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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구치구미를 백으로 한 코베예능사는 연예계에 이어 프로레슬링계에도 진출하며 성공을 거둔다. 그 요인에 코베예능사 사장이자 야마구치구미 3대째 추미쵸인 타오카 카즈오의 운영 능력이 있었음 두말할 나위 없으나 역도산(力道山)이라는 슈퍼스타의 존재가 있었던 것 역시 결코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링크). 이번에는 야쿠자 이야기는 잠시 옆에 두고 역도산을 비롯한 외국 국적 프로레슬러에 초점을 맞추도록 하겠다.

 

 

1. 유세프 터키와 역도산

 

지난번에 등장한 터키인 레슬러, 유세프 터키는 부모가 1922년에 일어난 터키혁명(터키 독립 전쟁)을 계기로 터키를 떠났고, 익년에 일본 통치하에 있던 사할린・유즈노사할린스크(당시 토요하라시(豊原市))에 거주지를 옮겼다. 정치적 이유로 망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할린에 이주한 유세프의 부모는 무역상을 영위했었다고 하니 경제적인 이유보다 정치 체제의 변화에 따른 망명이었다는 설에도 일리가 있는 것 같다.

 

1931년 유세프가 태어난다. 사할린은 일본어가 공용어였던 것도 있어서 그는 터키어와 더불어 원어민급의 일본어도 구사할 수 있었다고 한다. 부모에게 무슨 인연이 있었는지 요세프가 9살이 된 해에 일가는 도쿄・요요기우에하라(代々木上原)로 이주한다.

 

2차대전 후, 마침 유도 고수 키무라 마사히코(木村政彦)가 권투를 잘 하는 외국인을 찾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유세프는 키무라의 문을 두드렸다. 유도 선수와 권투 선수가 시합을 하는 이종격투기 “유권(柔拳)”의 선수로 활약하며 1954년에 일본프로레슬링협회 소속 프로레슬링 선수로 데뷔했다. 익살스러운 퍼포먼스로 관객들의 웃음을 자아내 많은 인기를 얻었던 그는 스모계를 떠나 프로레슬링에 입문한 역도산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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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도산

 

역도산은 함경남도 홍원군 신풍리 출신, 조선명 김신락(金信洛). 스모를 은퇴하고 나서 훗날의 양부인 모모타 미요스케(百田巳之助)로부터 1939년에 프로레슬링계에 스카우팅 받으며 일본명 모모타 미츠히로(百田光浩)를 칭하게 되었다. 일부 관계자만 그가 조선인임을 알고 있었다. 15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일본 본토로 터를 옮겼던 그의 일본어는 원어민 수준이었고 그러한 사정을 모르는 이들은 그가 한반도 출신자임을 몰랐다고 한다(실제로 그가 일본어로 말하고 있는 동영상을 봐도 아주 자연스럽다).

 

유세프 터키는 프로레슬링계의 선배이자 훗날에는 좋은 상담 상대가 되어 주었는데 처음에 만났을 때부터 역도산이 조선인임을 알아챘었다. 일설에는 터키군 병사로 한국전쟁에 종군하는 중 한반도에 역도산이라는 산이 있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진실은 안갯속이지만 멋있는 에피소드이긴 하다. 역도산이 동료들한테 조선 출신자라는 이유로 놀림을 당했다며 화났을 때 유세프는 그에게 “조선인 소리를 들었다고 화나는 것은 이상하네… 조선인에게는 조선인의 피가, 터키인에게는 터키인의 피가 흐르고 있는 거지. 서로 힘내자고.”라며 격려해 주었다.

 

 

2. 프로레슬링 업계

 

오늘날에야 일본에서 프로레슬러 하면 스타급 취급받는 당당한 직업이다. 하지만 초창기 프로레슬링 업계는 다른 격투기를 하다 좌절한 선수들이 마지막에 표착하는, 말하자면 “쓰레기터”와 같은 곳이었다. 스모 출신자로서는 역도산이나 키요미가와(清美川)가 유명하고, 유도 선수로 그 이름을 떨치던 기무라 마사히코(木村政彦)나 엔도 토요키치(遠藤豊吉) 같은 경우에는 2차대전 후 점령 정책 때문에 유도 자체가 냉대당함으로써 먹고 살 길을 잃어버린 케이스였다. 패전으로 인한 좌절감을 안고 있던 일본인들은 떨어질 데까지 떨어진 타락자들의 모습에 자신을 겹쳐 보고 있었는지, 미국에서 온 백인 프로레슬러들을 해치우는 모습에 열광했다. 역도산의 십팔번인 가라테촙이 작렬하면 “닛뽕 만세!!”를 외치는 팬도 꽤 있었다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여기서 하나 꼭 잊어버리며 안 될 점이 있다. 프로레슬링은 어디까지나 “쇼”이며, 거의 모든 경기에서는 미리 누가 이길 건지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일본에서 치러지는 경기에서 항상 일본 측 선수가 이기는 건 아니다. 가령 일본에서 치러지는 모든 경기에서 일본 측 선수가 이긴다면 그야말로 천편일률, 매너리즘에 빠져버렸을 것이다. 그러므로 일본에서 실시되는 시합임에도 일부러 일본 측 선수가 지는 날을 만드는 것이다. 특히 외국인 레슬러가 심판 몰래(실제로는 심판도 잘 알고 있는데) 쇠병따개나 파이프 의자로 일본 선수를 때려 결과적으로 “의문의 일승”을 거두거나 하면 매우 좋은 포석이 된다. 나중에 복수전이 짜여지고 비겁하고 더러운 악마를 일본 선수가 깔끔하고 철저하게 쓰러뜨리는 시나리오.

 

일반 대중에게 있어 프로레슬링이 어떠한 의미를 갖고 있었는지를 엿보게 해주는 것이 바로 1954년 8월에 치러진 범태평양 프로레슬링 선수권에서 짜여진 역도산/엔도 토요키치 조 대 “살인 스너블(snubble)” 핸스 슈나벨/“미스터 엑스” 루 뉴맨 조의 대결이다. 첫날에 치러진 시합에서는 핸스/루 조의 집요한 반칙 공격이 벌어졌다. 이것은 몇 달 뒤에 예정된 리턴매치이자 타이틀 탈환전의 포석이었지만, 15,000명의 관객들은 그런 사정을 모르고 있었다. 흥분을 억누를 수 없는 일부 관객이 “이 새끼!! 죽어버려!!”라고 외치며 링으로 달려들었다. 경찰대가 권총을 들고 제압했기에 핸스와 루는 겨우 경기장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핸스 슈나벨은 “많은 시합을 경험했으나 이때만큼 무서운 일은 처음이었어. 일본인은 왜 프로레슬링을 오락으로 즐기지 않고 그렇게까지 진지하게 보는 건가?”라고 증언한 바 있다. 실체와는 달리 그 당시 일본사회에 있어서는 아직까지 프로레슬링을 엔터테인먼트로 여길 정신적 토양이 조성되지 못하고 있었다.

 

 

3. 오오키 킨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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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헤비급 벨트를 두른 김일(1972)

 

일본에서 활약한 조선 출신 프로레슬러로서는 역도산 외에도 꼭 언급해야 할 인물이 몇 명 있다. 그 중에서도 먼저 떠오르는 레슬러는 오오키 킨타로(大木金太郎), '김일'이겠다. 1929년 전남 고흥군에 속하는 거금도(居金島) 출생. 같은 섬에는 그의 업적을 현창하는 기념관과 기념체육관이 지어져 있는데 그럴만한 사정이 있다. 아직 섬 지역까지 전기가 보급되지 않았던 시절, 거금도는 다른 섬보다 앞서 전기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오오키의 팬이었던 박정희 대통령이 그의 소망을 들어주었기 때문이다. 오오키 킨타로는 한국 프로레슬링계에도 적지 않은 공헌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94년 국민훈장 석류장, 이어서 2000년에는 체육훈장 맹호장을 수여된 것에 이어 고인이 된 2006년에는 체육훈장 청룡장이 추서되기도 했다.

 

일본 국내 뿐 아니라 고국에서도 높은 사회적 평가를 받은 그였으나 화려한 커리어의 시작은 꼭 쉽지만 않았다. 당시 이미 슈퍼스타였던 역도산을 동경하던 그는 1958년에 어선을 타고 일본으로 밀항했다가, 그 익년에 출입국관리법 위반으로 체포된다. 웬만해선 한국으로 송환조치 되었겠지만 어찌된 사정인지 역도산이 어려움에 처한 오오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역도산이 오오키의 신원을 보증하며 일본 프로레스협회 회장직을 맡고 있던, 자민당의 거물 오오노 반보쿠(大野伴睦)에게 오오키를 석방시켜 달라고 호소했다. 오오키는 무사히 석방되어 프로레슬링계에 입문하게 되었는데, 역도산이 어떠한 사정이 있었기에 오오키가 체포됐음을 알게 되었고 신원보증까지 해주었을지, 흥미로운 대목이지만 이렇다 할 자료는 찾지 못했다.

 

하여튼 이렇게 해서 어렵게 프로레슬러가 된 오오키한테 역도산은 “너는 한국인이니까 ‘박치기’를 연습해라”라고 명했다고 한다. 역도산이 오오키한테 박치기 기술 단련을 권한 까닭은 알려진 바가 없으나 결과만 보면 역도산의 조언은 딱 맞은 것 같다. 마치 야구 투수가 공을 던지는 듯 오오키는 온 힘을 머리에 집중시켜 강력한 박치기를 날렸다.

 

그 위력에 더해 마치 야구 투수가 공을 던지는 듯이 다이나믹한 체중 이동을 보이는 것도 있어서인지 “원폭 박치기”라고 불렸다. 오오키는 레슬링에 타고난 재주가 있었던 것 같아 박치기 외에도 다양한 기술을 구사하고 있었으나 박치기가 그의 대명사가 된 것은 그만큼 보는 이들을 매료하는 뭔가가 있었단 셈일 것이다. 일본에서도 박치기의 고수로 유명하던 미국 레슬러, 보보 브라질과 맞싸운 “세기의 박치기 대결”은 프로레슬링 팬 사이에서는 아직까지도 전설로 남아 있을 정도다.

 

 

4. 타이거 토구치(タイガー戸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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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명, 한국인 프로레슬러로서 떠오르는 선수가 있다. 본명은 표정덕(表正德), 타이거 토구치(タイガー戸口)라는 링네임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레슬러다. 그는 역도산이나 오오키 킨타로와 같은 이른바 재일교포 1세가 아니라 도쿄・가츠시카구(葛飾区)에서 한국인인 아버지와 일본인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재일교포 2세다. 어머니의 성씨가 토구치였기에 일본명 토구치 마사노리(戸口正徳)를 칭하기도 했다. 도쿄 소재 사립고에서 유도선수로 활약하고 있었고 고교 시절부터 사립의 명문 메이지대학(明治大学) 유도부 연습에도 참가하고 있었다.

 

유도 유망주로 큰 기대를 받고 있던 그의 인생을 바꾼 것은 오늘날에도 남아 있는 '학생운동의 관습'이었다. 고교 졸업 후에 그가 당연히 메이지대로 진학해서 유도를 계속할 것을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 상황에서, 관서 지방에 있는 모 사립대 유도부가 본인의 의향과 상관 없이 그가 당시 속하던 유도부에 그를 해당 대학교로 진학하게 하도록 뒤에서 손을 쓴 것이다. 선수(학생)의 의향을 무시하고 진학할 학교를 정하는 것은 학생 스포츠계에 만연하는 나쁜 습관이기 하지만, 선수 본인도 좋은 환경에서 운동을 계속할 수 있으면 학교 이름에 대해서는 딱히 신경을 안 쓰는 편이다. 하지만 그는 달랐다. 희망하던 메이지대로 진학할 길이 끊기자 깔끔하게 유도를 그만둬 버리고 일본프로레슬링협회의 문을 두드렸다. 유도 선수로 활약한 경력에다 193cm라는 당당한 체구를 가진 젊은이가 프로레슬링계에서 기대를 안 모을 리가 없다.

 

그러나 거기서 또 그에게 불행한 우연히 겹친다. 그가 프로레슬링계에 들어가기 한 달 전에 당시 일본 유도계를 대표하는 선수 중 하나였던 사카구치 세이지(坂口征二)가 유도를 그만두고 일본 프로레슬링에 입단했었던 것이다. 일본 유도계를 대표하는 스타 선수와 장래의 유망주를 잇따라 일본 프로레슬링협회에 빼앗긴 꼴이 되었으니, 유도계와 일본프로레슬링 사이에 갈등이 빚어질 것은 누가 봐도 명백했다. 사카구치는 유도 선수로서는 이미 전성시대는 지난 감이 없지 않았으나 토구치의 경우는 달랐다. 쓸데없는 갈등을 피하기 위해서인지 그는 특련(특별 연습)이라는 명목으로 약 6개월 간 한국으로 피신한다.

 

1968년 8월에 일본에 돌아와 일본프로레슬링 소속 레슬러로 정식 데뷔를 한다. 때마침, 일본 프로레슬링계에서 내분이 일어나는 바람에 토구치는 활동터를 미국으로 옮긴다. “김덕”이라는 링네임으로 “한국 출신 악역 레슬러”로서 눈부신 활약을 보이는 한편, WWF라는 단체가 주최하는 시합에서는 “Tiger Chung Lee”로 링에 오르기도 했다. 어려서부터 영어를 잘하던 그는 미국에 간 뒤에도 동료 선수들과도 잘 어울리며 스승이던 칼 고치와도 절친한 관계를 구축했다. 한때 일본프로레슬링계의 거물인 자이언트 바바(ジャイアント馬場)가 미국에서의 활동을 접고 자신이 사장을 맡은 단체의 얼굴이 되어 달라고 타진하고 그도 흔쾌히 받아들였다고 한다. 하지만 가족의 동의를 얻고 일본으로 가는 준비를 다 마친 뒤 이제 항공권을 끊는 단계에 이르러 비용을 내달라 바바한테 연락을 했더니 “알아서 사서 오라”는 말을 들었고, “그럼 안 가겠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한 프로레슬링 단체의 대표 선수로 활약할 수 있는 자리를 날린 셈이다. 유도를 그만두게 된 경위도 그랬듯이 그는 겸손하면서도 자존심을 해치는 일에 대해서는 한 걸음도 타협하지 못하는, 서툰 사나이였다.

 

 

5. 재일교포 레슬러들이 만든 단체

 

많은 재일교포가 스타 프로레슬러를 꿈꾸며 활동했었고 그들 중에는 자체적으로 단체를 설립하는 이들도 있었다. 일본 프로레슬링사에 남은 단체로서 널리 알린 것은 1956년에 오사카・이마자토(今里)에서 설립된 동아프로레스(東亜プロセス)다. 대동산(大同山), 백두산 등의 링네임을 쓰는 선수들이 소속되어 있었는데, 조금이라도 조선에 대한 지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바로 재일교포가 중심이 된 단체임을 알아챌 수 있다. 역도산은 별도로 오오키나 타이거 토구치가 일본에서도 폭발적 인기를 누린 점을 감안하면 조선/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단체가 성장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대동산이란 레슬러에겐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그는 2차대전 중에 제주에서 일본으로 들어온 조선인으로 본명을 고태문(高太文)이다. 유도를 잘 했고 역시 역도산을 동경해서 친구들과 프로레슬링을 시작했는데, 끝내 성공치 못했다. 결국 1961년 5월 제5차 귀국선을 타고 북한으로 귀환하였는데, 약 40년이 지난 2006년 7월, 평양에 있는 체육출판사에서 “유도애국자”라는 책이 출판된다. 대동산(고태문)의 전기인데 그 저자의 이름이 고춘행이었다. 그녀는 대동산의 차녀로 알려져 있는데, '고영희'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김정일의 아내라는 이야기가 있다. 이 이야기는 한동안 사실로 회자되고 있었으나 지금은 사실이 아니란 입장이 우세한 모양이다.

 

 

6. 프로레슬링, 야쿠자 그리고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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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재일한인역사자료관

 

지금도 역도산 급의 스타가 되면 일반인이 누릴 수 없는 혜택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만약 1960년대라면 더더욱 그랬겠다.

 

1961년 11월 역도산은 지방 공연으로 방문한 니이가타에서 북한에 사는 중형 및 친딸을 만나는 기회를 얻었다. 단 3시간의 짧은 상봉. 서로 눈물을 흘리면서 건강하게 지내기를 바랬다. 역도산은 이듬해 4월, 당시 김일성 주석의 50세 생일 선물로 차를 선물했다고 한다. 상봉이 이루어진 사연이나 생일 선물과의 관계에 대해 알려주는 자료는 못 찾았으나 역도산이 순환 공연 때문에 니이가타로 가는 타이밍에 그의 가족이 탄 만경봉호가 니이가타항에 정박했다는 점, 역도산의 승선이 허락되었다는 점을 보면 북한 당국과 재일교포 단체(아마도 조총련) 사이에서 미리 이야기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 목적은 반드시 명백하지 않지만 당시 북한의 對재일교포 정책을 감안하면 일본 국내 파친코(게임형 도박) 업계가 그랬듯이 외화획득을 위한 돈줄로 이용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역도산이 북한과의 관계에서 돈줄로 이용당할 뻔했거나 실제로 이용했었다면 남쪽 한국과의 관계에서는 일본의 외교 카드로 이용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1963년 1월, 역도산은 국빈급 대우를 받으며 한국을 방문한다. 무려 20년 만의 고국 방문. 김포공항에는 체육협회나 국내 레슬링 관계자들이 모두 60명 남짓이 마중나왔다고 한다. 기자회견에서 그는 “오랫동안 일본어만 쓰다가 한국어는 하나도…”라고 말하면서도 마지막에는 한국어로 “감사합니다”라며 마무리지었다.

 

귀국 후 기자회견에 응한 역도산은 한국을 방문한 이유에 대해 물은 기자한테 “코베에 있는 프로모터인 타오카 씨한테 전부터 권유받았었기에…”라고 답했다. 하지만 아무리 힘이 센 타오카라도 한국 정부를 움직일 정도의 영향력은 없었을 것이다. 어디까지나 소문에 그치지만, 역도산 방한 뒤에는 일본 프로레슬링 사장이자 자민당 부총재를 맡았던 (그리고 입국관리법 위반으로 체포된 오오키 킨타로를 석방시킨) 오오노 반보쿠의 영향력이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이야기가 있다. 심지어 오오노의 배경에 1960년까지 수상을 맡았던 거물 보수계 정치인, 키시 노부스케(岸信介)의 정치적 의도가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사실 키시는 좀체 진전이 안 되는 한일회담을 성공적으로 진행시키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고착된 한일관계를 타개하기 위한 수단의 하나로 키시가 역도산을 이용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는 이야기는 그냥 소문으로 넘어가기엔 설득력이 강한 것 같다.

 

 

【오늘의 야쿠자 용어(16)…케츠모치 쟝켄】

 

지난회에서 "케츠모치(ケツ持ち)"라는 말을 소개했습니다(기억하시는 분이 거의 없을 테니 '링크'). 쉽게 말해 케츠모치라 함은 백, 즉 '뒤에서 받쳐 주는' 일 또는 세력을 뜻합니다. 그럼 '쟝켄'이 뭣일까요? 일어 공부할 때 비교적 이른 단계에서 나오는 말이라 아는 분도 꽤 있을 텐데 "가위바위보"란 뜻이죠.

 

그렇다면 과연 케츠모치 쟝켄이 무슨 뜻일까요?

 

일본 영화나 드라마에는 가끔 술집에서 일하는 여성들이 각자 손님한테 받은 명함을 동시에 내밀어 -마치 가위바위보를 하듯- 서로가 내민 명함의 "위력"을 겨루는 놀이 장면이 나옵니다. 그들이 내미는 명함은 대기업 임원이나 유명 인사, 의사・변호사를 비롯한 전문직 등등 사회적 지위가 높은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의 명함입니다.

 

이 비슷한 놀이를 동네 술집 주인이나 오락실 사장, 식당 주인끼리 할 때가 있답니다. 다만 사장님들이 내미는 명함은 자신이 운영하는 가게를 케츠모치 해주는(뒤를 받쳐주는) 야쿠자의 명함인 겁니다. 이게 바로 "케츠모치 쟝켄"이죠. 가게를 운영하는 사장님끼리 자신의 케츠모치의 위상을 겨루는 겁니다. 물론 복수의 야쿠자나 야쿠자 조직으로부터 케츠모치 서비스(?)를 받고 있는 가게는 없기 때문에 케츠모치 쟝켄은 딱 한 번만 할 수 있고, 반드시 즐거운 놀이라 할 수 없겠죠.

 

폭력단단속법이 시행된 이후 동법상 "지정폭력단"으로 지정된 조직의 구성원은 일반인에게 명함을 주는 것은 물론 보여주는 것도 "조직의 위력을 과시하게 된다"는 이유로 금지돼 있고, 경우에 따라 체포될 가능성도 있다네요. 그런 의미에서는 지금은 케츠모치 쟝켄을 하기 어려운 시대라 할 수 있을 겁니다(옛날에 한 경매사이트에서 야쿠자의 명함이 출시돼 있는 거를 본 적이 있는데 당시에는 이런 걸 사서 뭐하게? 싶어 신기했죠. 물론 지금은 옥션사이트 측에서 그런 출품을 막고 있는 모양입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