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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때까지 검사나 해라

언젠가 읽었던 고 박완서 작가의 칼럼 중 흥미로운 대목이 있었습니다. 그 칼럼의 화두는 80년대의 어느 법정에서 튀어나온 누군가의 중얼거림이었습니다. 어느 날 박완서 작가는 법정에 참석해 이른바 운동권 학생들의 좌경성과 용공성을 준엄하게 논고하고 징역 몇 년을 아무렇지도 않게 때려 버리는 검사를 목도합니다. 그런데 역시 논고를 듣던 한 방청객이 이렇게 뇌까립니다.

 

“죽을 때까지 검사나 해라.”

 

당시 유행하던 저주(?) 중 하나가 “죽을 때까지 설사나 해라.”였으니 비슷한 말일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뭔가 어색하죠. 누군가는 평생을 바쳐 피땀 흘려 공부하여 따낸 타이틀이며, 새파란 나이에 영감님 소리를 들으며 수십 년 한 세상을 보낼 수 있는 대단한 ‘검사’를 죽을 때까지 하라는 것이 저주일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검사가 들었다고 해도 ‘모욕죄’로 기소할 리 없는 ‘저주’였지요. 박완서 선생님이 이 중얼거림을 어떻게 해석하고 유려하게 풀어나가셨는지는 애석하게도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오늘 저는 그 ‘저주’가 사실상 ‘저주’였음을, 그것도 매우 극악하고 비인간적인 저주였음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전직 검사로 ‘검사내전’이라는 책까지 썼던, 부당한 개입을 시도하는 정권에 맞서다가 사표를 내자 무려 660여 명의 검사가 지지댓글을 달았다는 ‘검사의 전범’이라 할 김웅 의원을 보면서 그렇게 생각하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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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웅 화법, 회사에서 쓰면 잘릴걸? 

이번 고발장 사태에 윤석열 후보를 끌어들이는 것은 아직은 시기상조라고 생각합니다. ‘미루어 짐작하여’ 사람을 몰아붙이고 밟아대는 것은 검찰의 방식이었지 민주공화국의 방식일 수는 없기 때문이지요.

 

다만 검사라는 사람들이, 정부여당에 반발하여 야당 의원 후보로 나선 전직 검사에게, 야당 진영이 입맛을 다시는 인물들에 대한 고발장을 상세히 작성하여 넘겼는가 하는 아주 단순한 사안의 진상은 빨리 입증이 돼야 합니다. 이 자체로 국기문란이고 기소권과 수사권을 지닌 검찰의 정치 개입이며, 나아가 검찰이 정보력과 정치력(?)으로 얼마든지 국민의 주권을 농락할 수 있음을 여실히 보여 준 중대사안이니까요.

 

여기서 두 검사가 등장합니다. 하나가 손준성 현직 검사, 또 하나는 김웅 전직 검사이자 현직 국회의원. 손준성 검사는 이미 깔끔하게 부인했습니다. 자기가 쓴 게 아니라는 거죠. 그럼 이 말에 책임을 지면 됩니다. 거짓말을 했으면 자리보전은 고사하고 동료가 쓴 조서에 지장을 찍어야 할 신세가 될 겁니다. 차차 밝혀지겠죠.

 

그런데 그 문건을 받았다는 김웅 검사를 며칠간 지켜 봤는데 도무지 그토록 정의롭고 원칙적이었으며 불의에 굴하지 않는 모습으로 검사들의 찬탄을 받았던 그분으로는 도무지 보이지 않습니다.

 

저런 논리력으로 무슨 논고를 했을까 의심스럽고, 저런 엉성함으로 누구를 수사했을까 연신 고개를 외로 꼬게 됩니다. 뭔가 말이 되는 것 같으면서도 갈피가 없고, 논리를 세우는 것 같은데 방향이 도대체 어디로 향하는지를 알 수 없습니다. 듣는 사람은 웃긴데 자기는 진지하고, 다들 답답해 죽겠는데 본인만 속시원한 것 같습니다.

 

김웅 의원의 인터뷰를 읽으며 이 화법을 회사에서 활용하면 상당히 유용하리라는 직감이 머리를 스쳤습니다. 어쩌면 김웅 검사는, 아니 김웅 의원은 횡설수설하는 게 아니라 자신을 취재하거나 심문하려는 모든 이들의 머리 속을 헝클어뜨려 제풀에 나가떨어지게 하는 고단수를 발휘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내가 저 화법만 배우면 회사에서 무슨 사고가 났을 때 본부장님이든 사장님이든 그 분노를 너끈히 감당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지요.

 

이를 테면 이런 식으로 말이죠. 김웅 의원의 화법을 회사에서 일어날 수 있는 사안에 응용해 봤습니다.

 

“이거 김부장이 작업하던 거지? 이 기안 작성해서 외부에 뿌린 게 당신 맞지? 아니 이게 대내외적으로 얼마나 파장이 큰 사업인데 이걸 뿌려댄 거야?”

 

"그게 제가 했을 수도 있고 아무개 차장이 한 걸 수도 있는데요. 제가 정확히는 기억이 나지 않는데 제가 하다가 넘겼을 수도 있고 넘긴 걸 받아서 토스만 해줬을 수도 있습니다. 분명한 건 제 책임이 아니라는 거예요. "

 

“이 친구가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여기 당신 사인이 있잖아. 전자결재를 당신이 작년 9월 1일에 했던 걸로 나와 있네. 자기가 결재한 걸 자기가 몰라?”

 

“1년 전 일이잖아요.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또 그 때 창사특집하느라고 무지하게 바쁠 때였습니다. 결재가 정신 없이 올라오고 해서 그냥 막 했을 수도 있어요. 그냥 대충 안 보고 사인하고 전체메일로 보냈을 겁니다. 아시잖아요. 그때 바빴던 거. 진짜 눈코 뜰 새 없었다니까요. 아시잖아요? 1년 전 일을 어떻게 기억합니까?”

 

“이 친구야. 이게 무슨 대충 올리는 주차 허락 업무 연락도 아니고, 루틴한 출연자 출입 요청도 아니고, 자그마치 회사 감사팀에서 온 거에 중요 표시까지 돼 있고 첨부파일도 A4용지로 수백 장인 기안이야. 제목부터 회사하고 안 좋게 나가서 우리가 예의주시하고 있는 사람 일로 명기돼 있고... 이걸 안 보고 그냥 전달만 했다고?”

 

“제가 다 보고 넘겼을 수도 있구요, 아니면 사인을 누가 대신 조작했을 수도 있어요. 아, 문건 중 일부는 제가 작성했을 수도 있어요.”

 

“도대체 뭐라는 거야. 그럼 감사팀이 보낸 문건이 아니라 당신이 작성했다고?”

 

“유도심문 하시지는 말구요. 그건 감사팀이 밝힐 문제죠. 왜 저보고 그러세요? 다 사실일 수도 있고 조작일 수도 있어요. 이거 외부에 뿌린 사람으로 짚이는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만 밝혀지면 진실이 드러날 겁니다.”

 

이쯤 되면 제 윗 사람 입에서는 쌍시옷이 들어간 말이 여럿 튀어나올 겁니다. 그런데 왕년에 논고 좀 해봤다는 검사 출신이 저렇게 한심하게 얘기하고 있네요. 동문서답에 꽈배기를 꼬고 도로아미타불을 외웠다가 ‘난 정말 몰랐었네’와 ‘그건 너 때문이야’를 돌림노래로 부르다가 ‘내 머리 속의 지우개’ 영화를 찍는데, 결국 모든 말과 노래와 연기의 주제는 ‘나는 살고 싶다’로 귀결되는 참을 수 없는 지질함까지 다 보여 주고 있는 셈이죠.

 

정치적 장난질하다 걸렸는데 물타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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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인터뷰에서 크게 웃은 대목 중의 하나.

 

“본건 고발장 등을 받았는지는 기억나지 않고 이를 확인할 방법도 없다. 이 자료들이 사실이라면 정황상 제가 손 아무개씨로부터 그 자료를 받아 당에 전달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조작 가능성을 제시하고, 명의를 차용했다는 주장도 있다.”

 

참 검사스러운 것이 본인이 피의자들을 취조하면서 무수히 들었을 말인 ‘기억 나지 않는다’를 써먹으면서, 자신의 혐의 자체를 ‘확인할 수 없는’ 영역으로 몰아넣는데, 그걸 깡그리 부인했다가는 증거가 너무 뻔하니 ‘정황상’ 내가 한 것일 수도 있다고 슬쩍 발을 뺍니다.

 

그러면서 숫제 조작과 명의 도용을 주장하며 엉뚱한 문제로 물타기를 시도합니다. 검찰이라는 국가 기관이 야당에게 고발장까지 제시하며 정치적 장난을 치려고 했다는 사안의 핵심을 희석시켜 보려는, 애처로울 만큼 찌질함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죠. 이러니 박완서 선생이 들었던 일갈이 기억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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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때까지 검사나 해라."

 

 

 

추신: 물론 김웅같은 검사만 있는 건 아닙니다. 진흙탕 속에도 연꽃은 피는 법. 대한민국 검사답지는 않지만, 진정 검사다웠던 사람도 있습니다.

 

[산하의 오역] 1964. 9. 5 검찰이 검찰다웠을 때, '아주 옛날엔 멋진 검찰도 살았다는데(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