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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항상 역사 속의 ‘보통 사람들’이 가장 궁금했습니다. 안타깝게도 ‘진짜 보통 사람’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아요. 그래서 양반의 일기 너머에 아른거리는 보통 사람의 이야기를 끌어낼 수밖에 없습니다. 그중 양반과 삶을 함께했던 노비의 이야기는 보통 사람의 흔적을 쫓을 수 있게 도와주죠. 

 

양반의 일기를 읽다 보면 흥미로운 점들이 눈에 띄는데 오늘 소개할 내용은 ‘노비들의 러브 스토리를 볼 수 있는’ 부분입니다. 노비들도 사람이니 각자 다양한 러브 스토리가 있겠죠? 여기 실제 사건이 기록된 오희문의 『쇄미록(瑣尾錄)』 일부 내용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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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희문(吳希文, 1539~1613)은 임진왜란 시기의 양반이자 『쇄미록』의 저자입니다. 『쇄미록』이란 오희문이 임진왜란 시기를 전후해 9년 3개월 동안 전라도, 충청도, 강원도로 피란을 다니며 쓴 일기를 하나의 책으로 묶어낸 것입니다. 『쇄미록』은 임진왜란 3대 기록물 중 하나로 ‘보잘것없이 떠도는 자의 기록’이란 뜻을 지닙니다.

 

또한 조선 중기의 일상사, 생활사, 사회경제사 연구에서는 빠질 수 없는 오래된 고전이죠. 전쟁에 직접 참여하지 않은 평범한 양반이 전란의 시기를 어떻게 살아남아 가문을 일으켰는지를 하루도 빠짐없이 세밀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럼 걸어서 역사 속으로 고고~

 

 

쇄미록으로 보는 ‘노비들의 러브 스토리’

 

오희문의 노비들이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 때문에 오희문은 아주 골치를 앓습니다. 왜냐구요? 그들의 사랑은 금지된 사랑. 불륜이었거든요. 노비들은 사랑을 위해 ‘대탈주’를 결심합니다. 과연 오희문과 노비들의 결말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1595년 8월 7일

 

송노가 또 도망쳤다. 그런데 이놈이 근처 옥춘이네 집에 숨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내가 저녁때 직접 찾아 나섰더니, 송노는 저 울타리 밑에서 숨어 있다가 나를 보자마자 횃불을 들고 부리나케 도망갔다. 나를 약 올리는 것인가. 아, 분하다, 분해.

 

노비들이 내게 고하길, “송노와 막정이의 아내 분개가 불륜을 저지릅니다”라고 하길래, 나는 그 정도까진 아니라고 믿었었다. 그런데 이번에 막정이가 집을 비운 틈을 타, 분개와 함께 도망치려고 단단히 벼르고 있던 것이다. 내 아내가 그 얘기를 듣고 분개의 방을 뒤졌더니, 아니나 다를까 자기 짐을 다 송노에게 주어 다른 곳으로 옮겨놓았다. 이 녀석들이 너무나 미웠다. 그래서 분개를 안방에 잡아 가두고 감시자도 붙여 놓았다.

 

어느 날, 기회를 엿보다 냉큼 탈주한 송노는, 기껏 도망쳤음에도 동네 인근에서 숨어 있다가, 오희문이 직접 찾으러 오자 횃불을 들고 약 올리듯 뛰어갑니다. 그를 쫓아갈 수 없는 양반의 체면과 늙어버린 두 다리 때문에 분했던 오희문은 그저 씩씩거릴 뿐이네요.

 

송노의 탈출 사유는 다름 아닌 사랑이었습니다. 돌아왔던 송노는 숨죽이며 때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여성, 분개와 함께 탈출하기 위해서죠. 분개는 이미 막정이의 아내였고, 자신이 도망가면 또다시 가족들이 위험에 빠진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지만, 이미 사랑에 눈이 먼 ‘직진남’ 송노를 아무도 막을 수 없습니다. 

 

결국, 가족을 잡아 봐야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안 오희문과 그의 아내는, 그들의 ‘사랑의 도피’를 방해하기 위해 분개를 가둬 놓습니다.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밀실에 갇힌 분개를 위해 송노는 ‘특급 구출 작전’을 결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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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5년 8월 8일 

 

아침에 일어나보니, 분개를 가뒀던 방 주변이 엉망진창이었다. 지난밤, 송노가 몰래 들어왔다가 그 방이 모두 잠긴 것을 보고, 먼저 굴뚝으로 침입하려다 실패했다. 그러자 마구간 밑에서 방까지 굴을 파서 분개를 빼내려고 했는데, 그마저도 실패하자 그냥 분개의 옷만 방안에 던져 놓고 도망갔다. 정말 녀석이 미워 죽겠다. 오늘 밤에는 분개를 더 단단히 가둬 놔야겠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발코니라도 있었지만, 송노와 분개는 사방이 두꺼운 벽으로 꽉 막혔습니다. 게다가 튼튼한 자물쇠까지 걸려 있죠. 애타던 송노는 몸에 검댕이 묻는 것을 무릅쓰고 굴뚝으로 침입하다가 실패하고, 이번엔 방 밑으로 굴을 파서 분개를 빼내려고 하지만, 그것도 하룻밤 만에 될 일이 아니었죠. 방법이 없음을 체념한 송노는, 분개가 보내줬던 옷가지를 방안에 던져 놓고 혼자 도망갑니다. 그때, 송노는 작은 창문 사이로 분개에게 말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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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꼭 다시 돌아온다고 약속할게. 그때는 분명, 우리가 함께 이곳을 떠나 같이 살 수 있을 거야. 그때까지 버티고 있어 줘. 사랑해. 알라뷰~! (응? 영어?)”

 

과연, 창살 없는 감옥 사이로 서로를 애틋하게 그리워하던 이 커플은 사랑의 도피에 성공했을까요?

 

1595년 9월 3일 

 

그저께, 결국 분개가 도망갔다고 한다. 분명 송노가 몰래 들어와 분개를 데리고 도망쳤다. 이런 젠장, 입에서 욕이 저절로 튀어나왔다. 이제는 못 참겠다. 더 이상 그놈을 용서해주지 않을 것이다. 어디, 잡히기만 해봐라.

 

송노는 시간이 지나길 기다렸다가, 잠시 감시가 허술해진 틈을 타 분개를 구출하고 탈출에 성공합니다. 소식을 들은 오희문을 이를 바득바득 갈며, 송노를 잡으면 목숨을 빼앗을 결심을 합니다. 어떠한 고난이 와도 이내 체념하고 자신을 다독이던 오희문이 이렇게 살의를 품을 정도로 ‘극대노’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입니다. 그만큼 송노가 미웠던 것이죠.

 

그렇다면, 병상에 누운 채로 아내(분개)의 탈주를 지켜봐야 했던 막정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1595년 12월 17일 

 

어젯밤, 막정이가 세상을 떴다. 막정이는 37년 동안 내 밑에서 항상 성실하게 궂은일도 마다하며 일했고, 전쟁이 나서 우리 식구들이 피난할 때에도 막정이 만을 의지해서 일을 시켰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지난해부터 명령을 거부하는 일이 생기더니, 조금만 기분이 상하면 도망갈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특히, 아내인 분개가 송노와 함께 도망간 뒤로는, 나 때문에 자신의 신세를 망쳤다며 나를 원망하면서, 집안일을 하나도 하지 않고 심지어 언제든지 도망갈 수 있게 짐을 싸놨었다.

 

하지만 이미 병세가 위중해서 그냥 놔뒀는데, 결국 분개가 떠난 뒤로 마음도 상하고 밥도 잘 안 먹게 되어 세상을 뜨고 말았다. 이게 다 분개 때문이다. 뼈가 아프도록 분개가 밉다. 최근 내게 보인 막정이의 태도를 생각하면 막정이도 조금은 밉지만, 오랫동안 애써 준 것을 생각하니 애통한 마음이 든다. 이에 관을 준비하여 매장하고 제사 지내 주었다.

 

안타깝게도, 40년 가까이 오희문 일가를 위해 일했던 노비 막정이는 충격을 받아 병이 더 심해져 결국 세상을 뜹니다. 마지막엔 오희문을 원망하기까지 했다는데, 평생토록 일했어도 불행한 결말을 맞이했으니 조금은 그 심정이 이해가 갑니다. 오희문은 양반이 노비의 사후 해줄 수 있는 최대의 존중인 관과 묘지, 그리고 제사로 삶을 자신과 함께했던 막정이의 마지막을 애도합니다.

 

송노와 분개 커플은 그 뒤 어떻게 되었을까요? 

 

1601년, 오희문은 드디어 송노의 소재를 파악합니다. 어디로 갔나 했더니, 분개의 친정어머니가 사는 집으로 도망가 새살림을 차렸다고 합니다. 이에 오희문은 아들을 보내는데, 그 소식을 들은 송노는 약간의 물품과 함께 시급히 올라와 오희문에게 용서를 구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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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 살려주십시오. 잘못했습니다요.

 

시간이 약이었을까요. 한때는 강한 살의까지 품었지만, 이미 분개와 결혼해 두 아이까지 둔 송노가 앞으로 최선을 다해 일하겠다고 다짐하고, 한편으론 당장 일손이 부족하다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기에 그를 용서합니다. 

 

송노와 분개 커플은 어차피 도망 노비의 신세이므로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었을 겁니다. 그나마 옛 주인을 찾아가 푼돈이라도 버는 것이 유일한 선택지였을지 모르죠. 죽음을 걸고 사랑의 도피를 했는데, 가정도 꾸리고 죽음도 면했으니, 이것도 나름의 해피엔딩일까요?

 

 

노비도 우리와 같은 인간이었을 따름이다

 

책에는 다양한 노비의 양상이 등장합니다. 

 

엄마와 싸우는 노비, 횡령하는 노비, 사기 치는 노비, 사랑에 눈이 먼 노비, 김보성도 울고 갈 의리파 노비, 양반 욕을 하며 대판 싸우는 노비, 양반이 된 노비…. 삶과 욕망의 굴레에서 자신들만의 삶을 찾아 떠났던, 누구보다 욕망에 충실했고 그래서 ‘속박 안의 자유’를 누렸던 노비의 이야기는, 우리의 삶과 한 쌍의 데칼코마니를 이루고 있습니다.

 

노비는 이 시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전근대의 상징입니다. 이제, 그들의 삶은 양반들의 기록에 남아, ‘보통 사람’의 모습을 엿보게 하는 귀중한 조연으로 빛나고 있습니다. 가장 천한 존재인 노비와 가장 고귀한 존재인 양반이 충돌하는 그 지점에서, 가장 보통의 존재인 평민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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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남 영흥 관노비 부부 2쌍. / 출처-<국립중앙박물관>

 

위 사진은 1911년경 촬영된 함경남도 영흥의 관노비 부부 2쌍 사진입니다. 1894년, 갑오개혁 이후 노비는 공식적으로 폐지되지만, 수천 년간 이어온 제도가 하루아침에 사라지진 않았죠. 이 사진은 한반도 최후의 관노비 사진 중 하나일 것입니다. 

 

수염과 상투, 복장과 낯선 시선을 빼면, 그들의 모습은 우리 시대 동네 아저씨, 할아버지, 할머니, 아주머니의 모습과 닮아있습니다. 비록 신분은 천했으나, 다만 누군가에게 팔리는 신세였으나, 그들 또한 우리와 같은 인간일 따름이었음이 사진 속 남성의 강렬한 시선에서 전해집니다. 

 

 

 

추신

 

빵꾼, 인사드립니다.

 

딴지스 여러분 덕분에, 『시시콜콜한 조선의 편지들』에 이어 『시시콜콜한 조선의 일기들』을 내놓았습니다. 『시시콜콜한 조선의 일기들』은 조선 사람들의 단맛 짠맛 나는 일기를, 우리 시대의 ‘김 씨 아조씨’의 삶과 야무지게 비벼놓은 책입니다. 저 혼자 읽기엔 아까울 만큼 재밌는 책이라, 책 속 「이 씨 양반은 가오리고, 류 씨 양반은 문어라니까」 챕터에 수록된 에피소드를 기사로 살짝 소개합니다. 사달라는 얘기,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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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
조선사 교양서를 쓰고 있는, 딴지가 배출한 또 하나의 잉여 작가
딴지의 조선사, 문화재, 불교, 축구 파트를 맡고 있슴다.
이 네 개 파트의 미래가 어둡다는 거지요.

『시시콜콜한 조선의 편지들』
『시시콜콜한 조선의 일기들』
『시시콜콜 조선복지실록』
『시시콜콜 조선부동산실록』 신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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