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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은 한국사에서 가장 굴욕적인 순간 중 하나로 꼽힙니다. 워낙 원사이드하고 깔끔하게 밀렸기 때문에, 임진왜란만큼 기록이 다양하지 않습니다. 특히, 전쟁을 직격으로 맞은 일반 백성들의 상황을 담은 기록은 더욱 드뭅니다. 글을 쓸 틈새도 없이 잡히거나, 죽거나, 끌려갔던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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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중 백성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그나마 남은 일기들은 남한산성에서 항전(이라 쓰고 사실상 뒤주 신세였던) 관리들의 기록들이 있습니다. 이번 기사에서는 남한산성 안에서 왕을 보필한 문관 석지형(石之珩, 1610~?)의 『남한해위록(南漢解圍錄)』의 기록을 중심으로 여러 일기를 엮었습니다. 

 

(석지형은 인조 12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며 관직에 진출한 조선 후기 문신이다. 저서로는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외부와 연락이 끊긴 채 소수의 군사로 버티다가 결국 직접 나가 항복했던 비극을 그대로 쓴 《남한해위록(南漢解圍錄)》과 문집인 《수현집(壽峴集)》 등이 있다) 

 

그들의 기억을 통해, 급박했던 남한산성 안의 상황, 그리고 그들이 무력하게 지켜보기만 해야 했던 백성들의 고통을 살펴보겠습니다.

 

 

1636년 12월 14일 - 『남한해위록(南漢解圍錄)』

 

새벽, 장계가 도착했다. 청군이 느닷없이 평양 인근에 도착했다는 소식이었다. 오후에서야 임금님이 피난을 시작해 숭례문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청군이 벌써 한양 코앞에까지 왔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신료들은 아연실색해 어쩔 줄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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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님께서 급하게 남한산성으로 향하였으나, 신하들도 다 흩어져 임금님이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 못하는 사람도 많았다. 을지로를 지나는데, 세자의 말고삐를 잡은 자가 도망가버려 세자가 직접 말을 채찍질하여 달렸다. 

 

왕을 모시는 군사들과 피난 가는 사람들이 모두 뒤섞여 도성의 문을 빠져나가려고 아우성을 쳤다. 혼란 속에서 헤어진 가족들이 서로를 찾는 소리로 가득했고, 쓰러져 밟혀 죽은 노약자들의 시체가 쌓였다.

 

1636년 12월 8일, 병자호란이 터집니다. 청군의 선발대는 무려 5일 만에 한양에 도착하고, 본대가 한양을 점령한 것은 보름이 채 되지 않았습니다. 느려터진 임금님의 어가가 궁궐에서 출발해 숭례문에 도착했을 때, 청군의 선발대는 이미 평양에서 한양을 주파했습니다. ‘점심은 압록강에서, 저녁은 평양에서’를 실제로 보여준 놀라운 진격속도에 대소신료들은 그저 충격과 공포에 빠졌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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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한 대로 남한산성을 향해 가는데, 촌각을 다투는 소식에 놀란 한양 사람들의 엑소더스는 이내 참극으로 변합니다. 왕이고 신하고 백성이고 노비 할 거 없이, 어떻게든 먼저 성문을 빠져나가려고 몸싸움을 하는 탓에 노약자들은 넘어지고 짓밟혀 목숨을 잃습니다.

 

엉겁결에 왕을 따라나섰지만, 남한산성 안에 들어온 신하들도 한양에 두고 온 가족들이 걱정이었습니다. 남한산성 안에 있었던 남이웅(​南以雄) 아내인 조애중(曺愛重, 1574~1645)은 자신의 일기에 그날의 혼란했던 상황을 기록합니다. 

 

 

1636년 12월 16일~17일 - 『병자일기』

 

오후 세 시쯤, 남편에게서 편지가 왔다.

 

“부인. 상황이 심상치 않으니, 짐 쌀 생각은 하지 말고 일단 제천으로 피난 가시오.”

 

나는 편지를 읽자마자, 쉬고 있던 대복이와 선탁이에게 피난 준비를 시켰다. 밤 12시쯤, 피난길을 떠났는데, 만삭의 몸이었던 덕생이가 울면서 “마님, 저도 제발 데려가 주세요”라고 하소연했다. 그러나 피난길에 아이를 낳으면 덕생이도 죽을까 걱정돼 다른 곳으로 보냈다. 양식과 짐은 모두 집에 묻었고 약간의 쌀만 챙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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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도록 피난을 갔다. 서리와 눈이 내가 타고 있는 말 위에 내려 얼어붙을 지경이었다. 그러다 샛길로 들어섰는데, 종 여덟 명과 천남이를 잃어버렸다. 피난 가는 사람들은 길에 꽉 차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 도저히 알 수 없어 발만 동동 구르며 애를 태웠다.

 

그들을 찾느라 제천으로 가는 길은 늦어져만 가는데, 어떤 사람이

 

“이미 청나라 군사들이 제천 쪽으로 향했습니다. 그쪽으로는 엄두도 내지 마세요.”

 

라고 말했다. 

 

노부인 조애중은 남편의 편지를 받자마자 노비들에게 피난 준비를 시킵니다. 남편의 말대로 짐은 그대로 둔 채 양식만 땅에 묻어야 했고, 심지어 만삭이었던 여성 노비를 포기한 채 떠나는 피난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추운 겨울날, 끝없이 이어진 피난 행렬 속에서 눈 깜짝할 사이에 이산가족이 되는 일은 비일비재했습니다. 게다가 누구의 말도 믿을 수 없습니다. 

 

“청군이 이미 제천 방향으로 떠났다.” 

 

“아니다. 청군은 강화도로 갔다.”

 

라는 등 부정확한 정보들이 피난민들을 휩쓸어, 어디로 피난해야 할지 갈피도 제대로 못 잡는 상황이 이어집니다.

 

왕과 조정이 남한산성 우주 방어를 선택하자, 그대로 청군에게 포위당해 모든 연락망과 행정망이 끊깁니다. 사실상, 이 순간 전쟁은 끝난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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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강점은 임진왜란 중에도 돌아가던 탄탄한 행정 시스템이었습니다. 그것이 막힌 순간, 조선이라는 나라의 시스템은 죽어버린 것과 같았죠. 조정이 성안에 틀어박혀 고심하던 그 순간, 청군은 아무런 저항 없이 한양을 제집처럼 누비며 사람들을 잡아 옵니다.

 

 

1636년 12월 27일 - 『남한해위록(南漢解圍錄)』

 

포로였던 조선 사람이 도망하여 성으로 들어왔다. 그가 말하길,

 

“청나라가 사람들을 붙잡아 남자들은 변발을 시키고 갑옷을 주어 선발부대로 보내고, 노약자들은 나무를 하고 가축을 기르게 시키며, 여성 중에 아름다운 자들은 함께 말을 타고, 더럽고 추한 자는 막일을 시키고, 어린아이들은 모두 던져서 죽였습니다.”

 

라고 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인류의 전쟁사에서 그러했듯, 사로잡은 남자는 총알받이로 쓰고, 노약자들에겐 잡일을 시키며, 여성들은 전리품으로 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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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의 경제적 배경에는 당시 만주에 불어닥쳤던 심각한 기근과 명나라의 경제 봉쇄가 있습니다. 

 

대군을 동원한 청나라도 한 달 남짓 안 되는 식량을 들고 출발했죠. 물론 남한산성 안의 식량도 그 정도였지만, 청군은 현지 조달이라는 유구한 전통을 실행하며 더욱 굳건한 입구 조이기에 돌입합니다. 이때 약탈한 물자와 이후 조선의 전쟁 배상금을 통해 청나라는 대명 전쟁을 적극적으로 수행할 수 있게 됩니다.

 

남한산성 수비군과 청나라의 군대는 대치와 소규모 신경전만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산성 안에서 ‘이대로 있을 수만은 없다’, ‘청나라 놈들에게 본때를 보여주자’라는 여론이 힘을 얻게 되죠. 

 

그에 힘입은 조선군은 입구를 뚫기 위한 작전을 실행합니다. 우리 백성들이 유린당하고 있다는 소식이 분노한 군사들은 앞다투어 작전에 자원하죠. 양 측의 제대로 된 첫 교전, 어땠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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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19일 남한산성에서 찍은 사진. 서울의 모습이 한눈에 다 보인다.

당시 산성 안 사람들도 한양 사람들이 도륙, 약탈당하는 장면을 그대로 보았을 것이다.

 

 

1636년 12월 29일 - 『남한해위록(南漢解圍錄)』

 

청나라 기병들이 갑자기 돌격을 시작했는데, 그 속도가 마치 번개 같았다. 우리 군사들은 아직 산에 오르지도 못했는데 청군은 이미 우리 군의 배후에 닿았다. 우리 군사들은 모두 공포에 젖어 제각기 도망치기 시작했다. 

 

청군들이 우리 군사를 포위하고 일제히 활을 쏘는데, 우리 군사들은 바람에 부대끼는 버드나무 잎처럼 힘없이 쓰러졌다. 이윽고 시체가 계곡에 가득했다. 성 위에서 지켜보는 사대부들은 모두 핏기가 없었고, 얼굴을 가린 채 차마 보지도 못했다. 이날 성 밖으로 나간 우리 군사는 3백 명 이상이었는데, 돌아온 자들은 백 명도 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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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군은 성을 나와 청군과 대치했지만, 청군은 그들이 완전히 내려오기 전까지 제대로 싸우지 않았습니다. 이윽고 성과 너무 멀어진 조선군이 산으로 돌아가려 할 때, 별안간 청군의 기마대는 말을 돌려 번개같이 돌격합니다. 

 

괜찮은 실력이었던 조선군의 조총대는 응사할 겨를도 없이 와해하였고, 청나라 군사들은 조선군을 활처럼 포위하여 화살 세례를 퍼붓죠. 산 중턱에서 제각기 도망치던 조선군은 일방적인 살육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이 광경을 성 위에서 바라본 관리들은 얼굴이 사색이 되어 자리를 뜹니다.

 

병자호란에 대해 ‘충분히 막을 수 있는 전쟁이었다’라는 아쉬움이 우리에게 가득합니다. 왕이 남한산성이 아니라 더 남쪽으로 도망갔다면? 이괄의 난이 없었다면? 외교를 좀 더 잘했다면? 와 같은 아쉬움이죠. 

 

그런데 당시 조선의 체계와 상황으로선 어떤 수를 써서라도 청군을 이길 수 없었다는 최근의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 청나라의 전략 목표, 그리고 청군의 체계는 이미 조선의 사이즈로 비빌만한 수준이 아니었다는 것이죠. 이 전투는 그 힘의 차이를 명징하게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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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국제정세. 사진의 금(金)이 청나라다.

출처-KBS1<역사저널 그날>

 

군사들의 사기가 바닥에 떨어진 순간, 조정에서는 군사들에게 하나의 ‘당근’을 내밉니다. 이른바, ‘10년간 세금 풀 면제’ 카드였습니다.

 

 

1637년 1월 11일 - 『남한해위록(南漢解圍錄)』

 

매우 추운 날이었다. 관리들이 성을 순찰하며 장수와 군사들을 위로하기 위해 이렇게 말했다.

 

“전쟁이 끝나면, 앞으로 10년 동안 자네들의 세금과 잡역을 면제할 것이네.”

 

그 말을 들은 군졸들은 끝내 비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계속>

 
 
 
 

 

편집부 주

 

독자 여러분의 성원 덕에 

필자의 책,<시시콜콜한 조선의 편지들>

여전히 잘 팔리고 있다는 소식이다. 

 

새로 나온 후속작, 

<시시콜콜한 조선의 일기들>

절찬리 판매 중이다. 

 

안 사줄 것 같이 하다가 기사가 올라오면

슬그머니 주문하는 샤이 독자 여러분 덕에 

필자는 눅눅한 골방에서 

조금 덜 눅눅한 골방으로 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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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
조선사 교양서를 쓰고 있는, 딴지가 배출한 또 하나의 잉여 작가
딴지의 조선사, 문화재, 불교, 축구 파트를 맡고 있슴다.
이 네 개 파트의 미래가 어둡다는 거지요.

『시시콜콜한 조선의 편지들』
『시시콜콜한 조선의 일기들』
『시시콜콜 조선복지실록』
『시시콜콜 조선부동산실록』 신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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