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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즌이 거의 마무리되었다. 구단과 코칭 스텝들은 곧 마무리 훈련에 돌입할 것이다. 대부분 국내 지도자들은 마무리 훈련을 좋아한다. 시즌 종료 후 1.5군 선수와 2군 선수 및 저 연차 선수들과 많은 훈련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무리 훈련에서 기량 향상이 많이 일어난다는 취지로 인터뷰하는 지도자들도 많다. 난 그 의견에 반대다. 일단 뭘 많이 해야지 좋아진다는 말에 동의할 수 없다.

 

예전에 일하던 팀에서 있었던 일이다. 시즌 종료를 얼마 앞두고 마무리 훈련에 관한 코칭스태프 미팅이 있었다. 그 당시 신인 선수의 마무리 훈련 참가 여부에 대한 얘기가 오갔다. 1년간 지켜본 코치들은 그 선수의 수비 능력이 부족하다는 결론을 내렸고, 그래서 마무리 훈련에서 많은 수비 훈련을 시켜야 된다는 이유로 훈련 참가를 시키는 분위기였다. 고참 선수들도 그런 생각을 얘기할 정도였다. 난 이렇게 얘기했다.

 

“지금 선수에게 필요한 건 휴식이지 훈련이 아닙니다.”

 

물론 대부분 나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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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무리 훈련은 정말 중요한가

 

마무리 훈련을 가든, 스프링캠프를 가든 전체적인 훈련 스케줄은 비슷하다. 수비 훈련 시간만 따지면 오전에 1시간 정도 할 것이고, 오후에 개인 훈련을 30분 정도 추가할 수 있다. 전체 수비 훈련시간 1시간은 다른 야수들이랑 같이 하는 거라 온전히 그 선수에게 할애되는 시간은 1-20분 정도 될 것이다. 엑스트라 훈련을 매일 한다고 해도 하루 1시간 정도 수비 훈련을 할 수 있다. 마무리 훈련을 4주 정도 한다고 가정하면 휴일 빼고 대략 20일 정도 훈련 일이 있다. 그럼 20일간 20시간 정도 수비 훈련을 하면 수비 능력이 좋아진다는 거 아닌가. 그래서 난 이렇게 얘기했다.

 

“20시간 훈련을 하면 좋아지는 걸 왜 시즌 중에 안 한 건가. 1시간을 하든 20시간을 하든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훈련을 시키면 시간 상관없이 마무리 훈련에 동의하겠다.”

 

마무리 훈련에서 지금까지와는 어떻게 다른 방식으로 훈련을 시킬 건지 물었을 때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같은 방법으로 훈련을 많이만 시킬 건데 시간 좀 더 투자한다고 갑자기 좋아지는 거에는 동의하지 못하겠다고 얘기한 적이 있다. 만약 게임이 부족한 선수가 게임을 더 하는 것 같은 방법의 변화가 있으면 동의하겠지만. 2군 선수들은 어차피 1년 내내 2군에서 훈련 강도가 높은데 마무리 훈련에서 같은 훈련을 조금 더 시킨다고 좋아진다는 논리에 납득할 수가 없었다.

 

우리나라에서는 2군 선수가 1군 선수가 되기는 너무나 힘들다. 그 이유는 1군과 2군의 시스템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1군 선수들은 시즌이 종료되면 휴식을 주지만 같은 기간 동안 훈련량이 더 많았던 2군 선수들은 시즌 종료 후, 마무리 훈련에 참가하여야 한다. 이전에 언급했듯이 야구를 잘하기 위해서는 힘이 중요한 요소다. 시즌이 종료한 후 1군 선수들은 누적된 피로를 충분히 푼 다음, 힘을 키울 수 있지만 마무리 훈련에 참가한 2군 선수들은 더 많은 피로를 안고 와서 1군 선수들보다 늦게 힘을 키우는 작업에 들어간다. 거기다 스프링캠프에 가면 또 어떤가. 주전 선수들은 여유 있게 개막전에 맞춰 컨디션을 끌어올리지만 2군 선수들이나 저연차 선수들은 초반부터 전력 질주를 해야 한다. 촌놈 마라톤 한다는 얘기가 여기서 나오는 것이다.

 

이런 시스템 자체를 바꾸는 게 좋다고 생각했지만 내 능력 밖의 일이었다. 그래서 2군 선수들에게 할 수 있는 조언은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빨리 1군 선수가 되어라. 그럼 그 자리를 지키기는 훨씬 쉬울 것이라고 얘기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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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관성이 없는 이유

 

관성의 법칙은 뉴턴의 운동법칙 중 하나이다. 사전적 의미로는 ‘외부에서 힘이 가해지지 않는 한 모든 물체는 자기의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려고 하는 것’을 관성의 법칙이라 한다. 달리던 버스가 급정거하면 앞으로 넘어지거나 브레이크를 급히 밟아도 차는 앞으로 밀린다.

 

나는 삶이나 사고의 방식에도 관성의 법칙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대부분 인간은 기존의 방식에 변화를 주는 걸 낯설어하고 싫어한다. 관성의 법칙의 다른 표현으로는 경로 의존 법칙이라는 말이 있다. 서울에서 부산으로 갈 때 경부고속도로를 이용하던 사람들은 더욱 넓어지고 빠른 고속도로가 생겨도 계속 경부고속도로만 이용한다는 것이다. 경로가 비효율적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관성과 경로의 기득권 때문에 바꾸기 힘들어하는 현상이다.

 

마무리 훈련이 중요하다고 하는 이유도 그런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6개월을 2군에서 훈련을 해도 발전하지 않던 기술이 한 달 만에 기술이 향상되었다고 믿는 건 특별한 근거 없이, 단순히 마무리 훈련에서 기량 향상이 많이 된다고 믿어오던 관성 때문이다. 나에게 이런 관성이 없는 이유는 간단하다. 난 선수 출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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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러브를 닦던 아이

 

부산에서 롯데 게임이 있는 날 술집에 가면, 롯데 얘기를 안주 삼아 술 마시는 사람들 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부산은 야구의 도시다.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부산에서 나고 자란 나는 그렇게 롯데 팬이 되었다.

 

초등학교 2학년 때의 일로 기억한다. 군무원으로 일하셨던 아버지 부대와 내가 다니던 학교가 가까이 있었다. 어느 날, 수업 중에 아버지가 대뜸 찾아오셔서는 조퇴를 시켰다. 나중에 개근상을 받은 걸로 봐서는, 아버지는 그날 조퇴 기록이 남지 않게 선생님께 잘 말씀드렸던 것 같다.

 

조퇴한 나는 아버지, 아버지 친구분과 함께 중국집에서 자장면을 맛있게 먹었다, 식사가 끝나자 아저씨는 사이다 페트병을 비우고 소주를 담았다. 작은 양주병 하나는 나의 팬티 안에 넣었다. 그리고 우리는 사직 야구장으로 향했다. 아들과 야구 보러 가기 위해 학교를 조퇴시키는 그런 아버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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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서 자란 내 또래 친구들은 아마 비슷한 추억들이 있을 것이다. 이런 환경에서 자란 내가 야구를 좋아하지 않을 리 없었다. 야구 유니폼을 입고 아버지랑 학교 운동장에서 캐치볼을 하고, 집에서도 항상 글러브를 가지고 놀며, 애지중지 관리했던 기억도 있다.

 

운동신경이 좋았던 나는 어릴 때부터 공으로 하는 스포츠는 다 잘했다. 특히 야구는 제일 자신 있었다. 초등학교 때는 학교 대표로 멀리 던지기 소년 체육대회에 출전하기도 했었다. 야구선수가 되고 싶었고, 롯데 자이언츠 선수가 되는 꿈을 가진 어린이였다. 다니던 초등학교에 야구부가 없어 야구부가 있는 학교로 전학을 시키려고 부모님께서 알아보시기까지 할 정도였다. 내가 기억하기론 전학을 하기 위해 위장 전입을 해야 했기에 전학은 시키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그래도 다니던 학교에서 진학할 수 있는 중학교 중에 야구부가 있는 학교가 있었기에 그 학교에 배정받기를 항상 기도하며 초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느그 아버지 뭐하시노 : 야구선수의 꿈을 접다

 

신기하게도 야구부가 있는 개성중학교로 진학했다. 난 당연히 야구부가 있는 중학교에만 가면 야구부가 되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런 희망이 깨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입학 후 운동장에서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을 하는데 키가 165Cm 이상 되는 학생들은 앞으로 나오라는 것이었다. 키 큰 친구들만 야구부 테스트를 봤다. 기대만큼 실망이 컸던 나는 집으로 가는 버스에서 펑펑 울었다.

 

그런 내가 맘에 걸리셨던 어머니는 담임 선생님께 야구부 테스트를 한번 보게 해 달라고 부탁하셨다. 선생님께서는 성적이 좋은데 왜 운동을 시키냐며 처음엔 반대를 하시다가 어머니의 계속된 부탁에 야구부장 선생님께 전달해주셨다. 그리하여 다른 친구 한 명과 함께 테스트를 보게 되었다.

 

몇 번의 캐치볼을 하고 나서 야구부 감독님과 야구부장 선생님은 나를 불러 세워서 얘기했다.

 

“아버지 뭐하시노?(진짜 영화 친구의 대사랑 똑같았음), 집에 돈 많나?”

 

지금 생각해보면 뭐 이딴 질문을 할 수 있나 하는 생각이 든다. 마지막에는 나한테 키도 작고 실력도 별로인데 그래도 야구하고 싶으면 내일 부모님을 모시고 오라고 했다. 캐치볼 몇 번밖에 안 했는데 뭘 보고 그렇게 판단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래도 다음날 어머니가 오시기로 하였다. 집안 형편이 넉넉하진 않았지만 부모님은 아들의 꿈을 지원해 주시려 하셨던 것이다.

 

다음날 등교를 했는데 야구부 친구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니 왜 야구 할라고 하노? 돈도 많이 들고, 엄마들 당번 정해서 밥도 해주러 와야한대이”

 

비록 어린 나이였지만 엄마가 학교에 밥해주러 오셔야 된다는 말에 나는 야구의 꿈을 접기로 마음먹었다. 아주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요즘 아마추어 야구시합을 가보면 어머니들이 간식을 챙기고, 상대팀 감독, 코치들 커피 타주는 모습을 보면서 30년 전의 기억이 새록새록 난다. 어떻게 30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지 잘 모르겠다. 아무튼 그렇게 나는 야구선수의 꿈을 포기하고, 평범한 학생으로 성장했다.

 

붓싼 야구소년, 트레이너가 되다

 

고등학교 2학년 즈음, 담임선생님께서 부르시더니 대뜸 말씀하셨다.

 

“지풍이 니는 맨날 볼이나 차는데 대학교도 체육과 가라”

 

고 하셨다. 그 말씀을 듣고 생각해 보니 영 틀린 말이 아니었다. 운동을 좋아하고, 잘하기도 하니, 미래에 성공하려면 이쪽 계열이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고3 시절에 체육 입시를 준비하였고, 성적도 괜찮은 편이라 고려대학교 체육교육과에 입학을 하게 되었다.

 

난 IMF를 겪은 세대였지만 그래도 나름 캠퍼스의 낭만을 누리며 학교생활을 하였다. 군대 가기 전까지는 선후배들과 술 마시고 놀았던 기억밖에 없을 정도였다. 그렇게 2년간 재밌게 학교생활을 하고 입영 통지서를 받았다. 입영통지서를 받자 정신이 들었던 것일까? 제대 이후의 진로와 계획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시기에 우연히 신문기사 하나를 접하게 되었다. 스포츠 신문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프로야구단 트레이너에 대한 기사였다. 각 팀 트레이너들의 출신학교, 학과 등이 나와있었고, 트레이너라는 직업에 대한 글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 기사를 보고 나서 나도 모르게 어릴 적 꿈이 다시 꿈틀거렸다. 비록 야구선수는 아니지만 롯데 자이언츠에서 야구를 보며 일을 할 수 있는 길이 보인 것이다. 그때 나는 야구단 트레이너가 되겠다고 결심을 하고 입대하였다.

 

제대 무렵에는 야구단에서 일을 하려면 외국인 선수들과 직접 소통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고, 제대 후 바로 캐나다로 어학연수를 떠났다. 어학연수 지역을 선택할 때도 야구가 영향을 미쳤다. 나의 조건은 이랬다. 첫째 한국 사람이 별로 없는 곳, 둘째 그런 도시 중 마이너리그 야구팀이 있는 곳이었다.

 

그래서 선택한 곳이 오타와였다. 당시 몬트리올 엑스포스 산하 트리플 A 팀이 오타와에 있었다. 우연히도 캐나다에 간지 얼마 안 된 시점에 김선우 형이 보스턴에서 몬트리올로 트레이드되었다. 김선우 형은 고려대학교를 다니다가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선수라 비록 얼굴은 몰랐지만 직속 선배였다. 나는 야구장에 가서 시합 전 더그아웃으로 향하는 김선우 형을 부르며 고려대학교 마크가 찍힌 티셔츠를 흔들며 인사했다. 선우형이 내 용기를 높게 평가하셨는지, 그날 저녁 한국 식당에서 같이 밥도 먹고, 형이 마이너에 있는 동안 매 게임 티켓도 주셔서 야구를 자주 볼 수 있었다. 훗날 선우형은 나를 참 특이한 놈이라고 생각했었다고 한다.

 

1년여의 어학연수기간 동안 영어도 공부하고, 트레이너 관련 자격증도 따서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때부터는 한국에서 트레이너 관련 공부를 중점적으로 시작했다.

 

군대가기 전에는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이 아니었기에 관련 과목 공부를 처음부터 다시 하였다. 공부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재밌게 공부했던 기억이 있다. 그런 시기를 보내고 있는데 과내 게시판에 공고가 하나 올라왔다. 현대유니콘스 야구단 트레이너 채용 모집 공고였다. 난 자격 요건이 되지 않았지만 방학 기간 동안 실습이라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아산병원에서 근무중이었던, 현 우송대학교 교수 김명화 선배를 찾아갔다. 야구단에서 실습을 하고 싶은데 도와 달라고 부탁했다. 선배는 당시 현대 유니콘스 트레이닝 코치였던 김용일 코치와 친분이 있어서 선뜻 소개해주었고, 운 좋게도 비시즌 기간인 12월 한 달 동안 수원야구장에서 실습하는 기회를 얻었다. 당시 자취방이 있던 안암동에서 수원까지 다니는 게 보통 일은 아니었지만 너무나 재밌고 뜻깊은 시간이었다.

 

그때의 인연으로 현대유니콘스 2군에서 인턴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고, 정식 채용까지 된 것이다. 당시만 해도 채용공고가 공개적으로 나던 시기는 아니어서 인맥이 중요한 시절이었는데 김용일 코치님이 나를 좋게 봐 주셨는지, 트레이너 TO가 생겼을 때 바로 뽑아주셨다. 팀당 4-5명 정도의 트레이너들이 있을 때인데, 우연히 인연이 있던 팀에서 자리가 생겼고, 운 좋게 채용된 것이다. 그렇게 트레이너를 시작하게 됐고, 십수 년이 지난 지금까지 오게 되었다.

 

Think different

 

애플의 1997년 광고 문구는 “Think Different"다. 국내에서는 ‘다르게 생각하라’로 널리 알려져있다. 애플의 각 지면 광고에는 역사적으로, 다른 방식의 새로운 것을 시도한 창의적인 인물들 사진을 내고, 한쪽 구석에 애플 로고와 "다르게 생각하라" 문구를 찍었다.

 

2011년 현대자동차는 새로운 슬로건을 발표한다.

 

‘New thinking New possibilities’ 새로운 생각, 새로운 가능성.

 

Think different 와 New thinking New possibility 의 의미는 본질적으로 같다. 세계적인 기업인 애플과 현대자동차가 계속 전 세계 시장에서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기업의 슬로건으로 다름과 새로움을 내세웠다.

 

야구 업계도 마찬가지다. 성공하기 위해선 뭔가 새로워야 하고 남들과는 달라야 한다. 17년 전과 비교하면 많은 변화들이 있어 왔지만 코치들 중 변화를 두려워하거나 새로운 걸 시도하지 못하는 지도자들이 많다.

 

나보다 나이가 많은 지도자들이 대부분일 때는 그래도 괜찮았다. 그분들은 정보가 부족해서 그렇다는 걸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새로운 정보를 얻는 환경도 아니었고, 익숙하지도 않았고, 오랜 세월 동안 배우고 해오던 방식을 바꾸는 게 많이 불안했었을 수 있다고 이해했다. 세월이 흘러 나보다 나이가 어리거나 동년배 코치들이 대부분인 요즘은 예전과 똑같은 모습을 보이는 지도자들 보는 게 너무 힘들었다. 인터넷 환경이 발달하고 시각적인 정보들도 구하기가 쉬워진 오늘날에도 그닥 달라지지 않는 어린 지도자들 볼 때면, 얼마나 많은 선수들이 고통 속에서 더 견뎌야만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지도자들 모두가 그런 건 아니다. 나의 욕심이 과한 거일 수도 있다. 아주 훌륭하고, 새로운 걸 추구하고 공부 열심히 하는 지도자들은 있다. 보기 드물어서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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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 업계에서 그동안 내가 먹고 살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가 야구선수 출신이 아니란 거다. 왜냐하면 난 특별한 노력 없이도 야구선수 출신들과는 다르게 생각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선수 출신들이 당연하게 생각해오던 것이 나에게는 궁금함이었고, 나의 설명들이 선수들에게는 새로운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한 선수가 군대를 제대하고 1년 동안 5번 정도 야구에 대한 얘기를 조금 깊이 나눈 적이 있다. 마지막 5번째 대화가 끝난 후 이 선수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올해 코치님하고 얘기를 5번 정도 나눴는데요, 얘기할 때마다 닭살이 돋습니다."

 

내가 무슨 뜻이냐고 물으니,

 

"야구를 해오면서 처음 듣는 얘기인데, 다 맞는 것 같아서 소름 돋습니다."

 

라고 얘기하였다.

 

얘기를 듣는 순간 나도 소름이 돋았다. 기분이 좋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너무 안타까웠다. 난 내가 무슨 얘기를 해줬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지만, 뭔가 아주 특별한 얘기를 했거나 새로운 이론을 얘기한 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선수가 저런 반응을 한다는 건 그동안 아마추어 때나 프로에서나 늘 같은 얘기들만 들어왔다는 얘기다.

 

우리 야구 코치들은, 이런 선수들의 니즈를 해소해 주어야 된다. 내가 선수 출신이 아니어서 볼 수 있었던 부분들을 선수 출신 코치들이 캐치하고 이해할 수만 있다면, 선수 시절의 경험이 어우러져 더 좋은 코칭이 나올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그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 될 것이다. 평생 쌓아올린 고정관념과 관성을 뿌리치고 새로운 관점을 만든다는 것은 정말로 힘든 일이다. 선수 출신 지도자들이 많은 노력을 해야 할 이유가 여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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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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