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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독일은 무장해제 당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동서로 갈라진 상황에서 서독은 재무장에 들어갔다. 이 때 서독의 재무장을 허용한 이유가 뭘까? 미국이 서독을 통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차대전 직후 독일을 통제할 주체세력이 모호했던 거다. 

 

윌슨 대통령이 있었지만, 그의 역할은 곧 사라진다. 1919년 9월 25일 뇌경색을 일으켰고, 얼마 가지 않아 반신불수가 됐다. 자신이 제안한 국제연맹에 미국을 가입시키기 위해 미국을 누비며 여론을 환기시켰지만, 그의 몸이 무너진 것처럼 미국의 국제연맹 가입도 무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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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슨 대통령&워런 G. 하딩

 

윌슨 대통령 후임으로 대통령 자리에 오른 이가 워런 G. 하딩(Warren Gamaliel Harding)이었다는 사실만 봐도 미국의 상황을 단적으로 알 수 있다. 하딩은 제1차 세계대전 같은 전쟁에 다시 끼어들고 싶은 생각이 없었으며, 이를 공약으로 내걸었다. 

 

그 스스로가 고립주의였으며, 그 당시 많은 미국인들도 그걸 원했다. 미국은 다시 먼로주의로 돌아가려는 상황이었다. 만약 윌슨이 제안했던 국제연맹이 제대로 작동했다면 세계는 어떻게 움직였을까? 다수결이 아니라 만장일치제였으며, 군사적인 제재 수단이 전무했다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미국이 가입을 했다고 하더라도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진 못했을 것이다.

 

입장 차이가 있었지만, 이들 4개국은 의견을 조율했고, 최종 완성본인 베르사유 조약을 1919년 5월 7일 독일 쪽에 통보한다. 당시 독일 대표단 일원이었던 막스 베버는 이 조약을 통보 받고는 단호히 거부했다. 그러나 독일 대표단이 거부했다고 끝날 문제가 아니었다. 조약은 바이마르 공화국에게 건네졌다. 총리였던 필립 샤이데만은 조약의 승인을 인정할 수 없다며 사퇴했다.

 

마음으로는 베르사유 조약을 거부하고 있었지만, 이때까지도 영국 해군의 해상봉쇄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협상국은 베르사유 조약을 받지 않는다면 군대를 밀어붙이겠다고 독일 정부를 위협했다. 

 

“237 대 138의 결과 베르사유 조약을 승인합니다.”

 

갓 태어난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 의회는 어쩔 수 없이 베르사유 조약을 승인한다.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의 어떤 부분을 납득할 수 없었던 걸까? 아니, 조약 체결 당시 인물들은 이 조약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던 걸까? 프랑스의 페르디낭 포슈 장군은 단순했다.

 

“이것은 평화가 아니라 20년 간의 휴전일 뿐이다!”

 

어쨌든 그의 예언은 들어맞았다. 원래의 의도와는 정반대였지만 말이다.

 

영국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즈는 더 신랄했다.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불행하게도 정치적 고려가 경제적 고려를 방해하고 있다.”

 

미국의 외교관 헨리 키신저의 말이 가장 적확할 듯 하다(그의 지혜가 녹아있는 한마디였다).

 

“베르사유 조약 만큼 목적을 놓친 문서는 없다. 화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징벌적이고, 독일의 회복을 막기에는 지나치게 관대했다.”

 

보복을 하려는 걸까? 화해를 하려는 걸까? 독일의 시점에선 보복의 느낌으로 다가왔고, 승전국, 그 중에서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은 프랑스에게는 관대한 용서처럼 느껴졌다. 분명한 사실은 전쟁을 막기 위해 만들어진 베르사유 조약이 또 다른 전쟁을 잉태했다는 거다. 

 

1919년 6월 28일 11시 11분 베르사유 궁전 거울의 방에서 조약은 체결된다. 이 서명 날짜와 장소는 치밀하게 연출됐다. 5년 전인 1914년 6월 28일, 제1차 세계대전 발발의 도화선이 된 오스트리아 페르디난드 황태자 부부가 사라예보를 방문한 날이다. 

 

이날 세르비아의 청년 포린칩(Gavrilo Princip)에 의해 황태자 부부는 암살당했고,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됐다. 베르사유 궁전 거울의 방의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독일 제국이 선포된 장소였다. 그리고 11시 11분은 1918년 11월 11일 휴전일과 겹친다. 서명 자체부터 고도의 정치적 계산과 함의를 가지고 있었다. 독일에겐 굴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이런 형식미는 애교 수준이었다. 물론, 독일의 입장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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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토리오 올랜도 이탈리아 총리,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영국 총리,

조르주 클레망소 프랑스 총리,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이

베르사유 조약에 서명하기 전에 윌슨의 파리 자택에서 회담을 하고 있다.

Bettmann Archive/Getty Images

 

 

2.

 

베르사유 조약은 총 440개의 조항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를 분류해 보면 크게 3가지 카테고리로 나눌 수 있다. <영토>, <군대>, <배상금>다. 그리고 그 내용은 독일에게 족쇄가 될 것들이다.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이 독일이 죄를 지었고, 그 죄에 합당한 벌을 받는다는 명시적인 선언이 조약에 들어가 있다는 거다. 죄를 짓지도 않았다면 벌을 받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이렇게 해서 나온 게 그 유명한 베르사유 조약 231조, 소위 말하는 ‘전쟁유죄조항’이다.  

 

“모든 전쟁의 책임은 독일과 그 동맹국에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의 경우는 전쟁의 책임을 명확히 가를 수 있다(이 기사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히틀러’가 전쟁의 주동자로 결론이 나있지 않은가?).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은 그렇지 않다. 가해자도, 침략자도 명확히 판별할 수 없었다. 유증기가 가득 차 있는 방안에 우발적으로 불꽃이 튀었다고 해야 할까? 이런 상황에서 전쟁을 책임을 독일에게만 돌린다는 건 언어도단이다. 

 

어쩌겠는가? 역사는 승자가 쓰는 것이며, 패자는 할 말이 없는 법이지 않는가? 이 상황에서 독일은 하나하나 자신에게 채워진 족쇄들을 눈물을 삼키며 바라봐야 했고, 프랑스는 이 족쇄들를 불안해 했으며, 영국과 미국은 족쇄가 너무 꽉 채워진 것 같다며 동정의 눈길을 보냈다. 

 

베르사유 조약을 통해서 독일은 영토의 약 15%와 인구의 10%를 잃어버렸다. 그 자체로도 치욕적이었지만, 분쟁의 소지가 너무 많았다. 

 

당장 영토를 가른 명분이었던 민족자결주의에도 위배됐다. 폴란드의 경우 2천 7백만의 인구를 보유했지만, 폴란드인은 1천 8백만이었다. 2~3백만은 우크라이나인, 1백만 명은 러시아인, 2~3백만의 유태인, 그리고 1백만 명은 독일인이었다. 체코슬로바키아도 마찬가지였다. 1천4백5십만 명의 인구를 보유한 체코슬로바키아 인구 중 3백 25만 명은 독일인이었다. 

 

훗날 히틀러가 민족자결주의를 명분으로 체코슬로바키아의 땅을 갈라먹으려 덤벼들었을 때 국제사회는 반론을 들 수 없었다. 베르사유 조약과 함께 체결된 생제르맹앙 조약, 뇌이쉬르센 조약, 트리아농 조약, 세브르 조약 등등에서 보여준 영토 조항의 핵심은 동맹국의 힘을 빼는 거였다. 당장 대제국이었던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은 무너졌다. 

 

오-헝제국의 알짜배기 공업지역이었던 체코슬로바키아 지역을 따로 떼어내 독립시켰고, 폴란드는 150여 년 만에 다시 부활했다. 이들은 동쪽에서 소련을 대신해 독일의 동쪽을 위협할 새로운 ‘러시아 역할’을 해 줄 것으로 기대했으나, 어디까지나 희망이었을 뿐이다.

 

히틀러의 말처럼 베르사유 조약으로 만들어진 독일 동쪽의 신생국들은 민족자결주의란 고매한 명분보다는 프랑스의 안전을 위해 만들어졌다고 보는 것이 옳았다. 1차 대전 이후의 독일 동쪽의 국경선을 보면 군인 입장에선 지옥이 따로 없었다.

 

군사적인 부분에서 국경선의 길이는 독일군에게 치명적이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국경선이 2,097km, 폴란드와 984km를 유지했다. 결정적으로 체코슬로바키아가 문제였다. 독일과 마주한 국경선의 길이만 4,112km나 됐다. 독일의 한가운데 박혀 있는 장검 같은 위치가 체코슬로바키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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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사유 조약 후 유럽지도(1919)

출처 : the Florida Center for Instructional Technology,

College of Education, University of South Florida

 

국경선의 길이가 물리적으로 길어졌기에 이를 방어해야 할 독일군으로선 난감해 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들 국가들이 그 목적에 충실했는가는 별개의 문제였지만 말이다. 게다가 이 영토 조정은 독일의 감정을 너무 건드렸다. 2차대전 때처럼 국가를 분단시키지 않을 거라면, 너무 어설프게 민족감정만 건드렸다고 볼 수 있다. 

 

당장 폴란드가 가져간 슐레지엔 지역은 독일에게는 역사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각별한 지역이었다. 동유럽 산업혁명의 중심지였으며, 독일의 자본과 기술이 집중돼 루르 지역 다음으로 발전된 산업지역이었다. 프로이센 시절부터 독일 산업의 중심부였다. 이 지역에 대한 독일인들의 애착과 실질적인 필요성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러나 신생 폴란드의 경제적 독립을 위해선 이 공업지역이 필요했고, 같은 의미로 신생 폴란드의 바다로의 접근을 위해서도 발트해 연안의 그단스크(단치히)로 이어지는 회랑을 도려내야 했다. 독일의 민족감정이 끓어오를 수밖에 없었다. 

 

 

참고자료

 

아돌프 히틀러 결정판 1, 2/ 페이퍼 로드/ 존 톨렌드 저 민국홍 역

히틀러 평전 1, 2/ 푸른숲/ 요아힘 C. 페스트 저 안인희 역

CEO 히틀러와 처칠 리더십의 비밀/ 휴먼 앤 북스/ 앤드류 로버츠 저 이은정 역

나의 투쟁/ 범우사/ 아돌프 히틀러 저 서석연 역

히틀러는 왜 세계 정복에 실패했는가/ 홍익출판사/ 베빈 알렉산더 저 함규진 역

히틀러 최고사령부/ 플래닛 미디어/ 제프리 메가기 저 김홍래 역

히틀러가 바꾼 세계/ 플래닛 미디어/ 메튜 휴즈 저 박수민 역 

히틀러 최후의 14일/ 교양인/ 요아힘 C. 페스트 저 안인희 역 

제2차 세계대전사/ 청어람미디어/ 존 키건 저 류한수 역

제2차 세계대전의 기원/ 페이퍼로드/ A. J. P 테일러 저 유영수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