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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주로 나가는 것은 순전히 남의 나라의 일이던, 아니 그저 만화영화에서나 가능한 일이던 때가 있었다. 먹고 살기도 바빴던 그 시절, 지구 반대편 미국에서는 콜롬비아호라는 최초의 우주왕복선을 하늘로 쏘아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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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NASA>

 

콜롬비아호는 SF영화 속의 우주선이 현실로 뛰쳐나온 듯 신기하고 놀라웠다. 로켓 하나만으로도 멋진데, 얘는 세 개나 붙어있었다. 심지어 조종사가 타는 비행기 같이 생긴 우주선도 있다. 이 놀라운 디자인의 우주선에 마음을 빼앗긴 어린이 중에는 나도 있었다. 어린 눈에도 너무 멋졌다. 좋아할 이유도 차고 넘쳤다. 

 

첫째, 그냥 로켓이 아니라 우주왕복선이다. 

 

몇 번이고 우주여행이 가능한 이 우주비행선은 곧 달 옆에 지어질 우주정거장과 지구 사이를 왕복하는 ‘스페이스 셔틀’이 될 것이라 했다. 아직 비행기도 못타봤는데 ‘우주정거장’이라니. 이 우주비행선을 타면 당장이라도 미래로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이 우주선은 그냥 미래 그 자체였다.

 

둘째, 멋진 방법으로 날아다닌다.

 

미공군의 고집으로 채용된 동체의 델타윙(삼각형 모양의 날개)덕에 이 우주선은 상당한 비행능력을 갖게 되었다. 기지로 귀환할 때에도 캡슐을 타고 떨어지지 않는다. 하늘을 활공하듯 날아와 우아하게 활주로에 착륙한다. SF영화 속의 그 우주선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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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The edwards AFB history office>

 

셋째, 변화무쌍한 모습이다.

 

궤도선 아래 미사일처럼 달려있는 2개의 고체 로켓부스터와 외부 탱크는 대기권을 뚫고 나갈 때까지만 쓰고 차례로 분리되어 떨어진다. 로켓부스터까지 모두 장착된 모습, 로켓부스터가 분리되어 가운데 외부탱크만 달려있을 때의 모습, 그리고 궤도선 본체만 우주 공간으로 나아갈 때의 모습까지, 어느 하나 멋지지 않은 게 없다. 

 

우주왕복선의 첫 발사는 달착륙 만큼이나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발사장면이 TV를 통해 중계되었고, 우주왕복선이 우주에 머무는 동안 매일 같이 그 소식이 뉴스로 전해졌다. 

 

서서히 우주왕복선 붐이 일어났다. 완구 회사들은 이 우주왕복선의 모형 장난감을 앞다투어 내놓았고, 어린이 잡지에는 우주왕복선에 관한 기사가 넘쳐났다. 

 

당시 봤던 기사 중에 '세라믹 타일'에 관한 기사가 있었다. 우주선이 지구로 귀환할 때, 공기 마찰은 우주선의 표면 온도를 섭씨 1500도~1만 도까지 끌어올린다. 그 어마어마한 온도와 압력으로부터 기체를 보호하기 위해 세라믹 타일을 마감재로 사용했다는 내용의 기사였다. 말미에 이것은 우리 고유의 도자기 기술이 최첨단 우주 왕복선에 사용된, 우리 기술의 쾌거라고 덧붙였다.

 

그대로 받아들이긴 좀 억지스러운 면이 없잖아 있지만, 당시의 어린이들은 이 기사에 크게 감명 받았고, 무척 자랑스러워했다. 그리고 막연히 우주비행사, 또 우주과학자의 꿈을 품었다.

 

 

#2

 

'브이(V)'라는 미국 SF드라마가 큰 인기를 모았다. 파충류 외계인들의 지구 침략에 맞서 싸우는 지구인들의 활약을 그린 미니 시리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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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우주개발 프로젝트는 소설이나 만화, 영화 같은 다양한 콘텐츠에 큰 영향을 미쳤다. 성공적인 콘텐츠는 전세계로 배급되었고, 사람들은 미국을 배경으로, 미국인 주인공이 미국 국기가 그려진 우주선을 타고 활약하는 SF영화를 너무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우리나라 배우가 태극기가 그려진 우주선을 타고 한반도를 배경으로 활약하는 우리나라 영화도 간혹 있기는 했다. 하지만 관객들은 현실감이 떨어진다고 오히려 김빠져 했다(우주비행사가 되겠다는 나의 원대한 꿈도 시들해졌다). 제작비 규모에 따른 조악한 소품이나 특수효과 등의 차이도 있었겠지만, 리얼리티는 현실을 기반으로 한다. 우주라는 화두는 미국이 선점한 뒤였다. 

 

그 때의 우리는 경제적으로든 정치적, 혹은 문화적으로든 세계의 중심무대에서 한참 떨어진 변방에 있었다. 하루 빨리 잘 사는 나라가 되고 싶었던 우리나라는 무조건 선진국을 보고 베끼는 방법을 택했다. 스스로를 '개발도상국'이라 부르며 선진-중진-후진국 순위표 안에 끼워넣고는 뒤는 쳐다도 보지 말라고, 앞에만 보고 배우라고 닥달했다. ‘너보다 공부 잘하는 애만 친구로 사귀라’는 얘기의 국가버전이었다. 

 

이런 분위기는 학교와 사회가 다르지 않았다. 7~80년대까지는 선진국을 본받고 배우고 따라가자는 구호가 많이 들렸다. 자유롭고 합리적인 생각을 하는 미국 사람을 본받고 준법정신이 투철한 신사도의 영국을 배워야 한다고 했다. 책임감 있고 검소한 독일을 배우고, 탈무드에 들어있는 대인의 지혜도 배우자고 했다. 

 

선진국을 쫓아가기로 한 전략은 잘 먹혔는지, 비교적 짧은 시간 안에 경제 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90년대 들어서는 선진시민을 본받아야 한다는 구호가 잦아들었다. 대신 남의 눈에 어떻게 비칠까를 더 중요시하게 되었고, 나의 취향보다 외국 사람들의 평가와 인정을 훨씬 더 무겁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두 유 노우?’ 같은 질문을 던지며 그들과 우리 사이에서 자그마한 공통분모라도 찾으려 했던 것이. 겉모습과 살림살이는 분명 나아졌지만, 아직 자신이 없었던 우리는 누군가로부터 인정받는 것으로 안정을 찾으려 했다. 인정받는 것이 곧 우리를 인정해주는 사람과 같은 높은 수준에 도달했음을 증명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우리의 생각과 삶의 방식을 결정하는 잣대로 굳어졌고, 타인의 시선과 비뚤어진 잣대로 우리를 들여다보게 되었다. 하지만 허무한 것은 그 ‘선진시민’은 누군가를 배우고 본받아야 한다는 강박이 만들어낸 이미지일 뿐,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는 잘 모르겠다. 어쩌면 어느 정치인의 통치 방식으로부터 시작된 일인지도 모르고, 혹은 식민시대에 깊이 주입된 패배주의로부터 시작된 일인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찌되었든, 이제는 우리의 기준으로 우리를 바라보아야 할 때가 되었다. 이제 우리에게 더 이상 본받고 배우고 따라가야할 대상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만 알지 못했을 뿐, 우리는 이미 길을 개척해야 할 자리에 와있다. 누리호의 발사는 우리가 그 나름의 기준과 방식으로 새로운 길을 만들어가는, 시작점이 될 것이다.

 

 

#3

 

누리호 발사 장면만큼은 놓치고 싶지 않았다. 발사는 오후 4시 예정이라고 했지만, 아침부터 중계영상을 틀어놓고 기다렸다. 

 

40년 전, 콜롬비아호의 발사장면에 매료되어 우주비행사가 되겠다는 막연한 꿈을 꾸었던 꼬맹이는 이제 배 나온 중년 아저씨가 되어 누리호의 발사를 기다리고 있다. 잠시나마 우주비행을 꿈꾸었던 어린시절의 나에게, 우주왕복선을 부러워했던 그 때의 꼬맹이에게, 꼭 보여주고 싶은 장면이었다. 포기하지 않고 여기까지 달려와, 내 나라의 위상을 여기까지 올려놓은 사람들과 함께, 누리호의 발사를 지켜보고 축하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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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5시 정각 누리호가 발사되었다. 하늘로 날아오르는 누리호를 보고 또 주책없이 울컥했다. 옆에서 중계를 지켜보던 선배가 말했다.

 

"요즘 우리나라, 되게 멋있다"

 

누리호는 비록 더미위성을 궤도에 안착시키는 최종 목표에는 도달하지 못했지만, 1, 2, 3단 로켓을 차례로 가동시키며 목표상공인 고도 700km에 도달했다. 우리 손으로 만들어, 우리 발사장에서, 우리가 쏘아올린 누리호로 인해, 우리는 명실상부한 '세계 10대 우주발사체 기술 보유국'이 됐다. 로켓기술이 그 나라가 가진 과학기술의 총합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우주개척의 역사에 영원히 기록될 커다란 성취가 아닐 수 없다.

 

혹자는 "2조 원짜리 불꽃놀이"라고 폄훼하지만 난 동의하지 않는다. 이건 9.8점을 받은 김연아 선수에게 "10점 만점이 아니니 게임에 실패했다"고 악플을 다는 것과 똑같다. 과정은 보지 않고 결과만을 보고 악의적으로 판단한, 비난을 위한 비난일 뿐이다. 

 

나이가 들어보니 신기하게도 결과보다 과정에 더 눈이 간다. 10점 만점의 완벽한 성공의 결과지를 받는 것은 그 자체로 무척 기쁜 일이겠지만, 과정이 없는 결과의 무게는 한없이 가볍다. 본질은 결과가 아닌 과정에 있다는 것을 오십줄에 들어서야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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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왠지 내 모습이 근사했어.”

 

그림책 <콧물끼리>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사랑하게 된 '콧물끼리'가 물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보고 하는 이야기다.

 

우리나라가 정말 근사해 보였다. 지난 12년 동안 누리호의 개발을 위해 묵묵히 애써오신 연구진 여러분께 감사와 존경과 응원의 인사를 드리고 싶다. 누리호의 발사로 마주한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은, 타인의 기준과 평가에 더 이상 연연하지 않을 자유를 선물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