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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에게 도끼질을

 

대학 입학하고 뻔질나게 드나들던 술자리는 노래로 범벅이었다. 듣도보도 못한 민중가요들에 대중가요, 농악대나 탈패가 끼면 민요도 흘러나왔고 소개라도 할라치면 반드시라도 좋을 만큼 노래 한 곡을 하고 앉는 게 문화였다. 술 마시다 보면 좀 험악한 노가바 즉 노랫말 바꿔 부르기도 한 순배 돌았는데, 처음 들었을 때 영 찝찝했던 노래가 있었다.

 

“만약에 우리 집에 개XX가 대머리라면 대머리라면 ··· 도끼로 찍겠네.”

 

이 문제의 대머리가 일반적인 탈모 현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80년대 한국을 지배한 독재자 전두환을 의미하는 것임은 당연히 알았지만 그래도 불쾌했다. “그래도 지성인이라는 사람들이 도끼로 뭘 어쩌고... 쯧쯧” 

 

술이 좀 들어가고 서로 할 말 못할 말이 뒤섞여 튀어나올 즈음, 나는 한 친구에게 위의 소회를 털어놓았다. “그래도 좀 그렇지 않냐.” 그때 갑자기 친구의 억양이 강해졌다. 그는 광주 출신이었다. 그는 초등학교 4~5학년 무렵 겪었던 광주의 참상을 얘기하며 정작으로 피를 토했다.

 

계엄군에게 곤봉으로 구타당하고 있는 시민_출처 KBS.jpg

출처: <KBS>

 

“네 누나 가슴이 대검에 잘려서 전봇대에 걸린 걸 봤다고 생각해 봐. 대검으로 목이 잘리고 머리가 없어지고 임산부가 총 맞고 죽었는데 배 속의 애는 살아 꿈틀거리는 거 상상해 봐. 그런 짓을 저지른 새끼한테 도끼도 부드러운 거 아니냐.”

 

그날은 마지못한 사과로 넘어갔으나 요즘 말로 나의 ‘선비질’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했다. 필자가 눈에 쌍불을 켠 채 “도끼로 찍겠네.”를 소리 높여 노래 부르기까지는 그로부터 3주일도 걸리지 않았다. 

 

지금도 열변을 토하면서도 못다 한 말이 목울대에서 울컥거리는 표정으로 필자를 쳐다보던 친구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 후로도 그는 얼마나 많은 속이 뒤집히는 질문을 받았을까.

 

“사람들이 총을 드니 군인들이 쏜 거 아니야?”

“그러게 왜 군인한테 총을 들어?”

“다른 데는 조용했는데 왜 광주만 그랬을까? 광주 사람들이 좀 그런 거 아니야?”

 

그 질문들에 가슴이 무너져 내리면서 또 녀석은 얼마나 갑갑했을까. 마음 속으로라도 전두환에게 도끼질을 퍼부어야 했을까. 

 

하고픈 말을 입 막혀 할 수 없고 차마 듣지 못할 말을 일삼아 듣는 것만큼 괴로운 일도 없다. 불려 말하면 일종의 지옥이겠다. 80년대 내내 전두환은 그런 지옥을 수백만 개, 수천만 개 만들었던 악마였다. 그 지옥의 입구에서 밤 9시만 되면 나타나 땡전 뉴스를 시전하여 사람들의 복장을 터지게 했던 빌런이었다. 노래 가사로라도 도끼로 찍고 싶었던 살인자였다. 이 악마가 만든 지옥을 깨기 위해 수많은 이들이 목숨을 걸었다. 또는 던졌다. 또는..... 잃었다. 

 

전두환 사진.jpg

출처: <한겨레>

 

78학번 김태훈

 

지금으로부터 40년 전 1981년 5월 27일. 그로부터 1년 전 광주의 불꽃이 마지막으로 타올랐던 날, 소수의 학생들은 암흑을 뚫고 분노의 성냥불을 그어 올렸다. 그러나 경찰의 군홧발은 더욱 빨랐다. 시위는 금세 진압됐고 끌려가는 학생들에게 무자비한 구타가 이어졌다. 

 

그때 서울대 도서관 6층에 앉아 있던 한 학생이 벌떡 일어났다. 78학번 김태훈. 그는 운동권도 아니었고 그날의 데모에 관여한 사람도 아니었다. 언론사 사회부장부터 의사, 판사가 즐비한 그야말로 남부럽지 않은 9남매 대가족의 여덟째였다. 그 자신은 신학도의 길을 진지하게 고민했던 사람이다. 가족들을 끔찍이 아끼는 사람으로서 어머니에게 걱정 끼칠 데모 같은 것에 발을 디민 적은 거의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창밖에서 일어나는 일을 들었고, 그 전해 고향 광주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를 알았다. 어려운 사람을 보면 서둘러 손을 내밀었고 양보는 "너 바보냐" 소리 들을 정도로 기가 막히게 잘했다는 이 착한 청년은 분노와 망설임, 절로 쥐어지는 주먹과 떼지지 않는 발 사이에서 방황하면서 스스로 불덩이가 돼 갔다.

 

마침내 그의 눈동자에 불이 일면서 그의 목구멍에서도 화산 같은, 그러나 너무나 짧은, 그래서 더 절박한 구호가 터져 나왔다. “전두환 물러가라.” 더 할 말도 없었다. “전두환 물러가라.” 그리고 그는 세상에 마지막 말을 남긴다. 다음과 같은 말이었다.

 

“전두화아안. 물러가라아아.” 

 

그리고 김태훈은 창문을 향해 돌진해서 그대로 투신했다. 얼마나 갑갑했을까. 밖에서 들리는 데모 소리도 안타까웠겠지만 그런 소리 있든 없든 책만 파고 있는 친구들 사이에서, 자기 고향 광주 사람들이 어떻게 죽어갔는지 알고 싶어 하지도, 관심을 두지도 않는 서울의 대학생들 틈에서, 분노를 장작으로 자신의 속을 새까맣게 태운 한 청년은 그렇게 사위어갔다. 6층에서 떨어져 피 흘리며 죽어가는 그 위로 전두환의 경찰은 최루탄을 쏴댔다. 그 몸이 최루탄 가루로 하얗게 뒤덮이도록. 전두환은 그런 놈이었다. 

 

김태훈 약력.jpg

 

다음날 형이 기자로 있던 동아일보 사회면 한 귀퉁이에 김태훈의 투신 기사가 실렸다. 그런데 그 옆에는 경기도 광주에 출몰한 곰 뉴스가 다섯 배 큰 기사로, 불곰 같은 덩치로 버티고 있었다. 경찰의 성급한 총탄에 목숨을 잃은 곰에 대한 애도는 김태훈의 기사에서는 한 줄도 비치지 않았다. 어쩌면 신문에 난 자체가 다행이었는지도 모른다. 전두환의 시대에는 그 ‘따위’ 뉴스는 신문과 방송 모두에서 추방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이 전두환과 그 졸개들에게 있었다. 

 

절대로 잊지 않겠다

 

전두환의 죽음을 들으면서 처음 든 생각은 저 인간이 끝내 고이 죽었네 하는 것이었다. 누가 때려죽이지는 못하더라도 그 몸뚱이에 처절한 고통을 받고 죽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했다. 그만큼 미웠다. 내 생애 나와 관계없는 사람이 이토록 미운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그건 그 사람 때문에 죽어간 사람들이 생각나서였다. 

 

광주의 사람들, 광주항쟁이 진압되고 계엄령 서슬 푸르렀던 그해 5월, 광주의 진실을 알리겠다고 하다가 죽어간 김의기, 김종태, 시위 도중 추락한 황정하, 강제 징집됐다가 돌아오지 못한 김두황, 최온순 등, 삼청교육대에서 어떻게 죽었는지도 모르게 죽어간 사람들, 박종철, 이한열······. 헤아리다가 손을 떨어뜨리고 하늘을 보게 되는 그 수많은 사람들 말이다. 

 

영화 암살 조승우 사진.jpeg

출처: 영화 <암살>

 

영화 <암살>에서 죽어간 독립운동가들을 위한 불을 밝히며 조승우(김원봉 역)가 말한다. “너무 많이 죽었어요. 어차피 다 잊혀지겠죠? 미안합니다.” 전두환의 죽음 앞에서, 그의 세상을 두고 “정치는 잘했다.”라고 뇌까리는 이가 대통령 자리에 가까이 다가선 지금, 저 말이 귀에 어른거리지만 어금니를 갈아붙이며 말해 본다. 

 

“너무 많이 죽었다. 그리고 너무 미안하다. 결국 이 지경을 만든 건 우리일 테니까. 하지만 잊지 않겠다. 절대로 잊지는 않겠다. 전두환도... 그리고 전두환이 죽인, 전두환과 싸우다 스러져간 여러분들도.” 

 

 

 

추신: 전두환이 죽인 가장 어린 희생자 중 한 명의 이야기는 아래를 참고해 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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