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연재는 반 세기를 역사의 변두리에서 살아온 필자의 경험과 생각을 통해 뜻을 지닌 민초들이 지난 반 세기를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기획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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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정치인의 죽음
몸은 비록 시드니로 떠나왔지만 마음은 한국을 떠날 수가 없었다. 특히 노무현 전 대통령이 죽었을 때는 국내에 있는 사람들 못지 않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역대 대통령 중에서 가장 깨끗했던 사람이 부패한 대통령으로 낙인이 찍혀 부엉이 바위에서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버렸다는 비보를 접하고 황망한 가운데 임시로 우리 집 거실에 태극기를 걸고 임시 분향소를 설치하고 조문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그 자리에서 즉시 문객들과 의논해서 시드니에서도 추모식을 거행하기로 하고 준비에 들어가서 원통한 마음으로 추도식을 치렀다.
노! 무! 현!
이 시간 우리는 대통령을 지낸 강한 권력자가 아니라 비운의 정치인으로 인생을 마감한 당신의 영령 앞에 서 있습니다.
지금쯤은 한 줌의 재로 변하여 고향으로 내려가고 계시겠군요.
당신은 취임한 직후 '평검사와 공개 토론'에서 "이쯤 하면 막 가자는 거지요?"라는 말로 유명해졌지요?
오늘은 저도 한 번 막가겠습니다.
아니, 평생 막말 한다고 핀잔 듣던 당신 앞이니 저도 오늘은 막말 좀 해 봅시다.
당신은 대한민국의 천덕꾸러기였소.
비록 국가원수가 되었어도 상고 출신에 미국도 한 번 못가 본 사람이라고,
자신들이 이 땅의 소위 주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끝임 없이 멸시와 비웃음을 받았던 천덕꾸러기 대통령이었지요.
당신이 대통령이 되었을 때 나는 흥분을 넘어 전율을 느꼈었지요. 그것은 당신 같은 사람이 대통령이 될 수 있을 정도로 대한민국이 성숙했구나 하고 생각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신이 대통령이 되고 나서 처음 한 일이 검찰을 독립시키는 것이었습니다. 현직 대통령으로서 면전에서 평검사들에게 '노무현은'이라는 호칭으로 불리는 수모를 받아가면서까지 검찰 독립을 시켰습니다. 하지만 제 버릇 개 못준다고 순간에 권력의 시녀로 전락한 검찰은 6개월 동안 집요하게 '털어서 먼지내기 작전'을 펼쳤습니다.
당신은 전 생애에 걸쳐 갖가지 압박들이 많았지만 그 때마다 정면 돌파로 뚫어왔습니다. 그럴 수 있었던 힘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부끄럽지 않은 삶 자체에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번만은 달랐습니다. 털어서 먼지가 났기 때문입니다.
저들은 깨끗한 대통령이라는 자긍심을 가졌던 당신을 위선자, 거짓말쟁이, 마누라와 애들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비열한 인간으로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소고기와 돼지고기가 육질이 다르듯이 당신은 그들과 격이 다른 인간이었습니다. 당신은 죽음으로 책임 정치가 무엇인지 보여주었습니다.
저들은 자신의 약속을 위해,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를 위해, 또 사랑하는 가족과 지인과 지지자를 위해 목숨을 던지는 것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자들입니다.
따지고 보면 당신은 '버리는 것'에 이미 익숙한 사람이었습니다.
당신은 언제나 자신을 버림으로서 모든 것을 얻었습니다.
당신이 뛰어 내린 곳이 부엉이 바위라지요? 하필이면 왜 부엉이 바위 입니까?
부엉이는 밤이 이슥해서야 비로소 낮의 의미를 알게 되는 동물이 아닙니까?
당신은 대한민국이 밤이 깊어서 낮의 의미를 알려야 하기에 첫새벽에 부엉이 바위에 오르셨습니까?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으로서 자신에게 부여된 사명을 '다 이루었다'고 했지만 당신은 부엉이 바위에서 몸을 던져 무엇을 이루려고 하셨습니까?
이제 답은 우리가 할 차례입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당신의 죽음 앞에 슬퍼하지 말고 분노해야할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단지 분노로만 그치지 않을 겁니다.
그것은 '노무현'이라는 이름이 상징하는 개혁과 진보의 역사적 성취를 무산시키려는 세력에 대항하는 투쟁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당신은 부엉이 바위 위에서 허공을 향해 홀연히 자신의 몸을 던졌을 때 앞으로 살아남아 태울 에너지를 순간에 태우고 산화해 버렸습니다.
지금 우리는 슬프지만, 더욱 강해지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 살아 움직이는 당신의 뜨거운 목소리를 듣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때로 기쁨을, 때로 실망과 낙담을 주기도 했던 당신,
그러나 이제는 당신의 죽음은 절망을 이야기하지 않고 새로운 희망을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당신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노~! 무~! 현~!
합장!
단기 4342년 5월 29일, 시드니에서
나는 이렇게 추도사를 마쳤다.
그런데 의외의 사태가 발생했다. 나중에 추도식에 참석했던 몇 분에게서 '실망했다'는 전화를 받았기 때문이다. 사실은 나 자신도 마음이 편치 않은 상태였다. 이유는 이랬다. 예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절제의 미학'이다. 아무리 아름다운 비너스의 몸이라도 까발릴 수 있는 데까지 까발리면 포르노일 뿐이지 예술일 수 없는 것이다.
서양 사람들은 공중 앞에서 될 수 있으면 우는 장면을 잘 보이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런 면에서 서구인들의 장례식에서 비교적 감정의 절제가 잘 되고 있는 모습은 미관상도 좋고 본받을 만하기도 하다. 서양의 장례식에서는 한국처럼 무식하게(?) 울면 반측으로 퇴장 당한다. 심지어 장례식에서도 유족이 고인에 대한 유머를 해서 웃기는 일도 다반사이다.
물론 '슬픔 보다는 분노'가 앞서는 추도식이었지만 순서를 맡은 이들 가운데 몇 사람이 사람들을 황당하게 만들었다. 정서적으로 평소에도 불안 불안하던 사람이 추도식장을 난데없이 정치교육의 장으로 만들었고 보통 때도 위태위태하던 사람이 자기감정에 겨워 욕으로 분노를 표출 하는 사태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특정 정당의 정치집회가 아닌 공식적인 대중행사는 모인 사람들의 정치적 정서적 스펙트럼이 다양하기 마련이다. 그런 자리에서 절제되지 못한 감정의 표출은 또 하나의 정서적 테러라고 할 수 있다. 추도식에 온 사람들 가운데는 망설이는 마음으로 모처럼 참여한 문상객, 어렵게 결단을 내려서 온 사람, 피치 못해 할 수없이 시간을 내어서 온 사람, '어디 한 번 구경이나 가볼까?'하는 구경꾼 심정으로 온 사람, 이유도 다양할 것이다. 주최를 한 측에서는 다만 비가 퍼붓는 밤에 와 준 것만 해도 한 분 한 분이 정말 고마운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온 사람들을 실망 시키다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노무현 서거 49제 때 다시 나는 추도사를 했다.
노! 무! 현!
노무현 때문에 한국의 내용적 민주주주의는 충실해졌습니다.
노무현 때문에 남북관계를 따뜻했었습니다.
노무현 때문에 정경유착은 끊어졌었습니다.
노무현 때문에 권위주위가 타파되었습니다.
이제 당신을 떠나보낸 우리는
노무현 때문에 비루하게 살 수 없습니다.
노무현 때문에 치사하게 살 수 없습니다.
합장!
그리고 2년 후 예수가 무거운 나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랐던 것 마냥 그가 마음속에 십자가를 지고 올랐을 부엉이 바위를 찾아갔다. 심청이는 인당수에서 몸을 던져 제 아비의 눈을 뜨게 했지만 그는 부엉이 바위에서 몸을 던져 감겼던 국민의 눈을 뜨게 만들었다. 아내와 함께 묵념을 한 뒤에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불렀다.
노무현이 후보 시절에 어느 인터뷰에서 다른 후보자를 평해달라는 기자의 주문을 받고 김근태에 대하여 평하기를 '다 좋은데 김근태 밑에는 사람이 안 모여'라고 했다. 오랫동안 김근태 형과 생사까지는 같이 못해도 고락은 같이 했던 나로서는 듣기가 거북 했다. 그러나 그 말을 어디까지나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김근태 밑에는 재야사관학교 졸업생처럼 훈련된 장교들만 모였고 노무현 아래는 어중이떠중이 오합지졸까지도 모여 들었다. 그러나 정치에는 바로 이런 사람들이 필요한 것이다. 노무현은 바로 이런 사람들을 모아서 정권을 획득했던 것이다. 대중성이 떨어진다던 김근태, 끝까지 대중들과 떨어진 삶을 살다가 세상을 떴다는 뉴스를 보았다. 근태 형을 추모하는 추도식은 없었지만 다시 나는 혼자서 아무도 보지 않는 추도사를 썼다.
근태 형!
빈소도 없는 먼 이국땅에서 당신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기억 합니까? 하루는 모임에서 형이 오는 길에 웃기는 일이 있었다고 했지요. 합승으로 택시를 탔는데 형이 먼저 앞에 타고 나중에 젊은 여성들 둘이 뒷자리에 탔었다고.
여자들이 형의 얼굴을 보더니(당시 뉴스시간에 사건 보도 때문에 가끔 얼굴이 나왔었지요.) "어머? 이근안 씨 아니세요?"했다고.
뉴스에서 보기는 봤는데 관심 없는 백성이 이근안이 김근태를 고문 했는지 김근태가 이근안을 고문했는지 헷갈렸던 것이지요.
내가 "그래서 뭐라고 그랬어요?" 했더니 언제나 점잖은 형은
"아닙니다. 제가 지금 이근안 씨를 괴롭히고 있는 김근탭니다." 했다지요.
오늘 특별히 형의 떠남을 알리는 비보를 접하고 슬픈 일은 95년 나의 출판기념회에서 형의 옆자리에 앉았던 화려한 변절자가 망신을 떨어서 세상을 웃긴 날(경기 도지사 김문수가 소방관에게 전화를 걸어 자기 목소리를 못 알아듣는다고 짜증내던 날)이기 때문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변절자의 행동을 보고 입에서 욕이 나오려다가도 형을 생각하니 탄식이 저절로 나오네요.
어느 자리에 같이 앉아 있으면 형을 목사 같다고 했고 목사인 나는 형사 같다고 했지요. 생긴 것도 그렇지만 말하는 스타일도 목사 같고, 말 하는 내용은 더 목사 같은 근태 형! 당신의 존재가 정말로 절실히 필요한 시기에 왜 이렇게 가버린거요? 최소한 나이가 훨씬 많은 이근안이 보다는 더 살아야 했을 거가 아닙니까?
형은 때를 표현할 때 구어체가 아닌 문어체로 '지난 시기'와 '현 시기'라는 말을 사용하는 어색한 버릇이 있었지요. 이제 형은 '현 시기'의 존재가 아닌 영원히 '지난 시기' 사람이 되었구려. 이제 고문 없는 세상에서 편히 쉬구려. 그러다가 이 근안이 오면 형이 언제나 보여주는 은은한 미소로 맞이해 주구려.
시드니에서
용산 참사를 다룬 영화, 두 개의 문
두 거인의 죽음이 한국 문제를 다시 적극적으로 생각하게 만드는 일이었다면 행동할 수밖에 없게 만든 일도 있었다. 한국에서 때때로 약간의 소음을 내고 살았기 때문에 해외로 나온 후 조용히 살려고(?) 마음 먹고 있었던 내가 다시 소란을 일으키는 사람이 되고 만 것이다.
2012년에 용삼참사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두 개의 문'을 시드니에서 상영하기로 하고 기왕이면 제작진들을 격려하는 의미에서 힘이 들지만 그들까지 초청을 하기로 했다. 시드니의 모든 민주세력들이 단결해서 준비 위원회를 만들고 나는 한국에 간 김에 감독들을 만났다.
드디어 두 사람의 감독, 제작자, 유가족 대표가 시드니에 왔고 우리 집에서 여장을 풀었다. 물론 여러 명이 힘을 모아서 하는 일이었지만 일을 시작하자고 제안한 나로서는 가장 큰 책임을 지고 표를 팔러 다니랴 손님 대접 하랴 정신이 없었다.
그런데 영화를 성공적으로 상영하는 일 외에 우리가 신경을 크기 써야 하는 일 한 가지가 기다리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용산참사에 대한 재판에서 검사였던 강수산나라는 사람이 시드니 영사관에 파견을 나와 근무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재외 선거관리'라는 명목의 파견이었다. 강 검사는 용산참사의 억울한 죽음의 원인을 밝히는 재판의 검사로서 피해자를 가해자로 만든 것에 일조한 인물로 평가받기도 하는 사람이다.
기사 원문 - SBS
당연히 당사자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기소해서 형을 받게 만든, 그것도 억울하게 생각될 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 더욱이 자신의 음성이 나오는 영화가 상영된다는 것이 유쾌할 리가 없을 것이다. 더욱이 영화 상영을 위하여 한국에서 영화감독, 유가족 대표들이 오고 상영 후 관객들과의 대화 시간도 가질 계획이기 때문에 시드니에 살고 있는 강 수산나 검사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 수가 없고 자연스러운 분위기에서 어떤 형식으로든 강 검사에 대한 입장 표명이 있을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순서였을 것이다. 그런 까닭에 영화 상영을 계획한 사람으로 기습적으로 일을 벌일 수는 없었다. 시드니 총영사관을 방문해서 평소 이러 저러한 일로 안면이 있는 안기부 파견 영사에게 현명하게 대처해 주기를 주문했다. 왜냐하면 영사관이 아무 것도 모르고 있다가 당일에 용산 유가족을 포함한 시위대가 영사관에 들이닥치고 강 검사 나오라고 소란이 일어나는 것은 당황스러울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당황을 넘어 초긴장을 해야 하는 사건은 강 검사에게가 아니라 나에게 벌어졌다. 며칠 후 오전 11시 쯤 연방경찰로부터 내가 시드니 영사관에 파견되어 있는 외교관을 위협했다는 신고를 받았으니 만나자는 전화를 받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저녁에 영화 준비 회의가 소집된 상태라서 당일 대응을 해야 회의 때 대책을 논의할 수 있었기 때문에 사방으로 전화를 할 시간도 부족했다. 그래도 어떻게든 연락을 돌려서 다음날 아침 한국을 가야하는 신준식 박사를 붙들어 놓고, 호주 금속노조의 고직만 조직가, 박은덕 변호사와 함께 오후 4시에 연방경찰을 만났다.
호주연방경찰(Australian Federal Police)은 강 검사로 부터 '국제법으로 보호받는 외교관에 대한 협박과 신체 위해 혐의(allegation of threat and assault under the Crimes -Internationally Protected Persons-Act)'가 있다고 신고를 받았다고 밝혔다. 아울러 현재 정식 기소된 바는 아니지만 사실 확인 차원에서 나를 만나고자 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연방경찰 담당자는 내가 법을 위반하면 징역 10년까지 처해진다는 내용도 전해 주었다.
나는 어째서 강 검사가 호주 연방 경찰에 신고를 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물론 강 검사는 용산 참사 공판에서 본인의 의사가 아니더라도 검찰 조직의 일원으로서 맡겨진 임무를 수행했던 것처럼 호주 경찰에 신고를 한 행동도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진행되었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가는 말이 험해야 오는 말이 고운' 것이 세상이치이지만 검찰의 이치는 '가는 말이 고운데 오는 말을 험하게' 걸어오는 것이었다. 이것은 '무조건 겁부터 주고 보자.'는 검찰의 유전적 공안 DNA인 것이다.
애초에 내가 크게 마음을 써서 친절한 주의 메시지를 보냈을 때 강 검사가 '고맙다'고 한 마디만 했으면 모든 것이 순조롭게 잘 돌아갔을 터이다. 그런데 강 검사는 나를 신고함으로서 결과적으로 온갖 욕을 다 들어먹고도 영원히 지어지지 않는 온라인에서 악명을 다시 한 번 떨치게 되었다. 아마도 온라인에서 강수산나 이름을 검색하면 용산참사 수사 사건 외에 이 사건도 반드시 나올 것이다.
기사 원문 - 참세상
이러나저러나 우리가 영사관 앞에서 시위를 하는 날 강 검사는 출근도 못했으니 결과는 똑같았다. 본인은 혹시 자기를 찾아오지 않을까하고 신변에 위협을 느껴서 출근을 안 했는지는 모르지만 사실은 서울서 온 용산 참사 유가족이나 3년을 끈 재판과 재판 이후 자료에 매달린 영화감독들의 입장에서 강 검사는 '꼴도 보기 싫은' 얼굴이었다. 강 검사는 시간도 지났고 장소도 바뀌어 해외에서 모처럼 유족과 허심탄회하게 만날 기회마저도 놓친 것이다. 이번 일로 용산 참사 재판의 한 사람의 조연에 불과했던 강 검사가 불행히도 다른 검사들을 재치고 스스로 주연급 악역으로 등장한 꼴이 되어 버린 것이다.
사건이 터진 후 "강 검사가 왜 저렇게 나오는 것이냐?"는 나의 질문에 국정원 영사는 "강 검사도 용산 참사 사건 때 철거민들에게 머리채를 휘여 잡히는 등의 사건이 있어 트라우마가 있는 것 같습니다."라고 했다.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내 경험으로도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일이었지만 나중에 확인해 보아야겠다는 생각에서 그냥 넘어갔다.
나중에 서울서 온 이들에게 확인한 결과는 역시 '마음으로는 몇 번이라도 그러고 싶었지만 강 검사가 올 때 마다 항상 전경에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에 전혀 그런 일이 벌어질 수가 없었다'는, 예상했던 대로 지극히 상식적인 답이었다. 이렇듯 중요한 거짓말을 하는 것이 공안검사인 것이다.
강 검사 협박 사건의 또 한 사람의 조연은 내가 최초로 대화를 나눈 국가정보원 파견 영사였다. 보도가 나가자 한국 언론들로부터 최초 대화자를 밝혀 달라고 시달림을 당해 몸살이 나고 혓바늘이 돋을 지경이었다. 언론 쪽에서야 그래야 취재가 쉬우니까 당연한 일이고 나로서도 그 자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이야기하니까 이야기가 복잡하고 따라서 내 이야기의 신뢰도도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국정원 파견 요원 ㅇㅇㅇ 영사'라고 밝혀주면 나로서는 간단한 일이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그의 신분이 들어나면 공무원으로 정리를 해야 할 나이에 있는 가장으로서 그가 인사상 불이익을 받을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내 편에서 조금 희생을 할지언정 그를 궁지에 몰리게 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만일에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평생 그 원망을 어찌 듣고 살겠는가? 그가 나를 만나서 고맙지는 않더라도 피해를 보았다는 생각은 들지 않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영화는 크게 흥행을 해서 강 검사로서는 될 수 있으면 화제가 되는 것을 피하고 싶을 것이 분명한 영화를 도와주는 꼴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마치며
이 연재가 15회를 거치는 동안 매회 글마다 달렸던 댓글 중에 깊이 인상에 남는 댓글이 있었다.
월남전, 택시기사 이야기. 재미도 있고 감동도 있고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나 생각이 공감가는 부분이 많았고 이렇게 글로 '나 이렇게 살았노라'라고 드러내도 될 만큼 치열하게 잘 살아오신 분이란 생각이 들었고 존경심도 들었는데... 한 가지 걸리는 것은 '개독 목사'란 것이었다. 개독에게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다. 그의 청춘도 투쟁도 파란만장한 인생역경들도 모두 오롯이 하나님께 봉헌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한' 과정에 불과하고 '예수 믿는 사람도 진보적인 사람 많습니다.'라는 것을 들어내기 위한 수단으로 딴지에 글을 올리고 있을 가능성이 있었다. 요즘 유행하는 이른바 '문화선교'라는 것 말이다. 문화 선교는 '예수 천국, 불신 지옥' 식의 1차원적 단순무식 전도 방식에서 진화된 세련되고 포지티브한 방식의 '이미지 메이킹' 기법 중 하나이다. 재벌 그룹들의 방법과 목적이 같다. 감성을 건드리고 지속적인 휴머니즘 이미지 각인(세뇌)으로 기업 이미지를 좋게 하고 기업 이미지가 좋으면 상품에 대한 이미지도 좋아지고 물건 팔아먹는데 유리한 인프라를 까는 작업... 개독 이미지 개선, 개독 문화전파, 전도의 문을 여는 것. 개독의 문화선교 전략이란 게 그런 것이다. 사회문제에 관심 있는 특히 진보적 개독들이 일찍이 주창하고 밀고 있는 기법이다. 그래서 이 양반의 글에 대해서 한 발짝 떨어져서 관망하는 스텐스를 유지하려 노력했는데... 오늘 드뎌 딱 본색이 드러나는고만...
이 댓글을 보는 순간 잊고 있었던 2007년도에 열렸던 안티 기독교 초청 토론회가 기억났다. 당시 한국교회언론회라는 보수 단체의 대표가 잘 아는 사람이어서 흥행이 될 것 같아서 안티 기독교 세력을 초청해서 토론회를 가져 보자고 제안을 했다. 내가 아는 한에서는 이것은 한국 최초로 보수교단들이 안티와 대화를 시도하는 기회였다.
사실 애초에 이 행사를 제안했을 때 성사가 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없었다. 양쪽 모두 깊이 생각하느라고 결정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두 집단 모두 내부에서 구태여 대화를 할 필요가 있느냐는 의견이 많이 있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여곡절 끝에 진행이 되어서 예비모임으로 반기련 회장을 포함한 발제자들이 만나서 여러 가지 가능성과 예기되는 문제점들을 검토 했다. 기자들이 많이 올 터인데 돌출 과격 행동이 발생한다면 피차에 유익할 것이 없다는 판단 하에서 서로들 조심하기로 했다.
그러나 문제는 양쪽 모두 체계적으로 통일된 조직이 아니어서 혹시 맛이 간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할 줄 몰라서 염려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우려 했던 대로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사람이 나타나서 양쪽을 다 긴장시키기도 했는데 더 큰 문제는 전혀 예기치 않은 곳에서 발생했다.
행사 2시간 전에 교회언론회 이사들이 뒤늦게 나의 발제 원고를 읽고서 나에게 "당신 프락치 아니냐?"고 몰아붙이며 발제를 할 수 없다고 하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순간 나는 '어떻게 알았지?'하는 당혹함(?)도 있었지만 "당신들은 한글도 못 읽느냐? 해학과 풍자도 이해하지 못하느냐?"고 되받아쳤다. 동시에 안티와 대화하려면 '안티의 문법'을 이해해야 한다고 교육을 시켰다. 교육의 효과가 있었는지 나중에야 '우리는 이해하지만 한국 교회와 매스컴에 당신의 발제 자료가 배포되면 오해가 생길 것을 우려 한다'는 입장으로 바뀌었다. 보수적인 한국교회 현실을 그대로 말해주는 그야말로 황당 시츄에이션이었다. 그래도 내 입장에서는 보수교단들을 배경으로 하는 주최 측의 고민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가 아니어서 결국 자료 배포 없이 구두로만 발제를 하기로 했다. 그래도 보수 교회 단체로서는 엄청난 시도를 한 셈이어서 그분들 마음고생이 무척 많았을 것이다. 마치 수류탄을 안고서 줄넘기 하는 기분이 아니었을까. 오죽하면 짧은 정해진 시간 10분보다도 짧았던 나의 발표가 끝나니까 사회자가 '롤러코스터에서 내린 심정'이라고 했을까.
결과적으로 개신교인들에게 안티의 입장이 공개적으로 알려지는 자리로 마련한 세미나는 되려 그동안 안티를 몰랐던 많은 개신교인들에게 실망을 안겨준 자리였다. 행사의 기획자로서 초청을 받은 자리에서 정제되지 못한 거친 감정을 드러내 보이는 안티 기독교의 자세는 매우 안타까웠다. 한 마디로 대화하자고 불렀더니 싸우자고 대드는 우스운 꼴이었다.
1980년대 전두환에 대한 불타는 적개심으로 자신을 스스로 단련시켜 '고난의 행군'을 즐겁게 하던 많은 젊은이들이 있었다. 안티들이 기독교에 대한 '불타는 적개심'을 가슴에 품고 사는 것이 자기가 바른 삶을 살아가는 데 원동력이 된다면 다행스러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 수 있을까?
길고 긴 글을 마치면서 독일에서 교수 생활을 하면서 북한을 방문한 죄로 국보법으로 재판을 받았던 송두율 교수가 자신을 '주변인'이라고 정의했던 것이 생각난다. 현재의 내 입장도 그런 것 같다. 종교적으로만이 아닌, 반백 년, 한국에서 분투하다 떠나온 지금 내 상황 자체가 그렇다.
난민들이 안전을 찾아가는 이들이라면 나의 경우는 이에 해당되질 않을 것 같다. 무엇인가 할 일이 있을 것 같은 한국으로 돌아가려면 오히려 불안을 향해서 가야 하는 상황이다. 결국 난민들은 불안하기 때문에 떠나려고 하고 나는 안전하기 때문에 돌아가지 못하는 것이다. '짧고 굵게' 살고 싶었는데 어쩌다보니 안락한 누에고치 속에 들어앉아서 '가늘고 길게' 시간을 좀 먹으면서 지내게 되었다.
끝까지 읽어주신 딴지스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나처럼 마음대로 안 되긴 하겠지만 아무쪼록 잘 먹고 잘 사시기를...
독자와의 만남 공지 지난 2년간 딴지일보에 '월남참전기, 남아공 탐방기, 시드니 택시기사의 일기, 어느 민초의 반세기 전투기'를 연재했다. 오늘로 연재를 마쳤는데 마침 한국에 와 있어서 '독자와의 만남' 시간을 갖기로 했다. 급하게 공지해서 몇 명이나 올지 모르지만 주제는 "어떻게 하면 헬조선을 탈출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다. 여기서의 탈출의 의미는 현상학적이다. 즉 심리적 탈출이 아니라 육체적 탈출을 말한다. 왜냐하면 '세계는 넓고 할 일은 없지만 쑤셔보면 있다.'는 것이 나의 신념이기 때문이다. 특히 이 날 행사에는 세계의 가난한 나라 쑤시기의 전문가인 정호진 목사가 함께 할 예정이어서 다채로운 탈출기가 소개 될 예정이다. 그러니까 나는 제 1 세계, 정 목사는 제 3세계가 전공인 셈이다. 1월 28일 저녁 6시, 대학로 벙커1 구름 같이 모여서 소낙비 같이 흩어지기 바란다. 지난 기사 |
sydney
편집 : 딴지일보 퍼그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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