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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신접종을 먼저 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앞서가는 얼리어댑터들이 잔여백신을 맞았다는 인증글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나이순으로 백신을 접종한다고 했으니 비교적 고령인 나도 곧 백신을 맞을 차례가 돌아올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그냥 순서대로 맞을 생각이었다. 

 

유난히 바늘을 무서워하기 때문인 것도 있지만, 귀차니즘이 기본 장착된 내가 병원 여기저기 전화를 돌려가며 잔여백신을 위해 치열한 경쟁을 뚫을 의지는 없다. 시도해본다 한들 될 가능성은 무척 희박하고(아재는 느리다...!). 

 

그런데 예상보다 일찍 백신접종을 하게 된 특별한 일이 생겼다.

 

중년에 접어들며 눈에 띄게 달라진 건강상태 덕분(?)이다. 알러지성 비염 및 천식, 혈압, 통풍, (우라질) 탈모 등 젊어서는 꽤 건강하다고 자부했지만, 나이가 드니 관리하고 살아야 할 지병이 하나둘 생겨난 게다. 

 

그로 인해 무지 귀찮지만 짧게는 한 달에 한 번, 많게는 일주일에 두 번 정도 꾸준히 병원을 찾아야하는 매출 기여 상위 10%의 VIP 신세가 돼버렸다.

 

그 ‘신세’가 이번엔 백신 주사를 예상보다 빨리, 그것도 급작스럽게 내 팔에 꽂게 만들었다. 

 

 

예상치 못한 백신접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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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은 백신 접종을 하려고 병원을 찾은 건 아니었다. 여느 때처럼 콧물과 코막힘, 재채기 등의 환절기 알러지가 올라와서 알러지 약을 처방받으러 갔었다(니들도 내 나이 돼봐!). 그 날따라 왠지 병원에 혼자 가긴 싫었다. 아내를 졸라 병원에 함께 갔다.

 

평소에는 진료 대기실에 많아야 한 두명 정도 앉아있곤 했는데, 그 날따라 사람이 좀 많았다. 진료접수를 하는데 잔여 백신 예약을 하겠냐고 묻길래 별 기대 없이 아내 이름까지 올려두었다. 그런데 내 순서가 아웃사이더의 속사포 랩보다 빠르게 다가왔다. 

 

간호사쌤이 몇 군데 전화를 하는 듯하더니, 진료를 기다리던 나와 아내에게 오늘 백신 접종을 할 수 있냐고 물었다. 

 

“네?? 오늘요? 지금요?”

 

카드 패를 까듯 조여오는 긴장감에 꽉 막혀있던 코가 뚫렸다. 눈코입을 몽롱하게 하던 알러지 반응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심장이 방망이질 쳤다.

 

여기저기서 ‘백신 맞고 사망’이라는 무시무시한 기사가 난무하고, 무려 영국의 전 태권도 챔피언도 '백신을 맞고 다리가 폭발'했다는 놀라 까무러칠 기사가 온갖 계란판과 1등 폐지생산 전문 업체에서 앞다투어 실리는 이 중차대한 시점에, 나 같은 ‘연약하고 민감한’ 아저씨가 과연 이렇게나 ‘위험한’ 일에 몸을 던져도 되는 일일까 걱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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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조선일보>

 

나는 한 여인과 일생을 약조한 지아비이자 두 아이의 아비이다. 국방의 의무는 민방위까지 끝났지만, 동시에 이 나라의 경제를 철통같이 수호해야 할 경제인이요, 출판 산업의 든든한 역군이다. 

 

그렇다. 

 

누가 뭐래도 가정과 국가의 미래를 짊어진, 절대 잃어서는 안 될 아주아주 소중한 인적 자원이다! 찰나의 순간 자존감을 누구보다 높게 높이며,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극렬한 나르시시즘에 빠졌다. 뭐가 더 없을까. 내가 죽으면 안 되는 다른 이유는 또 무엇일까.

 

아인슈타인이 그랬나? 빛보다 빠른 건 없다고. 아니었다. 순간 내 머리의 회전속도는 빛보다 빨랐다고 자부한다. 순간, 당장 마무리 해야 할 일들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월말 계산서 마감, 두 건의 원고, 그리고 다음 날로 예정된 신간 인쇄 감리까지... 어느 하나 소홀히 할 수 없는, 국가 경제를 뒷받침하는 중요한 일들뿐이었다. 

 

백신 맞고 많이 아프다던데... 자존감과 함께 급격히 애국심도 상승하며 마음의 준비도 안 된 상황에서 괜스레 계획에 없던 일을 했다가 국가 경제에 큰 손실을 끼치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되는 게 아재의 마음이다.  

 

국가와 가정의 미래를 걱정하는 충심이 전해진 것일까? 옆에서 문진표 작성하던 또 한 명의 아재가 모든 것을 이해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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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맞으실 거면 제 동생 불러도 돼요?” 

 

사람 심리가 참 웃기다. 아저씨의 한 마디에 돌연 백신을 맞고 싶어졌다. 안 그래도 빡센 스케줄, 빵구날 경우, 둘러댈 핑계가 필요할 것도 같았다.

 

“그래! 이왕 할 거라면 그냥 오늘 해버리자.”

 

문진표를 작성하고 체온을 또 쟀다.

 

“여보... ㅠ.,ㅠ 우리, 자장면 먹을까?”

 

여전히 무섭긴 했다. 다리가 폭발할지도 모르는 운명의 순간을 맞이할 생각을 하니 먹고 싶은 것은 먹어야 할 것 같아 아내와 점심 메뉴를 논의하고 있었다. 순간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다. 

 

“왕털풍뎅이님 들어오세요.”

 

긴장된 순간이었다.

 

진료실에 들어선 후 최후의 변을 토하는 심정으로 의사쌤한테 말했다. 

 

“실은 오늘 알러지 약 받으러 왔는데 갑자기 백신을 맞게 된 건데요. 백신 맞고 알러지 약 먹어도 괜찮은 건가요? 혈압약이랑 통풍약도 먹고 있는데, 괜찮나요? 백신 때문에 이상 반응이 생기는 건 아닐까요?”

 

“괜찮습니다. 크게 걱정하실 것 없어요. 알러지 약도 처방해드릴게요.”

 

국가와 가정의 미래를 걱정하는 충심을 읽었는지, 의사쌤도 백신을 맞았는데 별 탈 없이 회복했다며 묻지도 않은 말을 해주었다. 

 

“백신은 없어서 못 맞는 거지 기회만 된다면 빨리 맞는 게 당연히 좋지요. 오늘 하루 정도는 목욕하지 마시고, 과로도 하지 마시고 푹 쉬세요. 그리고 이러이런 거 주의하시고...” 

 

친절한 설명과 함께 오늘은 푹 쉬라는 주의사항은 퍽 마음에 들었지만 하루 동안 목욕하지 말라는 주의사항은 깔끔한 성격의 나에겐 받아들이기 어려웠다(세상 모든 일이 내 마음 같을 수는 없는 것이니 곧 받아들기로 했다). 

 

담담하게, 그러나 용감하게 운명의 주사를 맞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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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을 파고드는 차갑고 날카로운 긴 바늘. 그리고 그 끝에서 뿜어져 나와 몸속으로 퍼져가는 치명적인 약물이 떠올라 이내 고개를 돌렸지만, 의외로 주사는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혹시 이상 반응이 생기면 즉각적인 대응을 해야 하니 15분 정도를 대기했다가 귀가하라고 했다. 두려웠다. 

 

기다리는 동안, 위험을 무릅쓰고 용감히 운명적인 거사를 치른 생생한 증거를 남기기 위해 쿠브(Coov) 앱을 깔았다. 본인 인증을 하자마자 앱에 예방접종 증명서가 떴다. 주사를 맞은 지 5분도 지나지 않아 문자메시지가 날아왔다.

 

국민비서 구삐가 보내준 문자메시지에는 2차 접종 날짜와 장소까지 안내되어 있었다(국민비서라는 단어가 좀 오글거린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이렇게 바로 다음 스케줄까지 나오는 것을 보니 우리나라의 방역행정이 어디에도 뒤지지 않을 수준급이라는 생각에 두려움 한편으론 가슴이 웅장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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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샘한 (만) 49세 아재의 접종 이후 증상

 

백신을 맞고 적당히 아팠다는 사람도, 너무 아파서 진통제를 며칠 먹었다는 사람들도 있었다. 특히 젊은 층일수록 아플 확률이 높다고 했다. 동안도 또래에 비해 좀 더 아픈가? 은근 동안이라 자부하는지라 혹시 곧 극심한 통증에 시달리게 될 것만 같아 은근히 걱정됐다.

 

아파지기 시작하면 지체없이 먹을 타이레놀을 사러 약국으로 향했다. 타이레놀이 동이나서 약국마다 큰 혼란이 야기되고 있다는 기사도 봤던 터라 마음이 급했다. 

 

하지만, 매대에는 타이레놀이 그득그득 쌓여 있었다. 약사쌤한테 물어보니 아직 사재기 조짐은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사재기로 타이레놀이 떨어지더라도 타이레놀과 똑같이 ‘아세트아미노펜’이 함유된 수십 종의 해열진통제가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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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세트아미노펜 계열의 해열진통제

 

타이레놀이라면 집에 몇 알 남아있을지도 모른다고 아내가 말했지만, 유비무환이라고 '아세트아미노펜'계열의 해열진통제 한 갑을 사서 돌아왔다.

 

백신 접종 후 즉각적으로 두드러졌던 특징은 주사를 맞은 자리의 욱신한 근육통이었다. 짐을 들기 힘들다거나 글씨를 쓰기 힘들다거나 할 정도로 심한 통증은 아니었다. 주사약이 아직 다 풀리지 않은 것 같은, 혹은 엄마의 등짝 스매싱에 멍이 든 것 같은 정도의 경미한 근육통이었다(그 통증은 점점 옅어져서 2~3일 정도 후에 사라졌다).

 

그 외에 두통이나 오한, 열이 난다거나 어지럽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의사쌤은 집에서 하루 푹 쉬라고 했지만, 가정과 나라의 경제를 짊어진 역군의 삶은 한시도 쉴 수 없는 그런 것이다. 주사 맞은 자리가 멍든 것처럼 아픈 것 외에는 이렇다 할 만큼 아픈 곳도 없기도 하고, 마감은 넘기지 말아야 칭찬받을 것 욕은 먹지 않을 것 같았다. 책임감과 사명감에 넘치는 올곧은 심성을 가진지라 사무실에 나갔다가 기어이 그날  밤을 새는 참사를 저지르고야 말았다. 

 

하루 종일 일하고, 그것도 모자라 밤을 새우는 투혼을 발휘하면서도 열이 난다거나 두통에 시달린다거나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피로감이 심하게 몰려와서 달달한 커피와 코코아를 연거푸 마시기는 했다. 그 피로감이 밤을 새서 열심히 일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백신 접종 때문인지는 알 수가 없다.

 

어쨌든 별 탈 없이 그 밤을 넘겼다. 하지만, 다음 날도 쉬운 스케줄은 아니었다. 신간의 인쇄감리가 예정되어 있어 인쇄소에 하루종일 나가 있어야 하는 날이었다. 아아, 산업 역군의 길은 이토록 험난하다.

 

해야 할 일이 많아 오매불망 일 생각만 했었다. 혹여 열이 나면 정문 발열검사에서 뭐라 말해야 할까, 백신을 맞았기 때문이라고 하면 될까, 안 믿어주면 백신접종 증명서를 보여주면 믿으려나 등등 인쇄소로 운전해 가는 내내 온갖 경우를 대비해 할 말을 준비했지만, 정문 발열 검사에서 정상체온으로 통과했다.

 

하루종일 눈 뻑뻑함과 피로감이 느껴졌지만, 업무를 아예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밤샘한 다음 날 느껴지는 전형적인 피로감 정도였다. 

 

별 탈 없이 무사히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무사히 일을 끝마쳤다는 안도감에 이른 저녁부터 쓰러져 다음 날 아침까지 계속 잠을 잤다. 반백의 나이에 밤샘, 거기에 백신 접종까지 했으니 안 그래도 연약한 몸이 여러모로 놀랐을 것 같았다.

 

아내의 말에 의하면 내가 밤에 살짝 끙끙대며 앓더란다. 열이 나거나 식은땀을 흘리지는 않았지만, 여튼 앓더란다. (하지만 정작 나는 기억이 없다) 다음 날 아침, 모든 역경을 극복하고 개운하게 일어나 정상적인 몸 상태를 회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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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종 후 만 3일이 되자 국민비서 구삐가 안부를 물어왔다. 다행스럽게도 내 다리는 멀쩡했다. 심지어, 그동안 담쌓았던 운동까지 했다. 아내 역시 어깨 통증과 둘째 날의 가벼운 피로감 외에는 특별한 이상 반응 없이 정상 생활로 돌아왔다. 

 

접종 후 꼭 일주일이 되어가는 오늘, 혹시 이상반응이 없는지 국민비서가 또 문자를 보내왔다. 어깨 근육통은 사라진 지 오래고 별다른 이상반응은 전혀 없으며 사다 놓은 해열진통제는 한 알도 먹지 않았다. 

 

한 가지 부작용이라면 ‘젊은 사람일수록 접종 이후에 더 아프다더만 정녕 자기도 이제 아줌마가 된 거냐’며 아내가 화를 내고 있다는 것이다.

 

 

나의 백신접종, 마을 집단면역의 불씨가 되다 

 

아내가 친하게 지내고 있는 같은 마을 학부형들에게 우리 부부가 ‘벌써’ 코로나 백신을 맞았다는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우리 마을은 구성원 대부분이 초등학교의 학부형으로, 앞집 아이가 같은 학교 동문이고, 같은 반 친구 어머니가 옆집 아주머니일 정도로 끈적끈적한 학연을 자랑한다)

 

하루에도 수십차례 아내와 문자, 전화로 서로의 소식을 실시간 생중계하는 어머님들이 몇 분 계시는데, 들리는 이야기로는 우리 부부처럼 ‘차례가 돌아오면 맞아야지’ 하는 생각에 차례가 오기를 기다리거나 혹은 (서울 쪽으로 출퇴근하시는 분들의 경우에는) 직장 근처의 큰 병원에 접종 예약을 해두셨던 경우가 대부분이었던 것 같다. 

 

정작 우리 마을의 가정의학과 병원에서 일찌감치 접종에 성공한 우리 부부의 사례에 ‘나도 할 수 있다!’라는 분위기가 한껏 고무된 것 같았다. 가까운 분 중에는 우리가 접종했던 병원에 예약하고 바로 접종에 성공했다는 소식도 들려왔다(이제는 대기열이 길어져서 그 병원도 앱을 통해서만 예약을 받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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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종 성공!! 

 

이렇게 앞다투어 백신 접종을 빨리하려는 것을 보면, 우리 마을 사람들은 분명 뉴스도 보지 않거나 아니면 다리가 폭발할지도 모르는 위험을 무릅쓴 용감한 사람들임에 틀림없다.

 

누군가 나에게 소 뒷걸음에 쥐 잡은 격으로 운 좋게 코로나 백신을 빨리 접종했다고 말할지 모른다. 나로선 엄청난 고뇌와 번민 끝에 백신 접종이 과연 위험한 것인지 확인하기 위해 몸을 던지는 심정으로 했다고, 내가 아파서 이 나라의 국가경제가 흔들릴지 모를 일인데도 과감함을 발휘했다 말하고 싶다. 

 

나의 이 도전과 모험이 우리 마을의 집단 면역을 앞당기는데 불을 당긴 게 틀림없다는 자부심이 샘솟는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독자들께 당부하고 싶은 것이 있다.

 

지금 이야기한 것은 순전히 나의 사례일 뿐 백만분의 일, 천만분의 일이라고 할지언정 크고 작은 부작용의 가능성은 분명 존재한다는 점이다. 내가 괜찮았으니 다들 괜찮을 것이라고는 단언할 수 없다. 

 

누군가는 괜찮을지도 모르고, 어쩌면 누군가는 조금, 혹은 많이 아플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백신을 접종하는 이유는 -다들 아는 바와 같이- 그 부작용은 대부분 치료할 수 있고 회복할 수 있는 정도이며, 백신을 접종함으로써 얻는 것이 그러지 않는 것보다 더 크기 때문이다.

 

부작용을 겪었던 사람들에 의하면, 평소 상태가 좋지 않았던, 혹은 약하다고 느꼈던 부위가 더 아프게 되는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접종 후에 푹 쉬라는 의사의 말을 안 듣고 나처럼 몸을 혹사하는 것은 부작용의 가능성을 높이는 위험한 일임에 틀림없다.

 

연약한 나도 맞았으니 겁낼 일은 아니다. 겁내지 마시되, 부작용의 최소화를 위해 모쪼록 콘디션 조절 잘하시고 접종에 임하시길 바란다. 난 8월에 있을 2차 접종도 꼭 할 생각이다. 그때는 콘디션 조절 잘 할 거다.

 

나는 국가경제의 버팀목이니까. 

 

 

추신: 혹시나 하는 말인데, 연약하고 섬세한 내 마음을 보지 않고 지옥에서 온 프로레슬러같이 생겼다고 허구헌날 나를 놀리는 딴지일보 편집부는 혹시나 내 나이를 언급할 때, 꼭 만으로 적어주길 바란다. 안 그러면 크게 삐질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