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번영
1차 아편전쟁 이후 60년 만에 홍콩 인구는 50배 증가했다. 중국 대륙 바로 옆에 ‘다른 나라’인 영국이 있는 셈이었다. 그것도 힘센 나라였다. 예나 지금이나 다른 나라의 주권이 행사되고 있는 지역은 피난지로서 최고다. 게다가 영국 지배하의 홍콩은 ‘도착정책(Touch Base Policy)’을 취하고 있었다. 누구든지 홍콩에 들어오면 홍콩에서 거주할 수 있었다.
서양 열강이 중국을 본격적으로 침략하는 시작점이었던 아편전쟁은 전통적인 중국의 사회구조를 단번에 흔들었다. 광동연해가 영국 해군의 관할 하에 들어감으로써 이곳에서 활동하던 해적들은 내륙 수로로 쫓겨 들어갔고, 그 여파로 운수업에 종사하던 대량의 노동자들이 실직했다. 당연하게도 혼란 속에서 상호부조나 종교적인 비밀결사들이 번성했다.
아편전쟁 즈음 청나라의 인구는 4억 정도로 증가하였으나, 행정조직은 그에 따라가지 못하는 바람에 백성들은 삶은 피폐해졌고, 결과적으로 태평천국 운동(1850년-64년) 같은 동란이 끊이지 않았다.
영국은 홍콩섬을 점령하고 있던 1841년에 이미 자유무역항을 선포하였다. 향후 그들의 야심을 보여주는 대목이지만. 19세기 중반에 자유항이라는 개념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그들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홍콩은 일찍이 누구나 오고 갈 수 있는 자유항이 되었다.
게다가 무관세 정책이었다. 중계무역이 활성화되었다. 수출입의 관세가 없다면 상품의 가격은 저렴해지고 거래는 활발해질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유통과 거래가 활발해지면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세상만사 음지가 있으면 양지가 있는 법이다. 전쟁으로 고통을 받는 곳이 있으면 전쟁의 특수 덕분에 번영을 구가하는 곳도 있다. 사회 혼란은 언제나 인근 지역(국가)의 경제 활성화를 가져왔다.
일본이 한국전쟁의 덕으로 급속한 경제성장의 발판을 마련했고, 한국이 베트남 전쟁을 통해서 경제 발전의 기틀을 닦았듯이, 홍콩은 식민지 초기부터 중국 대륙 내의 전쟁 덕분에 인력과 자본이 몰려들었다.
(1960년대에 홍콩은 베트남 전쟁의 특수 덕으로 다시 한번 비약적인 성장을 했다)
홍콩뿐만이 아니고 조계지도 마찬가지였다. 조계지란 중국의 영토에서 외국인이 행정, 경찰, 사법 등을 관할하는 지역으로서, 1845년에 상해에서 영국이 처음으로 설정하면서 시작되었다. 조계지는 지조(地租)만을 중국에 지불할 뿐 사실은 중국의 땅이 아니었다. 상해의 조계지는 중국의 각종 동란으로부터 안전하였고, 자본이 집중되어 ‘번영’을 누릴 수 있었다.
▲1930년대 중국 상하이 국제조계지 황푸강변 와이탄의 풍경.
조계지는 청나라가 청일전쟁(1894년)에서 패배한 이후 급증하였다. 영국, 일본, 러시아,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벨기에 등이 중국의 28개 지역에 조계지를 확보할 만큼 확대되었다. 당연히 해당국의 직접투자가 가능하였다. 제국주의 국가들은 무역업과 은행업에 투자하면서 생산에도 뛰어들어, 중국에 대한 경제적인 지배를 확대해 갈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홍콩을 포함하여 조차지와 조계지는 중국 근대사의 치부라고 할 수 있다. 서구 세력에 대한 중국의 경계심과 피해 의식도 무리가 아님을 알 수 있다. 과거를 잊지 말자는 차원에서 자주 제기된다.
식민 초기의 홍콩
홍콩의 인구는 1842년 초에 이미 2만 명까지 늘어났다. 재판소, 우체국, 토지 등기소, 감옥 같은 정부 건물과 더불어 부두, 창고, 상점, 환락가, 도박장 등의 상업 시설이 들어섰다. 1845년에 홍콩을 방문했던 유럽인들은 이미 그 규모에 놀라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홍콩은 밀수와 합법이 공존하는 중계항으로서 중국의 차, 비단, 도자기, 설탕, 염료 등이 해외로 나갔고, 해외에서는 양모, 의류, 금속, 인도의 원면 등이 들어왔다. 물론 아편은 여전히 밀수의 중심에 있었다. 1840년부터 20년 동안 아편으로 벌어들인 영국의 순이익은 6배 성장하였다.
1865년 홍콩 거리.
1890년 홍콩 거리.
19세기 홍콩에는 아편 밀무역을 하는 기업도 많았는데, 많은 선박은 물론 호위 함대까지 보유하고 있을 정도였다. 지금도 건재하고 있는 자딘 그룹은 한때 아편 밀수의 상징이었다. 아무튼 활발한 중계 무역 덕분에 개항 20년 만에 외국 상사 70개가 들어왔다.
해적의 문제도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1844년에는 해적 1백 50명이 홍콩섬 해변의 창고를 약탈한 적도 있다. 심지어 해적 선단이 항만의 동서 양쪽을 막아서 홍콩과 중국 간의 무역이 마비되기도 했다.
앞서도 말했지만 1차 아편전쟁의 결과에 중국과 영국 모두 불만이었다. 2차 전쟁의 조짐은 끊이지 않았다. 영국군이 광저우를 포격하기도 하고, 홍콩의 중국인이 영국 포병단의 식사에 독을 타기도, 센트럴 시장에 방화를 하기도 그리고 영국군이 해적에게 살해당하기도 했다. 1849년에는 마카오 총독이 암살되자, 홍콩에는 광동성 당국이 홍콩 총독의 머리에 현상금을 걸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1850년대에는 동남아 각지에서 식민지 당국에 항의하는 소요가 집중적으로 일어났다. 2차 아편전쟁 기간(1856-1860) 동안 홍콩의 인심도 나날이 흉흉해졌다. 황제를 대신하여 광동성과 광서성(현 광시성)을 다스리는 양광 총독은 중국인은 백인을 돕지 말라는 지시를 내리는 동시에 백인들의 머리에 현상금을 내걸었다. 홍콩과 광저우의 가두에는 영국 오랑캐를 살해하고, 그들의 집에 불을 지르라는 내용의 전단지가 나붙기도 했다.
광저우에서 외국 무역관이 불타고, 외국 선박이 포로가 되는 일들이 있었고, 홍콩에서는 외국계 기업이 습격당하고, 공무원이 하인에 의해 살해당하기도 했다. 1857년에는 비상을 섞은 빵에 총독 부인을 비롯한 수백 명의 유럽인들이 중독되기도 했다.
자유를 찾아 홍콩으로 몰려온 중국인들
홍콩으로, 홍콩으로, 피난민의 발걸음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1911년 중화민국 건국, 1920년대는 군벌 전쟁, 1930년대는 항일전쟁 등 중국 대륙을 뒤흔드는 사건에 백성들의 발길은 자연스럽게 홍콩으로 이어졌다. 1937년 말에 홍콩 인구는 이미 1백만 명을 돌파했다.
▲1937년 8월 전쟁이 상하이까지 덮쳤다. 일본군은 황푸강 연안과 부두를 점령하고 도시를 폭격하기 시작했다. 짐을 짊어진 중국인들이 안전한 곳으로 피하기 위해 몰려들고 있다. / 출처-<북폴리오>
결정적으로 피난민이 몰려온 것은 1940년대 후반부터였다. 일본의 통치로 일시 감소하였던 홍콩의 인구는 국민당과 공산당 간의 내전을 피해서 몰려오는 피난민으로 다시 폭증하기 시작했다. 1947년에는 홍콩의 인구가 180만 명이 되었다. 사회주의 정권인 중화인민공화국이 출범한 다음 해인 1950년에는 다시 230만 명으로 증가했다. 5년 만에 170만 명이 늘어난 것이다.
1949년 10월 1일 천안문 광장에서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선포를 하는 마오쩌둥.
우리는 언제나 억압받지 않는, 꿈과 능력이 무한대로 인정되고 발휘될 수 있는 공간을 꿈꾼다. 홍콩은 전쟁을 피해서, 사회주의가 싫어서 오는 피난민들에게 이상적인 공간을 제공했다.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하면서 탈출한 사람들에게 홍콩은 자유 그 자체였다. 자유를 찾아 위험을 무릅쓰고 육상으로 해상으로 넘어왔다.
인구 유입은 염가의 노동력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이지만, 주거, 교육, 취업, 의료 등의 문제를 수반한다. 좁은 홍콩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인구가 한꺼번에 몰려든 것이기에 정부는 특단의 대책을 세울 수밖에 없었다.
1949년에 처음으로 중국-홍콩의 국경선을 만들었다. 눈에 보이는 중국과 홍콩의 경계선이 생겼다. 이때부터 홍콩의 정체성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많다.
1950대 말부터는 대륙에서는 ‘대약진운동’의 실패와 자연재해로 수천만 명이 아사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반우파 투쟁’과 ‘문화대혁명’ 등이 야기한 정치적 박해는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홍콩으로 피신을 했다. 대륙에서 벌어진 부르주아지 숙청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그들은 홍콩으로 탈출을 했기에 목숨을 건졌다.
1950년부터 20년 동안 90만 명이 들어왔다는 기록이 있다.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느슨해진 사회 분위기에 힘입어 유입되는 인구가 다시 급증했다. 이렇게 해서 1980년에는 홍콩의 인구가 5백만 명이 넘었다. 홍콩을 ‘피난민의 도시’라고 하는 이유이다.
1980년대 홍콩 거리
홍콩 친구들과 대화를 하다 보면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언제 어디에서 왔다는 이야기가 꼭 등장한다. 철책을 넘어서 육로로, 또 헤엄쳐서 해로로 건너왔다고 한다. 무슨 책이든 저자의 이력에도 대륙으로부터의 탈출 경력이 빠지지 않는다. 한국전쟁 때 월남했다는 것과 똑같은 이력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책 한 권만큼의 스토리를 간직하고 있다. 전쟁을 피해서, 공산당의 핍박을 피해서 홍콩의 ‘자유’를 찾아왔다는 스토리는 홍콩 사람들을 이해하는데 반드시 필요하다. 대륙에서 사회주의 정권이 수립되면서 홍콩으로 피난 온 이 170만 명의 엘리트들은 향후 홍콩 ‘발전’의 주역을 담당했다.
‘과객’으로서의 홍콩인
1984년 중국과 영국 사이에 홍콩의 주권을 중국에게 반환한다는 『중영공동성명』이 발표되었다.
1984년 중영공동성명
“홍콩이 주권이 중국 아니 중국공산당에게 반환된다고? 그것이 결정되었다고?”
주가와 집값이 폭락했다. 절체절명의 위기감에 홍콩인들은 다시 피난을 생각했다.
“대륙에서 우리 가족이 어떻게 당했는데?”
“우리 할아버지는 지주계급이라고 인민재판에서 변명 한마디 못하고 바로 총살당했어!”
“우리 아버지는 친구에게 솔직하게 한마디 했는데, 우파로 지목되어 평생을 감옥에서 보냈어!”
“문화대혁명 때 나는 그 아버지는 우리 아버지가 아니라고 공개 선언해야 했다고!”
“엄마가 집에 와서 울면서 불평하자 내 동생이 엄마를 밀고해서 엄마는 고문받다가 돌아가셨다고!”
“내가 어떻게 탈출했는데? 내가 어떻게 살아남았는데?”
주권 반환은 대륙을 탈출한 홍콩 사람들의 상처와 공포를 다시 건드렸다. 당시 나는 홍콩의 지인들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공산당이 온다고, 공산당이”
▲문화대혁명(1966-1976) 당시 홍위병들은 일명 ‘반혁명분자’들을 대중 앞에서 조리 돌림하며 모욕 주고 폭행했다. 많은 이들이 죽었다.
홍콩사람들의 정체성을 요약할 때 지나가는 손님 즉 ‘과객(過客)’이라고 한다. 언제든지 떠날 수 있다는 말이다. 알다시피 ‘과객’은 책임이 없다. 내가 그곳에 영원히 살아야 할 이유도 없다. ‘과객 심리’를 홍콩 사회의 치명적인 약점으로 꼽는 학자가 많다.
다시 한번 떠나면 되는 것이었다. 1997년 주권 반환을 앞둔 그즈음 홍콩 사회의 화두는 단연 해외 이민이었다. 홍콩의 내 친구들은 모두 이민을 입에 달고 살았다.
캐나다와 호주의 대사관 앞에는 사람들이 장사진을 쳤다. 최근에는 홍콩과 동병상련의 처지인 대만 그리고 홍콩에 대한 영원한 책임을 강조하는 영국 정부가 홍콩인들의 이민을 받아들이는 데 적극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1987년에 3만 명,
1988년에 4만 5천 명,
1989년에 4만 2천 명,
1990년에 6만 2천 명,
1991년에 5만 8천 명,
1992년에 6만 6천 명
이 이민을 떠났다.
1984년부터 10년간 60만 명이 홍콩을 탈출했다. 무려 홍콩 인구의 10분의 1에 해당했다. 그들은 대부분 사회 중산층들이었다. 이른바 ‘두뇌 유출(Brain Drain)’ 현상이 일어났다.
당시 나의 석사 지도교수는 나를 송별하는 식사 자리에서 진지하게 물었다.
“내가 외국에 가서 사는 것은 어떨까? 한국인인 너는 지금 외국인 홍콩에 살고 있잖아.”
이미 소문을 듣고 있었다. 선생님이 호주로 이민을 준비 중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선생님은 홍콩을 대표하는 인문학자이면서 ‘친대만파’의 지도자급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우파답게 공자를 숭상하고, 유교를 전파하기 위한 활동에도 열심이었다.
선생님은 홍콩의 주권이 중국으로 반환될 경우, 이미 우파로 공인된 본인의 활동에는 제약이 따를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한국인인 나는 (피난민답게) 매우 ‘이기적인’ 홍콩사람들에게, 철저한 ‘개인주의’ 사회인 홍콩에게 신물을 내고 있던 차였다.
“아이고, 선생님 힘들어요. 저 지금 외국에 살고 있잖아요. 하루하루가 힘들어요. (외국에 살면) 항상 긴장하고 살 수밖에 없어요. 선생님은 여기에서 크게 대우받는 분인데, 외국에서 적응하려면 얼마나 힘들겠어요?”
선생님은 호주로 떠났다. 당시 나는 선생님이 바보(죄송) 같은 결정을 했다고 생각했다. 선생님의 지명도 덕분에 호주 중국인 사회에서도 대우받고, 여전히 공자의 도를 전하는데 열심이지만, 홍콩에서만큼 행복하실까 했다. 하지만 최근 언로가 막힌 홍콩의 답답한 상황을 보면, 선생님의 선견지명이 탁월했다는 생각이 든다.
신이민 정책과 신홍콩인
홍콩의 인구 유입을 논할 때 ‘신이민’ 또는 ‘신홍콩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을 챙겨보아야 한다. 중국의 개혁개방 이후에도 여전히 너무 많은 사람이 몰려오기에 홍콩 정부는 중국 정부와 상의하여 이민정책을 바꾸었다. 하지만 각자의 목표는 달랐다.
홍콩 정부는 홍콩의 ‘두뇌 탈출’에 대응을 해야만 했고, 중국 정부로서는 미래 홍콩 판도에도 대응할 방법이 필요했다. 중국 정부 차원에서 신청자들을 선별해서 홍콩으로 이민을 보내는 것이었다. 처음부터 홍콩 정부는 이민자를 심사할 권한이 없었다. 누구를 보내느냐 하는 것은 순전히 중국 정부의 소관이었다.
‘신이민’ 정책은 결과적으로 중국 정부의 준비성이 돋보이는 정책이었다. 미래의 여론 주도권 다툼을 미리 대비한 것이었다. 이른바 사람으로 홍콩을 접수하는 방식이었다. 1982년부터 매일 75명, 1995년부터는 150명이 홍콩으로 들어왔다. 불완전한 통계지만 이제 홍콩 인구 7백만 명 중 40% 이상을 점유하고 있다고 본다.
2019년 홍콩에서 일어난 친중국 시위.
그들은 언어 불통, 학력, 자립심 부족, 생활습관 차이 등으로 홍콩 사회에 적응을 잘하지 못했다. 홍콩사람들은 홍콩의 사회복지 혜택만을 노린다는 의미에서 새로 이민 온 그들을 ‘메뚜기’라고 부르면서 무시했다.
하지만 그들은 태생적으로 ‘친중국’ 성향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나날이 강해지는 ‘친홍콩파’를 견제하는 세력으로 성장했다. 홍콩의 이슈에 대해 이 둘은 사사건건 대립하게 된다.
류영하(백석대학교 중국어학과 교수)
<계속>
※다음 편에서는 민족으로부터 분리된 홍콩중국인의 정체성이 생성되는 과정을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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