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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력 1592년 4월 13일, 일본이 조선을 침공하며 동아시아사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 임진왜란이 발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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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전쟁이 보통 사람들의 삶을 완전히 파괴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전쟁사에서 그보다는 영웅의 대활약이나 승리의 통쾌함에 더 집중하는 면이 있죠.

 

여기 전쟁을 그대로 관통당한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홀로 피난 갔다가 너무나 운 좋게 가족들을 다시 만난 오희문(吳希文, 1539~1613), 그리고 가족들과 함께 피난을 떠났던 도세순(都世純, 1574~1653)의 이야기를 소개해봅니다.

 

오희문과 도세순은 조선 시대 양반으로, 오희문이 임진왜란 시기를 전후해 9년 3개월 동안 전라도, 충청도, 강원도로 피란을 다니며 쓴 일기를 하나의 책으로 묶어낸 것을 『쇄미록(瑣尾錄)』이라 합니다. (징비록, 난중일기와 함께) 임진왜란 3대 기록물 중 하나로 ‘보잘것없이 떠도는 자의 기록’이란 뜻을 지닙니다. 

 

도세순은 성주(星州) 도(都)씨 14세손으로 18살이던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피란을 가며 1592년 4월 13일부터 1595년 1월 15일까지 약 2년 10개월간 쓴 피란일기를 썼습니다. 왜적의 침략을 받아 살육과 노략질, 굶주림, 질병, 도둑질, 죽음 등 전쟁에서 일어나는 모든 비참한 상황들이 기록되어 있는데요. 이것을 『용사일기(龍蛇日記)』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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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일기

 

『쇄미록』과 『용사일기』를 잘 살펴보면, 임진왜란 중 실제 민중들의 삶은 어땠는지, 어떻게 살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백성들이 다반사로 겪은 학살과 겁탈, 이별 등의 이야기는 1편 링크)  

 

 

임진왜란 중 백성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지난 편에서 딸 수정이가 왜적들에게 끌려가는 광경을 본 노비 엄마 애정이가 끝까지 왜적들을 쫓아간 기록을 소개했습니다. 하지만 전쟁은 각종 인간의 추악한 모습을 끌어내기도 하죠.

 

애정이와는 반대로 가족을 버리고 본인의 안전을 도모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오희문은 실제 남편에게 버림당한 가족들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1593년 7월 15일 - 『쇄미록』

 

어제 집에 오는 길에 길에서 일고여덟 살쯤 돼 보이는 한 아이가 길가에서 큰 소리로 울고 있고, 한 여성은 주저앉아 얼굴을 가린 채 슬피 울고 있었다. 나는 사정이 궁금하여 말을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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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시오. 왜 여기서 이러고 있으시오”

 

“금방 내 남편이 저와 아들을 버리고 혼자 도망갔습니다.”

 

“아니, 지아비가 되어서 어째서 처자를 버린다는 말이오”

 

“우리 세 식구는 그동안 오갈 곳이 없어, 구걸하면서 끼니를 때웠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더 구걸할 곳이 없어 그저 굶어 죽게 되었다면서, 저희를 버리고 떠났습니다. 이제 저희는 그저 죽을 날만 남았습니다.”

 

어떻게 이런 인륜에 반하는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짐승도 이러지는 않는다. 그저 한숨만 나오는 일이다.

 

1593년부터 94년까지, 조선은 전쟁보다 더욱 큰 위기를 겪게 됩니다. 이른바 계갑대기근이라 하는 사건입니다. 전쟁으로 쑥대밭이 된 농토로 인해 양식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게 되고, 전염병까지 창궐하며 전쟁 발발 초기보다 더욱 고통스러운 상황이 벌어지죠. 

 

양반이고 노비고 할 거 없이 조금이라도 양식을 구하기 위해 구걸하는 신세가 됩니다.

 

 

1593년 12월 21일 - 『쇄미록』

 

양식이 하나도 없어서 순창 군수를 찾아갔다. 순창 군수는 이전에 함께 일했던 직장동료였는데, 그때 “혹시라도 어려운 일 생기면 말만 해. 내가 적극 도와줄게”라고 했다. 그래서 그의 집을 찾아가, 

 

“이보게 친구, 나일세. 예전에 함께 일했던 오희문이야. 오랜만이네”

 

라고 불렀는데,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혹시나 못 들었나 해서 다시 큰 소리로 불러보았지만, 역시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오히려 못 들은 척하면서 무시할 뿐이었다. 예전엔 괜찮은 사람이었는데, 어쩌다가 저렇게 되어버렸을까. 여기 온다고 양식을 써 버렸는데, 빈손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니 눈앞이 캄캄해진다.

 

 

1595년 4월 11일 - 『쇄미록』

 

양식을 구하기 위해 태수를 찾아갔다. 보는 눈이 많아서 노비에게 편지를 전달하게 했지만, 태수는 편지를 읽어보지도 않고 비서에게 맡겼다. 낙심하던 마당에, 오늘 동네에 결혼식이 있어서 태수가 마을로 온다고 한다. 절호의 기회였다. 

 

나는 길가에 서 있다가, 태수가 신랑을 데리고 나오자,

 

“이보게 태수. 나, 오희문이야. 좋아 보이네”

 

라고 외쳤다. 태수는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잠깐 고민하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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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자네였나! 이게 얼마 만이야. 지금은 좀 바쁘니, 관아에서 식사라도 하면서 기다려주게”

 

라고 했다. 다음 날, 태수와 그동안의 회포를 풀면서 양식을 얻을 수 있었지만, 싫어하는 티를 너무 내서 나의 자존심도 적잖이 상했다. 하지만 앉아서 굶고만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참아야 한다.

 

오희문은 가장의 역할을 다 하기 위해 자존심을 던지고 옛 친구들을 찾아다닙니다. 곡식을 내주는 친구는 ‘역시 A가 인정을 아는 친구다’라며 칭찬을 잔뜩 써 놓는데, 곡식을 내주지 않는 친구는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변할 수 있을까. 실망스럽기 그지없다’라며 뒷담화를 적습니다. 

 

위기의 순간, 그동안 쌓아 올린 인적 네트워크를 통해 도움을 받을 수 있는가 없는가가 가장으로서, 또 양반으로서의 존재를 증명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따라서 거절을 당하는 것은 곧 존재가 무시당하는, 자존심이 팍팍 상하는 굴욕이었죠.

 

양반조차도 끼니를 제대로 못 때우니, 가장 먼저 죽어 나간 사람들은 노비들이었습니다. 가족들과 함께 이곳저곳을 전전하던 도세순 패밀리의 노비들도 전염병과 영양 부족으로 하나둘 쓰러집니다.

 

 

1592년 12월 10일 - 『용사일기』

 

윤금이가 병으로 쓰러졌다. 우리가 신세 지고 있는 주인집에서는 병이 전염될까 봐 두려워하고, 나도 눈치가 보인다. 가지고 있던 생선을 죽으로 끓여서 먹었다. 힘겨워하는 윤금이를 억지로 재촉해 길을 떠났는데, 고개 아래에서 엎드려 

 

“어르신, 저는 도저히 못 움직이겠습니다”

 

라며 하소연했다. 나는 가지고 있는 모든 음식을 윤금이에게 주면서, 

 

“윤금아. 일단 어느 집이라도 찾아가 이 음식으로 요양을 하고 나를 찾아오너라.”

 

라고 말했다.

 

 

1593년 3월 18일 - 『용사일기』

 

형님과 누님은 간신히 살아가고 있지만, 못 먹어서 안색이 영 좋지 않았다. 나는 형님과 누님을 바라보며 아무런 말도 못 했다. 간신히 노비들의 안부를 물으니, 형은 이렇게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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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복이, 애정이, 수정이는 이미 굶어서 죽었다.”

 

며칠 뒤 아버지께 형님과 노비들 소식을 전하니, 아버지는 그날 온종일 눈물을 흘리셨다.

 

왜장을 끝까지 쫓아가서 애걸복걸하며 딸 수정이를 되찾아온 애정이었지만(해당 사건 1편 참조), 칼날보다 무서운 것이 굶주림이었나 봅니다. 안타깝게도 두 사람 모두 사망했다는 소식입니다. 

 

도세순 패밀리는 생존율을 높이기 위해 가족을 나눴지만, 생사를 함께했던 적잖은 노비들은 굶어 죽고, 도세순이 업고 도망치던 남동생과 “죽어도 함께 죽자”라며 약속했던 어머니까지 전염병으로 세상을 떠나죠. 도세순이 이러한 고난을 넘기고 살아남은 것 자체가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습니다.

 

이런 지경에 이르니, 전국 곳곳에서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었다는 소식이 등장합니다. 임진왜란 중에 벌어진 식인에 대한 기록은 실록이나 여러 개인 일기에 거듭 나타나는데요. 

 

오희문의 일기에도 그 흉흉한 소문이 기록됩니다.

 

 

1594년 4월 3일 - 『쇄미록』

 

요즘에는 길가에 거지들이 드물다고 한다. 왜냐면, 최근 두 달 동안 이미 다 굶어 죽었다는 것이다. 다른 곳은 알 수 없지만, 이 동네는 길가에 굶어 죽은 자가 즐비하니, 헛소문은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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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영남과 경기 지방에서는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는 일이 많아서, 심지어 6촌 친척도 죽여 잘근잘근 씹어 먹는다고 한다. 예전에 들었을 때, 한양 근처에서는 고작 한두 되의 쌀을 얻기 위해 서로 죽이고 빼앗는다고 하더니, 이제 한양에서는 혼자 다니는 사람을 쫓아가 죽여 먹는 것을 산짐승 잡아먹는 것처럼 한단다. 

 

이 와중에 전염병이 널리 퍼져 우리의 앞집과 뒷집도 죄다 누워 있고, 병으로 죽었다는 소식도 하루에도 여러 번 들린다. 정말로 세상이 망하려고 하는 것일까. 앞으로는 또 얼마나 힘든 일이 다가올 것인가. 두렵다.

 

 

선조들이 남긴 경계를 되새기는 법

 

오희문이 피난 일기를 마지막으로 쓴 날은 1601년 2월 27일입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끝나고 약 2년 후에나 한양으로 돌아올 수 있었죠. 죽음은 가장 낮은 곳에 사는 사람들부터 찾아가, 이윽고 가장 위에 있는 사람까지 쫓아왔습니다. 

 

전쟁통에서도 결혼이나 승진 축하 잔치가 벌어졌지만, 이 시기를 관통한 대부분 사람들의 삶은 상상하기 힘든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그 고통 속에서도 도세순과 오희문은 꾸역꾸역 일기를 쓰며 이렇게 적었습니다. 

 

“후세에 경계를 전하기 위함이다.”

 

그동안 임진왜란을 바라보는 시선은 다분히 엘리트적이었습니다. 예컨대, 『징비록(懲毖錄)』의 구조는 관군의 삽질 – 백성의 고통 – 이순신 대승으로 편집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원한 영웅 이순신이라는 이미지가 구축된 것은 조선과 일본 양국에서 『징비록』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덕분이었죠.

 

우리가 교과서에서 ‘백성들이 스스로 칼을 든 역사’라고 배웠던 의병의 역사도, 그 후에는 양반층의 트로피로 변질됩니다. 

 

양반들은 ‘관료 사회가 왕을 버렸을 때, 나라를 지킨 것은 우리 지방 사족들이었다’라는 명분을 등에 업고 향촌 사족 중심의 국가로의 변화를 주도해 나가죠. 그 후, 조선 사회의 부와 권력은 향촌 사족들이 독점해나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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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희문 초상화 / 출처-<국립진주박물관>

 

오희문과 도세순도 향촌 사족이었으니, 그 굴레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기록은 전선으로 끌려가 죽어 나가고, 포로로 잡혀 끌려갔으며, 전후 복구를 위해 각종 요구에 부응해야만 했던 보통 사람들의 삶을 엿볼 수 있게 합니다. 또 어떤 부분에서는 그들 또한 보통 사람이기도 했죠.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지만, 만약 지금 당장 전쟁이 터진다면, 우리의 삶 또한 그들이 남긴 기록과 유사한 모양새를 할 것입니다. 우리 중 대부분은 ‘이름 없는 보통 사람’이 되어 희생과 노력을 해야만 하겠죠. 

 

그래서 영웅의 대활약과 역사적 사건, 그 이면에 잠든 이름 없는 사람들의 희생과 노력을 조망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우리의 문제일 테니까요. 그것이 우리가 선조들이 남긴 경계를 되새기는 방법일 것입니다.

 

 

 

[참고문헌]

 

(1) 도세순 저, 도두호·김현철 역, 『龍蛇亂中日記』, 새박, 2009.

(2) 오희문 저, 이민수 역, 『쇄미록』, 올재클래식스, 2014.

 

 

 

 

 

편집부 주

 

독자 여러분의 성원 덕에 

필자의 책,<시시콜콜한 조선의 편지들>

여전히 잘 팔리고 있다는 소식이다. 

 

새로 나온 후속작, 

<시시콜콜한 조선의 일기들>

절찬리 판매 중이다. 

 

안 사줄 것 같이 하다가 기사가 올라오면

슬그머니 주문하는 샤이 독자 여러분 덕에 

필자는 눅눅한 골방에서 

조금 덜 눅눅한 골방으로 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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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
조선사 교양서를 쓰고 있는, 딴지가 배출한 또 하나의 잉여 작가
딴지의 조선사, 문화재, 불교, 축구 파트를 맡고 있슴다.
이 네 개 파트의 미래가 어둡다는 거지요.

『시시콜콜한 조선의 편지들』
『시시콜콜한 조선의 일기들』
『시시콜콜 조선복지실록』
『시시콜콜 조선부동산실록』 신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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