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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전두환을 향한 역쿠데타를 저지하다

 

12·12 군사반란으로 전두환과 신군부 세력은 정권을 잡았다. 하지만 12·12 이후에도 군부 내 반대 세력은 적지 않았다. 장성 30여 명은 1980년 상반기에 역쿠데타를 모의하고 있었다. 전두환도 군내 불안한 움직임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누구인지 정확히 알 순 없었다. 

 

최근까지도 역쿠데타 주모자의 정체는 불분명했었다. 그만큼 역쿠데타 계획은 은밀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지난 9월 미국 기밀문서가 해제되면서나 역쿠데타를 주도한 장군이 이범준 중장(육사 8기, 전두환은 11기)이라는 사실이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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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2월, 박정희와 이범준(검은 뿔테안경). 

 

미국은 역쿠데타 소문이 들려오자 발 빠르게 움직였다. 글라이스틴 당시 주한 미 대사는 미국 본국에 ‘역쿠데타 측에 대한 경고’ 승인을 요청했다. “다른 장교들이 12월 12일에 벌어진 일을 되돌리려고 노력하는 것 역시 그만큼 위험하다고 믿는다”는 내용이었다. 결국 이 요청은 승인되었고, 미국에 의해 역쿠데타는 좌절되었다. 1980년 2월 1일의 일이었다. 이범준 중장은 1980년 2월에 예편했다.

 

어디서 자신을 겨냥한 총알이 날아올지 모르는 상황은 12·12 이후 전두환을 늘 괴롭혔다. 1979년 12월 14일, 전두환은 글라이스틴 대사를 만나 

 

“이번 사건(12·12)은 쿠데타나 혁명이 아니라 박정희 대통령 피살에 대한 조사를 마무리하려는 노력이며, 전혀 계획된 바 없던 일이었다.”

 

“저는 개인적 야심이 없으며, 최규하 대통령의 자유화 정책을 지지한다.”

 

며 알랑방귀를 뀌었다. 또한 군부 내 반대 세력이 역쿠데타를 하려는 것을 우려했다. 

 

미국은 결국 1980년 2월, 역쿠데타 세력을 저지하면서 전두환의 손을 들어줬다. 그제서야 전두환은 역쿠데타나 암살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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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과 글라이스틴.

 

 

광주민주화운동과 진압을 승인한 미국

  

전두환과 신군부 세력은 1980년 5월 17일 ‘2차 쿠데타’를 일으켰다. 국무회의장을 사실상 무력으로 포위한 상태에서 전국적으로 계엄령을 확대한 것이다. 그리고 다음 날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났다. 이를 진압하기 위해 전두환은 미국의 승인을 거쳐야 했다. 

 

미국은 일단 20사단 일부 병력의 이동을 승인한 후, 1980년 5월 22일 백악관 회의에서 다음과 같이 결정한다.

 

“최우선 과제는 계엄 당국이 차후 혼란의 씨가 되지 않도록 최소한의 무력을 행사해 광주의 질서를 회복하는 일이다. 질서가 회복된 후에는 차후 정치적 자유 신장을 위해 한국 정부와 특히 군부에 압력을 가해야 한다.” 

 

일단 이번까지는 전두환을 밀어주고, 전두환이 안정적으로 권력을 장악하면 전두환에게 압력을 행사해 한국의 자유를 증진시키겠다는 것이다. 미국은 항공모함과 전투기 편대, 2대의 공중경보통제기를 한국에 보냈다. 광주 시민들은 그들을 도우러 오는 것이라 생각했지만 안타깝게도 반대였다. 

 

광주를 피로 물들이고, 대통령에 취임한 전두환, 하지만 늘 그렇듯 권력을 쟁취하는 것보다 권력을 유지하는 것이 더 어려운 법이다. 

 

특히 전두환은 박정희와 달리 최소한의 국민적인 지지나 여론조차 업지 못하고 오로지 군부의 힘으로만 권력을 장악했다. 그만큼 권력 기반이 취약했다. 그리고 이제 미국은 만만한 전두환을 상대로 투자에 대한 성과를 받아낼 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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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이 시민들을 진압하는 모습. 

출처-<5·18기념재단>

 

 

미국의 압박과 국방을 후퇴시킨 전두환

 

미국은 최소한의 정당성조차 확보하지 못했던 전두환의 집권을 용인해줬다. 그리고 그에 대한 명세서는 비쌌다. 1980년 미국은 박정희 정권의 핵 개발과 자주국방을 뿌리 뽑기 위해 전두환에게 압력을 가했다. 

 

한국원자력연구소는 한국핵연료개발공단과 통폐합된 후 ‘한국에너지연구소’로 변경되었다. “풀뿌리를 캐 먹더라도 핵을 가져야 한다”는 박정희의 의지는 박정희에게 충성했던 이들에 의해 산산이 사라졌다. 

 

이후 미국은 플루토늄 단 몇 mg이라도 확인되면 강력한 핵 사찰을 하는 등 한국의 핵 개발에 대해 눈에 불을 켜고 감시했다. 그리고 국방과학연구소 연구인력의 70%가 넘는 1400명이 해고당했다. 학자들은 이로 인해 자주국방이 근 10년은 후퇴했다고 평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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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경제수석 김재익과 전두환.

 

표면적으로는 전두환의 ‘경제 스승’ 김재익이 방위산업 과잉투자를 비판했고, 전두환은 직접 ‘과학자 숙청’을 지시했다. 하지만 이는 미국의 압력이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박정희 정권 말기부터 미국이 끊임없이 한국의 자주국방에 비토를 놓았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결국, 미국의 압력에 박정희는 1979년 피살 직전 한미 미사일협정을 통해 미사일 사거리 제한을 180킬로미터로 제한했다. 이는 42년 만인 2021년 문재인 대통령에 의해 폐기되었다)  

 

청와대 직제에서도 방산을 담당하던 경제2수석 자리를 폐지한 것을 볼 때, 국방과학자 숙청은 미국과 합의된 사항으로 보여진다. 미국은 한국의 방위 우려에 대해서 F-16 전투기를 판매하고, 전술핵을 여전히 한국에 배치하며, 주한미군을 빼지 않겠다는 말로 전두환을 안심시켰다.

 

김대중에 대해서도 미국의 뜻에 따랐다. 애초 사형을 선고했으나 1981년 1월 23일 무기징역으로 감형했다. 그리고 1981년 1월 28일, 전두환은 미국 레이건 대통령의 초청 형식을 빌려 미국을 방문했다. 전두환 정권이 미국에 완전히 승인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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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과 레이건.

 

 

미국이 전두환에 민주화 압력을 가한 이유

 

이후에도 미국은 전두환에게 자유화 조치를 계속 요구했다. 미국은 전두환을 승인했지만, 미국으로 인해 군부독재가 지속되었다는 오명을 피하고 싶었다. 국제사회의 눈치도 있었고, 언젠가 한국에도 민주 정부가 들어설 건데, 그때 ‘반미정부’가 들어선다면 난감해지는 것이었다. 미국은 그렇게 전두환에게 압력을 가해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노력했다는 근거를 남기고자 하였다. 

 

1981년 1월 24일(김대중 감형 다음 날) 전국 계엄 조치가 해제되었고, 이후 야간통행금지도 해제되었다. 1983년 ‘유화 조치’로 인해 정치 규제자 일부 해금, 학생운동 제적생 복교, 학원 상주 경찰의 철수, 해직교수 복직, 시위주도 학생 구속 유보 등이 이뤄졌다. 이후에도 학생자치조직(학생회) 부활, 교복자율화 등이 이어졌다. 

 

경제적인 면에서도 명세서는 이어졌다. 미국은 한국의 수입 폐쇄조치를 비판하고 32개 품목에 대한 수입개방을 요구했다. 이에 1984년 11월 17일 일부 품목에 대한 개방을 수용했다. 이후에도 미국은 농산물 시장 개방과(이미 그 당시부터 지겹도록 들어온 쌀 시장 개방 요구도 시작되었다) 원화절상 등을 요구했고, 전두환은 일부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전두환은 ‘방구석 여포’에 불과했을 뿐이었다 

 

미국은 한국에 민주주의가 성숙하는 모습을 국제사회에 보여주고 싶었다. 게다가 올림픽도 앞두고 있었다. 그런데 전두환의 1987년 4월 13일 호헌조치 발표는 미국의 의도와 완전히 어긋나는 것이었다. 

 

미국 국무부는 즉시 ‘개헌논의 중단에 유감을 표한다’고 했으며, 5월 12일 미 상원 외교위에서는 ‘4.13조치 재고 결의안’이 통과되었다. 하지만 전두환은 꿈쩍 않았다. 만약 직선제로 김대중이나 김영삼이 권력을 잡으면 자신의 신변을 장담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6월 항쟁이 일어나자 미국 국무부는 대화와 타협을 촉구했다. 이어 6월 18일 미 하원 외교위 아시아태평양 소위에서 대화 재개를 촉구하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하지만 전두환은 완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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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월 18일 부산 서면에서 ‘독재타도’ ‘호헌철폐’를 외치는 시민들.

출처-<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군 출동을 통해 전국의 시위를 막겠다는 구상을 밀어붙였다. 결국 레이건이 직접 나섰다. 6월 19일 릴리 주한 미국대사는 레이건 대통령의 친서를 가지고 청와대를 방문했다. 90분간 이어진 두 사람의 면담에서 만약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군이 출동한다면 한미동맹은 치명적인 타격이 있을 것이라고 재차 삼차 강조했다. 

 

전두환은 이 자리에서 릴리 대사에게 군을 출동시키지 않겠다고 사실상 굴복 선언을 한 것으로 보인다. 릴리 대사는 전두환과의 면담 직후 “계엄을 선포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최광수 외무장관에게 연락했다.

 

전두환은 노태우를 찾았다. 노태우에게 넌지시 직선제를 권했지만, 노태우는 처음엔 반대했다가 결국 직선제를 수용하기로(딴지 기사 ‘노태우에게는 여섯 번의 선택이 있었다’ 링크) 했다. 

 

전두환은 이렇게 국내에서는 막강한 힘을 휘두르는 것처럼 보였지만, 미국이나 국제사회가 볼 때는 정당성과 명분이 1도 없는 저기 아프리카 어느 나라에나 있을 법한 군부 독재자에 불과했다. 따라서 전두환은 항상 미국의 인정에 목말랐고, 그 대가를 치르는 방법으로 정권을 유지해나갔다. 

 

항상 배에 힘을 주고 낮은 목소리와 거만한 눈으로 국민에 군림했던 그는 실상 ‘방구석 여포’에 불과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