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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프로듀서가 있었습니다. 78학번이라니까 나보다 10년쯤 위, 격동기와 황금기를 골고루 맛본 세대라고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80년대 초중반 지상파 PD들이 누린 ‘좋았던 시절’의 이야기는 지금도 노익장들의 술안줏거리죠. 지방 촬영 가서 군수들한테 영접받은 이야기며 출장비를 단 한 푼도 안 쓰고 다시 서울로 돌아온 사연이며 등등.


하지만 또 그 시기는 대한민국의 시사 고발 프로그램이 싹을 틔운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KBS에서는 추적 60분이 맹위를 떨쳤고 MBC에서는 1990년 PD수첩이 막을 올렸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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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프로듀서도 그에서 인상 깊은 활약을 펼쳤습니다. 포천에 있는 할렐루야 기도원. 도무지 예수에 접신한 무당이라고밖에는 생각 안 되는 할렐루야 아줌마가 좌정한 그곳에 카메라를 숨겨 들어간 용감한 PD였습니다. 할렐루야 아줌마가 안수기도한답시고 사람들 몸을 할퀴어 대는 바람에 그만 그 손톱 속에 들어 있던 누군가의 매독균이 여러 명에게 퍼졌던 매독 사건을 취재하기 위해서였지요. 이 방송이 나간 후 MBC는 난리가 납니다. 중환자들을 앞세운 시위대가 링게르병 들고 여차하면 죽어버리겠다고 을러댔고 견디다 못한 MBC는 내키지 않는 사과를 할 정도였지요.


종교인들에 이 정도 데었으면 다시는 사이비 종교 아이템은 건들고 싶지 않을 텐데 이 PD는 이내 종교인들의 광기 속으로 뛰어듭니다. 열대여섯 명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정되는 사이비 종교 영생교를 수면으로 끄집어낸 거지요. 몇 년 뒤 교도소에서 영생교주가 심장마비로 사망하자 부활할 것을 믿고 장례를 치르지 않고 기다리다가 경찰이 강제로 장례를 치러 버렸을 정도로, 눈에 뭣이 씌워도 잘 마른 시멘트로 씌인 사람들을 향하여 이 PD는 카메라를 신랄하게 겨눕니다.


실제로 무엇인가에 광적인 종교인들은 무척이나 위험하죠. 이 PD가 만든 영생교 방송 당시 조언을 해 준 종교 연구가 탁명환 씨가 방송 3일 후 전혀 다른 기독교 광신도의 칼에 죽음을 당한 것처럼 말입니다 이 PD도 온갖 위협을 받았지만 꿋꿋하게 취재를 이어 갔고 영생교를 세상에 알렸습니다. 시청률도 34%의 대박을 냈죠.


그가 이 방송으로 언론학회에서 수여하는 언론상을 받았을 때는 한창 PD 비리 사건으로 신문 지상이 시끄러울 때였습니다. 그래서인지 그는 PD의 명예를 강조합니다. “이 상이 최근 PD 비리 수사로 손상당한 PD의 명예 회복에 작은 보탬이 됐으면 합니다.” 그는 또 어떤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이 존재하고 사회가 존재하는 한 시사고발 프로그램은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 참 멋진 PD였습니다.


그런데 참 세상은 묘하고 세월은 무상합니다. 이 PD의 이름은 백종문. 이번에 <뉴스타파>에서 폭로된 녹취록상에서 그래도 대 M 본부 간부 처지로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인터넷 언론사 사람들과 쑥덕거리면서 “해고시켜 놓고, 나중에 소송이 들어오면 그때 받아주면 될 거 아니냐...... 그래서 둘 (최승호 박성제 PD)은 우리가 그런 생각 갖고서 (해고)했다”는 귀 열고는 못 들을 민망한 소리를 늘어놓은 그 사람입니다.


인내심을 가지고 녹취록을 들어 보면 민망을 넘어서 역겨움에 얼굴을 구기게 됩니다. “걔네들은 노동조합 파업의 후견인인데, 후견인은 증거가 남지를 않는다. 그런데 이놈을 가만 놔두면 안 되겠다 싶어가지고 해고를 시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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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타파>는 백종문 미래전략본부장과 모 인터넷 매체 국장 등이

2014년 식사 자리에서 발언한 내용을 녹취를 근거로 방송했다.

요는, MBC 해고자인 최승호 피디와 박성제 기자를 증거 없이 해고 했다는 것

출처 - <뉴스타파>


대략 10년 전 “시사고발 프로그램이 놓아서는 안 되는 조건은 바로 공정하고 엄정한 증거입니다.”라고 떠벌리던 사람이 무슨 약을 먹으면 저렇게 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PD의 명예 회복에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고 수상 소감을 밝히던 의기충천의 PD가 대체 어느 좀비에게 물렸기에 저렇게 추하게 꺽꺽거리면서 누군가를 물지 못해 안달하는 추물이 되었는지 도통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할렐루야 기도원과 영생교주들 사이에 뛰어들어 할 말 있으면 해 보라고 마이크를 들이밀던 패기 넘치는 PD는 뉴스타파 기자의 마이크 앞에서 왕년의 할렐루야 아줌마가 되고 영생교 교주로 현신해 있더군요. 인터뷰 거부하고 부하들에게 내쫓으라고 명령을 내리는 아주 낮익은 모습으로 말입니다.


어차피 정권이 유지되는 한 방송사는 그들의 놀이터이고, 나라를 팔아먹어도 묻지마 지지하는 ‘개 돼지 같은’ (영화 내부자들의 논설위원 표현을 빌린다면) 사람들을 조금만 부채질해 주고 북돋워 주면 그 놀이터에서 자신들이 무슨 일을 하든 누구도 상관 못 할 것이고, 알아봐야 꽥꽥거리다가 조용해질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20년 전 백종문 PD가 삼풍 참사 후 관련 프로그램 제작에 의욕을 불태우면서 “매번 대형사고가 나면 온 사회가 떠들썩하다가 시간이 흐르면 전부 망각하는 전례가 되풀이돼 왔다."고 한 것처럼, ”니들이 떠들어 봐야 다 잊어버려 흥“ 하면서 코를 풀고 있을 수도 있겠군요.


세상의 부조리와 거대 악에 돌팔매를 던지던 다윗이 어느결에 골리앗이 돼서 “누가 나를 상대하겠느냐” 껍적대는 걸 보면서 참 만감이 교차합니다. 하지만 골리앗이 된 다윗은 알아야 할 겁니다. 그가 아무리 지금 튼튼하고 상대가 보잘것없어 보여도 그 이마를 깨뜨릴 물맷돌은 “인간이 존재하는 한” 계속 준비될 것임을 말입니다.



방송 언저리에서 밥 얻어먹는 처지로 왕년의 용감한 한 PD의 타락과 변신을 애달파합니다. 언젠가는 지고 또 지는 꽃잎처럼 가야 할 청춘이었겠으나 지켜야 할 푸르름은 있었을 텐데. 가버린 세월이야 어쩔 수 없으나 한때의 그 자신을 내팽개친 한 늙은 PD의 노추는 용서가 어렵습니다.






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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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 딴지일보 coco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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