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리호와 관련하여 중앙일보가 싸지른 병풍 얘기를 한창 물고 뜯고 맛보고 즐기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노태우가 죽었다. 하여, 중앙일보는 잠시 뒤로 미룬다.
정부는 노태우의 장례를 국가장으로 치르겠다고 공식 발표했다. 일정은 5일이며 장례비용 일체는 정부가 부담하고 장례기간 관공서엔 조기가 게양된다.
동방예의지국인 대한민국은 관혼상제에 민감하다. 또한 노태우는 전재산 29만 원 드립이나 치는 전두환에 비해 추징금도 성실히 납부하였고, 학살주범의 1인자도 아니며, 무엇보다 대통령으로 재임하는 동안 북방외교 등 성과가 인정되니 예우를 하는 게 옳다는 주장이 있다. 정부의 설명 또한 대동소이하다.
평소 공중파 방송, 특히 공영방송은 전파의 공공성을 들어 중립성과 함께 대중에게 끼칠 악영향을 극도로 경계하는 행태를 보여왔다. 대중의 건강보건을 위해 담배를 피우는 장면을 빼거나 뿌옇게 모자이크 처리하는 것 등이 일례다.
이와 똑같은 논리로 방송국 소속 아나운서들은 방송 안에서 ‘바른 말, 고운 말’을 쓰도록 훈련받는다. 짜장면이 아니라 '자장면'이 맞다면서 말이다.
그런 공영방송 KBS는 전직예우가 박탈된 노태우에 대해 뉴스를 통해 꼬박꼬박 “노태우 전 대통령”이라 칭하였다. 이는 가치판단의 문제가 아니라 원칙의 문제다. 그렇게 원칙 없이 내키는 대로 할 거면서 대체 왜 자장면에 집착하는지 알 수가 없다.
정부의 결정도 이와 똑같다. 전직예우를 하겠다면 먼저 노태우가 박탈당한 자격부터 복권하고 볼 일이다. 일의 순서란 게 그렇지 않은가. 휴지를 쓸 거면 포장부터 뜯어야지. 휴지만 샀다고 저절로 닦이는 게 아니잖냐. 내 말이 틀렸냐.
추징금 납부도 그렇다. 이는 정상참작, 즉 감형의 사유가 될지언정 죄 사함과 애도의 기준이 될 순 없다. 정부는 국가 차원의 예우가 역사적 평가와는 다르다고 기괴한 주장을 하던데 예우 자체가 엄연히 역사적 평가의 한 부분임을 고의적으로 외면한 옹색한 논리다.
전두환과는 다르다고? 그럼 노태우는 사죄와 반성을 하였던가. 그의 아들이 수차례 광주를 방문하여 아비의 죄를 대신 사죄한 것은 사실이다. 허나 노태우 자신은 본인의 회고록에서도, 생전 육성으로도, 그 어떤 공개적인 자리에서도 명징하게 시민학살에 대해 사죄하거나 유감을 표명한 일조차 한 적이 없다.
심지어 사후 유족이 발표한 유언에서도 “책임과 과오가 있었다면...”이라 밝혔다. ‘책임과 과오가 있었는지 없었는지 난 잘 모르겠는데, 만약 있었다면’ 너그러이 용서해 달란다. 내가 너의 아구창을 까고 배때지를 지른 후 센타를 까서 삥을 뜯은 것이 잘못된 일인지 잘 모르겠지만, 만약 잘못된 것이라면 용서해달라는 가해자의 사과를 받아들이고 예를 갖춰 용서하는 피해자를 우리는 대체로 X신이라 부른다.
노태우가 임기 중 성취한 업적 또한 그렇다.
“일제가 수탈 좀 한 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인가. 공장 짓고 근대화 시켜준 은혜도 모르는 조센진들”이라는 일본 우익들의 일갈에 난 앞으로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고 눈만 꿈뻑일 것 같다. 대한민국의 오늘을 있게 한 근대화의 초석을 마련한 '천황폐하'를 위해 '천황폐하' 기일에 조기를 게양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고 보면,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던 당시 검찰의 논리는 그 얼마나 혜안과 용기 있는 주장이었나 싶다. 이는 우리 사회에 대단히 큰 시그널로 작동할 테다.
7살 짜리 꼬마가 묻겠지. “엄마, 아빠. 저는 자라서 어떤 어른이 되어야 해요?” 그럼 대한민국의 평범한 엄마, 아빠는 한없이 자상한 얼굴로 이렇게 대답하겠지. “응.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높은 자리에 오르렴. 사람들을 수백, 수천 명 학살해도 좋아. 그럼 나중에 대한민국 정부가 너에게 예를 갖춰줄 거야.” 그런 말을 보고 들으며 자란 아이들이 만들어 갈 대한민국의 미래, 참 밝아서 좋겠다. 그치?
‘사죄’를 입에 담은 유족들은, 염치가 있다면 국가장을 사양했어야 했다. 그것이 노태우가 이 땅의 시민들에게 지은 죗값을 그나마 덜어내는 길이었다. 하지만 유족은 정부의 안을 덥석 받고 사의를 표했단다. 기가 찰 노릇이다.
어떻게 했어야 했나. 민주당 이재명 후보의 말을 들어보자.
“망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를 한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바로 이것이 정답이다. ‘최소한의 예우’.
변변한 사죄도 없이 갈 길 간 인간에게 정 그렇게 예우를 해줬어야 했다면 최소한의 예우, 즉, ‘국가장’이 아니라 ‘주민센터장’ 정도로 격을 맞췄어야 했다(국가장에 대한 적절한 비유가 이거 말곤 떠오르지 않는다. 전국에 계신 주민센터장님들의 하해와 같은 이해를 바란다). 조기 게양도 태극기의 세로폭 만큼 내리는 게 아니라 한... 18mm 정도 내리고 말이다. 내 말이 틀리냐.
김부겸 총리는 “현대사의 굴곡을 한 단계 넘는 과정으로 이해해 달라”고 하였다. 다 좋은데, 굴곡을 위로 넘어야지 왜 아래로 땅을 파고 앉았냐고요. 박근혜 정부가 일본 정부와 합의한 위안부 문제는 “현대사의 굴곡을 한단계 넘는 과정”이 아니었던가요? 뭐가 다르죠?
어쨌거나 저쨌거나, 이미 결정은 났고 분향소는 차려졌다. 나 까짓 게 되돌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백날천날 떠들어봐야 아무 의미 없겠다. 하지만 이런 뻘글이라도 써재껴서 이런 목소리와 주장도 있었다는 기록마저 남기지 않고는 도무지 못 견디겠어서 지껄여 봤다.
엎친데 덮쳤다고나 할까. 이 글을 쓰고 있는 와중에 임성근 전 부장판사 탄핵소추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각하 소식이 날아들었다.
임성근 전 부장판사는 재판에 개입해 위헌적-위법적 행위를 한 건 맞지만 애초에 그럴 권한이 없었기에 직권남용이 성립되지 않는다(남용할 직권이 엄쒀)는 괴랄한 이유로 무죄를 받더니 헌재는 이미 임기가 끝나 파면을 못한다고 탄핵소추를 각하했다. 이에 임성근은 당장 변호사 개업하는데에 아무 문제가 없고 퇴직연금도 온전히 받게 되었다. 감축드린다.
나도 하루 빨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어떡해서든 부와 권력을 거머쥐어서 떵떵거리고 살아야지. 그것만이 이 땅에서 억울할 일 없이 살아 갈 유일한 길이니까 말이다. 장기매매나 기획부동산, 다단계 일 같이 하실 분, 메일 주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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