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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중국은 ‘50년 동안’ 일국양제를 보장한다 했나

 

중화인민공화국은 사회주의 국가다. 정확하게 말하면 공산주의라는 이상향을 향해 가는 사회주의 단계에 있는 국가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중국이라는 국가의 특수성을 간직한 (중국정부 스스로 규정한)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국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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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을 알기 위해서는 ‘일국양제’가 관건이고, ‘일국양제’를 알기 위해서는 사회주의와 덩샤오핑에 대한 이해가 필수다. 하여, 짧게 언급하기로 한다. 

 

마르크스 이론엔 핵심 내용인 ‘역사 발전 5단계론’이 있다. 

 

“인류 역사는 원시공산주의에서 출발하여 노예제 사회 → 봉건제 사회 → 자본주의 사회를 거친다. 그리고 자본주의가 발전하면 심각한 빈부격차가 발생할 수밖에 없고, 곧 노동자가 주축이 된 혁명이 일어나서 프롤레타리아가 독재를 하는 사회주의 국가가 수립된다. 사회주의가 더욱 발전하면 유토피아인 공산주의로 진입한다.”

 

이것이 주요 내용이다.

 

문제는 사회주의라는 과도기인데, 마르크스는 그 기간과 형태에 대해 말한 적이 없다. 이 부분에서 좌파 이론가들이 할 일이 많아졌다. 중국정부도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개혁개방을 결정하면서 고민에 빠졌다. 사회주의 포기를 선언할 수도 없었고, 자본주의로의 회귀를 인정할 수도 없었다. 

 

그때 개발된 이론이 ‘사회주의 초급 단계 이론’이다. 이것을 특정하여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라 했다. ‘중국 특색의’라는 다섯 글자로 이론적 딜레마를 극복한 것이다. 이후 너희는 사회주의냐? 자본주의냐? 고 따져 묻는 모든 질문에 ‘중국 특색의’라는 수식어는 도깨비방망이처럼 유용했다. 

 

당시 중국정부는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부터 사회주의 단계에 진입한 것으로 보고, 그때부터 향후 1백 년을 초급 단계로 설정했다. 1백 년이 지나면 전국이 ‘살만한 상태(소강, 小康)’가 될 것이라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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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가 급속도로 성장하며 중국의 국가 로드맵은 처음 계획보다 시기가 많이 앞당겨졌다. 사진의 ‘샤오캉’이 소강을 의미한다. 

 

1997년 홍콩의 주권을 반환받고, 사회주의 초급 단계가 끝나는 2050년 즈음이면, 중국은 선진사회인 홍콩을 접수할 만큼 부강해져 있을 것이었다. 홍콩의 자본주의 제도를 50년 동안 보장하겠다는 약속을 한 이유이다. 

 

중국이라는 ‘일국’에서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라는 ‘양제’를 같이 시행해 보자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마오쩌둥 vs 덩샤오핑

 

중국 사회주의는 두 명의 위인을 배출했다. 마오쩌둥과 덩샤오핑이다. 이 두 위인을 생각하면서 나는 측두엽과 전두엽을 떠올린다. 두뇌과학을 공부하면서부터 내게 ‘못된’ 버릇이 생겼다. 그 사람을 생각하면서 그 사람의 두뇌구조를 분석해보는 것이다. 

 

저 사람은 주로 측두엽을 사용할까, 전두엽을 사용할까? 

 

사람은 다르다. 사람이 제각기 다르게 사고하고 행동하는 이유는 두뇌 구조가 다르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 마오는 감정에 충실한 ‘측두엽적인 인간’이고, 덩은 이성의 힘을 믿는 ‘전두엽적인 인간’이다. 

 

중국학자들은 ‘홍(紅)’과 ‘전(專)’으로 설명한다. 마오는 홍(紅), 덩은 전(專)으로 대표되는데, 사상성과 전문성, 즉 명분과 실리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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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좌)과 덩샤오핑(우).

 

마오는 일평생 사회주의라는 사상성을 강조했고, 덩은 시종일관 실사구시 즉, 전문성을 주장했다. 마오는 개인의 사리사욕이 생길 수 있다 하여 텃밭조차도 허용하지 않는 이상주의자였고, 덩은 텃밭을 이용하는 정도의 경제활동은 용인해주자는 실용주의자였다. 

 

꿈과 이상을 포기할 수 없는 사람이 많은데, 이런 이상주의자의 대표 격으론 단연 마오쩌둥이라고 할 수 있다. 마오는 처음부터 끝까지 ‘계급투쟁’과 ‘균등노동, 균등분배’를 주장했다. 

 

원칙을 존중하되 지금 우리가 처한 현실을 중시하자는 사람 또한 매우 많다. 이런 현실주의자 중 대표 격이 덩샤오핑이다. ‘흰 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쥐를 잘 잡는 고양이가 좋은 고양이’라는 구호는 그를 상징한다.

 

모든 역사와 마찬가지로 중국 사회주의의 역사도 ‘명분’과 ‘실리’ 두 가지 노선의 투쟁이었다. 마오라는 절대 지도자가 끊임없는 혁명을 강조하는 이상주의자였기에, 덩을 비롯한 실용주의자들의 목숨은 늘 경각에 달려 있었다. 덩샤오핑도 저승의 문턱에서 살아 돌아온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에 ‘오뚝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일찍이 마오쩌둥은 자신이 죽으면 덩샤오핑을 위시한 실용주의자들이 사회주의를 포기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결과적으로 마오는 정확했다. 이후 덩샤오핑은 ‘누구라도 먼저 부자가 되어라’ 하는 ‘선부론’과 ‘경제발전이 절대 진리’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최근 중국 대륙의 빈부격차와 환경파괴 등을 보면서 나는 가끔 마오의 경고를 떠올린다. 

 

마오쩌둥 사후 덩샤오핑은 평생의 꿈인 실용주의 노선을 강력하게 밀어붙였다. 문화대혁명이 끝나는 시점인 1976년부터 덩샤오핑은 중국의 최고 실권자로서 정국을 요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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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 사후 권력을 잡은 덩샤오핑이 생각하는 중국의 방향을 엿볼 수 있는 발언들이다.

 

개혁개방 결정, 홍콩반환을 두고 벌인 영국과의 협상 지휘, 1989년 ‘64천안문사태’의 강제 진압 결정, 1992년 ‘남순강화’를 감행하여 중국이 처한 내우외환의 위기 돌파(추후 자세히 설명)는 모두 덩샤오핑이 주도한 일이었다(옳다 그르다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 그가 한 일들이 이렇다는 것이다).    

 

 

‘일국’과 ‘양제’의 우선순위가 달랐다

 

중국과 영국이 발표한 『중영공동성명』에는 문제가 몇 가지 있었다.

 

중국과 영국은 『중영공동성명』에서 홍콩의 ‘현행’ 제도를 주권 반환 이후 50년 동안 유지하겠다고 했는데, 문제는 ‘현행’의 시점이었다. ‘현행’에 대한 시점을 적시해두지 않았던 것이다. 

 

『공동성명』이 체결된 1984년부터 주권을 반환하기로 한 1997년까지 13년이라는 시간이 남아있었다. 그렇다면 ‘현행’의 시점은 언제를 말하는 것일까? 그만큼 허술했다. 

 

또 하나의 큰 문제는 ‘일국’과 ‘양제’의 무게중심과 우선순위였다. 

 

전편에서도 잠깐 말했듯이 중국-홍콩체제에서 영국(홍콩)이 가장 크게 실수한 점은 ‘일국’과 ‘양제’의 순위와 관계를 자세하게 규정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후 그것에 대한 해석을 두고 중국과 영국(홍콩) 양측은 지루한 다툼을 이어갈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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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영공동성명. 가운데 덩샤오핑이 보인다.

 

중국정부는 당연히 ‘일국’ 즉 ‘한 나라’가 중요하다고 하고, 영국(홍콩)은 또 당연히 ‘양제’, 즉, ‘두 가지 제도’가 중요하다고 한다. 중앙정부는 국가가 중요하다고 하고, 지역은 지역성(로컬리티)을 존중해 달라고 한다. 

 

우리에게는 생소할 수 있지만, 중국-홍콩을 비롯하여 미국, 영국과 같은 연방국가 등의 체제에서 국가가 중요한가, 아니면 지역의 정체성이 중요한가에 대한 공부거리를 던지는 지점이다(관련하여 졸저 『방법으로서의 중국홍콩체제』를 참고하기 바람). 

 

물론 홍콩으로부터는 암울한 뉴스들이 이어지고 있다. 2021년 6월 말 홍콩 경찰은 『국가보안법』 시행 이후 동법 위반 혐의로 1년 동안 117명을 체포했다고 밝혔다. 내가 중국-홍콩체제를 연구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친구들은 하나같이 ‘이제 일국양제는 끝났다며?’, ‘홍콩은 이제 망했다며?’라고 묻는다. 

 

50년 동안 홍콩을 있는 그대로 보장해주겠다고 한 ‘50년 불변’이란 중국의 약속은 깨진 것인가? 대륙에는 사회주의, 홍콩에는 자본주의를 시행하겠다는 ‘일국양제’의 약속은 역사 속 기록으로만 남게 되는가?

 

인간 만사 모든 것이 보는 사람의 눈과 입장에 달려있다. 그것이 관점이고 세계관이다. 

 

‘일국양제’를 바라보는 세 가지 시선이 있다. 

 

①‘일국양제’는 완전히 끝났다고 보는 시선.

②‘일국양제’는 여전히 유효하다고 보는 시선. 

③‘일국양제’의 큰 틀은 유지되고 있지만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일국’과 ‘양제’의 우선순위가 시시각각 변화하고 있을 뿐이라고 보는 시선. 

 

수많은 민주인사가 체포되고 있는 것을 지켜보는 홍콩 사회는 당연히 ‘일국양제’는 완전히 끝났다고 본다. 반대로 중국정부는 ‘일국양제’는 여전히 유효하다고 반복해서 선전하는 것을 잊지 않고 있다. 

 

최근의 흐름에 대해 누구보다 충격을 받는 건 대만 사회다. 당초 자신들을 겨냥해 만들어진 ‘일국양제’가 홍콩에서 어떻게 구현되고 정착될 것인가를 초미의 관심사로 지켜보던 중이었다. 

 

‘일국양제’의 현실이 심각해지고 있는 것과 더불어 대만을 중국과는 완전히 별개의 국가로 독립하자는 독립파의 입지가 빠른 속도로 커지는 건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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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독립파이자 현 총통 ‘차이잉원’.  

 

 

‘일국양제’, ‘50년 불변’은 공산당의 통일전선전술이었다

 

1984년 『중영공동성명』으로 1997년에 주권이 반환되기 때문에 영국의 『황실훈령』 등의 법을 대신할 홍콩의 헌법이 필요해졌다. 1985년 중국의 전국인민대표대회는 홍콩의 헌법인 『기본법』을 만들 ‘기본법 기초 위원회’를 조직했다. 1990년 4월 4일 『기본법』이 정식으로 반포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 홍콩특별행정구 기본법』은 홍콩이 살아오던 대로 자본주의 제도와 생활방식을 유지하고, 그것이 50년간 변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고도의 자치를 누린다는 내용을 골자로 했다. 당시로써는 중국과 홍콩 모두 만족하는 내용이었다. 

 

중국과 홍콩특별행정구의 관계도 명확하게 규정하고 있다. 중앙정부가 외교와 국방을 책임지며, 중국 군대가 홍콩에 주둔하며, 중앙정부가 홍콩의 행정수반을 임명한다. 

 

특히 중요한 것은 『기본법』에 대한 해석과 개정에 관한 권한인데, 중국의 국회 격인 전국인민대표대회가 가진다. 이 권한이 얼마나 크고 중요한 것인가는, 이후 전개되는 중국-홍콩의 정체성 갈등에서 여실히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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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전국인민대표대회.

 

홍콩 사람들은 ‘일국양제’, ‘50년 불변’, ‘홍콩인이 홍콩을 통치한다’는 슬로건에 매료되었다. 홍콩과 홍콩인들의 정체성을 인정해주고 보호해준다는 약속으로 받아들였다. 홍콩에서 계속 살아도 될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일국양제’, ‘50년 불변’ 등의 약속은 모두 공산당의 통일전선전술이었다. 중국정부는 선전전에 총력을 기울였다. 모든 매체를 통해서 ‘일국양제’, ‘50년 불변’, ‘홍콩인 자신이 홍콩을 통치한다’는 구호를 반복 선전했다. 불안감도 있었지만, 홍콩인들은 점차 안심했다.

 

류영하(백석대학교 중국어학과 교수)

 

<계속>

 

 

추신: 다음 편에선 ‘64천안문 민주화 운동’은 홍콩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살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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