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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지에 리뷰노예로 납치된 불가사리. 거액의 제작비로 복수하겠다 다짐했지만, 딴지가 던져준 주제는 온통 싸구려들. 하다 하다 반창고 리뷰까지 시키는 통에 멘탈 바사삭된 불가사리는 태업에 돌입한다. 그럴 때가 되었다 싶은 편집장 죽지않는돌고래(이하 죽돌), ‘맛집 리뷰’라는 당근으로 불가사리를 유혹하기 시작하는데.. 과연 불가사리는 이번에야말로 딴지의 등골을 빼먹을 수 있을까?

 

불가사리의 소비대모험, 기대하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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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호구인지 모르겠다면 니가 호구다

 

죽돌 : 이제 사회적 거리두기도 좀 풀리고 하니, 자영업자 응원 차원에서 음식점을 다녀오시고 리뷰하면 어떨까요?

 

불가사리 : 네? 정말.. 식당을 다녀와도 되는 겁니까? 음식값은 내 줍니까?

 

죽돌 : 후후. 당연하죠. 기름값 주차비 동행의 식대까지 다 드리겠습니다.

 

뭐지. 딴지가 왜 갑자기 이런 통 큰 결단을...? 시답잖은 아이템들로 지금까지 나를 조졌던 건 오늘을 위한 일종의 테스트였던 것인가...?

 

불가사리 : 그렇다면 첫 아이템은 한우가 좋을까요 스시 오마카세가 좋을까요?

 

죽돌 : 둘 다 좋지요. 어디건 자유롭게 가서 리뷰해보시죠! 아 물론 지식편이 나올 수 있어야겠지요?

 

불가사리 : 캬하하 너무 신나네요! 혹시 그러면 제주도 같은 데 다녀오면 비행기값도 주시는 겁니까?

 

죽돌 : 물론이죠. 그런데 제주도 어디를 가시려구요?

 

불가사리 : 음 얼핏 생각나는 곳은 연돈인데... 여기 예약 힘들다던데, 민족언론 정론직필 딴지일보의 힘으로 그냥 들어갈 수 있겠죠?

 

죽돌 : 후후. 교통비도 드려야죠. 근데 예약은 좀 알아봐야겠네요

 

불가사리 : 감사합니다 편집장님! 사랑합니다 총수님! 김어준 짱!

 

이렇게 불가사리는 꿈에 부풀었다.

 

그리고, 이틀 뒤 새벽 3시(왜?), 죽돌 편집장에게 온 문자를 아침에야 확인했다.

 

불가사리님, 죄송한데 연돈 예약은 안된다고 합니다. 죄송하니 대신 인기 돈까스집인 성북동 금왕돈까스는 예약해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외식 주제는 돈까스로 하는 걸로 알고 있겠습니다. 기왕이면 한국식 돈까스가 좋겠지요?

 

또 무슨 개수작인가 싶어 불가사리는 죽돌에게 다급히 전화를 걸었으나,

 

‘아 죄송합니다, 아이 때문에 바빠서요’

 

라는 영혼 없는 자동 전송 문자만 올 뿐, 죽돌의 통화연결음은 또 처연하게 새벽 공기 속으로 끝도 없이 울려 퍼진다.

 

그래. 항상 나만 진심이었지.

판떼기에서 누가 호구인지 모르면 니가 호구랬다고,

이쯤 되면 매번 혼자 설레고 실망하는 내가 말미잘이다.

 

우리에게 돈까스란 무엇인가

 

돈까스는 언제나 내 곁에 있었지만 그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아주 어릴 때, 명동 유네스코 빌딩 스카이라운지 식당에서 돈까스를 먹었던 기억이 거의 최초의 기억이다.(화장실에서 좋은 냄새가 났던 기억이 난다.) 돈까스의 추억은 뭐니 뭐니 해도,

 

‘크림슾으로 하시겠습니까 야채슾으로 하시겠습니까?’

 

‘빵으로 하시겠습니까 밥으로 하시겠습니까?’

 

이런 질문이 세상에서 가장 심각한 고민이었던 어린 시절 경양식집이다. 초등학교 시절, 돈까스를 튀기는 날도 기억이 난다. 어머니가 튀긴 돈까스에 케찹과 ‘오뚜기 돈가스 소스’를 얹어 먹던 날, 오뚜기 스프를 먹으면서 가슴이 어찌나 두근거렸던지. 그러다 급격히 돈까스는 굉장히 친숙한 어떤 것이 되었다. 도시락 반찬으로 종종 나왔고, 급식으로도 군대 식사에서도 종종 나오는 음식이 되었다. 허름한 분식집에서도 늘 돈까스를 먹을 수 있었다.

 

그러다 아마도 90년대, ‘까르보나라 스파게티’라는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 즈음에 처음 일본식 돈까스를 접했다. 아마도 ‘허수아비’라는 이름의 가게였던 것 같고, 짝사랑했던 선배 누나가 데려갔던 것 같다. 절구에 참깨를 직접 갈아 돈가스 소스를 넣고, 잘려 나온 튀김을 젓가락으로 먹었다. 비슷한 듯 하지만 전혀 다른 음식이었다. 두꺼운 고기와 바삭한 튀김이 신선했다. 그 자리에서 선배 누나가 학생회장 형과 사귄다는 이야기를 해서 마음이 너무나 슬펐지만. 그 와중에도 돈까스가 너무 맛있어서 더 슬펐다.

 

대학교 학생식당에서 수없이 많은 돈까스를 먹었고, 어린 시절 이게 무엇인지 늘 궁금하던 ‘돈가스 안주’라는 것도 먹어 보았다. 소개팅을 나가 김재벌들만 시킬 수 있다는 전설의 메뉴 ‘김천스돈’, 즉 ‘김밥천국 스페셜 돈까스’를 떨리는 손으로 시켰던 기억도 난다. 수없이 많은 돈까스를 먹었고 나도 그 돈까스 수만큼이나 나이가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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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인터넷을 휩쓸었던 충격적인 메뉴,

재벌의 상징인 ‘김천 스돈’

 

한국인이라면, 돈까스는 늘 곁에 있는 어떤 것이자 많은 추억이 서린 어떤 것이다. 그 경험들과 기억들은 모두 다른 것이라 일반화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공통점은 있다. 그것은 바로 돈까스는 졸라, 맛있다는 것이다.

 

돈까스는 졸라 맛있다. 아니, 맛이 없을 수 없다. 돈까스가 무엇인가, 돼지고기를 튀긴 거다. 이 세상에 돼지고기로 만들어서 맛 없는 음식이 없고, 튀겨서 맛없는 음식이 없다. 그런데 돼지고기를 튀겼다니. 이건 뭐 어쩌란 말인가.

 

돼지고기는 얼마나 맛있는가

 

돼지고기와 소고기 중 무엇이 더 맛있는가? ‘비싼 소고기와 싼 돼지고기’라는 생각을 버린다면, 희소성을 생각하지 않으면, 나는 돼지고기가 더 맛있다고 생각한다. 소고기는 정확한 정도로 익히지 않으면 질기거나 뻑뻑해진다. 하지만, 돼지고기는 살짝 덜 익으면 육즙이 퍼지고 더 익어도 기름기가 많아서 맛있다. 돼지고기로 무슨 짓을 해도 맛있다는 거다. 돼지고기가 얼마나 맛있는지는, 수많은 종교에서 금지하고 있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메이저 고기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이슬람과 유대교 등에서 돼지고기를 금지하는 이유에 대한 이론이 있다. 우선 이슬람교와 유대교의 바탕은 유목민들인데, 돼지는 유목 생활과 맞지 않고, 쉽게 부패하며, 선모충과 갈고리촌충이라는 치명적인 기생충이 있어서라는 것이다.

 

이 이론들은 일리가 있지만, 조금 석연찮은 부분이 있다. 이슬람교와 유대교가 퍼지기 전 같은 지역의 유목민들은 돼지고기를 먹었다는 것, 그리고 두 종교가 돼지고기 금기를 도덕적인 일로 그리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크리스토퍼 히친스 같은 경우, '돼지고기 금기는 실질적 이유가 없고 그저 종교가 인간을 속박하기 위한 것' 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근래에 돼지가 ‘사치’와 ‘탐욕’을 상징하기에 이를 금지하는 것이라는 학자들의 주장도 꽤나 설득력이 있다. 인간이 기르는 다른 가축과 달리, 돼지는 고기를 주는 것 외에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는다. 소는 일을 하고 우유를 생산하며 가죽도 쓴다. 양은 털과 가죽을 주고, 닭과 오리는 매일 알을 낳는다. 개는 집을 지키고 사냥을 도우며 고양이는 쥐를 잡고 말은 타고 다닐 수 있다. 그러나 돼지 털이나 가죽은 사용할 수 있으되, 털은 억세고 가죽은 약해서 아주 제한적으로만 사용 가능하다. 즉 돼지는 먹기 위해서만 키우는 동물이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육식은 사치이다. 지금도 그러하고 과거도 그러하다. 곡식 등의 식물을 먹는 데 비해 훨씬 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돼지고기의 에너지 효율은 8% 정도이다. 1% 남짓 되는 소나 4% 정도인 양에 비해 효율이 좋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낙농업이 고도화되어 소와 양에게도 사료를 먹이는 현대가 아니라 과거를 기준으로 생각하면, 소와 양이 먹는 식물은 인간이 먹을 수 없는 ‘풀’임에 반해 돼지가 먹는 것은 인간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이라는 점에서 완전히 다르다. 소와 양은 인간이 먹을 수 없는 무엇인가를 통해 인간이 먹을 수 있는 우유 고기 등을 준다면, 돼지는 인간이 먹을 것을 빼앗아가는 것이다. 돼지를 키우지 않고 곡식으로 섭취하면 가난한 이들까지 곡식을 먹을 수 있는데, 돼지를 키우게 되면 부자들의 미식을 위해 가난한 이들은 굶어야 한다. 사료로 쓸 수 있는 옥수수 등을 대량 생산할 수 있는 시기인 20세기 이전에 돼지고기 섭취는 사치이고, ‘가난한 이들의 밥을 빼앗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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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양 고금에서 늘 돼지를 ‘탐욕’의 상징으로

본 것은 우연이 아니다.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에 나오는 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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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lliam Steele의 ‘The greedy pig'

 

돼지가 사치인 이유 중 또 하나는 물이다. 돼지는 사료의 3배 정도 물을 먹어야 하는 동물이고, 몸에 털이 없어서 체온 조절을 위해서 물이 꼭 필요한, 물이 많이 요구되는 동물이다. 물이 흔하지 않은 곳에서 돼지를 키운다는 것은 곡식보다 더 중요한 물을 빼앗는 일이었다. 물이 늘 부족한 유목민들이라면 더하다. 중국의 경우에도 돼지고기를 광범위하게 키우게 된 것은 대규모 운하와 관개시설이 완비된 당나라 말기에서 시작되어 송나라 대에 완성된 일이라는 점이 이를 시사한다.

 

결국 물이 풍부하고, 먹을 것이 풍족하거나 돼지에게 인간이 먹지 못할 것을 먹일 수 있는 특별한 상황, 혹은 돼지 똥 비료의 역할이 큰 척박한 농토가 아니라면, 돼지고기는 곧 사치의 상징이다. 조선에서도 돼지는 19세기 이전까지는 사신에게 접대하기 위해 기르는 귀한 고기의 역할을 했고, 현재 남한에 남아 있는 돼지고기 문화는 제주도를 제외하면 대부분 북한, 그것도 여진족 등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함경도에서 내려온 음식 문화이다. 그럼에도 인간이 돼지를 굳이 먹었던 것은 돼지가 그만큼 맛있기 때문이다.

 

튀김은 얼마나 맛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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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김은 너무나 맛있다. 그리고 단순히 고온의 기름에 넣었다 빼는 것이니, 그닥 어렵지 않은 요리일 것이라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사실 세계적으로 튀김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고, 대중화된 것은 더욱 짧으며, 한국에서는 튀김의 전통은 거의 없다고 보아도 좋다. 그 첫 번째 이유는 불이고, 두 번째 이유는 기름(식용유)이다.

 

기름을 끓이기 위해서는 꽤나 센 불이 필요하다. 인류는 도자기를 만들 때 1000도 이상의 불을 내기도 하는 등 센 불을 내는 것 자체는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를 조리용으로 사용하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볶음과 튀김 요리를 쉽게 할 수 있을 정도의 센 불은 나무로 내기 힘들어서, 화덕과 같은 특별한 구조를 갖추거나, 아니면 석탄 등으로 센 불을 내야 한다. 역사적으로 보면, 중국 송나라 시대에 석탄을 연료용으로 일반적으로 쓰기 시작하면서 음식을 볶거나 튀기는 현대 중국 음식이 시작되었다. 서구에서도 토탄(peat), 석탄 등을 이용한 화력이 일반화된 18세기에 이르러서야 튀김 음식이 흔해진다.

 

한반도에 튀김이 거의 없었던 큰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온돌 때문이다. 한국인들이 온돌을 사용한 것은 기원전부터의 일이고, 조선 중기에는 어지간한 초가집에도 온돌이 들어갈 정도로 일반화되었다. 이 온돌이란 집 아래 공간을 두고 그 앞에서 불을 피워, 따스한 연기가 집 아래 공간을 통과하여 밖으로 나갈 수 있도록 하여 공기의 열기로 바닥 자체를 달구는 방식이었다. 그리고 불을 때는 부분 위에 가마솥을 걸어서 조리용으로 썼다. 그런데 강한 불을 사용했다가는 바닥이 너무 뜨거워지고 탈 우려도 있었기에, 적당한 불로 오랫동안 가열하는 것이 핵심이었고, 따로 조리용 불을 두기보다는 온돌로 음식을 하였기에 한국 음식은 ‘센 불로 빠르게’만드는 것이 아니라 ‘중불 내지 약불로 오래오래’만드는 방식으로 발전하였다. 소고기 뼈와 고기를 오래오래 끓여 만든 곰탕이나 육개장 같은 음식들이 한국 음식의 대표인 것은 온돌의 영향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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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문제는 기름(식용유)이다. 근대 이전 식용 기름은 고가의 식재료였다. 비싼 우유에서 아주 조금만 얻을 수 있는 버터나, 동물을 잡아야 얻을 수 있는 동물성 기름은 당연히 고기보다도 비싼 것이었고, 깨나 콩을 가지고 기름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굉장히 효율이 떨어졌다. 방앗간에서 참기름을 만드는 모습을 보면 된다. 기능이 좋은 압착기를 이용해서도, 엄청나게 많은 깨를 짜 내야 겨우 참기름 한 병이 나온다. 콩에서 기름을 얻어내는 것은 이보다도 훨씬 효율이 떨어졌다. 콩기름 식용유를 싸게 살 수 있게 된 것은 헥산(Haxene)을 이용한 추출법이 개발된 1920년 이후의 일이고, 물리적인 힘으로 콩기름을 얻는 것은 매우 힘들다.

 

그나마 18세기 이후 서구권에서는 포경을 하여 잡은 고래기름이 상대적으로 싸게 유통되기 시작하여(불을 켜는 데도 고래기름이 이용되었고, 양초, 비누 등 제법은 예전부터 알려져 있었으나 대중화되지 않았던 물건들이 고래기름으로 인해 대중화된다) 튀김이 가능해진다. 19세기가 되면 아프리카에서 사용되던 팜유(야자유), 일본 등지에서 재배되던 유채유 등이 사용되고, 무엇보다 석유가 일반화되어 산업용으로 고래기름 등을 쓸 필요가 없어져 기름이 흔해진다. 헥산 추출법이 발명된 이후에는 본격적으로 기름이 싼 시대가 열린다. 즉 튀김이 ‘고급 조리법’의 지위에서 내려온 것은 불과 100년이 조금 넘었을 뿐이다.

 

튀김과 종교

 

이렇듯 근대 이전에 튀김이 비싼 음식이었기 때문에, 일반적인 경우에 먹는 음식은 되지 못했고, 그 자체로 기름기가 있는 고기를 튀긴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튀김 문화는 주로 고기를 먹을 수 없는 상황에서, 고기나 마찬가지의 고열량과 맛을 내기 위해 발전했다. 전통적으로 가톨릭에서는 예수의 죽음을 기념하는 40일간 고기를 먹지 않았는데(사순절), 이때 고기를 대신해서 튀김을 먹곤 했다. 우리의 사찰음식에도 기름을 많이 사용하고, 포르투갈에서 콩깍지 튀겨 생선 모양으로 만든 튀김(peixinhos da horta)도 이런 이유에서 생겨난 음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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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어로 금육일은 quatuor anni tempora, 줄여서 ‘텡포라’라고 부르는데, 일본에 포르투갈 상인이 처음 들어온 1543년 경 서양 상인들에 의해 ‘텡포라에 먹는 요리’라고 전해졌다. 일본인들은 튀김 자체를 ‘덴푸라’라고 부르게 된다.

 

이 조리법은 일본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끈다. 일본이 1,200년 동안 육식이 금지되어 있던 사회라는 점이 큰 요인이었다. 일본인들은 튀김을 너무나 좋아한 나머지 유채꽃을 이용한 유채유 생산에 나서서, 세계적으로 튀김 문화가 가장 발전한 국가가 된다. 1616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도미 덴뿌라를 먹고 너무 맛있어서 과식하여 죽었다는 설이 널리 퍼져 있을 정도이다.

 

반면 육식을 즐겼던 서구에서는 튀김 문화가 늦게 발전했다. 고래기름이 대중화되고, 도시가 생겨나면서 신선하지 않은 식재료라도 고온에 익혀야 했던 시기, 산업 혁명 시기가 가까워져서야 튀김이 일반화된다. ‘프렌치 프라이’가 이 시기에 생겨나기도 한다. 그리고 산업혁명을 지난 1800년대에, 도시화가 가장 발전한 영국은 모든 음식을 튀겨 먹는다고 할 정도로 튀김 문화가 발전한다. ‘피쉬 앤 칩스’도 그때 발전한 요리이다. 원래부터 고기 조리법이 발전하지 않았던 영국에서 튀김 문화가 더 발달한 것도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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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초코바를 튀겨 먹기도 한다.

 

자본주의를 상징하는 작물은 면화다. 이 면화에서도 면실유가 나오고 이 기름으로도 튀김을 할 수 있다. 모든 것이 풍요로운 미국에서는 엄청난 규모로 목화를 재배했고 여기서 면실유를 뽑아 ‘프라이드 치킨’이 발전한다.

 

미국은 1800년대만 해도 후진국이었지만, 최소한 먹을 것이 넘쳐 나는 후진국이었다. 불과 200년 전 프랑스에서 앙리 4세가 일주일에 한 번씩 닭고기를 먹게 한 것이 유럽 최고 선진국의 상징이었는데, 미국에서는 흑인 노예들도 매일 랍스터를 먹을 수 있었고, 닭고기도 일주일에 두세번은 먹을 수 있었다. 정확히 같은 시기 프랑스에서 최고급이던 랍스터 요리를, 미국에서는 이민자들이 ‘맨날 이런 맛없는 고기만 먹을 수 없다’고 폭동을 일으킬 정도였다. 식재료의 풍부함에 있어서 유럽과 미국은 차원이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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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식 프라이드 치킨의 아버지 커넬 센더스 할아버지 이전에도 흑인들은 프라이드 치킨을 일상적으로 먹었다.

커넬 센더스가 흑인 여성의 레시피를 훔쳤다는 주장이 있을 정도

 

한편 한국에서는 식용유라고는 비싼 참기름과 들기름이 거의 전부였다. 유채꽃을 많이 키우지도 않았고, 돼지고기를 많이 먹지도 않았으며, 우유도 거의 먹지 않아서 버터도 없었다. 앞에서 말한 ‘약한 불’과 어우러져, 한국에는 튀김의 전통이 거의 없었다. ‘조선의 프라이드 치킨’정도로 알려져 있는 ‘포계’도 사실은 기름에 닭고기를 볶는 요리에 불과했다.

 

여기까지 요약해보자.

 

1) 돼지고기는 열라 맛있다.

2) 튀김은 짱짱 맛있는데, 센 불과 많은 식용유가 필요해서 만들기 힘들었다.

3) 그나마 야채나 생선은 튀겨 먹어도 고기는 안 튀겨 먹었다.

4) 17세기 이후 일본, 18세기 이후 영국에서 튀김 문화가 무척 발전한다.

 

돈까스 비긴스: 슈니첼과 커틀릿

 

고기를 튀겨 먹는 문화는 한참 이후에 유럽에서 나오기 시작한다. 고기를 튀겨 먹는 음식, 흔히 ‘커틀릿 cutlet'이라 부르는 이 음식이 최초에 문헌으로 등장한 것은 1682년이고, 일반인들에게 흔한 음식이 된 것은 1700년 이후이다. 아까 말한 산업혁명에 가까워진 시기이다.

 

원래 커틀릿은 튀김(deep Fat Frying)보다는 송아지나 양의 갈비뼈 부분을 튀기듯 부쳐 먹는(Shallow Fat Frying) 요리였다. 소갈비뼈는 프랑스어로 côtelette라고 불렀는데, 이것을 튀긴 요리를 côtelette(꼬똘레뜨), 영어로 Cutlet이라 부르게 되었다.

 

커틀렛은 유럽 각지에 여러 방식으로 존재했다. 유명한 '오스트리아 슈니첼‘이나, ’코톨레타 알라 밀라네제‘가 그 종류 중 하나다. 일반적인 커틀릿은 뼈 있는 고기나 없는 고기를 두드려 얇게 만든 후, 이것을 빵가루에 묻혀 버터에 굽듯이 튀기는 요리다. 빵가루를 잘 달라붙게 하기 위해 계란 물을 입히기도 한다. 고기를 얇게 두드려 펴 여기에 밀가루, 계란 물, 빵가루를 묻혀 기름에 지지거나 튀기는 것이므로, 현대 한국의 경양식 돈까스(또는 기사식당 돈까스)와 모양이나 맛이 흡사하다. 여기서 사용하는 빵가루는 일식 돈까스 사용하는 ’마르고 굵은 빵가루‘가 아니라 유럽식의 고운 빵가루여서 튀김옷 위의 입자가 작은데, 이 점 또한 한국식 돈까스와 흡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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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엔나 슈니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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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톨레타 알라 밀라네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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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jägerschnitzel, ‘사냥꾼의 슈니첼’

소스를 뿌려 먹는다는 점에서 더더욱 흡사하다

 

이 음식은 산업혁명 시대 이후 특히 군인들을 위한 식사로 각광받았다. 기름이 싸진 시기였기에, 고열량이 필요한 군인들에게 고기를 튀겨 제공하는 것은 조리하기에도 쉬웠고 병사들의 불만도 잠재울 수 있었으며, 고열량을 제공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튀김은 그리 신선하지 않은 식재료도 건강에 별지장 없이 먹을 수 있게 해 주었고, 대량 조리를 하기에 유리했다.

 

고기튀김은, 비슷하게 대량 조리에 유리한 방식 몇 가지와 함께 (특히 영국) 군인 식사의 중심이 된다. 고기를 채소와 함께 물에 삶은 비프 스튜, 여기에 식민지 인도에서 가져온 카레 가루를 넣은 카레, 그리고 고기를 튀긴 비프(포크) 커틀릿, 이 고기들을 메인으로 여기에 비스킷과 맥주를 함께 먹는 것이 전형적인 군인의 식사였다.

 

이때, 청운의 꿈을 안고 영국으로 유학을 간 일본인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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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이름은 도고 헤이하치로, 러일전쟁에서 러시아 발트 함대에 승전을 거둔 사령관이다.

 

일본의 ‘카츠레츠’의 탄생

 

일본은 불교의 영향으로, 1200년간 육고기를 먹는 것이 공식적으로는 금지되어 있었다. 먹는 경우도 있었지만, 어쨌든 도덕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일로 치부되었다. 육고기가 공식적으로 해금된 것은 1895년의 일이다. 그러나 메이지 유신 이후, 서구 문화를 받아들이는 것이 진보라고 생각했던 젊은이들은 기꺼이 금기시되어 있던 고기를 먹었다. 육식을 하는 것이 서구 문명의 섭취라 느낀 것이다. 메이지 정부는 공식적으로 육고기가 해금되기 전인 1870년에 ‘고기를 먹지 않으면 문명인이 아니다’라고 선언하였을 정도다.

 

고기 맛도 모르고 고기를 먹는 법도 몰랐던 서민들은, 일본식 된장에 생선 대신 고기를 넣고 끓여먹다가 나중에는 된장 대신 간장과 설탕을 넣어 먹었다. 이후 ‘스키야키’와 ‘샤브샤브’가 되는 ‘쇠고기 전골’의 탄생이다. 쇠고기 전골은 큰 인기를 끌었으나, 육식으로 인한 근대화의 열망을 채워주기에는 조금 부족한 면이 있었다. 본격적인 육식의 방법은, 역시 서양식, 그것도 서양의 군대 식사에서 왔다.

 

당시 영국의 군인 음식으로 가장 많았던 것이 비프 스튜, 비프(또는 포크) 커틀릿, 커리였다. 일본 해군은 이를 그대로 들여온다. 도고 헤이하치로를 비롯한 11인의 유학생이 고안했다는 일화가 있지만, 그들이건 다른 이들이건 어쨌든 군인 음식을 가져온 것은 분명하다. 일본인들은 어쨌든 쌀밥을 먹어야 했기에, 음식이 쌀밥에 맞게 조금 변화한다. 비프 스튜는 소고기와 감자를 볶은 뒤 간장, 설탕을 넣어 끓여낸 ‘니쿠자가’로 변했고, 니쿠자가에 간장 대신에 카레가루를 넣은 후 밥과 함께 먹으면 ‘카레라이스’가 되었다. 카레가루 대신 브라운 소스를 넣으면 ‘해시라이스(하이라이스)’가 되었다.

 

그리고 커틀릿은, 돈까스가 되었다. 영어에서 Cut-let은 2음절의 단어이고, 한국어 ‘커틀릿’은 3음절의 단어이다. 일본어에서는 이를 Cu-T-Le-T로 나누어 발음할 수밖에 없어서, 이를 ‘카츠레츠’라 불렀다. 이후에는 ‘레쓰’를 줄이고, ‘포크카츠’, ‘비후카츠’, ‘치킨카츠’라 부르기 시작했다. 즉 당시에는 ‘돈까스’라는 단어는 없었고, ‘돈까스’라는 단어는 1950년 이후에야 생겨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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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최초로 돈까스를 만들었다는

긴자의 ‘렌가테이’에서 현재 판매하는 돈까스

 

일본에서 처음 나온 ‘가쓰레쓰’는 유럽식을 거의 그대로 재현한 것이었다. 일본 최초로(1895) 돈까스를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는 긴자의 ‘렌가테이’에서 현재 파는 돈까스만 보아도 우리가 알고 있는 ‘일식 돈까스’와는 많이 다르다. 고기를 두드려서 고기를 얇게 펴고, 가는 빵가루를 겉에 붙이며, 미리 잘라 나오지 않는다. 이러니 현대 한국 기사식당 돈까스와 오히려 더 닮았다. 영국에서처럼 커틀릿은 따로 소스 없이 그냥 먹는 음식이었는데, 도쿄에서는 별도 요리인 ‘비프 스튜’를 소스처럼 흥건하게 부어 먹는 것이 유행이었다고 하고, 비프 스튜를 간소화시킨 ‘브라운 소스(또는 그래비 소스)’를 부어 먹기도 했다고 한다.

 

‘일본식 돈까스’의 탄생

 

이런 ‘카츠레츠’는 시간이 지나면서 변화한다.

 

맨 처음, 1920년 경부터 튀김의 방식이 변했다. 일본은 원래 덴푸라를 튀겨 먹는(deep fat frying) 경험이 있었다. 그래서 프라이팬에 기름을 넉넉히 넣어 부치는(Shallow fat frying) 방식으로 만드는 커틀릿을 덴푸라를 만드는 방식으로 튀겨 먹기 시작한다.

 

두 번째로 1930년 중반부터는 소스가 변했다. 원래 독립적 음식인 비프 스튜를 찍어 먹거나 부어 먹지 않고, 일본인들에게 인기가 좋았던 서양 소스인 우스터 소스(Worcestershire sauce)를 찍어 먹게 된다. 이 소스는 영국 기준으로는 인도의 맛, 동양의 맛을 구현하려 멸치나 기타 향신료를 넣은 음식이어서, 일본에서 ‘서양식 간장’으로 인기를 끌던 물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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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마트의 소스 코너

우스터 소스 또는 그의 변형이 많다

 

세 번째로 1960년 경부터는 고기가 두꺼워진다. 애초에 기름에 부치기(shallow frying 또는 pan frying) 위해 넓적했던 것이고, 기름통에 넣어 튀길 때는 넓적한 모양보다는 둥근 모양이 만들기 쉽다. 다만 고기가 두꺼워지면 속을 익히기 힘든데, 덜 익은 지방은 이에 들러붙고 맛이 없다. 그래서 기름기가 적은 안심을 이용하여 ‘겉은 바삭하게, 속은 촉촉하게’ 만들게 된다. 동시에 ‘포크 카츠레츠’가 ‘포크카츠’를 지나 ‘돈카츠’, ‘카츠돈’이라는 이름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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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일본식 ‘돈카츠’는 1970년대가 되어서야 비로소 현재와 비슷한 모습의 음식으로 정립된다.

 

일제 강점기, 한국 또한 일본을 통해 자연스럽게 돈까스를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나, 현재 우리가 먹는 한국식 돈까스(경양식 돈까스, 기사식당 돈까스)의 조상은 일본 돈까스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다른 음식의 영향을 더 짙게 받았다. 그 음식은 무엇일까?

 

죽돌 : 아니 원고를 여기서 끊어서 주면 어떡합니까.

 

불가사리 : 이제야 전화를 하시는군요.

 

죽돌 : 그래서 그 음식이 뭔데요?

 

불가사리 : 연돈 예약하고 제주 항공권 보내줄 때까지 안알랴줌.

 

죽돌 : 허허..

 

과연 불가사리의 돈까스 인질극은 성공할 것인가?

 

불가사리의 소비 대모험, 한국 돈까스의 기원과 발전 이야기, 기대하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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