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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배합에 관한 환상 

 

야구단에 입사하기 전 내가 얻을 수 있는 야구에 관한 정보는 스포츠 신문이나 중계방송에서 해설 위원들이 얘기해주는 게 전부였다. 그런 정보만 아무런 의심 없이 습득했다면 나도 야구에 대해 특별히 다른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외국인 선수를 만나면서, 메이저리그 기사, 메이저리그 칼럼니스트의 글들을 보면서 다른 시각으로 야구를 바라보게 되었다. 신문이나 야구 중계방송에서 많이 나오는 말이 있다. 볼배합. 국내 야구에 대한 의심 없이 바라봤다면 나도 볼배합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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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연합>

 

야구단에서 일하면서 지도자들에게 볼배합에 대해 질문을 많이 했었다. 대부분 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볼배합에 정답은 없어!”

 

하지만 포수들이 힘들어하는 건 항상 결과 가지고 지적받는 거였다.

 

“왜 그때 직구를 던졌나”

 

“그때 이거를 던졌어야지”

 

등등 항상 던지고 나서 하는 얘기들이 대부분이었다.

 

결과론과 싸우는 선수들

 

한 포수가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볼배합에는 정답은 없지만 정석은 있다고 배우죠. 그렇지만 결과가 좋지 않으면 왜 그걸 던졌냐고 지적을 받아요."

 

그렇다. 단 한 번도 왜 정석대로 하지 않았냐는 얘기를 하는 지도자를 본 적 없다. 그 포수는 웃으며 말했다.

 

"볼배합은 항상 안타 맞고 나서 배우는 거죠."

 

한 번은 코칭스텝이 모여서 볼배합에 대한 토론을 하는 시간을 가진 적이 있다. 그때 당시에는 투수코치와 배터리코치 사이에 의견이 일치하지 않아서 같이 모여서 머리를 맞대고 얘기해보자는 아주 건설적인 시간이었다.(사실 야구단에서 이런 토론 시간 가지는 게 아주 드문 일이다.)

 

이 당시 투수코치는 투수들이 직구를 좀 더 많이 던지길 원하였고, 배터리 코치는 변화구 사인을 포수에게 많이 내던 중이었다. 각자의 의견을 얘기하고 있었는데 배터리 코치가 이런 얘기를 했다.

 

"타자가 직구를 노리고 있는데 직구를 어떻게 던져?"

 

"직구 타이밍에는 변화구를 던져야 한다"

 

이런 주장을 하였다. 선수 출신도 아닌 내가 손을 들고 질문을 했다. 나의 질문은 이랬다.

 

"코치님은 타자가 직구를 노리는지 어떻게 아세요?"

 

"그리고 우리 팀에서 제일 잘 치는 타자한테 물어보니 80%는 직구를 노리고 있다고 얘기하던데, 그럼 80%를 변화구로 던져야 하는가요?"

 

극한직업, 포수

 

나에게 볼배합에 대한 다른 얘기를 해준 외국인 선수가 있다. 영어로는 Pitch sequence라고 얘기했다. 이런저런 얘기를 듣다가 그에게 물었다.

 

"어릴 때부터 그런 걸 배워왔으면 타자도 배우지 않았나? 그럼 서로 다 알고 하는 싸움 아닌가?"

 

그랬더니 그 외국인 선수는 맞다고 했다. 타자가 어떤 생각으로 타석에서 투수를 상대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그전에 던진 공에 대한 반응을 보고 그 다음공을 선택한다는 것이었다. 직구에 스윙을 했으니 다음에 변화구를 던지는 그런 얘기는 아니었다. 타자가 투수와의 타이밍을 어떻게 잡고 있는지, 그 타이밍을 깨뜨리기 위해 구종 변화를 어떻게 하는지에 대한 설명이었다.

 

효과 구속에 대해서도 설명해주었다. 간단히 설명하면 같은 구속의 직구라도 몸쪽 공과 바깥쪽 공의 체감 스피드가 다르기 때문에 이것도 활용한다고 했다. 이때 들은 걸 국내 포수에게 얘기해 줬을 때 다들 처음 들어보는 얘기라고 했다. 그래도 요즘은 피치 터널을 강조하는 젊은 지도자가 있을 정도로 많이 발전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포수는 가장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포지션이다. 중계에서 자주 보게 되는 장면이 있다. 투수가 스트라이크를 못 던지고 있으면 포수한테 바디랭귀지를 날린다. 양쪽 주먹을 마주치며 승부하라고. 공은 투수가 던지는데 포수에게 승부하라고 하는 모습이 참 웃긴 장면이다. 포수가 볼을 던지라고 한 게 아닌데도 말이다.

 

직구를 던져 안타를 맞으면 그때 왜 변화구를 안 던졌냐 그러고, 변화구를 던져서 안타 맞으면 왜 직구를 안 던졌냐고 그런다. 얼마나 고통스러운 포지션인가. 요즘 어린 MZ 세대 투수들은 국내 최고의 포수인 양의지 선수와 해도 고개를 흔들고 본인들이 원하는 공을 던지는데도 포수에게 많은 부담을 주고 있다. 결과론으로 포수에게 지적을 할 때마다 마음속으로 이렇게 외쳤다.

 

제발 투수가 던지기 전에 그 사인을 주면 되지 않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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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NC DINOS>

 

독박 야구, 텔레파시 야구

 

얼마 전 이런 기사가 났다.

 

A 선수 교체 미스터리 풀렸다. B 감독 "쓰리볼 타격, 상황에 맞지 않았다“

 

A 선수가 팀이 지고 있는 3볼 0스트라이크 상황에서 스윙을 했는데 결과가 좋지 않아 문책성으로 게임에서 뺐다고 한다. 볼넷으로 출루할 수 있는 확률이 높은데도 타격을 하여 결과가 좋지 못했던 것이다. 난 이런 상황을 정말 많이 겪었다. 그럴 때마다 선수에게 책임을 묻고, 다음날 기자들에게 선수의 잘못이라고 인터뷰하는 감독들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주 비겁하다고 생각한다.

 

플레이를 하고 있는 선수와 감독이 경기 중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은 많다. 타자와 소통의 방법은 3루 작전 코치를 통해 할 수 있다. 만약 감독이 3볼 0스트라이크 상황에서 타격을 하기를 원하지 않으면 사인을 내면 되는 것이다. 모든 팀들이 3볼 0스트라이크 상황에서 주고받는 사인이 있다. 흔히 히팅 사인, 웨이팅 사인이라고 불리는 사인이다. 선수가 타격을 하지 않기를 원하면 웨이팅 사인을 주면 되는 것이다.

 

만약 A 선수가 웨이팅 사인을 냈는데 타격을 하였다면 문책을 할 수가 있다. 지시사항을 불이행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문화에서 웨이팅 사인을 냈는데 히팅을 할 선수는 그렇게 많지 않다. 그리고 만약 웨이팅 사인을 무시하고 타격을 했다면 감독은 사인미스라는 인터뷰를 했을 것이다. 그 순간 웨이팅 사인이 나지 않았다면 히팅 사인이라고 모두가 생각한다.

 

내가 이런 상황에서 선수를 나무라는 감독을 비판하는 이유는, 그 순간에 사인을 주지 않았으면서 결과가 좋지 않은 것에 대해 선수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3볼 0스트라이크 상황에서 A 선수가 타격을 하였고, 그 결과가 안타나 홈런이었으면 아마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감독 자신이 지시한 내용을 선수가 이행을 했는데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선수가 지고, 모든 야구팬이 알 수 있게 다음날 기자들에게 그 선수의 잘못에 대해 이야기하는 건 정말 보기 불편하다.

 

감독은 아마 이렇게 이야기했을 것이다. A 선수 정도 되는 베테랑들은 상황을 알아서 잘 판단해서 행동했어야 한다고. 하지만 그 순간 A 선수는 그 상황에서 타격하는 게 옳은 방법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다만 감독이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 뿐이다. 한국에서 훌륭한 야구선수가 되려면 사인을 주지 않는 지도자의 마음까지 꿰뚫어 읽을 수 있는 텔레파시 능력이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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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연합>

 

어느 전력분석회의

 

한 선수가 면담을 요청했다. 전력분석팀에서 초구를 치지 말라고 했다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되냐는 하소연. 초구를 건들지 말라는 얘기를 들으니 한가운데 공이와도 방망이가 잘 안 나간다는 것이다. 말 한마디가 결과는 이렇게 무섭다.

 

초구 타율이 얼마길래 그러냐고 하니 0.273 라고 했다. 숫자를 듣자마자 11타수 3안타가 떠올랐다. 내가 버럭 화를 내며 11타수 3안타 기록 가지고 너보고 초구를 치지 말라는 게 말이 되냐고 했다. 한 타석만 빼면 10타수 3안타에 3할인데, 3할이었으면 그런 말 하지 않았을 거 아닌가?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상황인가. 얼마 되지도 않는 표본을 가지고 얘기하는 것도 모자라, 선수에게 초구를 치지 말라는 말 한마디가 어떤 영향을 미칠지 전혀 고민을 하지 않고 얘기한다는 것에 너무 화가 났다.

 

어느 날 감독님께서 특정 선수가 투구 수 70개 이후에 결과가 계속 안 좋으니 전력분석팀, 투수코치, 배터리코치, 트레이닝 코치가 모여서 문제를 찾아보라고 했다. 미팅하기 전날 전력분석팀에서 분석한 자료를 받았다.

 

전력분석팀은 대부분이 야구선수 출신으로 구성되어 있다. 매일매일 선수들과 코칭스텝에게 필요한 데이터를 제공하고, 영상 분석 업무도 하는 팀이다. 감독님이 분석해보라고 한 이유는 전년도보다 결과가 좋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전력분석팀에서 분석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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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BIP- 인 플레이된 타구 중 안타 된 비율

 

 

방어율은 2점 이상이 높았다. 하지만 삼진 비율은 좋아졌고, 볼넷 비율도 작년에 비해 월등히 좋아진 것이었다. 홈런 비율도 좋았고. 암튼 모든 기록이 작년보다 좋아졌는데 단 하나 BABIP 수치가 나빠진 것이었다. 그리고 당해 연도 70구 이전과 70구 이후의 데이터도 거의 비슷하게 나오고 있었다. 단 70구 이전에 비해 슬라이더 비율이 14% 정도 증가된 것이 눈에 띄었다. 이런 데이터를 각각의 코치들이 받은 다음 문제점을 어떻게 해결할지에 대해 의논하기 시작했다.

 

투수코치는 투수의 메커니즘을 얘기하기 시작했고, 배터리 코치는 볼배합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이때 정말 많은 고민을 했었다. 나의 생각을 얘기할까 말까 하면서. 내 생각을 얘기하고 나면 투수코치, 배터리코치, 전력분석팀 이랑 사이가 또 멀어질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더 이상 트러블 메이커로 살고 싶지 않아 그냥 듣고만 있으려다가 선수에게 안 좋은 영향이 있을 것 같아 입을 열었다.

 

진짜 데이터를 읽어야 한다

 

나의 반론은 이랬다.

 

첫째, 그 자리에 있던 데이터 전문가에게 BABIP가 작년보다 안 좋아졌는데 다음 게임에 좋아지게 할 수 있는 방법을 물었다. 당연히 없다고 했다.

 

두 번째, 70구 이후 슬라이더 비율이 14% 정도 증가했는데 개수로 몇 개를 더 던진 거냐고 물었다. 대답을 못해서, 난 대충 계산하니 슬라이더를 70구 이전보다 2개 더 던지고 직구를 2개 덜 던진 건데 이게 어떤 문제가 있으며, 이걸 개선하기 위해 투수가 어떻게 마운드에서 개수를 세고 던지냐고 물었다. 14%로 표시하니 많은 차이가 나는 거 같지만 사실 2개 차이밖에 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배터리 코치는 볼배합을 얘기했고, 투수코치는 나에게 비야구인이 모르는 야구 선수들만이 느끼는 그런 게 있다며 메커니즘을 얘기했다. 난 그냥 선수에게 다음 등판 전에 선수단에 커피나 한 잔씩 돌리라고 했다. 그럼 BABIP이 좋아질 거라고. BABIP는 운이 많이 영향을 미치는 지표라 나머지 선수들에게 베풀면 하늘이 도와줄 거니까 이전까지 하던 대로 하라고 조언했다. 문제가 없는 선수에게 굳이 문제점을 찾아서 얘기해 줄 필요는 없는 거니까.

 

다음 등판에서 선수단에 커피를 돌리고 다행히 승리투수가 된 선수에게 난 이렇게 얘기했다.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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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머니볼>

 

요즘은 데이터 야구 얘기를 많이 하고 있다. 하지만 데이터를 정말 잘 활용하고 있는지는 개인적으로 의문이다. 물론 과거에 비하면 엄청 많이 발전하긴 했다. 하지만 아직 투수 교체를 할 때 대기하는 투수가 상대 타자와의 상대 전적이 3타수 1안타로 피안타율이 0.333라 투수 교체를 하면 안 된다고 감독에게 조언하는 전력분석원도 있고, 우리 팀 투수와 상대팀 타자의 전적이 3타수 2안타로 표시된 기록에 빨간펜으로 동그라미를 치는 지도자도 있다.

 

무시할만한 표본의 데이터는 과감하게 무시할 수 있는, 그런 지도자가 그런 야구인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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