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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편에서 우리는 '코인의 가치'에 대한 3가지 시도를 정리해봤습니다. 코인의 원형인 비트코인만으로도 가치가 있다는 원리주의, 기술적 가치를 담아내려는 Dapp과 Defi, 그리고 다른 무언가의 가치를 담아내는 도구로 접근하는 NFT(Non Fungible Token, 대체불가능한 토큰). 이번 편에서는 NFT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올해 NFT가 언론의 많은 관심을 받았습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사례를 살펴보죠.

 

뱅크시(Banksy)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얼굴 없는 거리의 화가'로 유명한 뱅크시는 정체를 밝히지 않은 채 약 20년 째 활동하고 있죠. 주로 그래피티 형태의 작품으로 사회를 비판하거나 풍자하는데, 그 방식이 기발하면서도 도발적입니다. 2018년에는 자신의 그림 액자에 파쇄기를 설치했는데, 그 작품이 경매에 15억 원 가량의 가격으로 낙찰되자마자 파쇄기를 작동시켰습니다. 미술시장을 풍자하면서도 오히려 훼손되면서 가격이 더 올라버렸죠.

 

그런 그가, 이보다 앞서 미술시장을 풍자하는 그림을 그린 바 있었습니다. 바로 '바보들(morons)'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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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can't believe you morons actually buy this shit

너희 똥멍충이들이 실제로 돈주고 이딴 쓰레기를 산다는걸 믿을 수가 없다.

 

라고 쓰여있는 작품을 경매하는 장면을 그린 작품으로, 역시 고가에 낙찰됩니다. 일반인들이 보기에 무의미해보이는 작품들이 높은 가격에 팔리는 세태를 비꼬는 글귀, 그 글귀 자체가 경매에 부쳐지는 장면을 그린 그림, 그 그림이 실제로 경매에 부쳐져 고가에 낙찰되는 현실, 복잡다단한 아이러니의 향연이죠.

 

2021년, Burnt Banksy라는 집단이 바로 이 작품을 약 1억 원에 사들입니다. 그리고 이 그림을 불태우는 과정을 영상으로 촬영합니다. 이어서 이 작품을 NFT에 담아 다시 온라인 경매에 올립니다. NFT는 당시 시세로 4억여 원 어치의 이더리움에 낙찰됩니다. 높은 가격이 책정되는 이유를 이해하기 어려운 현대미술, 그걸 비꼬는 작품 또한 고가에 낙찰되고, 그걸 사서 불태운 후 NFT라는 것에 담았는데 더 비싼 가격에 낙찰되는, 3쿠션에 3쿠션을 더해버리는 듯, 안 그래도 복잡다단한 아이러니를 한번 더 꼬아버린 것이죠.

 

 

현대미술 작품의 '가치'라는 것은 때때로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뒤샹의 '샘'이라는 작품, 그러니까 그냥 변기 하나를 전시하여 논란이 됐던 그 일이 벌써 94년이나 됐습니다. 이후 수많은 '이게 어떻게 미술작품이야?'라는 것들이 전시되고 경매를 통해 고가에 낙찰됩니다. 얼마 전에는 이탈리아의 한 예술가가 '눈에 보이지 않는 투명 조각'이라고 주장하는 작품이 2천만 원에 낙찰되기도 했죠.

 

이러한 면모가 철학적, 미학적으로 지니는 의미를 연구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한편 이를 비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비판적 관점에서 보면 미술경매 시장에 영향력을 끼치는 세력에 줄을 잘 서야만 먹고 살 수 있는 구조라고 볼 수도 있는 것이죠. 다수의 대중들이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소수의 애호가와 자산가 사이에서 벌어지는 시장이다보니 상대적으로 큰 손의 영향력이 더 커질 수 있고, 이것이 악용될 여지도 많습니다. 영화 '위대한 유산'에서 에단호크의 그림을 모두 사준 로버트 드니로는 과거의 은혜를 갚은 것이지만, 동시에 한국의 음원시장 사재기와 별다를 바 없는 수법을 사용한 뉴욕 미술시장의 작전세력이라고 볼 수도 있겠죠.

 

그런 점에서 현대 미술시장은 코인 시장과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그 가치를 주장하는 이들도 있고 반대하는 이들도 있고, 또 해악이나 사회적 부작용을 주장하는 이들도 있고 반대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꽤나 큰 규모의 시장이 계속 존재하고 있습니다. 시장은 존재하니 거래가 이뤄지고 돈이 오가는데, 도대체 이 정도의 돈이 오가는 게 맞는가 하는 판단은 다분히 돈을 쓰는 이들이 알아서 책임져야하는 공통점입니다. 

 

바로 이 부분이, NFT라는 기술과 현대미술을 가장 잘 어울리는 조합으로 만들어줍니다.

 

NFT는 'Non Fungible Token', 대체불가능한 토큰이라는 말의 약자입니다. 내 100원 동전과 친구의 100원 동전이 바뀌었더라도 우리는 별로 신경쓰지 않습니다. 똑같이 100원의 가치를 지니니까요. 하지만 내가 갖고 있는 동전이 돌아가신 할머니 할아버지와의 추억을 담고 있다면 다른 동전과는 달리 고유한 가치를 지니죠.

 

NFT는 고유한 성질을 지니게 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술입니다.

 

여기까지가, 흔히들 NFT를 설명하는 방식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좀 의아합니다. 한층 더 파고들기 위해서는 2가지 질문에 대한 답변이 필요합니다.

 

1. '고유함'을 담는 수많은 방법들 중에서 NFT라는 방법은 뭐가 그리 다른가

 

2. 그걸 그래서 어따 쓰냐

 

사실 우리가 쓰는 주민등록번호도, 신용카드도, 사원증이나 학생증도, 각각 다 고유합니다. 매년 갱신할 때마다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공동인증서도 고유하고 수도 없이 많은 이메일주소들도 고유하고, 페이팔에 가입하면 생기는 계정도 고유하죠. NFT라는 게 의미를 가지려면 이러한 기존 방법과는 다른 무언가가 있어야 할 겁니다.

 

NFT도 다른 코인 기술과 마찬가지로 블록체인에 기반합니다. 지금 이 글을 읽으실 정도라면 블록체인이 '분산원장'이라는 특징을 지닌다는 사실은 알고 계실 겁니다. 하나의 행위를 여러 명이 각각 검증하고 기록하죠. 이 기록이 거미줄처럼 얽혀 누적되기 때문에 누군가가 이 기록을 허위로 만들거나 조작할 수 없다는 게 블록체인 기술의 가장 기초적인 상식입니다.

 

하지만 이건 고유함을 증명하는 기존의 방식들도 제공하고 있는 기능이죠. 공인인증서도, 이메일도, 페이팔도 마찬가지입니다. 조작이 불가능하다는 건 블록체인의 본질적인 차별성이 아니라, 고유함을 증명하는 기술에게 공통적으로 요구되는 조건입니다.

 

그렇다면 '본질적 차별성'이란 건 어디서 올까요? '탈중앙화(Decentralized)'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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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중앙화(Decentraliz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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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화(Centralized)

 

지메일 계정은 구글의 서버에서 관리됩니다. '중앙화(Centralized)'돼있죠. 우리가 지메일을 믿고 사용하는건 구글이라는 회사, 즉 이메일 시스템의 중앙관리기관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구글이 개인 사용자들의 메일 계정을 조작해서 중요 정보를 빼돌린다든가, 페이팔이 마음대로 계정을 중복으로 만들어 금전적 피해를 만든다면 더 이상 '고유함'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고, 모두에게 버림받겠죠.

 

탈중앙화라는 건, 그런 중앙 관리 기관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분산화'라는 말이 먼저 떠오르겠지만 분산이라는 말은 오해의 소지가 있어서 잘 사용되지 않습니다. 분산화라고 하면 어떤 책임이나 권한이 '한 명'에게 집중돼있지 않고 '여러 명'에게 분산돼있다는 것처럼 여겨질 수 있는 거죠. 책임이나 권한은 그대로 있는데 그냥 그게 여러 명에게 나눠진 것처럼 보인다는 겁니다.

 

말이 좀 어렵네요. 유명한 '케잌 나누기' 문제를 생각해보겠습니다. 케잌이 한 덩어리 밖에 없는데, 그걸 2명이 나눠 먹어야 하는 상황입니다. 케잌 모양이 울퉁불퉁 희한해서 눈대중으로 정확히 반을 나누기가 어렵습니다. 그리고 2명 모두 이 케잌을 최대한 많이 먹고 싶어하는 상태라고 하죠.

 

중앙화된 방식이라는 건, 두 명 중 한 명에게 칼을 쥐어주고 분배를 맡기는 겁니다. 마침 그 사람이 정말 똘똘하고 선한 사람이라면 문제 없이 잘 분배를 할 수도 있겠죠. 그러나 어리석거나 이기적인 사람이라면 자기에게 유리하게 분배할 겁니다. 즉, 중앙화된 방식은 책임과 권한을 지닌 주체에 대한 신뢰를 필요로 합니다.

 

그렇다면 2명 모두에게 권한을 주면 어떨까요? 한 명 마음대로 할 수는 없고 반드시 둘 다 동의해야만 한다면요. 둘 다 선하고 똘똘하다면 별 문제 없이 케잌을 나눠 먹겠지만 둘 다 어리석거나 이기적이라면 합의가 이뤄지기 어려울 겁니다. 분배 과정이 비효율적일 것이고, 케잌이 부서져버리거나 서로의 얼굴에 던져져 먹을 수 없는 상태가 될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경우에는 분명 권한은 분산됐지만 그 권한의 형태가 변한 것은 아닌 거죠. 그로 인해 여전히, 나와 함께 권한을 나눠가질 상대방이 충분히 신뢰할만한 지를 신경써야만 합니다.

 

케잌 나누기 문제의 모범답안은 이겁니다. A가 케잌을 맘대로 나누면, B가 두 조각 중 한 조각을 맘대로 고른다. 이 방식은 규칙 자체가 두 사람 간의 의견 충돌에 대한 균형을 맞춥니다. 한 조각이 유달리 크다면 B가 그 조각을 고를 것이므로 A는 되도록 공평하게 자르려 노력하겠죠. 혹시 칼질이 서툴러 한쪽이 크게 잘렸는데 B가 그걸 잡는다 하더라도, A는 자신의 칼질이 서툴렀던 것이므로 불만이 적을 겁니다. 이 경우 우리는 A와 B가 얼마나 똑똑한지, 선한지를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즉, 사람이 아니라 그냥 이 규칙을 신뢰할 수 있는 것이죠.

 

불록체인이 말하는 '탈중앙화'라는 것은 이런 방식입니다. 그냥 그 규칙 자체가 지켜진다면 개별 주체들의 신뢰도는 신경 쓸 필요가 없는 거죠. 이 블록체인이 굴러가는 방식을 신뢰하느냐 마느냐만 결정하면 되며, 그에 참여하는 이들이 어떤 이들인지는 신경쓸 필요가 없습니다. 결국 중앙화와 탈중앙화의 차이는 '사람을 믿느냐 규칙을 믿느냐'의 차이입니다.

 

이제 NFT로 돌아오죠. 어떤 미술작품을 NFT에 담든, 어떤 기관에서 진품 인증서를 발급해주든, 고유한 것에 대한 소유를 증명해준다는 기능은 같습니다. 차이는 인증기관을 신뢰할 것이냐, NFT가 굴러가는 블록체인을 신뢰할 것이냐는 것이죠. 인증기관이 몇 년 후 마피아의 소유가 돼버린다면, 인증서의 '고유함'도 위협을 받을 수 있습니다. 가짜 작품에 가짜 인증서를 발급해줘버리면 '내 거가 진짜다!'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별도의 노력을 들여야 하는 거죠. 그런 일이 안 생기게 하려면 그 인증기관을 계속 지켜볼 필요가 있죠. 결국 중앙화 방식은 사람에 대한 지속적인 의심을 유지해야만 합니다.

 

하지만 블록체인에 있는 NFT는 건드릴 수가 없습니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으시겠지만, 최소한 '이론적으로는 사실'입니다. 내 지갑에 저장된 NFT와 똑같은 NFT를 만들어낼 수는 없고, 그렇게 조작할 수도 없습니다. 자신의 소유물을 지키기 위해 다른 누군가를 의심해야 할 필요가 전혀 없고, 나중에도 고유함을 증명하기 위해 별도로 들일 노력이 없습니다. 이게 NFT의 차별성입니다.

 

이제 블록체인의 탈중앙화라는게 어떤 것이고, NFT에 어떤 차별성을 만들어주는지 조금 이해가 되셨나요. 하지만 찝찝한 의문점이 남아있습니다. '이론적으로는 사실'이라는 말이 도대체 어디부터 어디까지를 말하는거냐는 점이죠. 그리고 여전히 '그래서 그걸 어따 쓰냐'는 질문이 남아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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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편에서 계속 이어 알아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