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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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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 제1차 세계대전 중 군병원에서 히틀러

(Photo by Hulton Archive/Getty Images)

 

“아침 무렵 나도 15분마다 심한 고통에 괴로워했다. 그리고 7시 전에 전투에 관한 나의 마지막 보고서를 갖고 타는 듯이 아픈 눈으로 고꾸라지고 비틀거리며 돌아왔다. 몇 시간 후, 이제 눈은 작열하는 숯불로 변하고 나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 <나의 투쟁> 중 발췌

 

1918년 10월 16일 가스중독에 걸린 히틀러는 병원열차를 타고 후송되고, 야전병원에서 종전을 맞이한다. 

 

“11월 10일 목사가 병원에 와서 간단한 이야기를 했다. 그래서 우리들은 모든 것을 알았다. (중략) 호엔촐레른 왕실이 이미 독일 황제의 왕관을 쓸 수 없게 되었다는 것. 조국이 ‘공화국’이 되었다는 것(중략). 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 <나의 투쟁> 중 발췌

 

킬 군항에서 반란은 삽시간에 독일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독일 사회는 이미 한계치까지 몰려 있었다. 루덴도르프가 총력전을 말하며 독일 사회를 한계까지 몰아붙였던 명분은, 이를 가지고 최후의 승리를 얻어낼 수 있을 거란 확신 때문이었다. 그러나 춘계대공세는 실패했고 역으로 협상국들의 100일 공세와 뒤이은 독일제국의 혁명 분위기로 독일은 무너진다.

 

(독일 해군은 전쟁의 막바지에 최후의 일전을 준비한다. 유틀란트 해전 이후, 변변한 해전 한 번 없이 항구에 박혀 있어야 했던 독일 해군은 종전이 다가옴에 따라 존재이유를 보이려고 했던 거다. 문제는 해군 수병들은 민간인과 정보에 노출돼 있는 항구에 있었다는 거다. 전선의 독일 육군들은 정보가 통제될 수 있다지만, 해군은 달랐다. 뻔히 죽으러 가는 걸 알았기에 출항을 거부했다. 이렇게 시작된 반란은 곧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들이 합류하면서 혁명으로 이어진다. 초기 반란은 항구와 항구로 이어졌고, 위원회를 조직한 뒤에 삽시간에 독일 전역을 장악하게 된다. 이미 독일 사회는 임계치에 다다랐던 거다)

 

1918년 11월 4일 킬(Kiel)에는 독일 최초의 군인 평의회가 구성됐고, 이들이 킬의 행정력을 장악했다. 혁명의 불길은 삽시간에 전 독일로 퍼져나갔다. 프랑크푸르트, 하노버, 슈투트가르트, 뮌헨에서 평의회가 만들어졌고 그 불길은 베를린까지 이어졌다. 

 

독일 장성들은 병사를 내보내 시위를 진압하라고 명령하지만, 병사들은 시민들 앞에서 총구를 내린다.

 

4년 간 끌어온 전쟁은 독일 국민들을 피폐하게 만들었고, 독일 제국의 사회적 내구성을 극도로 취약하게 만들었다. 1915년부터 실시된 빵 배급제만 봐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4년 간 끌어온 전쟁이 혁명의 양분이 됐다. 킬 군항에서 수병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평의회를 구성한지 일주일도 안 돼 황제는 퇴위했고, 네덜란드로 망명했다. 한때 목숨과도 같이 아끼며 키워왔던 독일제국 해군이 독일제국의 마지막을 장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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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군인들의 사진(베를린에서)

출처: 위키피디아

 

이제 남은 건 전쟁의 종결이었다. 독일 제국이 일으킨 전쟁을 독일 공화국이 정리해야 했다. 11월 10일 에베르트는 임시 공화국 정부를 구성하고, 바로 정전협상 대표를 파리로 보냈다. 독일은 그동안 점령한 영토를 포기해야 했고, 군대를 철수해야 했다. 러시아와 맺었던 브레스트-리포프스크 조약도 폐기해야 했다. 이건 휴전이 아니라 항복이라 보는 게 맞았지만, 독일에게는 달리 선택지가 없었다. 11월 11일 콩피에뉴에 정차된 열차 안에서 독일 대표단은 휴전 문서에 서명하게 됐다. 이로써 1,568일 4년을 넘게 끌어왔던 전쟁이 끝이 났다.

 

엄밀히 말해 1918년 11월 11일은 전쟁을 멈추는 ‘휴전 협정’을 맺은 거였다. 전쟁을 멈춘 거지, 끝낸 게 아니었다. 1차 대전이 끝난 뒤 전후처리를 위해 승전국인 협상국과 패전국인 동맹국 사이에 열린 국제회의가 바로 파리강화회의다. 이 회의의 결과물이 1919년 6월 28일 베르사유 조약이었고, 이 조약이 체결되면서 1차 대전은 끝난다.

 

 

2.

 

파리강화회의가 열린 날짜, 그리고 베르사유 조약이 체결된 장소를 보면 베르사유 조약의 성격을 한 번에 확인할 수 있다. 바로 ‘복수’다. 

 

역사를 잠깐만 거슬러 올라가 보자. 1871년 1월 18일 프로이센의 빌헬름 1세는 베르사유 궁전 거울의 방에서 독일 제2제국의 탄생을 선포했으며, 이곳에서 초대 황제로 즉위했다. 독일 제국의 탄생을 프랑스 땅, 그것도 프랑스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베르사유 궁전에서 했던 거다. 프랑스로서는 치욕이 아닐 수 없었다. 이유가 뭘까? 간단하다. 프랑스와 프로이센의 전쟁, 바로 보불전쟁에서 프랑스가 졌기 때문이다. 

 

비스마르크는 프랑스가 다시 재기하지 못하도록 50억 프랑의 배상금을 요구했고, 독일과 프랑스의 접경지인 알자스-로렌의 양도도 요구하게 된다(알퐁스 도데가 <마지막 수업>이란 단편소설을 쓰게 된 배경이 된다). 여기까지 보면 독일이 가혹하다 할 수 있겠지만, 거슬러 올라가면 나폴레옹 황제가 활약하던 시기 프로이센은 프랑스에게 철저히 짓밟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는 1871년의 치욕을 항상 잊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이걸 고스란히 되돌려 주기 위해 절치부심. 이때만을 기다려왔다. 파리강화회의 시작을 1월 18일로 잡은 것, 그리고 베르사유 조약 체결 장소를 베르사유 궁전 거울의 방에서 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프랑스는 독일에 대한 복수를 잊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은 독일과 프랑스만 싸운 전쟁이 아니었다. 다른 수많은 국가들이 이 전쟁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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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오르펀(William Orpen)'의 

<베르사유 거울의 방에서 평화 서명>

(The Signing of Peace in the Hall of Mirrors, Versailles)

 

파리강화회의를 위해 27개국에서 정치인들과 외교관들이 몰려왔다. 이들 모두가 회의에 참여할 수는 없었기에 미국의 윌슨, 프랑스의 클레망소, 영국의 로이드 조지, 이탈리아의 오를란도, 이 4명이 약 140여 차례의 회담을 통해서 주요 사항들을 결정한 다음 나머지 참가국들이 이를 승인하는 형태로 강화회의가 진행됐다. 여기서 패전국 독일은 철저히 배제되었다. 패자는 말이 없는 법이니 발언권이 없는 게 당연하겠지만 독일의 생각은 좀 달랐다. 

 

‘1815년 빈 회의 때 패전국 프랑스의 외상 탈레랑이 맹활약했어. 비록 우리가 졌지만 외교적으론 아직 승산이 있어.’

 

나폴레옹 전쟁의 결과를 수습하기 위해 열린 빈 회의. 패전국 프랑스의 외상 탈레랑은 패전국이었지만, 당시 승전국이었던 영국,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 사이에서 이들의 입장차를 교묘히 활용해 프랑스의 이득을 최대한 챙겼다. 

 

독일은 이 교훈을 잊지 않았고, 협상국 간의 입장 차이를 최대한 활용해 독일의 발언권을 높이려 했지만, 철저히 배제됐다. 협상국들도 빈 회의 때 교훈을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독일이 협상국 사이의 입장 차이를 이용해 승전국들 사이를 이간질 할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그렇다. 분명한 건 같이 싸우긴 했지만, 협상국 간에도 입장차이가 분명히 존재했다. 

 

4년 내내 전쟁은 프랑스 땅에서 일어났다. 자기 땅을 지키기 위해 프랑스의 18~27세 사이 남성인구 중 27%가 전장에서 사망했다. 프랑스는 20~32세 사이의 청년세대 40%가 사라졌다. 그 결과, 130만 명의 군인과 40만 명 정도의 민간인이 희생됐다. 이건 돌이킬 수 없는 피해였다. 한 세대 자체가 사라진 거였다. 여기에 더해 독일의 점령지였던 프랑스 지역은 황폐화되고 경제적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어야 했다. 가축은 빼앗겼고, 탄광은 물이 채워져 폐광이 됐으며, 건물은 부서졌고, 밭은 황폐화 됐다. 프랑스로서는 독일이 불구대천의 원수였으며, 독일이 다시는 일어설 수 없게 만들어야 하는 당위를 가지게 됐다.

 

1차 대전 이전까지 영국의 대(對) 유럽 외교정책 기본은 균형자 정책이었다. 그들 표현으론 ‘영광스러운 고립(splendid isolation)’이라 부르는 정책이었는데, 한 마디로 유럽 각국이 적당히 세력균형을 이루게 하는 거였다. 영국은 어느 유럽국가와도 동맹을 맺지 않았다. 그러다가 약한 세력을 외교적으로 지지해 세력균형을 유지하도록 하는데 힘썼다.

 

그러다가 유럽에서 막강한 패권자가 등장하면? 이 경우에 다른 동맹 세력을 규합해 싸웠다. 나폴레옹이 그랬고, 러시아가 남하정책을 펼칠 때, 프랑스와 사르데냐를 이끌고 크림전쟁을 펼친 게 그랬다. 영국의 제일 관심사는? 유럽 내의 세력 균형이 된다.    

 

이 세력 균형 덕에 영국은 200년 동안 대륙의 전쟁에서 떨어져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던 거다. 그렇기에 영국은 독일이 약해지더라도 너무 약해지는 걸 바라지는 않았다. 더구나 러시아가 사회주의 혁명으로 소련이 된 상황에서 독일은 소련을 막는 방파제가 돼야 했다. 그러려면 어느 정도의 힘은 가지고 있어야 했다. 프랑스와는 결이 다를 수밖에. 그렇다면 미국은 어땠을까? 

 

“무대는 준비되었고 운명은 드러났다. 그것은 우리가 구상한 계획이 아니라 우리를 이 길로 이끈 신의 손이 만든 것이다. 우리는 되돌릴 수 없다. 우리는 다만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정신을 차리고 전진하여 그 미래상을 따라갈 수 있을 뿐이다. 우리가 태어나면서부터 그린 그림이다. 미국은 진실로 그 길을 보여줄 것이다. 빛이 우리 앞에 놓인 길을 비출 것이다. 다른 곳은 비추지 않을 것이다.”

 

1919년 7월 10일 베르사유 조약 원문을 상원에 제출하면서 우드로 윌슨이 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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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강화회의에서의 조르주 클레망소,

우드로 윌슨 대통령,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영국 총리(1919)

Mansell/The LIFE Picture Collection/Getty Images

 

우드로 윌슨은 파리강화회의 당시 민족자결주의를 말하며 국제연맹의 설립을 주장했다. 그의 이상주의가 어떤 식으로 포장되든, 그의 궁극적인 목표가 무엇이든 별 상관이 없다. 중요한 건 그의 발언이다. 그는 미국의 역할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국제연맹을 만들어 보다 투명한 형태로 세계의 평화를 만들어 내겠다는 그의 꿈 같은 주장이 아무리 허황되게 보여도 상관없었다. 왜? 당시 윌슨은 앞으로 미국이 어떤 곳으로 가야할지를 알고 있었다. 그렇다. 미국은 영국을 대신해 세계 패권국의 자리를 이어받아야 했다. 

 

윌슨은 그걸 명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이미 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기 직전에 영국은 독일의 추격에도 몰리고 있었다. 세계대전 직전에 세계 제조업 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독일이 영국을 추월했었다. 국내 총생산도 독일이 영국을 추월했다. 유럽 대륙으로 한정한다면 독일이 이미 영국을 추월한 상황. 그러나 영국에게는 식민지가 있었다. 

 

문제는 1차대전 기간 동안 영국의 국고가 말라붙었다는 거다. 미국에게 돈을 빌리지 못했다면, 전쟁을 치를 수 없었을 거다. 1차대전이 끝나고 나서 문제는 본격화 된다. 영국이 패권자로서의 역할을 계속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미국이 그 자리에 올라서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면 어땠을까? 아니, 책임있는 자세만 보였어도 이야기는 달라졌을 거다.

 

당장 대공황은 일어나지 않았을 테고(대공황 자체보다 그 직후에 있었던 미국의 ‘스무트-홀리법(Smoot-Hawley Tariff Act)’의 제정과 시행이 문제였다), 제2차 세계대전 같은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한 마디로 패권의 진공상태였다는 거다. 만약 윌슨 대통령이 말한 국제연맹이 제대로 된 모습을 갖췄다면 어땠을까?

 

 

참고자료

 

아돌프 히틀러 결정판 1, 2/ 페이퍼 로드/ 존 톨렌드 저 민국홍 역

히틀러 평전 1, 2/ 푸른숲/ 요아힘 C. 페스트 저 안인희 역

CEO 히틀러와 처칠 리더십의 비밀/ 휴먼 앤 북스/ 앤드류 로버츠 저 이은정 역

나의 투쟁/ 범우사/ 아돌프 히틀러 저 서석연 역

히틀러는 왜 세계 정복에 실패했는가/ 홍익출판사/ 베빈 알렉산더 저 함규진 역

히틀러 최고사령부/ 플래닛 미디어/ 제프리 메가기 저 김홍래 역

히틀러가 바꾼 세계/ 플래닛 미디어/ 메튜 휴즈 저 박수민 역

히틀러 최후의 14일/ 교양인/ 요아힘 C. 페스트 저 안인희 역 

제2차 세계대전사/ 청어람미디어/ 존 키건 저 류한수 역

제2차 세계대전의 기원/ 페이퍼로드/ A. J. P 테일러 저 유영수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