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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축구가 전투이고 패싸움이던 시절이 있었다. 아시아 바깥에서는 세계의 문을 수줍게 두들겼으면서 아시아에서는 사납게 1등을 다투던 시절이다. 90년대에 완성된 그 시절의 느낌이 있다. 일본대표팀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쥐어패는 데 꼭 성공하던 시절 말이다.

 

선수단이 ‘일본에 질 경우 결코 살아서 돌아오지 않겠다’고 할 정도로 한일전의 열의가 엄청났던 시절이다.

 

노골적으로 시뻘건 국가대표 유니폼을 입고 축구장이 아니라 논두렁에 있어도 딱 어울릴 것 같은 한국 아저씨들이 옹이지듯 근육이 불거진 종아리로 잔디를 박차며 앞으로 치달리던 시절. 한일전이 열리는 날이면 날마다 희뿌연 매연이 가득한 거리를 걷던 사람들의 눈에 일제히 비장한 독기가 어리던 시절. 한국이 아직 중진국이었던 시절. 한국 축구의 감수성은 그때 완성됐다. 

 

한국 축구는 오랫동안 객관적 지표보다 더 좋은 성적을 냈다. 국제대회에서 선수들이 자신의 기술과 체력 이상의 결과를 내는 이유는 따로 묻거나 분석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시합 직전 애국가가 울려 퍼질 때 선수들의 눈에서 그야말로 화염이 일었으니까. 그때 몇몇 국가대표 선수들은 반드시 이겨야겠다는 사명감이 치받혀 몸을  떨기도 했다. 그냥 하는 표현이 아니라, 정말로 떨었다. 

 

유상철은 홍명보, 황선홍과 함께 그 시절의 이미지를 구성한 붙박이 얼굴의 주인공이었다. 고대 로마시대에 흰 대리석상이 있었듯 그때 한국 축구에는 유상철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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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를 대표팀 공격수로 기억하지만 사실 국가대표팀에서 그는 수비수였다. 유상철이 공격수로 기억되는 이유는 실제로 공격에 자주 참여했기 때문이다. 그는 최종수비부터 최종공격까지, 시시각각 변화하는 드넓은 필드를 헌신적으로 소화해냈다. 

 

유상철과 황선홍은 TV로 축구를 접하는 축구팬들에게 결정적인 득점 기회에서 공을 하늘로 띄우는 일명 '홈런볼'로 악명이 높았다. 그런데 공이 뜨지 않으려면 안정적인 자세와 템포, 호흡이 필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객관적 실력 이상의 성적을 내던 시절에 국가대표 중에서도 뛰어난 선수들은 홈런볼이 많을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동료를 대신해 더 많은 기회를 만들고 단숨에 마무리까지 지으려면 슛을 차는 시점에 발의 정확한 포인트로 공을 가격하기 힘들다. 

 

어느 순간 유행이 끝나버린 신문선 해설위원의 '디딤발과 차는발' 이론은 당시에는 매우 정확한 분석이었다. 당시 한국 축구 수준에서 대표팀을 책임지던 해결사들은 정말로 디딤발을 확보하는 데 불리했다. 히딩크에 의해 대표팀 멤버 전부가 상향 평준화되면서 틀린 이론인 것처럼 되어버렸지만 말이다. 

 

유상철에게 홈런볼이 많았던 이유는 아군 진영 깊숙한 후방에서부터 자신의 역할을 다하고 진격해 결정적인 기회를 만들어서였다. 그래서 팬들은 그가 어째서 그렇게 대표팀에 중용되는지 이해할 수 없었고, 반면 그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헌신적인 플레이로 국가대표 감독에게 필수 옵션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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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대표팀은 유상철을 중앙 수비수로 기록하지만, 프로팀에서 그는 사실 윙어였다. 기술과 체력의 한계를, 공격이 성공할 때까지 앞뒤 질주를 무한 반복하며 끝없이 치고 달리는 윙어는 한국 축구의 상징이었으며 일본 국가대표에게는 지옥의 풍경이었다. 윙어의 끝없는 질주와 계속되는 '센터링'(요즘 표현으로는 크로스), 그리고 이어지는 문전에서의 우격다짐. 이게 되는 이유는 득점이 '될 때까지' 하기 때문이다. 

 

축구에 있어서 한국은 전통적으로 멕시코와 함께 윙어의 나라다. 차범근 역시 분데스리가에서 가장 뛰어난 윙어로 전설이 되었다. 또한 국가대표 경기에서 한국과 멕시코 같은 팀은 강팀 선수들의 힘과 기술을 윙어의 야생마 같은 기세로 상쇄해야 한다. 그러면서 팀을 위해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거기에 아무렇지 않은 성격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사람 자체가 '그런 사람'이어야 한다. 축구가 지금처럼 고도로 세련되어지기 전까지 성격은 기술만큼이나 선수의 플레이에 정체성을 부여했다.

 

그런 유상철에게 세계 유수의 감독들이 군침을 흘렸다. 그의 가치를 가장 제대로 알아본 감독은 당시 FC 바르셀로나를 이끌던 로날드 쿠만이었다. 다름 아닌 아약스에서 완연한 선수로 완성된 쿠만은 리누스 미헬스에서 시작된 현대축구의 원형 토털풋볼의 순혈 직계 중 한 명이다. 

 

그는 유상철의 선배격인 공격형 수비수였으며, 중장거리 슛 득점으로 경기 양상을 충격적으로 뒤집는 것에서도 유상철의 유전적 선배였다. 하지만 당시 한국축구와 세계축구의 연결망은 엉망이었다. 시대적 한계로 유상철은 고작 J리그에 진출하는 데 만족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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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상철은 자신이 책임져야 할 결과와 역할 외에는 그 어떤 핑계도 대지 않았다. 스스로를 안쓰러워하는 습관도 없었다. 그는 사실 한쪽 눈이 실명 상태인 채로 현역 선수 생활을 보냈다. 그러나 철저히 비밀로 했다. 

 

장애를 이겨내고 지금은 국가대표 선수라는 것. 그것은 동정표, 대중의 응원, 감동 휴먼스토리, 이런저런 감정적 가산점, 대중의 관심과 마케팅 등 다양한 이점을 선사해 줄 보물 같은 이야기였다. 

 

그러나 유상철은 자신이 다른 한 선수를 제치고 기용되고 발탁되는 데 있어 조금의 영향이라도 끼칠까 봐 그 사실을 철저히 숨겼다. 그는 단지 혼자서 묵묵히 남보다 몇 배 노력했을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유상철이 현역에서 은퇴하고 나서야 그의 장애를 알 수 있었다.

 

유상철이 홈런볼로 국민들에게 욕을 먹을 때, 그는 그냥 욕을 먹었다. 슛에 실패한 건 실패한 거고 그게 전부였다. 자신이 카메라에 잡히지 않는 오프더볼 상황에서 얼마나 헌신적으로 대표팀을 책임지는지에 대해 일언반구 하지 않았다. 

 

대신 자신을 조롱하기 위해 만들어진 '돌아온 홈런왕 유상철'이라는 플래시게임을 해 보고 웃는 얼굴로 소감을 밝혔다. 이런 것이 인간 유상철의 자존심이고 멋이었다. 진정한 투사는 이렇게 깨끗한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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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축구팬들에게 한일전을 통해 전달된 유상철의 느낌은 물불 가리지 않는 야쿠자 행동대장이었다. 유상철은 일본 축구판에서 증오의 대상이었으며, '기술이고 작전이고 뭐고 우격다짐으로 짓찧고 이겨버리고야 마는' 그래서 '무식하고 폭력적인' 한국 축구의 기세를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정교함의 황선홍과 카리스마의 홍명보와는 느낌적 위상이 달랐다. 셋 다 원수인 건 마찬가지였지만.

 

유상철의 유난히 싸움 잘해 보이는 얼굴 표정도 한 몫 했으리라. 한쪽 눈이 실명 상태가 되면 제 기능을 하는 눈 쪽으로 힘이 쏠려서 얼굴 표정이 남들과는 달라지게 마련이다. 뭔가 더 사나우면서도 또 어떤 것에는 아무렇지 않아 하는, 진짜 잘못 걸리면 누구 하나 죽여버릴 것 같은 느낌의 얼굴이 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만들어진 그의 인상도 일본 축구팬들의 트라우마가 됐을 것이다. 

 

하지만 유상철 같은 인간형은 주어지는 것에 불만을 갖지 않는다. 그리고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최선을 다하는 데 주저함이 없다. 유상철은 라리가 대신 가게 된 J리그에서 특유의 씩씩함으로 그가 어떤 인간인지를 보여주었다. 그는 스스로 얼마나 정직한 투사인지를 증명하며 일본 축구팬의 깊은 사랑과 존경을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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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암과 싸우게 되었을 때 유상철은 가족과 팬들을 위해 싸워서 이겨보겠다는 의지를 천명했다. 그에게는 병상도 그가 묵묵히 피땀을 쏟은 또 하나의 필드였을 것이다.

 

유상철은 참으로 유상철답게 끝까지 동정과 위로를 구하지 않았다. 병마와 싸워 이기고 있으며, 몇 번이고 이제 다 나았다고 했다. 그의 성격이라면 대중의 지지를 받고 싶었을 리 없다. 관심과 응원 없이 죽어가는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괜히 부끄러웠을 것이라 짐작해본다.

 

어차피 시간과 죽음을 이기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 둘은 사실 동일한 것이다. 그는 병마에 패배하지 않았다. 단지 우리보다 더 잘 싸웠으므로 더 앞서갔을 뿐이다. 슬프긴 하다. 하지만 그토록 강인한 사람을 주제넘게 동정하진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