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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기. 이 숫자는 조선 왕족 무덤의 총 개수다. 

 

왕과 왕비의 무덤은 능(陵), 왕세자·왕세자비·후궁의 무덤은 원(園), 왕족의 무덤(광해군 포함)은 묘(墓)로 부른다. 이중 능(陵)은 42기가 있으며, 40기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2기는 북한에 있어 함께 등록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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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데, 조선왕릉을 가본 사람은 알 것이다. 도심 속의 보석 같은 울창한 숲을 제외하면, 생각보다 관람할 게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물론 그 숲 자체가 500여 년간 무수히 많은 사람의 노력이 담겨 있는 역사적 산물이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세계문화유산이 왜 이렇게 ‘심심’하냐면, 조선왕릉은 단 한 번도 석실 발굴이 없었기 때문이다.

 

평소 조선왕릉 발굴에 관심 많은 이들이 많진 않을 텐데, 여기엔 의외로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많다.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조선, 무덤에 공구리를 돌리다

 

조선왕릉은 거의 도굴되지 않았다. 공식적인 도굴 성공 사례는 단 한 차례, 조정이 의주로 빤스런한 임진왜란 시기에 발생했다. 왜군들이 선릉(성종과 정현왕후의 무덤)과 정릉(중종의 무덤)을 털어간 것이다.

 

“선릉과 정릉을 살펴보니, 선릉은 구덩이가 이미 비어 있고, 정릉은 염습한 옷은 없어지고 옥체(玉體)는 가로로 놓여 있었습니다.”

 

-1593년 4월 13일 『선조실록(宣祖實錄)』- 

 

정릉은 중종으로 추정되는 시신(당시 중종 승하 50년 후라서, 형체는 알아볼 수 없었으나 시신은 남아 있었다)은 남아 있었지만, 선릉은 탈탈 털렸다. 이것이 유일한 조선왕릉 도굴 성공 사례이다.

 

왜 고작 한 번이었을까? 가장 큰 이유는 석회의 마법에 있다.

 

선조의 무덤을 고스란히 지키고 싶은 것은 모든 왕조의 희망이었다. 조선 왕조 또한, 처음엔 석실묘(돌로 방을 만드는 무덤, 고구려부터 고려까지 한반도는 석실을 베이스로 하는 무덤 양식을 전통으로 삼았다)로 시작했다. 무덤 양식은 가장 보수적으로 변화한다. 민족이나 종교의 대격변이 발생하지 않는 이상, 묘제가 극적으로 바뀌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그런데 조선은 확 바꿨다. 

 

주희(朱熹, 1130~1200)의 예절 매뉴얼, 『주자가례(朱子家禮)』를 전 국민의 예절 교과서로 삼은 이래로, 조선은 석회를 이용한 무덤, 즉 회곽묘를 표준으로 삼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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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자가례 / 출처-<중앙매거진>

 

사실, 조선 버전의 회곽묘는 주희가 정리한 회곽묘와 조금 다르다. 조선은 주희의 회곽묘를 직접 본 것이 아니라, 텍스트를 통해 복원했다. 조선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재료와 익숙한 공법으로 제작한 것이다. 

 

그 결과, 조선 버전의 회곽묘가 등장했는데, 우연의 산물인지, 아니면 축적된 경험에 기반한 의도인지는 모르겠지만, 조선 버전의 회곽묘가 인간의 삽질로는 파는 것이 졸라 어려운, 전성기 말디니나 비디치만큼 핵딴딴한 회곽묘가 되었다는 거다. 

 

유학의 보급과 더불어, 조선 버전의 회곽묘는 왕가에서 사대부까지 널리 쓰이는 스탠다드로 자리 잡는다.

 

회곽묘의 위엄은 이내 조선 사람들에게 깊게 인식된다. 무덤에 공구리질을 해놨으니, 중장비도 없던 시절에 회곽묘 무덤을 파내는 일은 며칠 동안 쌩노가다를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이장(移葬) 절차가 복잡해진다. 무덤을 두고 고소 고발이 남발했던 조선 후기에도, 남의 묘에 자신의 선조를 몰래 묻는 일은 빈번했으나, 기존 무덤의 시선을 꺼내어 빼돌리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회곽묘의 위엄은 한차례 거센 도전을 받게 된다. 도전자는, 조선에 통상을 요구하던 독일 출신 국제 사기꾼, 오페르트가 되시겠다. 조선을 통해 한몫 잡아 보려던 이 사기꾼은 자신의 통상 요구가 지속해서 무시당하자, 씽크빅을 돌려 하나의 미친 아이디어를 떠올린다.

 

“조선 사람들은 효에 목숨을 바치니, 흥선대원군 아버지의 관을 인질로 잡아 협박하면, 개화의 문을 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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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빵 필승’이라는 인류의 유구한 격언을 그대로 실현하려 했던 것만큼은 칭찬하자. ‘진주만을 때리면, 미국이 화해의 손을 내밀지 않을까?’라던 수십 년 후의 일본제국처럼, 제국주의와 식민주의는 사람을 좀 미치게 만드는 성향이 있는 것 같다. 어쨌거나, 오페르트는 100명의 작업반을 태워 충남 예산의 남연군(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묘에 도착한다. 

 

최소 수십 명의 인원이 밤이 새도록 삽질을 했건만, 그들을 기다리던 것은 쨔-잔, 단단한 공구리였다. 이 배에는 조선의 천주교도들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들은 오페르트에게 석회의 딴딴함에 대해 분명히 전했을 것이다. 그러나 ‘묘가 두꺼워 봐야 얼마나 두껍겠어’라던 오페르트의 미친 짓은 5시간의 삽질로 끝났다. 그 이후, 오페르트가 대원군에게 보낸 편지가 걸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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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른스트 오페르트

 

 

To. 대원군 좌하

 

남의 무덤을 파는 짓이 예의 없는 행동이라는 건 알지만, 내가 군대를 끌고 와 백성들을 짓밟는 것보단 낫지 않겠소? 원래는 당신 아버지의 관을 가져오라고 했지만, 봐준 것이요. 나도 예의를 아는 사람이니까. 우리 팀이 그깟 석회 따위 못 부쉈겠소? 못 부순 게 아니라, 안 부순 거라는 점, 똑똑히 아십쇼.

 

 

미친 아이디어에 이어 미친 정신승리 역시 제국주의 시대의 전염병이었던 걸까? 여하튼, 오페르트의 미친 짓은 그 덕분에 석회의 위엄을 널리 알리게 되는 교본이 되었다. 오페르트 같은 도른자가 아니고서야, 당시 조선의 모든 공돌이가 갈아 넣어진 조선왕릉에 도굴을 시도하는 사람은 없었다.

 

 

기록으로는 알 수 없는 역사, 회곽묘에 있다

 

회곽묘 공법이 자리 잡을수록, 그 견고함도 더해갔다. 특수한 재료와 섞은 석회로 곽 주변을 돌리던 초기 방식은 훗날, 아예 석회벽을 둘러 나무곽의 역할을 대신하는 형태로 진화한다. 아무튼, 있는 대로 석회를 들이부었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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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곽묘 발굴 모습. 그냥 콘크리트 그 자체다. / 출처-<분당신문>

 

이렇게 되면, 석회가 굳으면서 주위의 수분을 흡수하고, 내부 온도는 물 끓는 온도보다 한참 높은 온도로 올라간다. 즉, 관 내부가 하나의 초고온 멸균실로 변한다. 그 덕분에, 조선의 회곽묘에서는 매우 잘 보존된 미라와 한글편지, 의복 등이 발굴되면서, 기록으로는 절대 알 수 없던 영역, 이를테면 필자 같은 사람들이 천착하는 보통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밝혀내고 있다. (묘에 목숨 걸었던 조상님들께 술잔을 치얼스!)

 

2000년대 이후, 조선의 미라만 10곳 이상에서 발굴됐다. 그 보존 상태도 가히 압도적이다. 고인의 머리카락은 물론, 심지어 장기까지 고스란히 보존되기도 한다. 고인의 살아생전 생김새가 어떠했는지, 무엇을 입고 살았는지, 사인은 무엇인지에 대한 단편적인 정보를 금세 파악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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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시기를 살다 간 송희종의 부인, 순흥 안씨의 미라

 

나아가, 고인의 발육 상태 등을 통해 당시의 삶이 얼마나 고된 것이었는지, 고인의 옷을 통해 당시 옷은 어떤 재료로 어떻게 만들었는지 추측할 수 있다. 여기에, 고인과 관련된 텍스트 자료가 ‘망자는 말이 없다’는 관념을 뛰어넘어 망자의 삶을 복원하게 해준다. 

 

그들의 시대가 지체 높은 사대부가 아니고서야 자신의 얼굴 그림 한 장 남기기 힘들었던 시대였음을 고려하면, 회곽묘가 복원한 그들의 생애는 그 자체로 우연과 신념이 결합한 기적의 소산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회곽묘는 고고학의 노다지인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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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사 교양서를 쓰고 있는, 딴지가 배출한 또 하나의 잉여 작가
딴지의 조선사, 문화재, 불교, 축구 파트를 맡고 있슴다.
이 네 개 파트의 미래가 어둡다는 거지요.

『시시콜콜한 조선의 편지들』
『시시콜콜한 조선의 일기들』
『시시콜콜 조선복지실록』
『시시콜콜 조선부동산실록』 신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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