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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는 변화를 기대하고, 누구는 더 강한 개혁을 원하고, 누구는 모든 것을 뒤엎는 혁명을 갈구한다. 상황에 대한 인식과 의지, 그것이 그 사람의 정체성이다. 서로 다른 정체성이 만나는 지점에 갈등이 기다리고 있고, 갈등의 끝에는 폭력과 전쟁이 대기하고 있다.  

 

우리가 ‘중국’이라고 부르는 국가의 정식 명칭은 중화인민공화국이다. 사회주의 국가이며, 민족의 자존심과 프롤레타리아 계급이라는 명분을 매우 중요시하는 ‘중국공산당’이 집권하고 있다. 원래 공산당은 정체성이 매우 강한 집단이다. 한꺼번에 모든 것을 뒤엎는 ‘혁명’이라는 ‘대의’를 위해 모인 정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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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10월 1일 천안문 성루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을 선포하는 마오쩌둥.

 

20세기 중반 중국공산당이 대륙의 주인이 될 경우, 사회는 어떻게 변할까 하는 것은 중국인은 물론 세계인 모두의 관심사였다. 그들이 입버릇처럼 주장하는, 중화민족의 완전한 독립을 쟁취하고, 평등하고 공평한 사회를 만들 수 있을까. 서구 제국주의에 점령당한 조차지와 조계지를 단칼에 회수할까. 영국에게 영원히 할양한 홍콩도 회수할까. 전쟁도 불사할까. 

 

(그즈음 홍콩의 우파 신문들은 홍콩을 중화인민공화국이 아닌 중화민국(대만)으로 반환해야 한다는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중국의 대홍콩 전략 : 장기 타산, 충분 이용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며 공산주의로 나아가는 직전 단계인 사회주의의 교두보가 마련되었다. 이제 혁명을 수출해야 하는 새로운 임무가 주어졌다. 우선 홍콩이 그 대상이 될 것임이 분명했다. 1949년에 홍콩영국 정부는 38개의 좌파 단체를 해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콩 좌파 조직들은 여전히 중국공산당의 ‘홍콩마카오업무위원회’의 지휘를 받고 있었다.

 

중국공산당은 홍콩 문제는 시기가 성숙할 때까지 기다려서 협상을 통해서 해결한다는 방침을 세워두고 있었다. (국공내전이 한창이던 1946년에 마오쩌둥은 영국 기자에게 영국인이 홍콩의 중국인들을 학대하지만 않는다면, 홍콩 회수에 관심 없다고 말한 적이 있다) 

 

중국인들은 한마디로 요약하는 것을 좋아한다. 방침은 ‘장기 타산, 충분 이용’이었다. 홍콩을 영국의 식민지로 그대로 두고 장기적인 계획 하에 충분히 이용하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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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관영매체 신화통신사 홍콩사무실 건물 입구. 사진은 2019년 11월, 홍콩 반정부 시위대의 공격을 받은 직후 소방관들이 피해 상황을 살피고 있는 모습이다. 

 

중국공산당은 신화통신사의 홍콩지사를 통해 해외 화교들에게 지속적으로 공산당을 선양하고 홍보했다. 화교들로부터 받는 지지와 외화를 생각하면, 현재 홍콩의 위상을 흔들 이유가 없었다. 민족의 자존심이라는 명분에 비해 경제 등의 실리가 대단히 크게 보였던 것이다. 대체로 명분을 포기하면 실리는 무한해진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고 중국 정부는 서구 제국주의와의 불평등조약을 모두 폐기한다고 선언했다. 시종일관 ‘불평등조약’의 결과물로 우선 지목되던 홍콩영국 정부는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사회주의 정권의 일거수일투족을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보고 있었고, 홍콩의 반환을 요구할 경우를 대비하여 여러 가지 시나리오를 준비하고 있었다. 최종적으로는 반환까지도 고려했다고 한다. 

 

영국의 예상과는 달리 홍콩의 운명은 현상을 유지하는 쪽으로 결정되었다. 중국이 홍콩을 회수할 여력이 없었다는 표현이 정확하겠다. 중국공산당이 사면초가 고립무원의 처지였기 때문이다. 그동안 국민당과의 내전을 치르느라 기진맥진한 데다가 중국공산당이 수립한 중화인민공화국은 세계로부터 ‘국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다.  

 

서구권 최초로 중화인민공화국을 국가로 인정한 곳은 영국이었다(1950년). 대만의 중화민국(국민당) 정부를 지지하고 있던 미국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 결정이었다. 중국과 주고받은 셈이었다. 실리와 실리의 만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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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우언라이

 

1957년 저우언라이 총리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홍콩을 외국과 경제 연계를 할 수 있는 포스트로 삼을 수 있는데, 홍콩을 통해서 외국 투자를 흡수할 수도, 외화를 벌 수도 있다.” 

 

실제로 한국전쟁 기간(1950-1953), 중국은 홍콩을 통해서 해외 물자를 구입했다. 중국 정부는 한국전쟁 기간 금수조치를 뚫고, 홍콩을 통해서 석유, 천연가스, 페니실린 등을 밀수입했고, 홍콩의 신계 거주민들은 트럭과 배를 이용하여 중국으로 팔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중국으로 실어다 팔았다.

  

 

홍콩에 대한 삼국(영국, 중국, 미국)의 입장

 

중국은 초기에는 국가로 인정받지 못해서, 나중에는 스스로 대문의 빗장을 닫아걸었기에 ‘죽(竹)의 장막’이라고 불렸다. 경계를 마주하고 있는 홍콩은 중국이 아니면서 중국을 가장 잘 알 수 있는 곳이 되었다. 중국 안에서 보는 중국보다 홍콩에서 바라보는 중국이 더 정확하다 할 정도였다. 

 

홍콩은 중국의 변경, 서구의 변경으로서 서로가 대치하는 경계였다. 중국에게는 세계로 통하는 문이었고, 서구에게는 중국을 감시하는 틈이었다. 역사학자 저우쯔펑(周子峰)은 영국과 중국 그리고 미국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의) 홍콩을 아래와 같이 정리했다. 

 

이 관점은 지금까지도 유효하다고 할 정도로 홍콩을 둘러싸고 전개되는 3개 국가의 입장을 잘 대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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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국: 홍콩에서 자신의 이익을 생각해야 하고, 미국을 도와 중국을 견제하고 싶었다. 동시에 미국의 세력 확장을 경계했다. 

 

2. 중국: 홍콩을 세계와 통하는 정치·경제적 통로로 삼고, 홍콩을 통해 영국과 미국의 동맹 관계를 약화시키고 싶었다. 중국은 언제나 홍콩은 미 제국주의의 포스트이고, 영국은 미국의 주구라고 비판했다. 

 

3. 미국: 중국을 감시, 견제하고 포위하는 전초 기지로 삼았다. 홍콩 주재 미국총영사관은 세계에 나가 있는 총영사관 중 최대 규모로 운영되었다(중국에 대한 미국의 정보 대부분이 홍콩에서 나온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미국의 아시아 정책에 대한 영국의 지지를 끌어내는 카드였다. 

 

 

홍콩에서 격해지는 좌우 정체성 충돌 

 

1950년 전후 국민당 군인과 인사들이 대거 홍콩으로 피난왔다. 임시 난민 캠프에서 좌우파는 수시로 충돌했다. 1950년대에는 대만(국민당)의 ‘대륙 수복’ 방침으로 홍콩에서도 국민당과 공산당은 첨예하게 대치했다. 1955년 국민당의 작전은 인도네시아로 가는 중국대표단이 탄 비행기를 폭파하는데까지 나아갔다. 

 

1956년엔 홍콩에서 대만(중화민국)의 국기인 ‘청천백일기’가 훼손되자 우파가 폭동을 일으켰다. 좌파의 상점을 약탈하고 좌파를 살해했다. 좌우 노동자는 물론이고 폭력 조직까지 총출동하였고, 스파이들이 배후에서 조종하여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경찰의 발포로 59명이 사망했다. 중국 저우언라이 총리의 항의로 홍콩영국 정부는 소요 주동자 등 3천 명을 체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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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당시 폭동 진압을 위해 파견된 홍콩 왕립 경찰들.

 

이렇게 좌우가 이렇게 극심하게 충돌하는 국면을 맞이하며, 홍콩영국 정부는 ‘탈이념’ 교육의 필요성을 느꼈다. 시행을 서둘렀다. 좌우의 정체성을 희석시켜야 했다. 중국, 대만과는 차별화된 정체성 교육으로 홍콩인들을 정치로부터 분리해야 했다. 

 

1952년부터 교육과정에서 중국 역사와 중국어문을 검토하기 시작했었고, 중국문화 교육에 치중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중국의 우수한 문화로 중국과 대만이 강조하는 당파적 정체성을 극복하고자 했다. 보편타당한 명분으로 극단적인 명분을 희석하고자 한 것이다. 

 

변화와 개혁과 혁명에 대한 정체성이 극단적으로 충돌한다면, 우선 양쪽이 인정할 수밖에 없는 공통분모부터 찾는 것이 좋다. 홍콩인들이 배우고 익힌 중국문화는 보편타당한 인류애 차원이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중국어 소통 능력을 배양하면서도 중국 전통사상과 고전문학을 중시하고 교과서 심사를 강화했다.   

 

하지만 중화인민공화국의 국민들과 마찬가지로 새롭게 출발한 사회주의 조국에 대한 홍콩인들의 기대는 나날이 커졌고, 대륙의 통일은 중국인으로서 홍콩인들의 애국심을 지속적으로 소환했다. 게다가 식민주의와 자본주의로 상징되는 홍콩의 특수성은 언제나 인종차별과 부정부패라는 유전자를 보유하고 있었다. 물가 상승과 노동자 생활의 악화 등으로 좌파 노동조합의 영향력도 갈수록 커지고 있었다.

 

중국공산당의 선전·선동도 집요하게 전개되었다. 1950년대에는 홍콩에서 『문회보文匯報』, 『대공보大公報』, 『신만보新晚報』 등 친중국계 좌파 신문이 발행되기 시작했다. 국민당도 홍콩에서 『홍콩시보香港時報』, 『공상일보工商日報』, 『성도일보星島日報』 등 친대만계 우파 신문들을 창간하고 선전전에 총력을 기울였다. 

 

미국 역시 홍콩을 세계 반공 선전 기지로 삼았기에 우련출판사(友聯出版社)를 통해 『중국학생주보中國學生週報』, 『아동낙원兒童樂園』, 『대학생활大學生活』 등의 신문 잡지를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홍콩 주재 미국 공보처는 작가들의 반공 작품 창작을 지원하였고, 선전 잡지 『금일 세계今日世界』 등을 발행했다. 

 

1957년 홍콩에는, 중국어와 영어 등을 합쳐 무려 42개의 신문이 발행되었다.

 

 

문화대혁명, 홍콩으로 들어오다

 

1965년 홍콩에서는 스타 페리 요금 인상에 항의하는 대규모 폭동이 발생하였다. 이로 인해 1,465명이 체포되었다. 스타 페리 요금 인상 항의에서 출발한 폭동은 그동안 쌓여온 빈부격차와 부정부패에 대한 불만을 분출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그즈음 중화인민공화국에서도 인민공사의 실패와 자연재해로 수백만 명의 아사자가 발생했다. 

 

마오쩌둥은 집권 이후의 최대 위기를 사회주의 정체성을 극단화하는 운동으로 돌파하고자 했다. 사회주의 정체성이라는 명분은 나날이 증폭되어 다시 ‘혁명’을 소환했다. 마오쩌둥을 ‘미신의 정도까지 믿어라’, ‘맹종의 정도까지 복종해라’는 말을 한 커칭스(柯慶施)가 하루아침에 정치국 위원으로 출세하는 세상이었다. 

 

1966년, 중국에서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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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홍위병이 하얼빈 시장의 머리카락을 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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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 사당을 해머로 부수고 있는 홍위병들.

 

사르트르 등 좌파 사상가들로부터 인류 역사상 한 번도 시도되지 않았던 쾌거라고 칭송받는 문화대혁명의 시작이었고, 그 파장에 중국도, 홍콩도, 대만도, 세계도 긴장하고 있었다. 마오쩌둥 사상에 ‘미쳐버린’ 홍위병들은 홍콩으로도 와서 시위를 이끌었다, 

 

1967년 5월 1일 노동절, 홍콩에서 노사 분규로 노동자들과 경찰이 충돌했다. 홍콩에서 일어난 문화대혁명, 이른바 ‘67폭동’이 시작되었다. 좌파 단체들은 공장의 담장에 대자보를 붙이고, 마오쩌둥 어록을 들고 항의 시위에 나섰다. 

 

5월 17일 베이징에서 1백만 명의 군중이 베이징 주재 영국대표처로 몰려가서 ‘영국이 홍콩에서 떠날 것’을 요구했다. 그다음 날엔 베이징 운동장에서 총리와 외교부 장관 등을 포함하여 10만 명의 군중이 모여 홍콩영국 정부가 국민당과 결탁하여 중국의 안정을 파괴하고 있다고 선동하는 집회가 열렸다.

 

홍콩의 좌파는 ‘홍콩 각계 동포 반영(反英) 항폭 투쟁 위원회’를 결성했다. 위원회의 이름을 보면 그들이 ‘영국 제국주의 반대’라는 명분을 전면에 내세웠음을 알 수 있다. 

 

중국의 인민일보와 신화통신사가 시위를 선동하고 나섰다. 영국이야말로 미 제국주의와 결탁하여 중국을 방해하는 음모 세력이라고 비난했다. 제국주의와 자본주의가 이중으로 홍콩 동포들을 착취하고 있으니 빨리 ‘해방’시켜야 한다는 명분은 언제나 큰 힘을 발휘했다. 

 

홍콩의 좌파 노동자 수천 명은 홍콩총독부를 포위했다. 홍콩영국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여 시위를 선동하는 방송과 전단지의 살포를 금지했다. 정부 발표에 의하면 6개월 만에 51명(경찰 10명)이 사망했고, 300명이 넘는 사람들이 폭탄에 부상을 입었고 5천 명이 체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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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사진 속 시민들이 들고 있는 것은 마오쩌둥의 '작은 빨간 책'이다.

 

중국의 저우언라이 총리는 뒤늦게 이런 원칙을 하달했다.

 

“이치에 맞게(有理), 이익을 챙기고(有利), 절차를 중시하라(有節).”

 

하지만 홍콩 좌파의 정서는 고양될 대로 고양되어 있었다. 폭탄으로 영화관, 공원, 시장 등 공중 시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버스와 택시에도 불을 질렀다. 

 

(이런 급진적 시위를 보면, 생각이 든다. 시위는 어떻게 끝나는 것이 좋을까? 이 정도면 되었다고 하는 선은 어디일까? 정부는 어느 선까지 용인할 수 있을까? 변화와 개혁과 혁명을 원하는 각각의 정체성은 어떻게 조율되어야 할까?) 

 

1967년 7월, 혁명을 원하는 홍콩의 급진 좌파는 돌, 염산, 어포 등으로 경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한번 시작된 폭력은 업그레이드되기 마련이다. 8월에는 좌파의 폭력을 비판한 유명한 아나운서를 포함하여 2명이 몸에 기름이 부어진 채로 불에 타죽는 사건이 발생했다. 

 

홍콩영국 정부는 혁명을 선동하는 신문 『홍콩야보香港夜報』, 『신오보新午報』, 『전풍일보田豐日報』 등 3개 신문을 폐간했다. 베이징에 있는 영국 대표처도 불에 탔다. 너무도 과격해진 홍콩의 좌파는 9월부터 중국 정부의 지지를 잃기 시작했다. 

 

홍콩영국 정부도 강온 양면 정책을 발표했다. 파업하지 않겠다는 약속만 하면 관대하게 처리한다는 방침이었다. 홍콩대학 학생회도 정부를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했고, 홍콩대학생연합회는 폭력 정지를 호소하고 나섰다. 

 

지역(커뮤니티) 조직, 각종 협회, 학교 등이 속속 정부를 지지하고 나섰다. 중립지 『명보明報』가 정부를 지지하고 나서자 발행인 겸 무협소설의 대가인 김용(金庸)이 좌파의 암살 명단에 올라 싱가포르로 도피한 것도 그즈음이었다. 

 

홍콩인들은 너무도 과격해진 혁명으로부터 완전히 등을 돌렸다. 역사는 이성적이지도 않은 데다가 참을성까지 없기에 하나의 장면에 방향을 틀어버린다. ‘67폭동’ 뿐만 아니라 세계 역사가 그래왔다. 

 

 

문화대혁명이라는 집단기억, 홍콩인을 보수화하다

 

문화대혁명의 영향으로 발생한 홍콩의 ‘67폭동’은 홍콩인들의 두뇌(유전자)에 뚜렷하게 각인된 집단기억이다. 대다수 학자는 ‘67폭동’이 중국과 분리된 홍콩의 정체성을 탄생시킨 또 하나의 대사건임에 동의한다. 정도를 넘은 과격한 시위는 역사의 수레바퀴를 뒤로 돌리는 전환점이 되기도 한다. 폭력은 이렇게 이쪽이나 저쪽에게 극단적인 빌미가 된다. 

 

초기에는 홍콩 서민들 대다수가 시위를 지지하고 동정했다. 하지만 시위가 점차 과격해지면서 시위의 당위는 시민들과 유리되기 시작했다.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며 대륙에서 탈출한 홍콩인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 숨어있던 공포감을 불러냈던 것이다. 홍콩인들에게 혁명은 폭력과 동의어가 되어 버린 것이다. 홍콩인들의 보수화, 즉 두뇌(유전자)가 안정을 중시하는 쪽으로 크게 기우는 계기가 되었다. 

 

폭력 시위는 홍콩인들의 좌파 트라우마를 자극하여 홍콩에서의 노동운동을 얼어붙게 했다. 이후 홍콩영국 정부는 좌파를 사회로부터 영원히 격리시키는 시도, 즉 그들을 꾸준하게 ‘타자화’ ‘악마화’ 했다. 

 

노동자의 권익 개선에 관련된 모든 논의는 정지되었다. 나는 이 사건 때문에 홍콩의 노동운동이 궤멸되었고, 그것은 홍콩 사회의 건강한 발전에 두고두고 부담으로 작용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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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trip.com>

 

홍콩에서의 문화대혁명은 홍콩인들을 다시 태어나게 만든 중대한 분기점이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누구인지’ 그리고 ‘누가 우리 편인지’에 대한 진지한 의문이 시작된 것이다. 

 

적어도 중국공산당이 지배하고 있는 중국은 더 이상 ‘우리’의 조국이 될 수 없다는 점은 분명해졌다. 반대로 홍콩인들과 영국 식민지 정부와의 일체감은 깊어져 갔다. 더불어 홍콩인으로서의 정체성은 더욱 강해지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는 ‘홍콩은 우리 집’ 운동에 대해서 살펴보겠다.

 

류영하(백석대학교 중국어학과 교수)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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