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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지의 리뷰노예로 납치된 불가사리. 거액의 제작비로 복수하겠다 다짐했지만, 딴지가 던져준 주제는 고작 안경닦이와 와인 오프너. 연일 와인을 마시느라 숙취에 시달리면서 이번에야말로 비싼 물건을 리뷰하리라 다짐했지만, 딴지 편집장 죽지않는돌고래(이하 죽돌)는 ‘믹스 커피’리뷰라는 싸도 싸도 세상에 너무 싼 미션을 던져준다. 과연 불가사리는 성공적으로 딴지의 등골을 빼먹을 수 있을 것인가.

 

불가사리의 소비 대모험, 기대하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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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지하게 생각해본 적 없는 주제, 믹스커피

 

‘믹스커피’라는 주제를 받고 나서 막막한 기분이 들었다. 한 번도 믹스커피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서이다. 얼핏 믹스 커피가 한국에서 최초로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 같고, 한국인들의 조회수를 노리는 외국인들이 믹스커피를 마시고 따봉을 날리는 것도 본 것 같다. 심지어 특허청이 선정한 ‘한국을 빛낸 발명품’ 5위에 선정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는 것 같은데 어째 뒤로 갈수록 좀 이상하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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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위일 수는 있다 치는데, 1위부터 4위가 너무 대단해서 뭔가 이상하지 않나...

 

새삼스럽지만, 지금 우리가 떠올리는 ‘인스턴트 커피’는 당연히 스틱형 커피믹스 또는 스틱형 블랙커피이다. 병에 든 커피를 언제 마지막으로 보았는지도 잘 생각나지 않는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90년대에만 해도 믹스커피는 집이나 사무실에서 흔히 마시는 물건이 아니었다. 집이나 사무실에는 주로 커피 통, 설탕 통, 프림 통이 따로 있어서 티스푼으로 비율을 맞추어 잔에 따른 뒤 더운물을 담아 마셨다. 어른들은 자신이 선호하는 비율이 따로 있어서, 이걸 잘 맞추면 ‘허허 우리 불가사리가 커피를 참 잘 타요’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2005년경 행정병으로 군 생활을 할 때도 사무실에 있는 열 명 정도의 간부들이 각자 선호하는 커피 비율을 암기해서 타 주곤 했던 기억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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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집마다 이런 통이 있었다. 커피, 프림, 설탕.

 

2000년대 초반만 해도 커피 광고라고 하면 대부분은 믹스커피가 아닌 병에 든 인스턴트 블랙커피 광고였던 시절이 있었다. 심지어 2010년경까지도 병에 든 커피 광고가 지면과 광고로 나오곤 했다. 스틱형 커피 광고나 카페 광고만 눈에 보이는 현재로서는 이질적이지만, 그 모델들의 얼굴은 너무 친숙해서 외려 이질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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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한석규와 황수정의 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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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조인성 한효주의 광고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부터 믹스커피를 마시게 된 것일까. 그 이전에는 어떤 커피를 마셨을까. 어떤 이유에서 어떻게 커피 문화가 변화된 것일까. 이를 알기 위해서는 이 땅에서 가장 먼저 커피를 마신 것으로 ‘알려진’ 인물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누규일까? 고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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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이 마신 커피는 무엇일까

 

흔히 고종은 아관파천 때 조선 최초로 커피를 마신 것으로 묘사되곤 한다.

 

그러나 실제 미국의 천문학자 퍼시벌 로웰이 1884년, 아관파천 12년 전에 한강 변 별장에서 커피를 마셨고 이를 ‘조선의 최신 유행품’이라고 이야기했던 기록을 보면, 아관파천 설은 호사가들이 만든 이야기일 뿐 사실이 아니다. 고종이 지은 ‘정관헌’이 일종의 카페라는 말도 있지만, 이 또한 전혀 사실이 아니다. 고종이 최초로 커피를 마신 사람인지는 확실하게 알 수 없다. 다만 고종이 커피를 무척 즐겼던 것은 확실하다.

 

그렇다면 고종이 마셨던, 당대 유행했던 커피는 어떤 것일까? 

 

고종이 커피로 독살당할 뻔했던 사건을 다룬 영화 ‘가비’에서는 정성스럽게 융(플란넬)에 커피를 담아 뜨거운 물을 부어 ‘드립 커피’ 방식으로 커피를 추출하여 고종에게 진상하는 모습이 나온다. 

 

 

현재 운현궁에서는 개화기에 사용했던 핸드드립에 필요한 도구들을 가져다 놓고 고종이 이렇게 마셨다며 ‘가배 체험’이라는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그곳에 준비된 도구는 알라딘이 사용했을 법한 드립 주전자(칼리타의 52017 동포트 또는 그 카피품으로 보인다)와 종이 드립 필터이다. 이 프로그램을 소개하는 서울시 블로그의 문구 중 ‘언젠가부터 커피는 인스턴트를 대표하는 음료가 되었다’는 부분에선 안타까움마저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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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현궁 가배 체험

 

그러나 이 가배 체험의 현대식 ‘드립 커피’는 고종이 마셨던 커피 방식은 아니다. 드립 커피는 아관파천으로부터 2년 뒤, 로웰의 기록으로부턴 14년 후인 1898년에 멜리타 벤츠(Melitta Bentz) 여사에 의해 만들어졌다. 

 

이 드립 커피는 커피 필터에 커피를 올려 뜨거운 물을 붓는 현대식 ‘드립 커피’가 아니라, 커피와 물을 함께 끓인 터키시 커피(Turkish Coffee) 같은 형태였다. 커피 필터는 커피에서 커피 가루를 걸러내는 용도로 쓰였다. 현대식 드립 커피 형태는 조금 뒤에야 사용되었다. 

 

그나마도 우리가 생각하는 ‘드리퍼’가 만들어진 것은 1937년의 일이고, 그 전의 필터 모양은 우리의 생각과 꽤나 다르다. ‘드립 커피’는 1822년 개발된 에스프레소 머신이나 1841년 개발된 프렌치 프레스, 1830년대 개발된 사이폰 방식보다도 훨씬 더 근래에 만들어진 것이다.

 

즉, 고종은 절대로 종이 드립 필터를 사용한 커피를 마셨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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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리타 벤츠 여사가 개발한 최초의 커피 필터

 

종이 필터가 아니면 융(플란넬) 드립을 이용했을 거라 생각할 수 있고, 그래서 영화에도 융드립이 나온 것으로 생각된다. 융드립이 언제 시작되었는지는 불분명한데, 일본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의견이 일치한다. 

 

그러나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고, 융 드립을 했던 흔적이나 기록이 발견되는 것은 모두 1900년대 이후의 일이다. 일본 최초의 커피하우스는 1888년에 생겼으므로 최소한 그 이후일 것은 분명하다. 조선 후기 커피를 일본이 아닌 서구에서 받아들인 것으로 보이는 점까지 함께 생각하면, 고종이 융 드립 커피를 마셨을 확률은 매우 적다. 그나마 가능한 것은 티백처럼 천 양말에 커피를 넣어 차를 우리듯 커피를 우리는 방법인데, 이런 방식으로 마셨는지는 불분명하다(커피 애호가다 보니 이런 방식을 몇 번 사용해 보았을 가능성은 있다).

 

고종이 마셨던 커피는 각설탕과 커피 가루를 잔에 넣고, 뜨거운 물을 넣어 수저로 저은 뒤에 가루가 가라앉기를 기다려 윗부분의 커피를 그냥 마시는 형태였을 것으로 보인다. 현대의 용어로는 ‘터키 커피’에 가깝다.

 

아니면 냉동건조는 아니지만, 물에 녹도록 만들어진 초기형 인스턴트 커피(개발된 것이 무려 1771년이다)일 가능성도 있다. 그것도 아니면 커피포트에 커피 가루와 물을 넣고 끓인 뒤 잔에 부어 마시는 형태일 수도 있다. 이것이 19세기에 가장 일반적으로 커피를 마시던 방법이기 때문이다. 실제 커피의 ‘원조’인 예멘, 케냐, 탄자니아에서는 지금도 주전자에 커피콩을 넣고 푹푹 끓인 뒤 잔에 담아 파는 사람들이 골목마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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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자니아, 케냐 골목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주전자에 끓인 커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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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0년대 사용되었던 커피포트들

 

이런 포트는 물만 담는 포트가 아니라, 물과 커피 가루를 넣고 끓이는 용도였다. 드립 커피에 익숙해진 현대 한국인들은 어쩐지 드립 커피가 엄청 오래된 방식일 것만 같은 생각에 당시 주전자들이 ‘드립용 주전자’라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커피 탕’을 만드는 도구이다. ‘양탕국’이라는 당시의 표현을 생각하면 자연스럽다.

 

다만 현재 남아 있는 왕실의 커피 관련 유물이 모두 커피잔과 수저뿐 주전자나 다른 기구가 없는 것을 보면, 초기형 인스턴트 커피 또는 일종의 터키 커피를 마셨을 것으로 보인다. 즉 고종은 잔에 커피 가루와 설탕을 넣고 휘휘 저어 마신 것이고, 드립 커피보다는 인스턴트 커피와 훨씬 가까운 형태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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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이 실제 사용했다는 잔과 차수저

 

그러니 ‘커피가 어쩌다 인스턴트가 되었는가!’라는 탄식은 의미가 없다. 원래 사람들, 특히 한국인들이 커피를 마시는 방법은 인스턴트 커피 개발 전에도 드립 커피보다는 인스턴트 커피에 더 가까웠다.

 

 

일제 강점기와 ‘모던 조선’의 커피

 

1923년을 전후하여 근대적 의미의 카페가 생겨났다. 이후에는 점점 술을 파는 곳으로 변모하지만, 초창기 카페(다방)에서 파는 음료는 커피였다. 세계적으로 당시 커피를 추출하는 방법은 전통적으로 포트에 커피 가루와 물을 넣고 끓이는 방식, 종이나 천에 커피 가루를 넣고 그 위에 물을 붓는(pour-over) 드립 방식, 그리고 에스프레소나 추출기(Percolator) 방식 등 여러 방식이 존재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에스프레소나 추출기, 드립은 주류가 되지 못했고, 차를 끓여 마셔 온 사람들에게 익숙한 방식이 주류가 되었다. 

 

일제 강점기의 다방과 잘 사는 집에서 커피를 마시는 방식은 주전자에 커피 가루를 넣고 끓이는 방식이었다. 다음의 기사를 보면, 위에서 소개한 탄자니아, 에티오피아 등에서 사용하는 것과 거의 비슷하게 주전자에 커피 가루를 넣고 끓이는 방식이었음을 알 수 있다.

 

"굵은커피로 차를끄리랴면 커피한곱부를 주전자에너코 계란껍질을 정하게 씨처너흔 후 더운물다섯곱부를붓고 불우에 올려노하 끄릴것이올시다. 한바탕훨신끝커든 주전자를 나려노코 냉수한곱부를 부을지니 그러케하면 우에뜬커피는 아레로가러안고계란껍질은 커피의 진을다빨어드려서 커피의 독특한맛을나게합니다."

 

-조선일보 1926. 1. 21.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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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카페의 풍경

 

다방에서는 이런 식으로 끓인 커피를 서빙하였다. 1901년 개발되어 1차 대전을 통해 완전히 대중화된 냉동건조 인스턴트 커피도 들어와 사용되었으나, 일반적인 다방 커피에 비해서도 더 비싼 것이었다. 어쨌든 일제 강점기, 일반인들이 커피를 마시는 방식은 끓여 나온 블랙커피에 우유와 설탕을 기호대로 넣어 마시는 것이었다.

 

 

한국전쟁 이후, 커피 전성기의 시작

 

그러나 해방과 미군정, 한국전쟁을 거치며 ‘커피’라는 단어의 뜻이 바뀐다.

 

미군정 시기와 한국전쟁 시기, 미군에게 지급되는 C-레이션은 여러 가지 종류가 있었으나 대개 커피가 포함되어 있었다. 주전자에 커피 가루를 넣고 끓일 수 있을 리 없으니, 지급되는 커피는 물만 부어 먹을 수 있는 인스턴트 커피였다. 

 

인스턴트 커피는 1909년부터 대량 생산되었고, 1937년 ‘네스카페’가 나왔으며, 2차 대전 시기 군용 커피는 나중에 ‘맥스웰 하우스’와 ‘맥심’을 만드는 ‘제네럴 푸즈’사와 ‘네슬레’를 비롯한 여러 회사에서 만들어 납품한다. 그리고 이 C레이션은 주로 미군 부대를 통해 일반인들에게 풀린다. C레이션에 들어 있는 인스턴트 커피를 통해 한국인들은 처음 인스턴트 커피를 맛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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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레이션 구성품. 커피가 보인다.

 

1950년대 이후 커피는 주로 미군 부대를 통해 흘러나온 커피였다. 다방에서는 주로 ‘미제 커피 깡통’에 담겨 판매되던 커피 가루를 주전자에 끓여 ‘레귤러 커피’ 또는 ‘아메리칸 커피’라는 이름으로 제공했는데, 가끔은 인스턴트 커피를 제공했다. 1959년 기사를 보면, 공식 수입된 커피의 10배 넘는 양이 미군 부대 PX를 통하여 흘러나왔다고 되어 있다. 아래 사진을 보면 압수된 커피는 인스턴트 커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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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6월 21일 동아일보

 

이러한 50년대의 혼란을 좌시할 수 없었던(?) 박정희 대통령은 5.16 이후 커피 수입을 전면 금지한다. 그리고 1964년이 되어서야 커피 수입을 재개하지만, 그 양을 제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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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조치로 인하여 밀수품의 시장 장악은 더욱 확고해졌고, 가격이 올라가 가짜 커피가 횡행했다. 심지어 1976년에는 ‘꽁피’라 하여 커피와 담배꽁초를 같이 넣고 끓인 커피를 판 사장이 적발되어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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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정부는 이런 제한적인 수입도 최대한 한국 업체에 의해 이루어지길 원했다. 정부는 원두를 수입하여 한국 회사에서 이를 가공한 후 판매하도록 했는데, 당시 국가에 의해 커피를 생산할 수 있도록 허락받은 회사가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동서식품’이다. 

 

동서식품은 1960년대 말 ‘엘리트’라는 이스라엘 회사와 합작, 기술제휴를 하여 커피를 생산하려 하다 결국 ‘맥스웰하우스’로 유명한 ‘제네럴 푸즈’와 합작 및 외자 유치를 하여 커피를 생산하기 시작한다. ‘제네럴 푸즈’는 미국에서 1968년부터 새로운 커피 브랜드를 런칭한다. 

 

그 브랜드 이름이 바로 ‘맥심’이다. 전설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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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남편은 많이 까탈스러운 사람이에요. 그는 잘 차려진 일요일 아침식사와 맥심 커피를 고집해요. 마치 추출기(percolator)로 추출한 커피 같아요’라는 광고 문구가 인상적이다. 이 모델은 ‘Patricia Neal'이라는 분인데, 이분의 까탈스러운 남편은 ’찰리와 초콜릿 공장‘을 쓴 Roald Dahl이다.

 

 

동서식품 라이징

 

1970년, 동서식품은 ‘맥스웰 하우스 커피’를 생산하여 시판한다. 처음에는 커피 가루(regular grind)를, 9월에는 인스턴트 커피를 출시한다. ‘맥스웰 하우스 커피’는 미군 부대를 통해 흘러나오는 커피 중 가장 흔한 것이었기에, 병 겉에 한글 상표조차 없이 미국에 판매되던 모양 그대로 판매했다는 점이 재미있는 포인트이다. 물론 몇 년 뒤부터는 한글을 표기하여 판매한다. 

 

수입품을 사용하면 공개적으로 망신을 당하고 지탄을 받던 엄혹한 70년대, 다른 커피가 수입이 금지된 상황에서 동서식품의 ‘맥스웰하우스’ 커피는 금방 시장을 장악한다. 동서식품 외에도 MJC커피 등이 생산되었으나, ‘맥스웰하우스’의 이름값에는 미치기 힘들었다. 세계적으로 쌍벽을 이루던 ‘네스카페’와 합작하려는 다른 기업들이 있었으나 정부는 이를 불허했고, 동서식품은 한국에서 커피에 관한 한 독과점적 지위를 구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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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9월 10일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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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12월 조선일보에 실린 맥스웰하우스 커피 광고. 제품에 한글을 쓰지 않은 것이 인상적이다. 

 

197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다방에서는 레귤러 커피를, 집에서는 인스턴트 커피를 마시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인스턴트 커피는 전체 커피의 10%밖에 되지 않았다. 집에서 커피를 마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다 1970년대 중반부터 중산층이 등장하면서, 인스턴트 커피의 시장 점유율이 급격히 상승한다. 유신이 끝나고 경제 발전의 성과가 눈에 보이게 된 1980년대부터는 인스턴트 커피가 레귤러 커피를 압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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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초반 마트 매대의 풍경

 

동서식품은 바로 이 시기인 1980년, ‘제네럴 푸즈’사의 고급 브랜드였던 ‘맥심’을 런칭하면서, 전성기를 열었다. 독점에 가까운 지위였던 점도 있지만, 실제로 기술도 일취월장한다. 1980년대가 되면 다방에서조차 ‘레귤러 커피’보다는 인스턴트 커피를 제공하는 경우가 일반적이 되고, 이미 갈아서 나오는 ‘레귤러 커피’ 대신 원두를 가게에서 직접 갈아서 커피메이커에 드립하여 제공하는 ‘원두커피’도 도입된다. 불가사리가 어릴 적인 1990년대 초에, ‘레귤러 커피’라는 것은 호텔 커피숍에서나 먹을 수 있는 것이었던 기억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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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동서식품은 1980년 기준 가정용 인스턴트 커피의 90%, 업소용 레귤러 커피의 70% 점유율을 성취하고 있었으나, 전설은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커피믹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동서식품에 따르면, 커피믹스는 1976년 동서식품에 의하여 최초로 개발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과거 신문 자료를 살피면, 1976년경 동서식품의 커피 관련 기사나 광고에 커피믹스는 등장하지 않는다. 새로운 브랜드를 런칭하거나, 디카페인 커피 개발 등에 어김없이 기사와 광고가 나왔던 것을 보면 매우 이례적이다. 1980년대 초까지 어떤 기사에도 커피믹스가 유의미하게 소개되지 않는다. 

 

커피믹스가 지면에 최초로 등장한 것은 1982년의 일이고, 그나마도 단독 광고가 아니라 동서식품의 다른 커피, 프리마 등과 함께 라인업을 갖추었다는 내용의 광고이다. 여기에 커피믹스는 ‘등산, 낚시 등’의 활동을 위해 만들어졌다고 되어 있다. 이후에도 한참 동안, 커피믹스는 커피를 대체하는 용도가 아닌 야외 활동 때 특별히 사용하는 물건 정도로 광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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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커피믹스 광고, 198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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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척’을 노릴 때는 커피믹스라는 광고, 1985년

 

1980년대 후반이 되면, 동서식품 외에도 두산 네슬레가 ‘네스카페 커피믹스’를 만들어내고, 커피믹스도 개량을 거듭한다. 그리고 커피믹스 광고는 여전히 야외 상황을 이야기하긴 하지만, ‘커피의 맛을 대체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1990년대 이후부터는 아예 야외 이야기가 쏙 들어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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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통 커피의 맛을 살렸다는 커피믹스 광고, 198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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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외 이야기가 없는 커피믹스 광고, 1991년

 

그리고 90년대 후반 이후, 커피믹스는 인스턴트 커피계의 왕좌를 차지하였고 10년이 채 되지 않아 ‘병 가루 커피’는 거의 멸종된다.

 

 

어떻게 커피믹스는 대세가 되었나

 

그렇다면 언제부터 커피믹스가 대세가 된 것일까?

 

얼마 전 어떤 방송에서는, 원래 회사에 있던 ‘미스김’ 등의 이름으로 불리우던 경리 여직원들이 주로 커피 심부름을 했는데, IMF 이후 이들이 가장 먼저 구조조정되면서 커피믹스가 이들의 빈 자리를 채웠다고 하는 말이 나왔다. 이 이야기는 어느 정도는 사실이겠지만, 이것이 결정적인 원인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우선 인과의 문제가 있는데, 커피 심부름을 주된 일로 하는 직원들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직원들이 잘려서 커피믹스를 쓰기 시작했는지, 아니면 커피믹스가 발전해서 직원을 잘랐는지 파악하는 것이 어렵다. 

 

또 한 가지 살펴볼 점이 있다. 

 

대한민국은 1997. 12. 3.부터 2001. 8. 23.까지 IMF 관리체제에 있었다. GDP를 살펴보면, 96년까지 가파르게 상승하다 1997년에 하락, 1998년에는 고점의 2/3 이하로 떨어졌다가, 2000년부터 회복을 시작하여 2003년에 전고점인 1996년을 상회하게 된다. 그리고 2002년부터 2007년까지 가파르게 성장하여, 2007년의 GDP(2만 3천불)는 2002년 GDP(1만 2천불)의 두 배에 달하게 된다. 

 

여러 요소가 있어서 딱 잘라 말하기는 어렵지만, 최소한 수치상으로는 우리나라가 가장 어려운 시기는 98년과 99년이었고, 2002년부터 2007년은 고성장기로 보인다. 그런데 커피믹스 판매량이 급상승한 것은 93년에서 94년, 그리고 1998년부터 2005년까지 큰 폭으로 매년 성장한다. 즉 불황기와 호황기를 가리지 않고 커피믹스 시장이 성장했다.

 

기록을 찾아보면, 1993년 삼성전자는 ‘시(時)테크 경영’을 이야기하면서 보고서를 작성했는데, “커피 한 잔의 비용은 여사원이 타줄 경우 인건비를 계산하면 3,134원, 본인이 타 마시면 1,800원이다”라는 보고서를 내고 이에 따라 이사급 이하 직원들은 커피를 스스로 타 마시도록 하였다. 이때부터 대기업들은 커피믹스를 사는 것이 차라리 싸다고 생각을 하였는지, 커피믹스로 스스로 커피를 타 먹게 하는 문화를 도입한 면도 영향이 있을 것이다.

 

커피믹스 판매량이 급격하게 성장한 2000년 당시의 신문기사를 살펴보면, 커피믹스가 많이 팔리는 원인으로 지목되는 것은 ‘냉온수기, 정수기의 보급 증가’와, ‘벤처 붐’, ‘위생의식의 변화’, ‘기업문화의 변화’이다. 냉온수기가 일반적인 것이 되어 굳이 물을 끓이지 않아도 가볍게 커피를 타 마실 수 있게 되었고, 공동의 티스푼을 사용하는 것을 꺼리게 되었으며, 벤처 붐과 기업문화 변화로 인해 커피 심부름을 시키는 것을 좋지 않게 보는 문화가 정착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찾아보면 그 외의 원인으로 보이는 것들도 있다. 커피믹스 시장이 본격적으로 성장한 것은 1999년부터인데, 네스카페에서 ‘설탕을 조절할 수 있는 스틱형 커피’가 개발된 시기도 동일하게 1999년이다. 설탕 조절이 가능하다는 점이 커피믹스의 인기를 견인했을 가능성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또 스타벅스가 한국에 진출한 것이 1999년이다. 스타벅스로 대표되는 카페 문화가 시작되면서 인스턴트 커피는 ‘고급 커피’의 아래 지위로 여겨지게 되었고, 따라서 굳이 설탕, 프림, 커피의 비율을 섬세하게 조절해서 만들 정도의 고급품이 아닌 것이 되었을 가능성도 생각할 수 있다. 

 

전술한 모든 이유들이 아마 종합적으로 어우러져서, 커피믹스의 전성기를 열었을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이런 모든 이유에서 커피믹스는 인스턴트 커피의 왕좌를 차지한다. 그리고 동서식품은 인스턴트 커피의 왕좌에 군림한다.

 

그 절정기였던 2007년, 동서식품은 ‘맥심 모카골드 커피믹스’ 하나로만 4300억 원의 매출을 올렸다. 이는 모든 식품 개별 브랜드 제품 중 최고였다. 두산 네슬레의 ‘네스카페’가 겨우 다른 옵션 정도의 역할만 하고 있던 시기, 시장의 85%를 장악한 동서식품의 왕좌는 굳건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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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의 광고, 회사 간의 경쟁이 아니라, 맥심 커피믹스의 맛 별 경쟁이 진행되던 시기이다.

 

 

흔들리는 왕좌

 

남양유업은 1964년에 시작된 기업으로, 우유와 분유 부분에 있어서 확고한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아인슈타인’ 등 히트 우유. ‘불가리스’ 등 히트 유제품, 그리고 ‘17차’ 등 히트 음료를 가지고 있던 이 회사는, 커피우유부터 시장에 진출하여 커피우유의 연장선상인 ‘컵 커피’에서 시장 1위를 차지한다. 당시 ‘컵 커피’의 이름은 ‘악마의 유혹 프렌치 카페’였다. 남양유업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2010년에는 커피믹스 시장에 진출한다.

 

남양유업의 ‘프렌치 카페’는 인기 절정의 배우 김태희를 모델로 했는데, 특이하게도

 

"화학적 합성첨가물을 모두 뺐다."

"프림이 다르다."

 

는 이야기를 한다.

 

다른 믹스커피에는 ‘카제인나트륨’이 들어 있는데, 자사 커피에는 카제인나트륨 대신 ‘우유’가 들어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광고 문구는 “프림속 화학적 합성품 카제인나트륨? 카제인나트륨이 든 프림이 좋을까? 우유가 든 프림이 좋을까?”였고, 이를 지속적으로 광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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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광고를 본 동서식품은 억울해했다. 

 

지금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지만, 카제인이란 우유 속에 들어가 있는 단백질 성분의 다수를 차지하는 단백질이고, 카제인나트륨은 물에 잘 섞이게 하기 위해 나트륨을 첨가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실제 남양유업의 분유 대부분에도 카제인나트륨이 들어가 있었다. 동서식품은 이를 ‘해명’하려 했지만, 동서식품이 해명하려고 ‘카제인나트륨’을 이야기하는 순간 프렌치카페 커피믹스를 광고해주는 것과 같은 꼴이었다. 돈 주고도 못할 광고가 연일 지면을 장식했다. 그리고 막 등장한 신생 커피믹스인 프렌치카페는 1년 만에 네슬레를 뛰어넘고 2년 만에 시장점유율 12.5%를 달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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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생각하면 조금은 이상한 일인데, 그럼에도 사람들에게 이 전략이 ‘먹혔던’ 이유가 있다. 해당 제품이 나오기 불과 2년 전에 ‘멜라민 파동’이 있었던 것이다. 

 

2008년 중국의 악덕 유제품 업자들이 우유에 물을 탄 뒤 멜라민을 타서 우유와 비슷하게 만들어 팔아먹은 사건이 있었다. 중국산 원유를 직접 수입하지 않는 한국에서도, 중국산 ‘카제인나트륨’에서 멜라민이 검출되었다. 그리고 비록 동서식품의 프림에서는 멜라민이 검출되지 않았으나, 기타 중국산 프림에서 다수 멜라민이 검출되었고, 동서식품은 당시에 ‘우리 프림은 안전하다’, ‘우리의 카제인나트륨은 호주산이다’는 식의 광고를 해서 상황을 넘겼다. 하... 듕국...

 

이 소동이 있고 얼마 시간이 흐르지 않은 시기에, 남양유업이 ‘카제인나트륨이 좋을까?’ ‘프림이 안전할까?’ 이런 류의 홍보를 하자, 먹혔다. 

 

동서식품은 해명하려 했으나 역효과만 났고, 시장 점유율은 마의 80% 아래로 내려왔다. 동서식품은 1년 정도의 실랑이 끝에 2012년 초, 카제인나트륨을 뺀 ‘맥심 화이트골드’를 출시하고 김연아를 모델로 기용했는데, 결과적으로 카제인나트륨이 나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같은 꼴이 되어버렸다. 

 

두 맥심 커피의 맛 차이는 다음 편 리뷰를 기대하시라. 어쨌든 덕분에, 2012년 ‘프렌치 카페’의 점유율은 더 상승하고, 2012년 12.5%, 2013년 13.4%를 달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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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귀환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카제인 나트륨 다툼’, 그리고 다수의 사람들이 카제인나트륨이 별문제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도, ‘프렌치 카페’는 여전히 승승장구했다. 상승세만 보면, 곧 30%에서 40%의 점유율을 가져간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남양유업이라는 회사 역시 전성기를 맞았다. 

 

카제인나트륨 이야기를 떠나, 맛에서도 프렌치카페가 낫다는 의견도 나오곤 했다. 사실 맛의 차이보다 중요한 것은 이미지였다. 뭔가 화학 제품이 없을 것 같은 이미지, 뭔가 같은 가격이지만 고급스러운 것 같은 이미지, 기왕이면 김태희, 같은. 

 

프렌치카페의 몰락은 의외의 곳에서 시작되었다. 바로 2013년 남양유업 대리점 상품 강매 사건이다.

 

남양유업이 지역 대리점에 밀어내기(강매)를 한다는 주장이 나왔고, 영업 사원이 대리점주에게 폭언을 한 녹취록이 나왔다. 이때부터 불매운동이 시작되었고, 남양유업의 다른 비위 사실이 터져 나오면서 불매운동은 더 커져만 갔다. 

 

이 불매운동으로 인해, 프렌치 카페의 상승세가 꺾였다. 애초에 맛이나 가격에서 앞서 있어서 성장한 것이 아니었기에, 거품도 빠르게 꺼졌다. 왠지 모르게 좋아 보이던 이미지는 왠지 모르게 안 좋아 보이는 이미지로 변했고, 점유율은 다시 꺼져 갔다. 물론 전통의 네슬레를 앞서고 있는 것을 보면 남양유업 입장에서 나쁜 것은 아닐 수 있다. 그러나 네슬레의 시장 점유율이 줄어들고, 남양유업의 점유율도 줄어들자 동서식품의 점유율은 더욱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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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동서식품의 믹스커피 점유율은 90%에 달한다. ‘맥심’ 브랜드만 보아도 80%를 넘어선다. 물론 언제 다른 도전자가 나타날지, 그래서 왕좌가 무너질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생각만큼 취약한 왕좌는 아닐 것 같다.

 

카페 문화가 한국인 삶의 일부가 되어 믹스커피 위기론이 있었으나 믹스커피의 소비량은 여전하고, 유독 한국만 커피믹스가 인기라는 점에서 언젠가는 사라질 유행으로 치부하는 사람들도 많았으나 베트남과 말레이시아 등은 이미 믹스커피가 시장의 큰 부분을 장악한 지 오래고, 스타벅스에서조차 믹스커피 ‘비아(스타벅스의 인스턴트 커피 브랜드)’를 발매하는 등 외려 세계적으로도 믹스커피가 소비되는 분위기이다.

 

 

스틱형 인스턴트 원두커피. 스타벅스가 던진 돌 하나

 

인스턴트 커피의 역사를 훑어 온 여러분이 보기에는, 스틱형 인스턴트 원두커피, 줄여 말해 ‘블랙커피 스틱’의 존재는 조금 이질적으로 보일 수 있다. 

 

불과 2000년대 후반, 즉 지금부터 10여 년 전만 해도 블랙커피를 사 먹는 것이 특이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회사에 주로 믹스커피를 배치하게 되고, 인스턴트 커피를 치우기 시작한 시점부터, 사실 ‘삼박자 커피’를 좋아하지 않는 이들은 충분히 있었고 이들은 어쩔 수 없이 회사 밖 카페를 찾아 나가야만 했던 시절이 있었다. 

 

스틱형 인스턴트 원두커피 시장의 개막을 알린 것은, 놀랍게도 ‘스타벅스’ 였다.

 

스타벅스는 2008년에 ‘스타벅스 비아 레디브루’라는 인스턴트 커피를 개발했는데, 특별한 기술로 스타벅스의 맛을 구현한 인스턴트 커피라고 홍보했다. 이것은 2010년 9월에 한국에도 상륙했고, 생각보다 큰 인기를 얻었다. 

 

스타벅스 비아가 다른 인스턴트 커피와 차별화되는 지점은 ‘블랙커피’임에도 개별 포장이 되어 있다는 점, 그리고 압도적인 가격이었다. 스타벅스 비아는 3.3g 스틱 하나에 1,000원을 상회하는 가격이었는데, 당시 ‘맥심 모카골드’는 100g에 5,000원 정도였고, 병 커피 중 가장 가격이 비쌌던 ‘네스카페 수프리모’는 100g에 7,000원, 인스턴트 커피 중 가장 높은 퀄리티로 평가받던 수입 ‘다비도프 커피’는 100g에 9,000원 정도였다.

 

3.3g 단위로 나누면 ‘스타벅스 비아’는 맥심의 6배 정도, 다비도프의 3배 이상의 가격으로 팔려나갔던 것이다. 그럼에도 인기가 좋았다. ‘비아’로 커피를 만들면 스타벅스 아메리카노를 사 먹는 가격의 절반 정도에 비슷한 농도의 커피를 마실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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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중요한 것은 맛의 차이이다. 비록 ‘스타벅스 비아’가 다른 인스턴트 커피와 대동소이한 과정으로 만들어진 인스턴트 커피라 하더라도, 맛이 압도적이라면 몇 배의 가격을 지불하는 것이 꼭 나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정말 맛이 압도적일까? 정말로 그런지는 다음 시간, 딴지 직원들을 동원한, 철저하게 통제되고 완벽하게 실험된 블라인드 테스트로 알아보도록 하겠다. 

 

어쨌든 ‘비아’가 던진 돌멩이에, 다른 커피 기업들도 진출하게 된다. 당연히 가장 먼저 냄새를 맡은 것은 믹스커피의 황제인 동서식품이었다. 비아가 진출한 2010년 9월은, 공교롭게도 ‘프렌치 카페’의 런칭 시기와 거의 비슷하다. 그동안 늘 생산해왔으나 판매량이 떨어지고 있었고 이윤도 적었던 블랙커피를 비싼 가격으로 판매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본 동서식품은 사활을 걸고 개발에 돌입, 2011. 10. 20.에 스틱형 인스턴트 커피를 출시한다. 

 

그 이름은 ‘카누’이다.

 

 

‘카누’와 인스턴트 원두커피의 성장

 

‘비아’는 어디까지나 스타벅스에서 제조, 판매하는 제품이었으므로 스타벅스의 맛을 블렌딩을 통해 재현했다고 주장할 수 있었고, 사람들이 이에 동의했다. 시작부터 프리미엄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카누’는 자칫하면 맥심 병커피를 스틱에 넣기만 해서 비싸게 판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위태로운 지위에 있었다. 그래서 ‘카누’는 몇 가지 차별점을 마련했다. 95% 정도는 그냥 인스턴트 커피이지만 여기에 5% 정도 잘게 간 원두 가루를 집어넣었다. 원두 가루가 맛과 향에 영향을 미쳤는지는 모르겠지만, 다 마시고 나서 아래 조금 남는 가루커피를 보면 최소한 구시대의 산물로 여겨지던 ‘병 커피’와는 다른 무언가를 마신다는 느낌이 들었다. 

 

가격 또한, 병 커피를 소분한다는 개념으로 보면 병 커피의 2배 정도의 가격에 판매되었기에 비싸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었지만, ‘비아’와 비교하면 1/3 정도의 가격에 불과했고, 커피전문점의 아메리카노와 비교한다면 1/7 정도의 가격에 불과했다. 비교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괜찮은 가격의 상품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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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유를 모델로 한,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강조한 광고도 성공적이었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카누’는 등장 시점부터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출시 1년도 되지 않은 시점에서 인스턴트 커피시장 전체 매출(1조 6,000억 원)의 7% 정도를 점유했고, 2013년에는 900억 스틱 매출을 달성했다. 현재 동서식품의 ‘카누’는 지속적으로 인스턴트 커피시장의 7~8%, ‘인스턴트 원두커피’ 시장의 80% 정도를 점유하고 있다.

 

물론 동서식품만 이 시장에 뛰어든 것은 아니다. 해당 시장은 실제로는 ‘병 원두커피’만 만들 기술력이 있어도 진입할 수 있는 시장이었기에, 믹스커피보다 훨씬 더 많은 회사들이 난립하게 된다. 

 

한때 ‘스타벅스’와 쌍벽을 이루던 커피빈이나, 할리스, 카페베네 등 많은 브랜드들이 자사의 이름을 걸고 인스턴트 스틱을 판매하고 있고, 오늘도 새로운 회사들이 진출하고 있다. 다만 ‘카누’가 선점한 시장을 다른 제품들이 위협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불가사리의 딴지 대모험

 

한국의 커피 역사와 특히 커피 믹스와 관련된 온갖 잡지식을 알아보았지만, 결국 핵심은 맛이다. 

 

커피 전문점의 커피와 인스턴트 믹스커피가 어떤 차이가 나는지, 믹스커피마다 사람들의 선호는 어떠한지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맛을 객관적으로 체크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불가사리는 이런 기사 작성에 대해 회사에 전혀 알리지 않고 있고, 딸들은 아직 어려 커피를 마시지 못하므로, 블라인드 테스트를 진행할 대상이 없다.

 

그래서 불가사리는, 강한 용기와 굳은 마음으로, 바리바리 수많은 종류의 커피믹스들을 껴안고, 수많은 두려운 이야기가 전해지는 공간이자 수염 난 자들이 다수 서식하는 곳으로 알려진, 앙마의 소굴(?) 딴지로 향했다. 딴지 직원들에게 블라인드 테스트를 진행하기 위해서 말이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무섭고 흥미진진한 모험을 겪었다. 지금도 트라우마가.. 암튼 신의 가호로 겨우 살아남아 이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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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지를 방문하는 불가사리의 모습 (뻥이야~)

 

다음 시간은 불가사리의 딴지 대모험... 아니 믹스커피 블라인드 테스트와 리뷰 대모험 시간이다. 여러분이 믹스커피에 대해 지금까지 찾아오고 고민해 온 모든 것을 알려주는 훌륭한 리뷰가 될 것이다. 기대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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