰 화환이 배달되고, 일류 요정(料亭)에 자리가 마련되며 그 가수가 초대된다. 타오카는 진심으로 고생을 위로하며 성공을 축하해준다. 또한 타오카를 통해 공연에 출연하는 연예인이 예를 들어 8만 엔의 출연료로 계약해놔도 만약 관객이 많아서 예상보다 수익이 많으면 그는 아무 말 없이 10만 엔 준다. 연예인들이 정성을 다해 타오카를 따르는 것도 당연하겠다.”

 

코베예능사는 미소라 히바리를 비롯한 많은 스타급 연예인을 안은 일류 연예기획사로 성장해 가는 한편, 연예인들은 타오카한테 “반례”를 하게 된다. 미소라 히바리는 한 해에 서너 번 오사카극장에서 출연료 없이 공연을 치렀다. 또한 연예계 인사 중에는 하와이 등지에서 권총과 총알을 입수해서 야마구치구미에 제공해주는 이도 있었다. 요즘에도 연예계와 야쿠자의 부적절한 교제가 뉴스 거리가 되는데, 그 뿌리엔 연예기획사를 매개로 한 연예인과 야쿠자의 유대가 있다. 코베예능사는 그러한 구조를 일찍부터 구축한 선구적 존재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4. 츠루타 코지(鶴田浩二) 습격 사건

 

연예인에게 있어서 타오카 카즈오는 도량이 크고 항상 자기 편에 서주는 훌륭한 기획사 사장이었음은 확실했다. 하지만 그의 본모습은 어디까지나 야마구치구미 3대째 두목이었고, 위에 코바야시 아키라의 증언처럼 착한 표정의 이면에 숨은 야쿠자의 얼굴이 때때로 드러났다. 야쿠자로서의 얼굴이 앞면에 나타난 대표적 사건이 츠루타 코지(鶴田浩二) 습격 사건이다.

 

鶴田浩二.jpg

츠루타 코지

 

츠루타 코지는 1948년 쇼치쿠(松竹)가 제작한 “유협(遊侠)의 떼”라는 야쿠자 영화로 데뷔, 주연은 아니었으나 달콤한 얼굴과 니힐리스트적인 이미지로 일약 스타가 됐고 가수로서도 활약하였다. 타오카는 새로 등장한 스타를 기용해서 어떤 식으로든 미소라 히바리와 공연시키는 기회를 만들려고 구상하고 있었다.

 

그러던 1952년 가을, 타오카는 츠루타 코지의 매니저와 우연히 마주쳤다. 종전부터 츠루타 코지를 히바리와 공연시키고 싶어 했던 타오카는 매니저한테 그 구상을 이야기했다. 구체적인 제안은 아니었다. 앞으로 그런 기획을 같이 해보면 어떨까, 인사에 가까운 이야기였다. 그런데 매니저는 바로 “스케쥴이 빡빡해서 좀…”이라고 응대했다. 타오카 입장에서는 문전박대당한 느낌. 매니저는 타오카가 누군지를 잘 알았을 텐데 왜 이러한 대응을 했던 건지, 타오카에게 무척 나쁜 인상을 남겼다.

 

시간이 흘러 이듬해 연말, 신년 오사카극장에서 개최 예정이었던 “100만 달러 쇼”에 츠루타가 출연하게 되었다. 츠루타매니저가 타오카한테 인사를 하러 코베를 찾았고, 매니저는 선물로 지참한 아사쿠사(浅草) 김, 그리고 금일봉을 내밀었다.

 

“사소하지만 인사를 드리는 뜻으로…”

 

금일봉에는 5만 엔이 들어 있었다. 타오카는 화가 났다.

 

“카네마츠 씨, 이건 결례 아냐? 나는 당신한테 이유없는 돈을 받을 거지가 아닌데...”

 

설 연휴 특별공연으로 치러진 100만 달러 쇼는 성황 속에 막을 내렸다. 츠루타 코지 등 출연진은 텐노지구(天王寺区)에 있는 숙소에서 뒤풀이하고 있었다. 숙소 앞에는 출연자들한테 싸인을 받으려고 많은 팬들이 모여 있었다.

 

군중 속에 “츠루타의 싸인을 갖고 싶다면 내가 받아 줄게”라고, 옆에 서 있는 아주머니한테 말하는 젊은이가 있었다. 후일 야마구치구미 무투파(武闘派, 조직 내에서 무력을 담당하는 일파)의 대표격으로 지목될 그의 이름은 야마모토 켄이치(山本健一), 통칭 “야마켄”이다. 주머니에는 위스키 병이 들어 있었고, 따로 3명의 젊은이를 거느리고 있었다. 야마켄 일행은 팬들의 인파를 헤치며 여관에 들어가 츠루타가 식사를 하고 있는 방의 문을 연다.

 

“축하드리네”

“수고 많았어”

 

츠루타는 묵묵부답. 자리를 같이 했던 배우들이 얼마나 황당했을까.

 

“많은 팬들이 추운 날씨에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츠루타는 여전히 얼굴을 돌리지도 않는다.

 

“뭐야! 그 태도는!!”

 

야마켄은 주머니에서 위스키 병을 꺼내 츠루타를 마구 때리기 시작했고, 드디어 츠루타가 입을 뗐다.

 

“제발 죽이지는 마라!!”

 

야마켄은 계속 츠루타를 때린다.

 

“죽이니 마니 그런 얘기 아냐!! 팬을 소중히 하란 말이야!!”

 

츠루타는 뒷머리와 팔에 모두 11바늘 꿰매는 상처를 입었다. 야마켄은 츠루타가 양팔로 얼굴만큼은 지키려 했던 것을 인상 깊게 봤었다.

 

 

5. 사건 그 후

 

스타가 야쿠자한테 습격당한 사건은 세간의 주목도와 대조적으로 형사 사건으로서는 딱히 큰 것은 아니었다. 실행범 4명에 더해 당시 야마구치구미 와카가시라(若頭, 조직내 넘버2)를 맡던 카지와라 키요하루(梶原清晴), 코베예능사의 니시모토 이치죠(西本一三)가 체포되어 재판에 넘겨졌지만, 야마켄에게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의 판결이 내려진 것이 다였다(타오카 역시 지명수배되었으나 나중에 스스로 출두해서 처분이 보류되었다).

 

야마켄.jpg

야마모토 켄이치

 

그러나 츠루타 코지 습격 사건은 흥행업계와 이에 관여하는 야쿠자 조직에는 큰 충격을 주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서일본에서는 야마구치구미를 무시하곤 공연을 치르지 못한다는 강력한 인상을 남겼다. 사실상 야마구치구미가 서일본 일대의 흥업권을 확립한 셈이다.

 

코베예능사가 급성장한 바탕에는 야마구치구미라는 폭력 장치가 있었던 것은 부정할 수 없겠다. 반대로 코베예능사의 활동이 야마구치구미의 세력 확장을 위한 앞잡이 역할을 하는 면도 간과할 수 없는 대목이다. 다음 회에서는 야마구치구미가 연예기획사인 코베예능사를 이용해서 나와바리를 넓혔던 방식부터 이야기하기로 한다.

 

 

【오늘의 야쿠자 용어 (14) ~이케이케(イケイケ)】

 

일본 서브컬쳐에 관심이 있는 분이면 혹시 "이케이케(イケイケ)"란 말을 들어 본 적이 있지 않니 싶습니다. 원래 동사 "이쿠(行く)"의 명령형을 두 개 붙인 건데요. 일반적으로는 "마구 기운이 있는 모양", "고양된 기분으로 기세 있게 뭔가를 함" 정도의 뜻이죠. “기운이 있게 마구 함”이 바탕에 깔려 있으면서 “규칙이나 도덕에 얽매이지 않음”이란 느낌도 포함되는 것 같습니다.

 

그럼 “이케이케”가 야쿠자를 수식하게 되면 무슨 뜻이 될까요. 예를 들어 “걔는 징역이 무섭지 않은지 까딱하면 바로 무기를 들고 뛰어나가네”라든지 “오야붕의 가오가 깎였다며 그 자리에서 바로 죽였다니 얘는 역시 이케이케구나”라는 식으로 쓰이는데요.

 

그렇습니다. 대략 “문제 해결을 위한 주된 수단이 폭력”이란 뜻이죠.

 

“응? 야쿠자는 다 그렇지 않나?” 싶을 분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아무리 야쿠자라 해도 실제로 폭력을 행사하는 경우는 그리 많지는 않죠. 물론 야쿠자업에 종사하는 분들은 아예 성향이 거칠고 물리적 힘을 발동하기를 꺼리지 않는 편이긴 하지만 항상 주먹을 휘두르는 것도 나름 힘들 겁니다.

 

그런데도 “걸핏하면 바로 폭력”이라는 야쿠자도 있는 겁니다. 이런 바로 폭력 스타일의 야쿠자를 이케이케라고 하는 거죠. 본문에서 츠루타 코지를 습격한 야마모토 켄이치를 “무투파(武闘派)”로 언급했는데 바꿔 말하면 그는 이케이케였던 겁니다. 야쿠자나 그 조직이 기세를 부리는 배경에 폭력이 있는 만큼 이케이케는 조직 내에서도 높은 자리를 차지했죠(꼭 그랬다는 말은 아니고 특히 폭력단단속법 시행 이후에는 상황이 급속도로 바뀌고 있다고 하죠). 현재 야마구치구미 구미쵸(6대째)의 출신 조직은 야마구치구미 내부에서도 이케이케 중 이케이케로 알려진 코도카이(弘道会)인 것이 알맞은 사례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