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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 선택 : 최전방 9사단 동원

 

1979년 12월 12일 저녁,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합수부(반란군) 측은 수경사 헌병중대를 동원해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불법으로 연행한 뒤, 대통령 경호실 직속의 55경비대대와 101경비단을 동원해 당시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이 머물던 총리공관과 일대를 장악했다. 

 

이어 13일 새벽 2시에는 전두환의 지시로 제1공수여단 병력 800여 명을 출동시켜 육군본부와 국방부를 점령하고, 제5공수여단 병력 600여 명이 경복궁으로 향했다. 이것이 그 시간까지 반란군이 동원한 병력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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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2월 12일 중앙청 앞. 

출처-<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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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2월 13일 낮 광화문에 주둔 중인 쿠데타군.

뒤로 중앙청이 보이고 경복궁 담장은 일제에 훼손된 채 그대로 남아있다.

 

그때 노태우는 전두환 지시 없이 자의적으로 자신의 9사단 29연대 병력을 차출해 서울 중앙청(현 정부청사 격)을 점령하라고 지시했다. 13일 새벽 2시 출동한 29연대 병력 1,300여 명은 새벽 3시 30분경 중앙청을 점령했다. 

 

앞선 부대들은 전두환의 지시나 요청에 의했지만, 노태우는 독자적인 판단으로 병력을 불법 동원했다. 그가 지휘하고 있던 9사단 병력은 북한군과 맞선 최전방 병력이었다. 

 

천하의 전두환이라고 해도 북한과 맞서고 있는 최전방 병력을 빼달라고 요구할 수는 없었고, 진압군 측에서도 9사단 병력이 움직인 것을 알았을 때는 경악했다고 한다. 이미 참모총장 납치부터 정신 나간 짓이었지만, 그 가운데 가장 미친 짓이 북한과 바로 직접 대치 중인 9사단 병력이 움직인 것이었다. 그리고 전방 병력을 움직이는 것은 한미연합사의 승인을 거쳐야 했다. 하지만 노태우는 무시했다.

 

그렇게 노태우는 전두환의 신임을 샀다. 

 

 

제2 선택 : 간선제 주장

 

정권을 찬탈한 신군부 세력은 앞으로의 정치일정과 방식을 두고 논쟁 중이었다. 전두환의 오른팔이자 12.12 군사반란의 1등 공신인 허화평은 3김(김대중, 김영삼, 김종필)을 제거했기에 대통령 직선제를 통해서 당당하게 선거로 정권을 잡자고 했다. 

 

전두환은 허화평과 참모들의 의견이 내키질 않았다. 하지만 본인이 나서 직접 대놓고 ‘선거를 하다 보면 별일이 다 생기는데, 그냥 체육관 선거로 하지’라고 얘기할 수는 없었다. 그때 노태우가 나섰다. 허화평과 허삼수 등을 제압하고 직선제가 아니라 기존 체육관 선거로 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렇게 노태우는 신군부 내에서 전두환에 이어 넘버 2가 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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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화평(좌)과 허삼수(우)

 

 

제3 선택 : 직선제 수용

 

노태우는 육군 참모총장을 하지는 못하고, 전두환에 의해 육군대장으로 예편하여 내각에 들어왔다. 정무 2장관, 체육부 장관, 내무부 장관 등을 거쳤지만, 아시다시피 내각 장관은 무슨 일이 터지면 책임지고 옷을 벗어야 하는 자리였다. 살얼음판 같은 자리에서 그는 내내 고개를 숙이고 겸양을 떨었다. 

 

서울올림픽조직위원장, 12대 국회의원, 민정당 대표를 하면서도 마찬가지였다. 절대권력자인 전두환의 비위를 단 한 번도 거스르지 않았다. 1987년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으로 장세동 안기부장, 노신영 국무총리가 옷을 벗었다. 경쟁자들이 사라지고, 7년의 인고 끝에 1987년 6월 10일, 최루탄으로 자욱한 거리를 뒤로 하고 민정당 대통령 후보가 되었다.

 

하지만 6월 항쟁으로 전두환 정권은 궁지에 몰려 있었다. 미국 또한 전두환에게 군 출동은 안 된다고 압력을 넣고 있었다. 군 출동이냐 직선제 수용이냐 갈림길에서 ‘대통령 후보’ 노태우도 판단을 해야만 했다. 

 

전두환도 대통령 후보인 그의 말을 마냥 무시할 수 없었다. 노태우는 여전히 체육관 선거를 선호했으나 참모들은 “만약 군이 출동하고 계엄령과 비상조치가 선포되면 정치일정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일이다”라는 의견을 전했다. 

 

노태우는 6월 20일경 전두환을 만난 자리에서 직선제를 수용하겠다고 밝혔다. ‘당사자’인 대통령 후보 노태우가 마음을 바꾸자 전두환으로서는 거리낄 것이 없었다. 군 출동을 취소하고 노태우가 전두환에게 특별건의 하는 형식으로 포장해 6.29 선언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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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9 선언을 발표하는 노태우.

 

노태우는 그렇게 역사의 전면에 나서게 된다.

 

노태우의 선거 과정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3김이 분열돼 있었기 때문에 구도상 지기 어려운 선거였다. 거기에다가 전두환으로부터 ‘5공과 나를 비판해도 된다’고 확답을 받았으며, 이에 노태우는 ‘5공(전두환 정권) 청산을 하겠다’고 공약했다. 

 

전두환은 후계자를 위해 아낌없이 베풀었다. 전두환 비자금 9,000억 가운데 1,500억 원 상당을 선거자금으로 지원해줬고, 노태우가 당선된 이후 인수 자금으로 또 500억 원을 지원했다.

 

노태우는 1987년 말 36.6%의 역대 최저 득표율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이 36.6%는 그의 발목을 계속해서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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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취임식에서 노태우.

 

이듬해 봄 총선에서도 민자당은 299석 중 125석에 그쳤다. 처음으로 여소야대 국회가 열렸고 ‘정치력 9단’인 3김을 중심으로 한 야당에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그는 원하지 않았지만 ‘5공(전두환 정권) 청산’은 스스로도 대선 공약으로 약속했던 점이었다. 새마을 비리를 일으킨 전두환의 동생 ‘전경환’을 구속하고, 전두환을 백담사로 유배 보내야 했다. 그리고 올림픽 개최에 집중했다. 

 

 

제4 선택 : 거부권 행사와 강경진압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하고 북방외교를 통해 고르바초프 대통령도 만나는 등 겉으로 보기에는 성과를 냈지만 속은 달랐다. 

 

사람들은 이런 성과를 ‘노태우의 역량’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서울올림픽은 당시로서는 역대 최대 규모인 160개국이 참여했다. 이념으로 갈라져 반쪽 올림픽에 그쳤던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 1984년 LA 올림픽의 상처를 치유하고 냉전이 무너지는 것을 보여준 올림픽이었다. 그런 올림픽을 개최했기에 우리나라로서는 사회주의권과의 교류는 당연한 수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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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좌)와 고르바초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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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올림픽

 

안으로는 3김을 중심으로 하는 야당과 학생운동, 노동운동, 농민운동 등 박정희-전두환을 거치며 억눌려 있던 정치사회적 요구가 분출했다. 노태우 정권은 올림픽이 끝나고, 북방외교 등을 하면 여론이 좋아질 것으로 생각했으나 별 차이가 없었다. 36.6%는 내내 발목을 잡았다. 

 

노태우는 또다시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되었다.

 

결국 노태우는 온건한 미소를 거두고, 칼을 쥐어 들었다. 1989년 3월, 국회를 통과한 4개 개혁법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했다. 지방의회 선거와 단체장 선거를 1990년 말 이전까지 마무리하도록 했으나 거부권 행사로 1991년에 지방의회 선거가 열렸고, 단체장까지 뽑는 온전한 지방선거는 1995년에야 열렸다. 

 

당시 조합별로 흩어진 의료보험을 현재의 국민건강보험공단처럼 단일화하는 법안도 거부권 행사로 폐기되었다. 이는 훗날 김대중 정부 때 성사되었다. 소방, 경찰, 군인을 제외하고는 6급 이하 공무원과 공공기관 근로자들은 모두 노조를 결성할 수 있고 단체교섭을 할 수 있는 노동조합법도 무산되었다. 

 

대신 전교조 탄압, 공안정국 조성으로 취약한 집권력을 보완하려 하였다. 전교조 탄압으로 42명의 교사를 구속하고 1,527명의 교사를 파면 또는 해임했다. 1989년 4월 3일에는 대검찰청, 치안본부, 안기부, 문교부, 문공부, 노동부, 보안사까지 포함된 ‘공안정책협의회’를 구성한 뒤 대대적인 ‘좌경세력 색출 작전’에 나섰다. 

 

풍산, 모토로라, 서울지하철,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의 쟁의를 좌경시위로 간주하고 헬기까지 동원한 무차별 진압을 강행했다. 문익환 목사 방북을 빌미로 전민련, 전대협 등 학생운동권과 정부에 비판적인 교육단체, 학술단체, 문화예술단체 등을 좌경으로 몰아세웠다. 

 

정권이 강하게 나가면 이들은 더 강력하게 반발할 것이고, 그것은 더 강력한 탄압의 기회가 되는 것이었다. 강경대 열사가 경찰에 맞아 죽었고 분신정국이 이어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렇게 해서 ‘공안정책협의회’는 317명을 구속시켰고, 최종적으로 김대중을 제거하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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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5월18일 만장과 대형 영정을 앞세운 고 강경대 열사 운구행렬.

명지대 신입생이던 강경대 열사 시위 중 백골단의 무자비한 폭행을 당하고 방치되었다.

곧 다른 학생이 발견하여 세브란스병원으로 옮겼지만 결국 숨을 거두었다. 

 

서경원 의원 방북사건과 관련해 김대중 당시 총재가 뒤에서 지시했다는 혐의를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으나 결국 김대중 총재를 구속시키지는 못했다.

 

 

제5 선택 : 3당 합당

 

그럼에도 노태우의 집권력은 그대로였다. 36.6%의 한계를 절감하던 차에 전두환과 노태우가 ‘선배님’으로 모시던 일본 이토추 상사 회장 출신의 세지마 류조가 힌트를 줬다. (세지마 류조 기사 클릭) 

 

3당 합당이었다. 정 안 되면 갈라치기를 해서라도 통치력을 보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3당 합당으로 그는 김대중을 왕따로 만들고, 김영삼과 김종필을 우군으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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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초, 3당 합당으로 이뤄진 민주자유당 창당 축하연.  

(왼쪽부터) 김영삼, 노태우, 김종필.

출처-<한겨레>

 

이어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폭력배를 잡아들였다. 1,000명이 넘는 조직 폭력배들이 구속되었으나 형기를 마치고 사회로 복귀하면 그만이었다. 오히려 폭력조직이 기업화되는 빌미를 제공할 따름이었으나 아무튼 당시엔 잡아넣는 것이 ‘대통령의 힘’을 보여주는 것이라 여겼다.

 

집값이 오르자 그는 신도시 200만 호를 달랑 2년 만에 만들어 버렸다. 부실공사는 물론이고 엄청난 건설 붐으로 당시 시중에는 건설용 모래가 귀해져 바닷모래까지 무분별하게 채취하는 일이 빚어졌다. 필자는 당시 10~11살 아이였다. 어느 폭포에서 물놀이를 하다 빠져 죽다 산 적이 있는데, 당시 폭포의 모래와 골재를 채취해 수심이 갑자기 깊어졌던 것이다. 

 

노태우 정부는 부동산 투기를 막기 위해 ‘토지공개념’을 도입해 수도권과 광역시 개인이 소유할 수 있는 택지를 200평으로 제한하고, 개발이익환수법, 토지초과이득세 등을 시행하려 했다.

 

하지만 노태우의 집권력은 오르지 않았다. 한국갤럽이 조사한 당시 지지율에서 1989년 하반기 이후 30%를 넘는 적이 한 번도 없었고, 1991년 이후에는 12%대를 전전했다. 그렇게 그는 물태우가 되어 사그라들었다.

 

 

제6 선택 : 조용한 말년

 

그는 전두환이 만들어준 상황을 활용해 집권한 군부정권의 아류 정권이었다. 그가 ‘국가운영’에 대해 본 것은 박정희와 전두환뿐이었고, 스스로 국가를 운영할 철학이나 비전은 갖고 있지 않았다. 

 

북방외교나 남북기본합의서, 부동산 안정화 등 개혁적인 조치들이 있었지만, 그것은 철학이나 비전을 갖고 한 것이 아니었다. 북방외교는 당시 냉전 해체의 상황에 팔로우했을 뿐 자주적인 외교를 한 것은 아니었다. 

 

남북기본합의서에 무려 ‘남북 상호 불가침’을 명시하고, 남북 간 민간 교류를 명시했지만, 북한과 조금이라도 연결된 이들은 모조리 좌경으로 몰아 처벌했다. 물량 폭탄과 (실현되지는 못했지만) 초강력 과세 시도로 집값 상승은 막았지만 왜 집값이 오르는지 진지한 고찰은 없었다. 

 

노무현 대통령의 지방분권이나 국토균형발전 같은 비전으로 전혀 이어지지 않았다. 힘이 떨어지자 힘을 과시하기 위해 칼을 휘둘렀으며, 세력이 약해지자 3당 합당이라는 한국 현대사 최악의 인위적인 정계 개편으로 억지로 집권력을 유지하려 애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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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전두환과 노태우가 선고 공판을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3당 합당을 토대로 대통령에 당선된 김영삼에 의해 그는 비자금을 조성한 혐의로 구속되었다. 노태우가 조성한 비자금 5,000억, 전두환이 조성한 비자금 9,000억. 금액과 강약의 차이만 있을 뿐 그는 전두환과 같은 카테고리에 있는 사람이었다.

 

친구이자 정치적 스승인 전두환은 그에게 마지막까지 도움을 주었다. 전두환과 대비된 그의 조용한 말년은 일부 동정을 샀고, 국가장으로 명예롭게 삶을 마무리 할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