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참 복이 많은 사람이다. 한국에 살던 시절, 길에서 그 흔한 '복이 참 많으시네요' 한마디 들어본 적 없지만 ('기운이 독특하시네요' 같은 말을 많이 들었던 것 같다), 딴지에서 '프랑스 특파원'이라는 직책 아닌 직책을 맡게 되면서부터 자신의 생각을 기꺼이 행동으로 옮기는 이들을 알게 되고, 그들의 목소리를 전달할 수 있음이 참 기쁘다. 그래서 내게 지면을 허락한 딴지 측에, 그리고 보잘것없는 내 글을 읽어 주시는 딴지 독자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프랑스 시각으로 2016년 1월 26일 저녁, 파리 트로카데로 인권광장에서 백남기 농민의 쾌유를 기원하고, 한국 정부의 책임을 묻는 1인 시위가 있을 것이라는 제보를 받았다. 네덜란드에 있는 백남기 씨의 둘째 딸이 진행하는 1인 시위에 지지와 연대를 보여 주기 위해 기획한 것이라고. 지난 1월 1일 '희망나비' 단체의 위안부 문제의 진정성 있는 대처를 촉구하는 집회에 대한 제보 이후 두 번째. 부르면 가야지. 나를 불러 주는 곳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게다가 한국으로부터 9천 킬로미터 떨어진 이곳에서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는 이들에게 외치는 한 사람의 목소리가 울림이 되고, 또한 메아리가 되려면 언론이라는 존재는 필수적이다. 딴지의 프랑스 특파원의 존재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근거 없는 혼잣말을 지껄이며 트로카데로 광장에 도착했다.
한국은 요즘 정말 살인적으로 춥다는데, 프랑스는 그 정도는 아니다. 대신 날씨가 참 우중충하다. 게다가 파리 테러의 여파로 관광객들도 확연히 줄었다. 파리 샹젤리제 근처, 온갖 명품 부티크가 모여 있는 8구의 몽테뉴 가(Avenue de Montaigne)에서 일하는 친구는 요새 워낙 손님이 없어서 이번 달에는 보너스가 거의 없을 지경이라며 울상을 짓는다. 트로카데로는 파리 인권 선언으로도 유명하지만 에펠탑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이기에 파리를 관광하는 사람들이 필수적으로 들르는 코스. 2016년 1월 27일 오후 2시 47분경 도착한 트로카데로 광장. 그마저도 방문하는 이들의 발길이 반 정도는 줄어든 듯, 우중충한 날씨까지 겹쳐 더욱 황량해 보이는 광장 구석에 두 명의 아시아인 여성이 눈에 들어 온다.
찾아가서 내 정체를 밝히기 전 도촬. 예고한 1인 시위를 10여 분 앞둔 시각, 이들은 이미 준비를 모두 마친 듯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들의 표정에 어딘가 모를 단단한 결의가 담겨 있는 듯 하여, 도촬을 아니 할 수 없었다고 변명해 본다.
딴지일보에서 나왔다고 인사를 했다. 포즈를 취해 달라니 플래카드 뒤로 숨어 주는 이 센스, 훌륭하다. 이번 1인 시위를 기획한 이는 현재 파리에서 정치학을 공부하고 있는 박미리내 씨. 지난 11월 14일, 경찰의 물대포에 맞아 아직도 혼수상태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 백남기 씨의 차녀 백민주화 씨가 네덜란드에서 1인 시위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녀 혼자 외로울 것 같아서 동참했다고. 프랑스라는 타국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지만, 현 정부에 대항하여 싸우는 모든 이들에게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라는 메세지를 전달하고 싶다고 이야기하는 그녀의 눈빛이 따뜻하고 진지하다.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
한 사람의 삶은 결국에는 그 사람의 것이다. 하지만 한 사람의 삶이란 모두 그 사람에 의해서만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모두 혼자가 아니다. 혼자일 수 없다. 가끔씩 그 사실을 잊어버린다 하더라도. 그리고 2016년 1월 27일 오후, 파리 트로카데로 광장의 한 구석에 온 몸으로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라고 외치는 이들이 있었다. 그 외침에는 그 어떤 물리적 요소도 없었지만 오히려 더 큰 울림이 있었고, 결국 파리에서 일어나는 집회에 항상 관찰자로만 참여했던 나 역시, 오늘만큼은 적극적으로 함께 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들이 들고 있는 플래카드에는 "당신이 한국에서 당할 수 있는 일"이라는 제목으로
① 집회 참가 시 경찰이 직사로 쏘는 물대포에 맞음
② 응급 상황으로 앰뷸런스에 실려가는 중이라도 경찰의 물대포는 계속 따라옴
③ 당신의 생명이 여러 개가 아니라면 집회 참가만으로도 생명을 잃을 위험에 처함
④ 물대포에 맞아 혼수상태에 빠짐
⑤ 경찰과 정부는 사과하지 않음
이라고 적혀 있다. 어쩐지 이름조차 들어본 적 없는 나라에서나 발생할 것만 같은 이 일들이 바로 우리나라, 한국에서 2015년에 실제로 일어난 것이라는 사실은 지금 다시 한 번 곱씹어 보아도 참으로 비현실적이기만 하다.
현재 한국에는 독재의 위협이 산재해 있다
트로카데로 광장은 세느 강을 사이에 두고 에펠탑을 마주하고 있어 언제나 강풍이 분다. 게다가 보다 많은 이들에게 메세지를 전달하고자 사방이 훤히 뚫린 곳에 자리를 잡은 탓에, 손이 얼 때까지 바람에 날아갈까 꼭 쥐고 있는 플래카드 아래에는 백남기 농민 이슈 말고도 세월호 문제, 국정화 교과서 문제가 함께 쓰여 있다.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참 문제들이 많기도 하다.
구호도, 노래도, 서명 운동도 없는 시위인지라 많은 이들이 장시간 머물렀던 것은 아니지만, 적잖은 이들이 발걸음을 멈추고 두 사람이 전하는 메세지에 눈과 귀를 기울였다. 오늘 시위의 특이할 만한 점이라면 한국 관광객이 보다 많은 관심을 가져 주었다는 것 정도랄까. 어쩐지 어색하지만 용기를 낸 듯, 플래카드를 들고 있는 두 사람에게 와서 환히 웃으며 "힘내세요!"하고 멋쩍게 웃으며 갈 길을 재촉한 커플도, 모른 척 스쳐 지나가는 척 하며 한국어로 된 메세지에 눈길을 주고 지나가던 한국인 가족도 있었다.
"왜 여기서 이런 걸 해요?"
같은 질문을 각기 다른 두 사람에게 받았다. 두 사람 모두 가족 단위로 파리에 여행을 온 이들인 듯했다. 프랑스에서 한국의 이슈를 접하는 것이 신기한 듯 한국어와 프랑스어로 쓰여진 플래카드를 유심히 바라보다가 던진 질문, "왜 여기서 이런 걸 해요?"
한 사람은 곧이어 "백남기 씨가 누구예요?"라고 물어 보고는, (내 느낌상으로는 뭐하러 쓰잘데기 없이 프랑스에서 이런 걸 하고 있는 거지, 하는 눈빛으로 시위를 하는 일행들을 훑어 보고서는)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몇십 분이 지났을까, 또 다른 사람이 와서 같은 질문을 던졌다. "왜 여기서 이런 걸 해요?" 아내와 함께 에펠탑 사진을 찍으러 트로카데로 광장에 들른 듯한 중년 남성은 한동안 우리 곁을 떠나지 못했다. 그의 시선은 1차 민중 총궐기, 그러니까 지난 11월 14일 백남기 씨가 경찰의 물대포에 맞고 혼수상태에 빠진 그 날의 사진에 머물러 있었다. 그의 눈빛이 너무나도 인상적이었기에 말을 붙여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자신 역시 농민 자격으로 그 자리에 있었노라 이야기했다. 농촌의 많은 주민들이 여당을 맹목적으로 지지한다며 한탄도 했다. 백남기 씨의 가족에 대한 애정 어린 지지 역시 잊지 않았다. 백남기 씨의 일이 그저 남 일이 아닌 것이다. 잠시나마 한국을 떠나 잊고 싶었던 고국의 온갖 사회문제들은 결국 프랑스에서까지 그를 따라와 머리 속을 복잡하게 만드는 듯했다.
'농민의 길' 소속의 김준식 씨는 결국 아내의 재촉에 트로카데로까지 와서 에펠탑을 배경으로 사진 한 장 찍지 못한 채, 그를 기다리는 일행과 가이드에게로 돌아갔다. 에펠탑 사진보다 집회를 하는 한국의 젊은이들과의 사진을 선택한 그가 우리에게 던진 질문, '왜 여기서 이런 걸 해요'에 대한 대답을 그는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오후 3시부터 5시까지 두 시간 동안 칼바람을 맞으며 진행한 집회는 두 명으로 시작하여 네 명으로 끝을 맺었다. 그 사이 꽤나 진지한 질문들이 오고 갔다. 베트남에서 온 한 박사과정 학생은 한국의 박근혜 정부를 독재라 보는 이유에 대해서 물었고, 우리는 꼭 폭력이 수반되고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만이 독재가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는 또 다시 "박정희는 독재자인 것이 확실하지만 박근혜까지 독재자로 보기는 어렵지 않느냐"고 물었다. 독재 정치의 사전적 의미가 '민주적인 절차를 부정하고 통치자의 독단으로 행하는 정치'임을 감안할 때, 현재 한국에 독재의 위협이 산재해 있음은 아프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라고 대답했다.
한국에는 수많은 이슈들이 정신이 없을 만큼 계속해서 쏟아져 나온다. 따라서 적지 않은 것들이 그 중요도에도 불구하고 계속 묻히고 잊혀져 간다. 인간은 망각이라는 방어 기제 없이 살 수 없는 존재이지만, 잊어서는 안 되는 것들도 분명 있다. 우리 사회의 가치를 위협하는 그 모든 이슈들이 제대로 해결되지도 못한 채 잊혀져 버려서는 안 될 것이다. 그래도 다행이다,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런 사람들이 있는 한 나는 알량한 딴지 특파원이라는 명함을 가지고 계속 그 자리에 변변한 카메라 하나 없이도 스마트폰 카메라로 버티며 서 있을 것이다.
아까이소라
트위터 : @candy4sora
편집 : 딴지일보 퍼그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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