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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자율인가

 

내가 고등학생 시절 야간 자율학습이라는 것이 있었다. 정규 수업 시간이 끝나고 밤에 교실에 남아 공부를 하는 시간이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으나, 그때 학습 분위기는 상당히 강압적이었다.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들으며 공부한다고 선생님에게 맞았던 기억이 있을 만큼 자율의 범위가 좁았던 걸로 기억한다.

 

프로야구단에도 자율 훈련이라는 것이 있다. 전지훈련을 갔을 때 정해진 훈련 시간 외에 하는 운동이다. 보통 야간에 자율 운동이라는 이름으로 스케줄이 정해져 있다. 시즌 중에는 전날 장거리 이동을 했을 경우 다음날 자율 운동이라는 스케줄을 잡는다.

 

국어사전에 자율은 ’남의 지배나 구속을 받지 않고 자기가 세운 원칙에 따라서 스스로 규제하는 일‘을 뜻한다. 나는 프로야구단에서 하는 자율 운동이 과연 진짜 자율이라고 할 수 있는지 항상 의문이었다.

 

훈련을 하든 안 하든 선수에게 맡기는 게 자율이고, 선수가 하고 싶은 훈련을 해야 자율이지만, 보통 자율 운동 시간에도 훈련 내용은 정해져 있다. 스케줄표 상에는 자율 운동으로 표시해놓고 훈련하는 인원과 안 하는 인원을 확인한다거나, 자율 운동 시간을 만들어놓고 훈련을 하지 않는 선수들에게는 그렇게 하면 자율 운동을 없애버린다거나 하는 협박 아닌 협박도 한다.

 

내가 생각하는 자율 운동은 정규 훈련 시간이 끝난 뒤에는 아무런 스케줄이 없는 것이다. 밤 7시부터 9시까지 자율 운동이라는 스케줄을 박아두지 않고, 정규 훈련 종료 이후의 스케줄은 오로지 선수에게 맡겨야 하는 것이 진정한 자율 운동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해야 선수들은 진정 누구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기에게 필요한 것들을 할 것이다. 휴식이 필요하면 휴식을 취할 것이고, 개인이 부족한 훈련을 하고 싶으면 개인에 맞는 훈련을 찾아 할 것이다. 훈련양도 본인의 컨디션에 맞게 할 수 있기 때문에 부상도 예방하기가 수월해진다. 이것이 진정한 자율의 힘이다.

 

지도자들은 항상 말한다. 선수들이 알아서 스스로 자기가 부족한 부분을 찾아서 훈련했으면 좋겠다고.

 

시대의 흐름에 맞게 자율적인 분위기를 만들고 싶은데 선수들을 믿지는 못하니 자율 훈련이라는 시간을 만들어 놓는다. 그러면서 스스로 알아서 찾아서 하는 프로선수의 마인드를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내가 자주 하는 말이 있다. 지도자들이 먼저 선수들을 프로선수처럼 대하면 선수는 프로가 될 것이고, 아마추어 선수처럼 대하면 선수는 계속 아마추어에 머물게 된다고. 지도자들이 선수들을 아마추어 마인드로 대하는데 선수들이 프로선수의 마인드를 가질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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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스포츠서울>

 

격려의 역설

 

2013년 한화와의 최종전을 앞두고 있는 날이었다. 최종전을 이기면 페넌트레이스 2위가 확정되고, 최종전을 지게 되면 4위가 되는, 아주 중요한 게임이었다. 상대 선발은 한화 에이스 바티스타, 넥센 선발 투수는 김영민(현 김세현) 선수였다.

 

선발투수의 무게만 놓고 보면 바티스타가 유리한 게임이었지만, 2013년 팀 성적만 놓고 보면 넥센이 유리한 게임이었다. 마지막 게임의 부담감은 있었지만 선수들과 코칭스텝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대전 한밭 야구장에 나와 몸을 풀고 준비를 했다.

 

대전 한밭야구장 원정팀 라커룸은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는 더 열악한 공간이었다. 공간 자체가 너무 작았고, 선수들 식사 공간도 크지도 않았을뿐더러 식사 공간에서 코치들은 담배를 피우고, 샤워공간에서 선수들이 담배를 필 정도로 공간이 아주 협소했다.

 

선수들이 다닥다닥 붙어 앉아서 게임을 준비했다. 김영민은 보통의 선발 투수 루틴대로 버스에서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게임 시작 시간 1시간 반전에 나와 라커룸에서 옷을 갈아입고 장비를 챙기고 간단히 요기를 했다.

 

운동장에 나가기 전 마주치는 선수 및 코치들이 영민이에게 한마디씩 던지기 시작했다.

 

‘영민아 부담갖지마, 편하게 던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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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데일리>

 

영민이의 마음을 편하게 해줄려는 격려였다. 운동장을 나가서도 마찬가지였다. 운동장에서 만난 선수들이 또 비슷한 격려를 하기 시작했다. 뭄풀러 외야에 나온 영민이가 나에게 이렇게 얘기했다. 어제 잠 정말 잘 잤고, 오늘 정말 마음 편하게 운동장에 나왔다고 . 근데 운동장 나와서 선수와 코치들의 격려를 듣는 순간부터 생각이 바뀌었다고 한다. 오늘 편하게 하면 안 되는구나를 느끼면서 그때부터 긴장이 되더라는 얘기였다.

 

교체선수와 더그아웃

 

2019년 창원에서 NC 다이노스와 게임 도중 타석에 있던 심우준이 교체를 해달라는 사인을 보냈다. 우준이가 더그아웃에 들어오자마자 코치, 선수들이 우준이에게 다가와 묻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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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경향>

 

‘다친 데가 어디야? 어때 괜찮아?‘

 

내가 상처 치료를 하려는데 지나가던 선수가 우준이에게 또 물었다.

 

’어디 다친 거야? 괜찮아?’

 

그때 내가 우준이에게 이런 말을 했다.

 

"우준아 지금까지 몇 명이 너한테 같은 질문을 했는지, 앞으로 몇 명이나 할거 같은지 잘 확인해봐."

 

우준이는 내 말의 의미가 뭔지 잘 몰랐을 수도 있다. 더그아웃은 교체로 나온 선수가 통증과 게임에서 빠진 안타까운 마음을 식힐 시간 자체를 주지를 않는다.

 

시즌이 시작하면 MLB 경기 중계를 보게 된다. 만약 같은 상황이 메이저리그 게임에서 발생했을 때 더그아웃에서 선수들이 어떤 행동을 하는지, 코치, 감독은 어떻게 행동하는지 잘 지켜보면, 한국의 더그아웃의 문제점을 잘 알 수 있다.

 

선수에겐 감정을 소비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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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한 방송에서 나의 마음속의 공주인 핑클님들이 캠핑을 떠나는 프로가 있었다. ‘영원한 사랑‘인 핑클이 다 함께 나오는데 안 볼 수가 없었다. 그중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었다.

 

옥주현 님이 감정이 격해져 캠핑카 뒤로 가서 울고 있을 때, 이진 님과 성유리 님이 따라가서 달래줘야 할지 어쩔지 걱정을 하는 장면. 그때 리더인 이효리 님이 한마디를 던졌다.

 

’본인 감정을 소비할 수 있게 내버려 둬라. 시간을 줘라’

 

우리 동네 예체능이라는 프로도 있었다. 농구 매니아인 박진영 님이 출연한 농구 편이었다. 그때 인상적인 장면이 있었다.

 

1점 차로 팀이 이기고 있는 상황에서 상대팀이 박진영에게 반칙 작전을 한 것이다. 자유투 2개 중에 1개만 성공 시켜도 안전하게 이길 수 있는 상황. 프리드로우 라인에 서있는 박진영에게 팀 동료가 가서 한마디 던지는 장면이 나온다.

 

‘진영이형 편하게 해요’

 

게임은 다행히 예체능 팀이 이기게 되었고 라커룸에 들어와서 지난 게임 상황에 대해 서로 얘기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때 박진영이 했던 말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자유투 상황에서 림이 아주 작게 느껴져 엄청 긴장하고 불안했다고. 근데 그 순간 팀 동료가 와서 편하게 하라고 얘기하니 그때부터 더 떨렸다는 얘기였다.

 

사실 주변에서 격려를 하거나 위로를 하는 마음은 다 같다. 걱정하는 마음으로 도와주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당사자는 그렇게 느끼지 않을 수 있다. 적어도 운동장에선 그럴 때가 많다. 그냥 아무 대답하기 싫고 혼자 있고 싶은데 아무리 좋은 뜻으로 하는 위로라도 좋은 결과를 얻기가 힘들다. 선한 의도와 다르게 좋지 않은 영향이 선수들에게 전해질 수 있다. 그래서 난 선수 본인들이 요청하기 전에는 먼저 말을 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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