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길한 오프닝
활과 투석기 등 전근대 냉병기 발사체 무기의 위력까지도 화력이라는 단어에 포함시켜 생각해보자. 원칙적으로는 틀린 표현이지만 그렇게 가정해보자는 얘기다.
한반도인은 주변국에 인구와 생산력에 압도당하는 상황을 오랫동안 경험했다. 그러나 화력, 화력을 통한 교환비에서 밀리는 경험은 근대, 그것도 현대가 시작되기 직전인 근대의 끝물에서나 겪었다.
출처: <KBS 역사저널 그날>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는 불길한 오프닝이라고 봐야 할 게다. 동학농민이 회전포(개틀링 기관포)에 수숫대처럼 거꾸러지면서 뭔가가 단단히 잘못됐던 것이다. 물론 동학군의 적은 조선군과 일본군 두 관군의 연합이었지만 당시 한반도의 시대정신이 조정보다는 동학에 있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역사적으로 훈련된 인내심과 집요함, 그리고 화력으로 상대에게 손해보는 장사를 강요하며 싸워왔던 민족이 거꾸로 신식무기에 숱하게 죽어나간다? 한반도의 지나치게 열악한 생산력과 인구부양력을 감안하면, 이 시점에서 나라가 한 번은 망할 수밖에 없는 거였다.
발사무기에 대한 탁월한 감각은, 안중근 의사나 김상옥 열사 같은 협객을 통해 확인할 수나 있을 뿐, 망하는 건 망하는 거였다.
화력의 끝판왕을 구경하다
한반도 주민은 화력이 부족한 절절한 경험을 광복 전후에서부터 느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화력과 인구+생산력의 상관관계다.
일본의 인구와 화력에 굴복한 나라 사람들이다. 그런데 학도병으로 끌려가 일제의 군복을 입은 사람들은 미국의 화력을 구경해야 했다.
독립운동을 하던 분들은 그들대로, 일본의 우월한 화력에 갖은 고초를 겪어야 했다. 1945년까지 화승총(조총)을 사용하던 독립군도 있으니 말 다했다. 그런데 그런 일본의 화력은 미국과 소련의 거대한 물량 앞에서 깨방정이 났다.
중국인과 함께 항일운동을 전개했던 조선인들 역시 갑갑한 심정을 느꼈을 수밖에 없다. 무기의 수준은 똑같이 유행에 뒤쳐져있지만 그들은 중국의 광대함을 목도했다. 엄청난 생산력과 인구로 일제를 막아서는 모습 말이다.
일제의 수도 도쿄는 미군의 폭격에 잿더미가 되었다. 결정적으로, 한반도 주민은 화력의 끝판왕을 구경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두 발의 핵폭탄이다. 이 사건 직후에 우리는 독립을 얻었다. 이것만으로도 핵무기에 대한 깊은 인상이 각인되지 않을 수 없다.
출처: <TODAY>
"탱크 한 대만 있었더라도"
'손바닥만 한 나라에 머릿수도 부족한데 화력도 없다.' 이는 고구려 시조 주몽이 활솜씨를 자랑한 이래 한민족이 처음 겪고 인정해야만 했던 1세기 동안의 무력감이었다.
1. 화력에 집착해온 역사적 경험
2. 화력을 잃고 지낸 '백년 동안의 고독'
이것만으로도 대한민국 국방부와 북한 로동당의 화력에 대한 비정상적인 페티쉬는 충분히 설명되고도 남는다.
하지만 여기서 한국전쟁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탱크 한 대만 있었더라도"
국군 참전용사분들이 막걸리 한 잔만 마시면 토해내는 한탄으로 유명한 말이다. 바리에이션은 많다. 견인포 한 문만 있었으면, 폭격기 한 대만, 우리 분대에 기관총 한 정만 더 있었어도, 그때 내 손에 수류탄 하나만 더, 등등.
맞다. 국군은 인민군에 비해 화력이 열세인 탓에 상상할 수도 없는 고난을 겪었다. 그러나 이쯤에서 잠깐, 남북한을 합쳐서 즉 한민족의 경험을 잠시만 이야기해보자.
한국전쟁에서 마주한 물량
인민군이 국군을 화력으로 가지고 놀았다 한들, 그들 역시 미군의 화력 앞에서는 결국 일본군 앞의 동학농민군 신세였던 건 마찬가지다. 남북한 모두에게 한국전쟁은 외국의 막대한 화력을 눈앞에서 경험한 전쟁이다.
화력이 열세인 국가도 있었다. 중국이다.
그러나 중국에는 인구가 있었다. 인해전술은 그 세계최강의 미군을 방구석 코너까지 밀어붙였다.
6.25전쟁에 개입한 중공군의 인해전술(1950)
출처: <국가기록원>
여기엔 부가설명이 필요하다. 인해전술을 단지 머릿수만으로 밀어붙인 무식한 공세로 보면 안 된다. 물론 투입 병력 240만이라는 숫자는 어찌 봐도 초월적이기는 하다. 하지만 2차대전에서 독일은 소련을 상대로만 1800만 명의 병력을 동원했다. 소련군의 동원규모는 3400만 명이 넘는다. 20세기에 240만이라는 원정군은, 중국만 가능한 초자연적인 숫자가 아니다.
인해전술은 당대 세계 최고의 전술가 중 한 명인 펑더화이의 지휘 아래 정밀하고 대담하게 실행된 군사전술로, 오히려 아군의 피해를 최소화한 채 전술적 목표를 달성하는 기동이었다. 물론 화력이 절대적으로 열세인 상태의 아군이 말이다. 그 특유의 기동방식 때문에 '인해', 사람의 바다로 보였던 것이다.
미국조차 당대의 그 어떤 미군 지휘관도 개인적 지략으로는 펑더화이에 미치지 못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만약 비슷한 물질적 조건이 주어졌다면 펑더화이가 미군을 찜쪄먹었을 거라는 평가는 온당하다. 왜냐면 이건 그 누구보다 먼저 미국의 평가니까.
하지만,
직관적 감각으로 인해전술이 어마어마하게 무식하고 확실해 보이는 건 사실이다. 눈으로 보는 광경으로는, 중국의 막대한 인구가 겹쳐보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한국전쟁에서 한반도 주민이 느낀 것은 역시 물량이다. 화력이든 인구든 물량이긴 마찬가지. '화력이 없으면 머릿수'였다. 당연한 말이지만 슬프게도 한반도에는 둘 다 없었다.
불균형에 의한 스트레스, 그리고 핵
한국전쟁과 분단 이후 한반도는 주변세력의 물량에 휩싸이게 되었다. 인구든 화력이든 둘 다든, 한반도보다 우월하지 않은 세력은 없었다. 미국, 소련, 중국, 일본. 한반도 주민이 이 극단적인 불균형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당연지사다.
복잡다단한 과정이 있지만, 결국 이 불균형에 의한 스트레스는 남북한 모두 핵개발에 뛰어드는 것으로 귀결될 수밖에는 없었다. '폭력으로 본 한중관계'에서 이제는 중국이 최소 2개국, 최대 4개국이 된 것이다. 그런데 우리에게 화력이 없다? 한반도 주민의 역사적 감각이 견딜 수 있는 상태가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부터 핵무기 개발을 꿈꿨단 말인가. 어찌보면 놀랍고 어찌보면 너무나 당연하게도, 이승만 시절부터였다. 화력은 건국 직후부터의 목표였다. 4.19 혁명으로 하야한 해에 있었던 회의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자립하지 않으면 노예밖에 될 도리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되니... 원자력을 개발하고 군비에 관한 위원회라도 만들어서 이순신 장군의 대를 이을 만한 기술자를 기르고...“
혹자는 이승만이 원한 것은 효율적인 경제성장을 위한 원자력 발전이라고 주장하지만, 이승만의 의지는 명백하다. 자립, 노예, 군비, 이순신 장군. 의심할 여지 없이 국방에 대한 의지이며, 그 의지는 확연히 핵무기를 가리킨다.
원자력전시회에서 이승만 대통령(1956)
출처: <국가기록원>
재미있는 것은 이승만이 이순신의 예를 들었다는 것. 그 역시 조선의 입장에서 임진왜란을 화력전으로 이해하고 있었으며, 핵무기를 이순신이 운용한 천자총통의 연장선에서 보고 있었다.
박정희가 추진하고 전두환이 폐기한 것
박정희의 핵무기 보유 의지는 더욱 노골적이어서, 그는 CIA에게 '수술'당하기 직전까지 핵개발에 매진했다(수술은 결국 김재규에게 받게 됐지만). 박정희를 어떻게 평가하든, 이것이 옳든 그르든, 확실한 것은 이 시대 한국의 핵개발이 여러 사람의 애국심에 의해 추진되었다는 사실이다. 나는 그의 애국심이 어떤 형태이든, 박정희에게는 나름의 완고한 애국심이 있었다고 본다.
따라서 전두환의 가장 큰 죄악은 5.18이지만 그가 결국 애국자가 못 된다는 결정적 증거는 핵을 포함한 고급무기개발 자료를 모조리 미국에 넘기고 이전까지의 성과를 깨끗히 폐기한 일이다(드라마 <제5공화국>은 이 일을 힘주어 비판했다). 학살은, 물론 그것은 너무나 잘못된 것이지만, 애국적 확신이나 역사적 사명감에 의해 벌어지기도 한다. 국방력을 포기하는 건 다른 차원의 일이다.
아무튼 전두환 이후 노무현 정권이 출범하기 전까지 한국의 화력개발은 비교적 침체기를 맞게 된다. 어디까지나 '비교적'이다. 하지만 조선시대 중반까지 이어진, 화력에 대한 한반도 주민의 고삐 풀린 광기가 제대로 '복원'된 것은 대한민국의 경우 참여정부 시기로 보는 게 맞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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