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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늘 변화를 꿈꾼다. 내일은 오늘보다 나아지겠지 하면서 말이다. 점진적인 개혁이 좋을까, 세상을 완전히 뒤집는 혁명이 좋을까? 대학생 시절 나는 40대 이상의 어른들이 다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그때 목숨이 경각에 달했던 어른들께 죄송한 마음이다). 

 
세상이 이렇게 불공평하고 불공정한 이유는 어른들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우리 같이 깨끗한 젊은이들만 살면 세상은 금방 맑아질 것이었다. 내 머릿속에서 그 방법은 혁명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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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인격이 없다. 역사에게 이래야 한다거나 저래야 한다고 요구할 수는 없다. 다만, 나는 특정한 사건이나 운동이 극단적으로 해석되고 소비되는 것을 우려한다. 이성과 합리는 없고, 극우나 극좌만 난무하는 광풍은, 두고두고 역사의 부담으로 남는다. 
 
문제는 해석이고 수용이다. 
 
“우리는 역사적 사건으로부터 무엇을 어떻게 배워야 하는가?”
 
이 의문에 대한 답은 시종일관 내가 제일 관심을 기울이는 부분이었고, 이 연재의 목표이기도 하다. 홍콩판 문화대혁명인 ‘67폭동’이라는 역사적 트라우마가 과도한 영향력을 행사할 경우, 개인도 집단도 불행해진다.
 
아주 (현실적으로) 냉정하게 ‘사건이나 운동의 참뜻이 무엇인지’를 살피는 일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67폭동’은 기존의 홍콩 사회에 대한 경고였다. 더 이상 이렇게 살 수 없다는 서민들의 절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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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홍콩, 한 남자가 경찰에게 돌을 던지고 있다.

 
 
 
오랫동안 홍콩인들의 마음속에 홍콩은 없었다 
 
홍콩 사회는 장기적으로 무너지고 있었다. 많은 학자들은 자본주의와 식민주의가 각기 다른 형식으로 홍콩인을 착취했다고 주장한다. 그것의 결과가 세계적으로 가장 큰 빈부격차였다. 무엇이라도 얻을 수 있는 사회였지만, 그것은 소수 상류층에게만 해당하는 일이었다. 
 
미국을 가리켜 모든 정체성을 녹이는 용광로라고 하고, 반대로 모든 정체성이 살아있는 사회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런 미국 내에서 한국인이나 중국인은 각기 자신들의 커뮤니티 즉 ‘우리끼리’ 사회 속에서 살고 있다는 지적이 있다. 
 
나는 홍콩 사회 역시 각기 따로 살고 있는 사회라고 본다. 홍콩 사회는 ‘인종끼리’의 사회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계급끼리’의 사회였다.  
 
홍콩영국 정부는 홍콩인들에 대한 복지에 무관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37년에는 장례비조차 없어 1천 3백 구의 시신이 가두에 버려졌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홍콩의 노동 조건과 주거 환경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진 점이 없다고 생각한다. 2021년의 조사에 의하면 홍콩 인구 7백만 명 중 26만 명이 여전히 극빈층의 주거 공간인 닭장집(cage house), 관짝집(coffin house)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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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명 ‘닭장 아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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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장 아파트 내부

 
장기적으로 홍콩인들은 홍콩에 살고 있었지만, 홍콩에 살고 있지 않기도 했다. 이러한 상태를 ‘내적 망명’ 또는 ‘내부 망명’이라고 한다. 재미없는 강의를 듣거나, 끝없는 잔소리를 듣는 곳에서 우리는 ‘유체이탈’을 경험한다. 몸은 그곳에 있되 마음은 없는 것이다. 
 
우리는 종종 말한다. ‘내 마음은 이미 떠났어’라고. 가정이나 사회가 똑같은데, 마음이 떠난 내부 망명자가 많아지면 혁명을 꿈꾸는 사람들이 많아지게 된다. 
 
(처음부터 홍콩영국 정부는 큰 딜레마를 안고 있었다. 홍콩의 사회복지가 너무 좋아질 경우 중국으로부터의 인구 유입은 더욱 많아질 것을 늘 우려했다)
 
1970년대 초까지만 해도 경찰을 위시한 홍콩 공무원들의 부패도 심각했다. 경찰이 매춘, 도박, 마약 등의 거래에 개입하여 해마다 벌어들이는 돈이 10억 홍콩 달러에 달했다는 기록도 있다. 
 
영국인 경찰 간부는 437만 홍콩달러(당시 아파트 한 채가 2만 5천 달러 정도)를 착복하고 영국으로 도주하였는데, 여론의 압력으로 체포 송환된 적도 있다. 지금까지 홍콩이 자랑하는 공직자 수사기관인 ‘염정공서(ICAC)’가 출범하게 된 계기이다. 
 
 
문화대혁명 이후, 영국이 변했다 
 
문화대혁명이 홍콩을 강타한 이후, 홍콩영국 정부는 서민들을 위한 정책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홍콩인들의 마음을 홍콩이라는 공간에 붙잡아두기 위한 조치들이었다. 경제정책도 ‘자유방임’에서 어느 정도 개입하는 ‘적극 불간섭주의’로 전환되었다.  
 
①노동시간을 단축하고 (1968년) 
②정부의 정책을 설명하고, 청년 활동을 지원하는 민정사무실을 설치하고 (1968년)
③노동자들을 위한 배상금액을 인상하고 (1970년) 
④여성 노동자에게 출산휴가 권리를 부여하고 (1971년)
⑤초등학교 무상교육을 실시하고 (1971년) 
⑥입법국 의석을 확대하고 (1972년)
⑦10년 주택 건설 계획을 발표하고 (1972년) 
⑧홍콩 청결 운동(클린 홍콩)을 추진하고 (1972년)
⑨‘파트너’ 개념의 사회복지정책을 발표하고 (1973년)
⑩반부패 전담 기구인 염정공서(廉政公署)와 소비자위원회를 설치하고 (1974년)
⑪중국어를 법정 언어로 인정하고 (1974년) 
⑫9년 무상교육까지 실시하고 (1978년) 
⑬3개 대학을 승인했다. (1978년)
 
공원, 운동 시설, 도서관, 박물관, 영화관 등의 편의시설을 대폭 확충하였다. 이런 시민복지 사업은 홍콩인들의 소속감과 자부심을 끌어올리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식민 종주국인 영국에서도 긍정적인 변화가 나타나고 있었다. 1964년 노동당이 집권하여 인종이나 여성차별에 대한 인식 등 탈식민화에서 진전이 있었고, 당연히 홍콩영국 정부에도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1966년 이후 홍콩에서는 사형이 집행되지 않았다. 1968년에는 영국 정부의 식민지부가 외교부로 편입되면서 홍콩영국 정부의 자주권이 상대적으로 커졌다. 
 
중국과 영국 간에도 해빙 모드로 전환되어 1972년에는 대사급 외교 관계가 수립되었고, 1974년에는 영국 수상이 중국을 방문하였고, 1979년에는 홍콩 총독이 처음으로 중국을 공식 방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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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마오쩌둥과 영국 수상 에드워드 히스(Edward Heath)

 
 
중국은 홍콩, 마카오의 반환을 원치 않았다
 
영국은 1945년 일본 패망 이후에도 홍콩을 계속 지배했는데, 중국은 (일관되게) 표리부동했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공식적으로는 홍콩을 영국 제국주의가 불법 점거한 식민지라고 비난하면서도 - 당장 반환하라는 요구보다는 - 장기적으로 충분히 이용하고 있었다. 
 
세계의 식민지들이 속속 독립하면서 홍콩의 국제적인 지위도 검토되어야 했다. 1972년 유엔은 세계 식민지의 현황을 조사했다. 중국 정부는 홍콩에 대한 입장을 다시 정리해야만 했다. 홍콩과 마카오의 주권 반환을 염두에 둔 포석이었다. 중국의 입장은 아래와 같았다. 
 
①홍콩과 마카오는 영국과 포르투갈에 의해서 점령당한 중국 영토의 일부이다.
②홍콩과 마카오 문제의 해결은 전적으로 중국 주권 범위 내의 문제이다.
③근본적으로 이른바 ‘식민지’의 범주에 들지 않는다.
④따라서 반식민지 선언 중에 적용될 식민지 명단에 포함되어서는 안 된다.
⑤유엔은 이 문제를 토론할 권한이 없다.
 
동년 11월 열린 유엔 27차 회의에서 유엔은 홍콩과 마카오 문제에 대한 중국 정부의 입장과 요구를 인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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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중국(위)이 유엔에 가입했다. 중국이 유엔에 가입하면서 중국 유일의 정부로 인정되었다. 그로 인해 대만은 국가로서 국제법적 지위를 사실상 박탈당했다. 대만 대표(아래)는 유엔에서 축출되는 표결이 나기 전에 스스로 탈퇴를 선언하고 대회장을 떠났다.  

 
1971년 중국이 유엔에 가입되고, 마침 전 세계 식민지 청산 문제가 대두되었다. 홍콩도 자연스럽게 식민지 명단에 들어가게 되었다. 당연히 기뻐해야 할 중국 정부는 식민지 명단에서 홍콩을 제외시켜 달라고 요구하고 나섰다. 대부분의 식민지가 독립되고 있는 현실이 발목을 잡을까 우려해서다. 이때도 중국공산당은 명분보다는 실리를 선택했다.
 
학자들은 중국 정부의 결정에 대해 홍콩의 미래는 영국이 아니라 중국이 결정한다는 의지를 보여준 것이고, 홍콩인들도 배제될 것임을 암시했다고 해석한다. 하지만 당시 홍콩인들은 홍콩의 미래를 낙관하고 있었기에 주권 회복에 대한 중국의 의지를 제대로 읽지 못했다. 
 
홍콩인들은 1970년대 홍콩 경제가 비약적인 발전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 정부가 그때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계속 현상을 유지하면서 실리를 취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게다가 1974년 포르투갈이 마카오 반환 의사를 중국에 전달했으나 거절당한 적도 있었다. 이것도 중국이 홍콩을 회수하지 않을 것이라는 좋은 징조로 받아들여졌다. 
 
류영하(백석대학교 중국어학과 교수)
 
<계속>
 
 
 
※편집부 주: 지난 편에 이야기한 '홍콩은 우리 집' 운동은 다음 편에 다뤄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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