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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다니엘 블레이크>

 

평생 기억에 남을 만큼 좋은 영화인데 두 번은 보지 않는 영화가 있다. 보기 싫은 게 아니고, 볼 수 없는 영화다.

 

다니엘블레이크 병원에서 검사받는 장면.jpg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심장 질환으로 의사에게 당분간 근로 노동을 하지 말 것을 권고받은 다니엘 블레이크가 질병 수당 심사에 탈락한 뒤 재심을 청구하려고 안간힘을 쓰다 심장마비가 도져 죽는 이야기다. 기계적으로 비인간적으로 축약하면 그렇다.

 

조금 더 인간적으로 축약하면 이렇다. 노년의 베테랑 목수 다니엘 블레이크는 심장마비로 한 차례 고비를 넘겼지만 아직 생업으로 돌아가서는 안 되는 몸이다. 주치의가 그렇게 권고했으니 본인 의지의 문제는 아니다. 다니엘은 국가가 마련해놓은 질병 수당 제도를 통해 일을 할 수 있게 될 때까지 생계를 유지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다니엘 블레이크를 막아서는 두 가지 장벽이 있었다. 비합리적이고 융통성 없는 복지 시스템이 하나의 벽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컴퓨터와 인터넷이라는 기술 장벽이었다. 어이없는 질병 수당 심사 질문에 발끈하는 바람에 심사에서 탈락한 다니엘은 재심 청구조차 느려터진 행정 절차 때문에 기약할 수 없게 되자 구직 수당이라도 받아보려고 애썼지만 아무것도 얻어내지 못한다. 질병 수당을 가로막은 두 개의 장벽은 구직 수당에서도 마찬가지였고 심지어 구직 수당 앞에는 한 가지 벽이 더 존재했던 것이다. 그건 다니엘 자신의 자존심과 수치심이 만들어낸 벽이었다. 자존심의 벽을 허물 바에야 질병 수당으로 돌아가는 길을 택한 다니엘은 다시 도전한 질병 수당 재심사 직전 화장실에서 심장마비가 도져 세상을 떠난다.

 

이 영화를 두 번 볼 수 없게 하는 건 제발 벌어지지 않았으면 하는 사건과 결과로만 이어지는 전개다. 다니엘 블레이크는 시종일관 앞서 이야기한 장벽에 가로막히며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좌절한다. 사람을 돕겠다고 만든 복지 시스템의 비인간성 앞에 좌절하고 손으로 뚝딱하면 만들지 못할 물건이 없는 베테랑 목수이지만 실은 디지털 문명에서 문맹 수준의 무능력자임을 뼈저리게 실감하며 또 좌절한다. 이 모든 좌절에 뒤따르는 수치심은 덤 치고는 너무 무겁다.

 

케이티와 아이들이 복지센터에서 곤란한 처한 장면.jpg

 

한편, 아이 둘을 키우는 싱글맘 케이티는 처음 이사를 온 동네에서 길을 헤매는 바람에 수당 심사 시간에 지각해 불이익을 당한 처지다. 마찬가지로 비인간적인 복지 시스템 앞에서 좌절할 때 만난 다니엘 블레이크 덕분에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받게 된 게 유일한 행운. 다니엘 블레이크는 자신의 생계가 막막한 상황에서도 전기세를 내라며 꼬깃꼬깃한 지폐를 내어주고 집을 수리해주고 케이티 대신 아이들을 돌봐줬다. 그럼에도 케이티의 사정은 단 한 푼도 나아지지 않았다. 식료품 지원 센터에서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진열되어 있던 통조림을 그 자리에서 열어 허겁지겁 먹다가 아이들 보는 앞에서 눈물이 터져도 견뎌내던 케이티는 딸 아이가 밑창 떨어진 신발을 어쩌지 못하고 신고 다니다가 학교에서 놀림감을 되었다는 말을 듣고서 결국, 매춘 알선 업자에게 전화를 건다. 생활비가 없어 세간살이를 팔아 이들 가족을 돌봤던 다니엘이 이 사실을 알고 케이티에게 달려가 눈물로 붙잡아보지만 이 돈으로 아이들이 먹을 과일도 살 수 있다며 뿌리치는 그녀를 막을 수는 없었다.

 

어떻게 이 영화를 두 번 볼 수 있단 말인가.

 

문제는 이 영화가 다큐멘터리 수준으로 현실적인 영화라는 거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 포스터.jpg

 

인간의 존엄성

 

인간다움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강요당하는 시대가 바야흐로 도래했다. 인공지능이 한 없이 인간에 가까워지고 로봇이 인간 동작 이상의 정교함을 보여주게 되자 역으로 인간은 ‘너희는 무엇이 특별한가’라는 물음에 부딪혔다. 인간의 존엄성은 인류 역사 내내 위기를 맞았지만 그건 한 부류의 인간이 다른 부류의 인간을 해쳤기 때문이었지 인간이 아닌 무언가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우서운 로봇.jpg

 

인간의 존엄 이전에 생명체의 지상과제에서도 멀어지고 있다. 그 점에서는 대한민국이 가장 앞서나가고 있는데, 종족 보존의 본능이 억제되는 모습이다. 자발적으로 아이를 갖지 않는다. 그 이전에 짝을 찾지 않거나 못한다.

 

종의 위협은 외부에서도 닥쳐온다. 환경 문제와 기후변화는 더이상 만약의 시나리오가 아니다. 기후변화는 이미 사람의 생명과 재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노리는 안보 위협은 적국이 아니라 지구 그 자체다.

 

위에서 말한 이 모든 위기를 인간 스스로 만들었다. 하여, 해답 또한 우리 안에 있다.

 

다니엘 블레이크의 자존심

 

나는 의뢰인도 고객도 사용자도 아닙니다.

나는 게으름뱅이도 사기꾼도 거지도 도둑도 아닙니다.

나는 보험 번호 숫자도 화면 속 점도 아닙니다.

난 묵묵히 책임을 다해 떳떳하게 살았습니다.

난 굽실대지 않았고 이웃이 어려우면 그들을 도왔습니다.

자선을 구걸하거나 기대지도 않았습니다.

나는 다니엘 블레이크, 개가 아니라 인간입니다.

이에 나는 내 권리를 요구합니다.

인간적 존중을 요구합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한 사람의 시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질병 수당 재심을 앞둔 다니엘 블레이크가 화장실에서 쓰러졌을 때 그의 가슴팍에는 연필로 쓴 그의 메모가 있었다. 수당 신청 기관에서 유일하게 다니엘에게 인간적이었던 직원이 있다. 다니엘 블레이크가 구직 수당을 포기하려고 하자, 길거리에 나 앉게 될 것을 우려하며 말린다. 그 때 다니엘은 이렇게 말했다.

 

“고맙소만, 앤. 사람이 자존심을 잃으면 다 잃은 거요”

 

위기에 빠진 누군가를 구하고자 하는 그 누구에게도 위기의 당사자를 조롱하거나 질책할 권리는 없다.

 

기본소득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다

 

기본소득 정책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2년 전부터였다. 앞으로 우리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 놓을 인공지능의 출현과 기후 변화에 대한 관심이 한대 모인 결과였다. 닥치는 대로 관련 서적을 읽고 정리해두었다. 당장이라도 기본소득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만 엄두가 나지 않았다. 기본소득에 대해 훨씬 많은 이야기를 해줄 수 있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얼마든지 있는데 그에 비해 아는 것도 풀어낼 능력도 부족한 탓에 고민의 끝은 언제나 ‘언젠가는’이었다. 

 

개인의 노력과 능력만으로는 도저히 어찌해 볼 도리가 없는 사회적 충격이 있다. 나의 예측 범위에서 그건 기술과 환경이었다. 코로나19가 닥치기 전까지는 그랬다.

 

마스크 쓴 100달러.jpg

 

전국민 재난지원금이 논의되고 지급되면서 그 누구도 원하지 않았던 팬데믹이라는 재난이 어쩌면 기본소득에 대한 진지한 논의를 촉발하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기대했던 시간이 있었다. 처음에는 기대대로 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대통령 선거를 4개월 앞둔 지금, 거대 양당의 대선 후보가 결정되고 그중 한 명은 적극적으로 기본소득 정책을 주장하고 있지만 현실은 실망스럽다. 기본소득을 국가 정책으로 선택할 것이냐를 떠나서 적어도 거대한 변화 앞에 선 우리가 스스로 삶을 지키기 위해 어떤 돌파구를 찾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사회적 차원의 깊이 있는 고민의 장이 열리길 바랐지만 현실은 우리가 지켜 보고 있는 바와 같다. 기성 언론과 상대 정당의 눈에 기본소득은 포퓰리스트 정치인의 상술에 불과하다. 심지어 같은 당내에서도 비슷한 기류가 읽힌다. 기본소득 정책에 반대하는 이들이 같은 고민을 바탕으로 한 더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길 기대하는 건 무리한 바람일까. 기본소득 정책이 반대하는 이들이 내놓는 대안은 고작 20세기 복지 정책을 답습하여 강화하는 수준이거나 오히려 역행하는 방식이다. 그조차도 제대로 된 토론과 논쟁은 찾아볼 수가 없다.

 

누군가가 이 위기를 애써 숨기려 하거나 혹은 위기 자체를 인지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면 이럴 수는 없다. 영화 속 다니엘 블레이크는 노인이고 심장질환이 있는 환자이면서 목수이지만, 머지않은 미래에는 최신 기기를 다룰 줄 아는 신체 건강한 젊은 사람 또한 다니엘 블레이크가 될 수 있다. 

 

일본아이와 로봇.jpg

 

- 기본소득으로 싸우자

 

다니엘 블레이크는 무능력자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자신의 무능력을 증명해야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런 다니엘은 무능력을 증명하기 위한 능력조차 없어 좌절했다.

무능력을 최선을 다해 증명하느라 서글펐다.

무능력을 온몸 바쳐 드러내고자 하는 다니엘과

그런 그를 부적격자로 심사하는 복지 시스템의 갈등은 사회적 비용을 발생시켰다.

이어지는 글에서 다양한 이야기를 다루겠지만

 

가장 핵심적인 가치는 인간의 존엄성이다.

 

이것은 단순히 복지 정책만의 문제가 아니다.

기본소득을 놓고 싸우는 세상이길 바란다. 기본소득이 이기지 못해도 좋다. 링의 한쪽에 기본소득을 세워 놓고 그 어떤 상대가 등장해도 좋겠다. 싸움의 펼쳐지는 링이 인간의 존엄성 위에 세워지기만 한다면 무엇이든 상관없다.

기본소득이라는 단어가 불편하다면 이렇게 바꾸어도 좋다.

‘앞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존엄성을 어떻게 지킬 수 있을 것인가’

 

※영화에서 다니엘 블레이크는 ADHD를 겪고 있는 케이티의 아들 딜런에게 ‘코코넛과 상어 중에 사람을 많이 죽이는 건 뭘까’라고 묻는다. 시간이 지난 후에 딜런은 정답을 말한다. 코코넛.

 

다니엘 블레이크는 인간을 공격하는 상어가 아니라 사람이 먹고 살아야 하는 코코넛에 맞아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