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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기사 요약

 

1989년, 중국에서 ‘64 천안문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다. 홍콩에서도 베이징 학생들을 지원하는 활동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빅토리아 공원에 1백만 명이 모여 천안문 시위를 지지하는 모임을 열었다.

 

그러나 당시 중국공산당 최고 권력자 덩샤오핑은 결국 천안문 시위 무력진압을 결정한다. 6월 4일 인민의 군대가 인민을 해쳐서는 안 된다는 온건파의 만류를 무릅쓰고 시위대를 향한 발포를 명령했다.

 

정부 발표로는 3백여 명(비공식 통계로는 2만 명)이 희생되었다. 덩샤오핑 만년의 오점으로 기록되는 대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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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5월 14일, 중국 베이징의 천안문 광장에 모인 시위대가 '자유가 아니면 죽음'이라는 구호가 적힌 현수막을 들고 있다. 평화적 시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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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6월 4일 천안문에서 민주주의를 요구하던 시위 학생들을 진압한 직후 베이징 시내 모습.

장갑차 등에서 피어오르는 연기에서 유혈 진압 과정의 격렬함이 느껴진다.

 

홍콩인들은 텔레비전 화면을 통해 탱크가 줄줄이 몰려오고, 총소리가 난무하고, 사상자가 들려가는 장면들을 보며 꿈이길 바랐다. 두려웠다. 앞으로 8년 후면 주권이 반환되어 저 ‘극악무도한’ 중국공산당 치하에서 살게 되는 것이었다.

 

홍콩인들은 베이징의 시위대를 위하여 모금하고 헌혈했다. 중국 자본의 은행들에서는 현금 인출사태가 벌어졌고, 입법국과 행정국의 의원들은 런던으로 달려가서 홍콩시민들에 대한 영국 영주권을 요구했다(결과적으로 전문직과 공무원 등 중산층 5만 5천 명에게 영주권이 부여되었다).  

 

홍콩인들은 공황에 빠졌다. 주가지수와 부동산 가격이 폭락했다. ‘너는 어떻게 할래?’라는 말이 서로의 인사가 되었다. ‘64 천안문 민주화 운동’이 일어난 1989년에만 4만 명이, 다음 해인 1990년에는 6만 5천 명(홍콩 인구의 1%)이 홍콩을 떠났다. 

 

문화대혁명에 이어서 홍콩인들의 마음은 다시 중국으로부터 완전히 이탈했고, 홍콩인들의 유전자에 큰 비율을 차지하고 있는, 공산당에 대한 원초적인 공포가 다시 각인됐다.  

 

(더 자세한 내용은 지난 편 링크)

 

 

천안문 사태 이후 찾아온 위기와 덩샤오핑의 행보

 

‘64 천안문 민주화 운동’을 무력으로 제압한 중국은 이후 국제적으로 완전한 수세에 몰렸다. 공산당 안에서는 개혁개방 자체를 의심하고 전복시키려는 보수파가 힘을 얻고 있었다. 덩샤오핑은 불안하고 초조한 상태였다. 마침내 1992년 춘절을 전후하여 그는 90 노구를 끌고 ‘남쪽으로의 여행(남순)’을 단행했다. 

 

1992년 당시 나는 홍콩의 주요 신문과 잡지를 번역하고 정리하는 알바를 하고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덩샤오핑의 동정이 사진과 함께 좌파는 물론 우파, 중립지 등 모든 신문에 도배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요인’이라는 익명으로 짧게 나오더니 이삼일 지나자 실명으로 모든 신문의 모든 지면을 장식했다. 그는 살아있는 20세기의 마지막 역사였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기사화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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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노구를 이끌고 남순에 나선 덩샤오핑.

 

그는 2주 동안 광동성의 수도인 광저우를 비롯하여 개혁개방의 상징인 선전(深圳)과 주하이(珠海)를 잇달아 방문했다. 그는 ‘흰 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쥐를 잘 잡는 고양이가 좋은 고양이다’와 ‘지금 이대로의 걸음으로 100년을 가자’고 외쳤다. 

 

덩샤오핑의 ‘남순강화’ 이후 중국에서 개혁개방 기세는 그 누구도 되돌릴 수 없었다. 

 

분명 과가 있지만, 그 장면에서만큼은 중국인들은 국가의 방향을 제시하는 지도자의 모습을 보았다. 중국공산당에 대한 홍콩인들의 분노와 의심을 크게 희석시키는 행동이었다. 어떻게든 홍콩에서 살아가야만 하는 사람들은 덩샤오핑을 믿고 싶었다. 

 

 

홍콩 반환 직전, 마지막 총독이 뿌린 민주주의 돌풍

 

이런 흐름 속에 1992년 7월 홍콩의 마지막 총독으로 영국의 거물 정치인 크리스 패튼이 부임했다. 그는 중국과 사전 협의 없이 홍콩의 민주화 방안을 발표했다. 중국정부는 강력하게 반발하였다. 이제 영국은 마지막 승부수로 홍콩인들에게 ‘민주’라는 정체성을 심어주는 수밖에 없었다. 

 

원래 ‘자유는 있지만, 민주는 없는 곳’이라고 일컬어지던 홍콩에 ‘민주’라는 선물이 날벼락처럼 떨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민주주의라는 나무는 피를 먹고 성장하는 바, 그것도 하루아침에 뿌리를 내릴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이후 홍콩의 역사가 또다시 증명해주었다.

 

1992년 10월 패튼 총독은 『시정보고』를 통해 아래와 같은 민주화 방안을 발표했다.

 

①선거권자 연령을 21세에서 18세로 인하한다.

②민주파에 유리하도록 직접 선거구제 투표 방식을 2석 2표제에서 1석 1표제로 변경한다.

③직능단체 선거 방법을 변경하였는 바, 21개 이외에 9개 직능 대표 선거구를 신설하여 직능단체에 재직하고 있는 종업원 270만 명 전원에게 선거권을 부여한다.

④지역 의원 전원을 직선으로 선출한다.

⑤행정 주도의 겸임제도(입법의원이 행정의원을 겸하는)를 철폐하여 입법국이 주도하는 대의 정치를 강화한다.

 

이후 중국은 영국을 ‘천고의 죄인’으로, 영국은 중국을 ‘야만’과 ‘악’으로 비난하는 성명전을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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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6월 30일 총독 관저에서 마지막으로 내린 영국기를 받는 크리스 패튼.

 

 

홍콩에서 지워지는 ‘64 천안문’ 집단기억

 

가족이나 고향 사람들만이 공유하는 집단기억도 있고, 그 국민과 그 민족만이 공유하는 집단기억도 있다. 어떻게 보면 기억을 공유하는 단위에 따라 가족, 고향 사람, 국민, 민족이라고 부른다. 

 

한국인이라면 일본 통치, 6·25, 4·19, 광주민주화운동, 6월 민주항쟁 그리고 최근의 세월호 사고 등의 기억을 공유한다.

 

2020년 6월 홍콩의 『국가보안법』(본격 시행은 7월 1일)이 발효된 이후 당국에 의해 홍콩인들의 집단기억 지우기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2021년 6월, 홍콩에서 국가보안법이 시행된 지 1년이 되었다. 

 

1년 동안 보안법 위반에 대한 홍콩인들의 밀고가 10만 건이었다는 것은 그간 당국이 추진해온 조치들이 ‘성공적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뜻이리라. 그만큼 홍콩사회가 공유해오던 집단기억이 희미해져 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2021년 6월 26일, 홍콩의 범민주파 야당인 ‘신민주동맹(ND)’이 자진 해산했다. 지난 2년여 사이, 홍콩의 정치 환경이 크게 악화되었다는 것을 볼 수 있는 대목이다. 당을 대표하는 정치인들이 구속되거나 탈당하고 있다. 나날이 더해지고 있는 압박을 견딜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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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국가보안법이 본격 시행된 2020년 7월 1일,

홍콩 경찰이 코즈웨이베이에서 보안법 반대 시위자에게

후추 스프레이를 뿌린 뒤 체포하고 있다.

 

2021년 올해는 ‘64 천안문 민주화 운동’ 32주년이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홍콩 빅토리아 공원에서 해오던 ‘64’ 기념 활동을 더 이상 하지 못했다. 32년 동안 집단 기억 나눔 활동은 이제 여기에서 접을 수밖에 없다. 

 

정부에 대한 유감 표명조차도 불법이 되었다. 인터넷에는 검은색의 옷을 입자는 호소만 공허하게 떠돌아다니는데, 홍콩 친구들은 페이스북의 프로필만을 검은 색으로 해두고 있다.  

 

2021년 8월 24일, 영화 심의와 관련하여 영화 검사 조례가 발표되었다. 국가안보를 위협하는 영화는 상영을 금지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2021년 9월 25일, 30년 이상 ‘64 천안문 민주화 운동’에 대한 기념 활동을 주최하면서, 정당한 평가를 요구해 온 ‘애국민주운동 지원 홍콩시민 연합회(지련회)’가 스스로 해산을 결의했다. 

 

(지련회는 천안문 민주화 운동 중인 1989년 5월 20일에 결성됐다. 수만 명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로 천안문 시위 지지 집회를 열고, 모금 운동을 벌여 2,200만 홍콩달러(현재 환율로 약 33억 원)를 베이징으로 보내기도 했다. 천안문 시위가 유혈 진압된 뒤, 지련회는 해마다 6월 4일 홍콩섬 빅토리아 공원에서 촛불 집회를 열어 희생자의 넋을 기려왔다. 중국 전역에서 천안문 민주화 운동을 기리는 유일한 곳이 홍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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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홍콩 빅토리아 공원에서 ‘6·4 천안문 민주화 운동’ 30주년 추모집회를 하는 모습. 사진은 2019년 6월 4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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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부터 빅토리아 공원에서 ‘64 천안문 민주화 운동’ 추모 촛불행사를 하지 못하게 되자 소규모로 추모를 하는 홍콩 시민들. 사진은 작년 6월 3일이다. 

 

감옥에 있는 지련회 전 주석은 편지를 통해 이렇게 말했다. 

 

①홍콩시민들이 개인적으로 또는 다른 형식으로 이전처럼 ‘64’를 기릴 것을 믿는다. 

②어떤 정치권력도 인민의 기억과 의식을 빼앗아 갈 수 없다. 

③지련회의 이념은 모든 홍콩인들의 가슴 속에 남을 것이다. 

 

지련회 뿐만이 아니라 2021년 1월부터 9월까지만 계산하더라도 노동자연맹, 교협 등의 민간조직 49개가 해산했다. 

 

2003년 기본법 23조에 반대하는 시위가 발생하면서 겨우 형성되기 시작한 홍콩의 시민사회가 한꺼번에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집단기억을 계승할 주체가 사라지고 있다. 

 

류영하(백석대학교 중국어학과 교수)

 

<계속>

 

 

추신: 다음 편에는 홍콩에서 일어난 정체성 충돌에 대해 좀 더 깊이 들어가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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