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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인, 홍콩인, 대만인

 

중국어에 ‘화인(華人)’이라는 단어가 있다. 중국, 홍콩, 대만 그리고 해외에 거주하고 있는 보편적인 ‘중국인’을 가리키는 말이다. 중국인들은 국적으로 나를 규정하지 말라는 뜻으로 ‘나는 화인이야’라고 말한다. 

 

화인들의 두뇌(문화적 유전자)에는 ‘세상의 가운데 있는 나라(중국)’ 사람이라는 집단의식, 즉 ‘중화사상’이 자리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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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화인’이라는 ‘명분’은 지역이라는 ‘실리’와 만나게 되면 다른 모습으로 다시 태어난다. 대륙과 홍콩, 대만 사람들은 모두 중화사상을 가지고 있지만, 거주하는 지역에 따라 다시 대륙인, 홍콩인, 대만인으로 나누어진다. 

 

다른 지역에 거주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다른 역사에 노출되고, 그 역사는 대륙인, 홍콩인, 대만인이라는 각기 다른 두뇌(유전자)를 만들어낸다. 그 두뇌(유전자)는 다시 그곳 특유의 역사를 만들어낸다. 

 

대륙인, 홍콩인, 대만인. 그들의 정체성은 다르다. 이번 편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다.

 

친구와 같이 여행을 할 때 공항 대합실에서 하는 놀이가 있다. 대륙인, 홍콩인, 대만인을 나누어보는 게임이다. 우리는 옷차림과 행동거지와 말투로 그들을 가려내고 있었다. 한반도에 사는 우리는 보편적으로 ‘한국인’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지역적으로 ‘남한인’과 ‘북한인’으로 나누어지는데, 지금 이 시각에도 각기 다른 두뇌(유전자)로 재탄생되고 있는 중이다. 유학 시절, 홍콩 친구들로부터 상습적으로 받는 질문 중의 하나가 바로 ‘남한에서 왔느냐, 북한에서 왔느냐’ 였다. 나는 발끈하면서 ‘보면 모르느냐’는 말을 쏘아붙였다.  

 

미국에서 영어 회화를 배울 때, 담당 선생님은 자신을 포함한 ‘미국인’들은 ‘영국인’들과 다르다는 말을 자주 했다. 영국으로 단체여행을 가보면 확연히 다른 점을 알 수 있는데, 우선 미국인들은 영국인들에 비해 떠들썩하고 무례하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고 했다. (오해 없기를 바란다)

 

미국에서 들은 다른 이야기로는, 한국 사람이 미국으로 이민을 가거나 시민권을 신청할 때, 담당관이 미국과 한국이 축구 시합을 하면 어느 편을 응원하겠느냐는 질문을 한단다. 당연히 미국팀을 응원하겠다고 해야 짧게 끝날 수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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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또한 해외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에게 농담처럼 이런 질문을 한다. 당신은 ‘한국팀’과 지금 살고 있는 ‘국가팀’이 시합을 하면 어느 쪽을 응원하는가?  

 

관련하여 이야기를 하나 더 하자면, 시민권을 취득해 미국인이 되어 미국 정보기관에서 근무하는 ‘한국인(정확히는 한국계 미국인)’이 있었다. 한반도 관련 정보를 다루는 그는 이른바 모국에 대한 ‘애국심’ 때문에 자신이 취급하는 극비정보를 한국 대사관에 넘겼다. 

 

법정에서 그는 ‘애국심’으로 자신을 변호했지만, 실형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는 ‘한국인’일까, 아니면 ‘미국인’일까? 그는 영웅일까, 아니면 배신자일까? 

    

 

각 중국사회의 정체성은 실리적이다

 

중국 대륙은 매우 넓다. 어떤 학자는 중국 대륙이 하나의 국가로 통일된 채 유지되고 있는 사실에 높은 점수를 준다. 하지만 넓다는 것은 통치자의 입장에서 보면 다스리기가 어렵다는 뜻도 된다. 통치자 입장에서도 그렇지만 백성들에게도 안 좋은 점이 있다. 행정력으로부터 보호받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동사무소나 파출소에 가는데 하루 꼬박 걸린다면 문제는 작지 않다. 교통수단이 매우 열악했던 시절에는 목숨과 직결된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 힘도 돈도 없는 처지가 같다는 사실만으로도 사람들은 뭉칠 수밖에 없었다. 

 

중국 사회 특유의 ‘조직(방회, 幫會)’이 생기게 된 배경이다. ‘혈연’으로 뭉치면 종친회가 되고, ‘지연’으로 뭉치면 ‘향우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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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필라델피아의 차이나타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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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멜버른의 차이나타운

 

우리 ‘동네’와 우리 ‘고향’ 같은 지역성은 가장 보편적인 정체성이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지역’을 떠나서는 생존할 수 없다. 인류 역사를 살펴보면 지역 중심으로 생존해왔고, 세계 어디에서나 ‘지역’은 정치경제의 중심에 있다. 

 

이렇게 보면 지역적인 정체성은 ‘실리’의 분야에 속한다. 문제는 ‘지역주의’에 기생하는 ‘전근대성’과 ‘배타성’인데, 그 속에는 ‘비합리’는 물론 ‘우리끼리’라는 유치함이 가득하다. 

 

낯설고 물 선 지역(외국)에서 믿을 수 있는 것은 우선 가족이고, 그다음에는 생사를 같이 하기로 한 조직이고, 그다음에는 같은 사투리(언어)를 사용하는 고향 사람들이다. 그들은 같은 성씨, 같은 ‘조직’, 같은 고향으로 뭉쳤던 것이다. 

 

머나먼 이국땅에서 중국인들은 텃세에 대항하며 서로 돕고 의지하면서 뿌리를 내리고 자리를 잡았다. 세 가지(가족, 조직, 언어) 모두 명분처럼 보이는 정체성이지만 사실은 매우 실리적인 정체성이다.

 

결과적으로 동남아의 중국인들은 그 나라의 경제권을 장악하게 되었고, 그 힘을 바탕으로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미주에 살고 있는 중국인들 역시 종친회나 향우회를 통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고 있다. 중국인들의 단결력은 이제 이탈리아계 마피아조차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는 수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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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방콕의 차이나타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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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뉴욕의 차이나타운

 

홍콩에서도 중국인 향우회의 단결력은 막강해서 어느 향우회는 바로 삼합회(三合會) 같은 ‘조직’으로 치부되기도 한다. 홍콩에서는 자신이 어느 향우회 소속이라는 점만 밝혀도 자신과 사업이 보호받을 수 있다. 지연이라는 ‘실리’를 다른 지역인 홍콩까지 연장시킨 결과이다. 거대 재벌의 출현은 시간문제였는데, 홍콩의 재벌치고 ‘조직’이나 향우회의 지원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다는 말은 더 이상 비밀도 아니다.    

 

 

홍콩인의 ‘민족의식’ 초기 성장사       

 

해외에서 ‘집단기억’을 유지하고 확산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하는 것은 (모국어로 된) 언론이다. 홍콩의 첫 번째 중국어 간행물은 1853년에 창간한 『하이관진遐邇貫珍』이었다. ‘멀고 가까운 보물 꼬치’라는 뜻의 이 신문은 중국인들의 계몽에 큰 공헌을 했다. 

 

1857년에는 『홍콩 세계 뉴스 香港中外新聞』, 1872년에는 『중국어일보 華字日報』, 1874년에는 『순환일보 循環日報』 등이 속속 창간되었는데, 이들은 청나라 정부의 개혁을 요구하는 논평을 많이 실었다. 특히 중국인 차별을 비판하고, 식민 통치를 감시하는 역할에도 충실하여 홍콩인들의 ‘민족의식’ 고양에 앞장섰다. 

 

그들은 민족의 자주, 중국문화 수호, 중국인들의 이익 보호를 목적으로 했다. 즉 ‘명분’과 ‘실리’ 모두를 추구했다. 바야흐로 언론의 노력, 중국인의 경제력, 중국인 차별, 국내 혁명의 영향 등으로 홍콩의 중국인 사회에서 민족의식이 성장하고 있었다. 

 

1911년 10월 10일 공화제를 추구하는 ‘신해혁명’ 발발 소식이 홍콩에 전해졌다. 당시 총독은 순식간에 도시가 끓어오르는 것이 ‘불가사의’ 했다고, 중국인들이 미친 듯이 기뻐했다고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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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해혁명 성공 후, 찍은 혁명 주역들의 단체 사진. 앞줄 가운데 손문이 있다. 

 

시위대는 중국은행과 청나라를 지지하는 신문사로 몰려가서 청나라의 황룡기를 내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동화의원(4편 참조)을 비롯한 중국인 사회가 나서서 피난민을 구휼하고, 학생들과 상인들은 혁명군을 위한 모금을 하고, 이발사들은 무료로 변발을 잘라주고, 기녀들은 수입의 절반을 혁명 사업에 기부했다. 

 

한족이 중심이 된 신해혁명에 고무된 홍콩 중국인들의 민족의식은 만주족 다음으로 이제 영국인을 몰아내야 한다는데 까지 내달렸다. 상황은 심각해지기 시작해서 군중들이 상점을 약탈하기도, 경찰을 향해 돌을 던지기도, 폭탄을 제조하는 공장이 발각되기도 했다. 심지어 감옥을 공격하기도, 홍콩 총독 암살을 기도하기도 했다. 

 

‘민족의식’으로 무장한 혁명파의 과격한 행동은 역효과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혁명파가 주장하는 공화제에 반대하고, 영국과 같은 입헌군주제를 도입하자는 주장이 사람들 사이에 힘을 얻기도 했다. 

 

이런 분위기 때문에 1913년 6월 홍콩을 방문한 손문이 중국인들로부터 냉대를 받았고, 홍콩영국 정부와 홍콩의 중국인 엘리트들은 중화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에 오른 원세개(袁世凱)를 지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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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세개 (혹은 '위안스카이'라고도 한다)

 

중국에서 신해혁명이 성공하자 홍콩영국 정부는 혁명파의 활동에 대하여 온 신경을 곤두세우기 시작했다. 날로 증폭되는 혁명 분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1913년에는 모든 학교를 관리할 수 있는 ‘교육조례’를 제정하고, 1914년에는 언론 질서를 위한 ‘간행물 조례’를 제정했다.

 

 

1925년 홍콩 대파업은 중요한 ‘집단기억’이 되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이후 홍콩의 물가가 폭등했고, 홍콩 노동자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졌다. 중국 노동운동의 영향과 좌파의 활동으로 노동조합이 속속 결성되기 시작했다. 1920년 3월 홍콩의 ‘중국인 기계 노동조합’이 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파업에서 승리하자 몇 개월 만에 80개의 노동조합이 태어나기도 했다. 

 

홍콩영국 정부도 이런 흐름에 대응하여 주둔군을 증원하고, 정보기관의 정보 수집 능력을 개선하는 동시에 시민들의 복지를 위해 연료공급을 개선하는 등 생활의 불편을 해소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중국 상하이에서 큰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1925년 상하이의 일본계 공장에서 분규가 발생했고 노동자가 피살되었다. 5월 30일 대규모의 항의 시위가 열렸고, 시위대와 영국 경찰이 충돌하여 수십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중국 현대사를 뒤흔든 ‘5·30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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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0 운동. 5·30 사건을 계기로 중국 전역으로 확산된 반제국주의 민중운동. 5.4 운동 이래 중국에서 발생한 최대 민중 운동이었다. 소규모 조직에 불과했던 중국 공산당은 이 운동을 계기로 이 중국 각지에 영향력을 확대했다.

 

6월 19일 홍콩도 총파업에 들어갔다. 아래 파업지도부의 요구사항을 보면 당시 홍콩 사회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1. 여덟 시간 노동, 연소 노동자 폐지

2. 언론, 출판, 결사의 자유

3. 중국인 입법국 의원에 대한 노동조합의 투표권 

4. 중국인과 유럽인의 동등한 대우

5. 중국인이 빅토리아 산정에 거주할 권리

 

노동 조건 개선에 민족 차별 금지 즉 정치경제적 평등을 요구한 것이다. 당시 홍콩 사회의 가장 큰 갈등이 ‘계급’과 ‘민족’이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즉 계급과 민족문제가 식민지 홍콩 사회의 현안으로 등장한 것이다. 그때나 이후에나 이 두 가지는 홍콩이라는 지역 사회의 약점이었다.  

 

1925년 6월 21일 홍콩영국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했다. 홍콩영국 정부는 의용군을 동원했고, 식량, 자본의 유출과 거주민의 홍콩 이탈을 금지했다. 

 

파업 반대 여론을 조성하기 위해 중국인 재벌과 중국인 의원을 중심으로 『공상일보工商日報』를 창간했다. 또한 파업 지도부가 노동자들의 이탈을 감시하기 위해 만든 ‘노동자 규찰대’를 견제하기 위해, 깡패와 해적을 고용하여 ‘공업 유지회’라는 비밀조직을 만들기도 했다. 

 

홍콩의 선원, 전차 노동자, 인쇄 노동자 등은 대규모로 광저우로 들어가서 6월 23일 대륙의 노동자들과 연대 시위를 했다. 그리고 곧 영국과 프랑스 해병대의 발포로 50여 명이 사망했다는 소식이 홍콩으로 전해졌다. 

 

언제나 어디서나 그렇듯이 정부와 파업지도부는 치열한 선전전을 전개했다. 파업지도부는 영국인과 그들의 ‘주구(走狗)’를 몰아내기 위해 싸우자는 전단지를 뿌렸고 대자보를 붙였다. 주구(走狗)는 ‘달리는 개’ 즉, 영국인 주인을 위해 달리는 중국인 개(앞잡이)를 말한다. 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중국에서도 최고 수준의 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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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대가 파업 당시 배포한 팜플렛

 

중국인인 입법국 의원 두 명이 (목숨을 내놓으라는) 협박 편지를 받기도 했고, 그들의 머리에 현상금이 걸리기도 했다. 홍콩 사회를 위해 일하는 중국인들은 이제 ‘민족’과 ‘계급’의 적이 되어 버린 것이다. ‘민족’은 이렇게 분리되고 있었다.  

 

파업지도부는 영국제품에 대한 불매 운동을 벌인 것은 물론, 홍콩영국 정부가 수원지에 독을 풀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려서 노동자들의 홍콩 이탈을 유도하기도 했다. 교통편의(기차 편과 선박 편)를 제공하였고, 그 결과 두 달 만에 25만 명이 홍콩을 떠나 광저우로 갔다. 

 

1년 이상 지속된 대파업 때문에 무역량이 50%가 감소되는 등 홍콩경제는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1926년 7월 광저우 국민정부가 북벌을 시작하면서 대파업이 서서히 끝났다. 대파업은 홍콩 역사에서 중요한 분기점, 즉 거대한 ‘집단기억’으로 남는다. 

 

본 기사를 읽는 독자들께 아래 세 가지 흐름을 기억해달라고 부탁하고 싶다. 언제 어디서나 모든 이슈에는 ‘찬성’과 ‘반대’ 그리고 ‘중도’라는 의견이 나온다. 평소 여러분은 어느 쪽인지를 묻고 싶다. 

 

1. 파업 찬성파 – 중국 광저우 국민정부를 지지하며 파업에 찬성하는 노동자와 학생

 

2. 파업 반대파 - 홍콩영국 정부를 지지하여 파업에 반대하는 상인들과 우파 노동자

 

3. 파업 중도파 – 자신들의 생계를 우선 고려하는 상인과 노동자. 광저우까지 가서 파업에 가담한 노동자들은 생계 곤란으로 다시 복귀하고 싶었으나 ‘노동자 규찰대’에 의해 저지당한다.

 

사건사고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나 입장 즉 두뇌구조도 대체로 이 세 가지와 궤를 같이한다. 나는 지난 편에서 진보적 두뇌(유전자)는 조금 더 낭만적이고, 보수적 두뇌(유전자)는 조금 더 현실적이라고 했다. 즉 가족이 원하거나 고향 친구가 도와달라고 할 경우 바로 나서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나한테 돌아올 실제적인 이익을 꼼꼼하게 따져보는 사람도 있다. 그런 것들이 그 사람의 입장을 결정하고, 그것들이 모여서 그 사람의 정체성이 된다. 당시의 홍콩이 그랬다.  

 

누구는 같은 민족이라는 말만 들어도 눈물을 흘리고, 누구는 내 목구멍이 포도청인데 민족이 무슨 소용이냐고 한다. 누구는 ‘그때 그곳’ 즉 중국에 연연하고, 누구는 ‘지금 여기’ 즉 홍콩에 충실하고자 한다. 또 누구는 ‘그때 그곳’도 중요하고, ‘지금 여기’도 중요해서 엉거주춤한 상태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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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 모두가 1925년 홍콩의 대파업으로 돌아간다면, 우리는 파업을 지지할까, 반대할까, 아니면 적당한 거리를 두고 있을까? 나아가서 여러분이 대파업의 역사를 서술한다면 어떤 입장에 설까? 

 

 

홍콩, 중화민족에서 이탈한 ‘지역 공동체’가 되다

 

장기간의 파업에 반대하는 흐름에 주목해 보자. 파업에 반대하는 이들을 중심으로, 식민 주체인 홍콩영국 정부와 일체가 되는 ‘홍콩’이라는 지역주의가 이때 만들어지고 있었다. 강고한 ‘중화민족’에서 이탈한 ‘홍콩인’이 점점 많아지고 있었다. 대파업은 지역 공동체로서 ‘홍콩’이라는 존재(정체성)를 확인시켜주었다.

 

중국인과 혼혈아 등이 홍콩영국 정부의 의용군에 가입하는 붐이 일기도 했는데, 그들은 우체국, 소방대, 병원에서 자원봉사를 하거나 전차 운전 등 파업 노동자의 빈자리를 채우는 등 사회 질서 수호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동화의원에서는 식량을 염가로 판매하고, 중국인 상인 지도자들은 베트남,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등지에서 식량을 구해오기도 했다. 

 

대파업이 끝나고 홍콩영국 정부가 추진한 조치들을 보면 대파업의 성격을 알 수 있다. 홍콩영국 정부는 우선 대파업을 중국공산당의 선동에 의한 공산주의 운동이라고 보고 대응했다. 홍콩으로 도피해온 공산당의 지도자들을 체포하여 국민당 정부에 인계하기도 했고, 공산주의 관련이나 제국주의 반대 서적을 들여오면 몰수하고 벌금을 부과했다. 

 

더불어 홍콩영국 정부는 ‘중국인으로 중국인을 통치한다’는 ‘이화제화’의 원칙에 더욱 충실하고자 했다. 그것이 ‘민족’으로부터 ‘홍콩인’을 분리시키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중국인 엘리트들의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해 공립 중국어문중고등학교를 설립하는 등 중국어교육과 중국전통교육을 중시하고, 처음으로 중국인을 행정국 의원으로 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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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 홍콩

 

‘집단기억’은 어떤 사람에게는 영광으로, 어떤 사람에게는 상처로 남는다. 대파업의 기억은 누구에게는 열악했던 노동환경이 개선된 기쁨으로, 누구에게는 자신의 사업이 낭패를 당한 슬픔으로, 누구에게는 집단폭력에 대한 분노로 남는다. 

 

이런 기억들이 각자의 두뇌(유전자)에 각인되어 이후 홍콩에서 발생하는 사건사고의 성격에 따라 (그때그때 다른 비율로) 반응(확대 또는 축소)하는데, 이런 것들이 모여서 ‘홍콩’과 ‘홍콩인’의 정체성을 만들게 된다. 또 하나의 지역적 정체성이 만들어지고 있던 것이다.

 

다음 편에서는 일본통치와 홍콩 정체성의 관계에 대해서 알아보겠다.

 

류영하(백석대학교 중국어학과 교수)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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