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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이란 인물의 인생이 바뀐 날은 언제일까. 그가 보결로 육군 사관학교에 입학하던 순간? 5.16 쿠데타 당시 육군 사관학교 학생들을 동원해 퍼레이드를 강행했던 순간? 아니면, 윤필용 사건 때 하나회의 전모가 드러났던 순간? 이도 저도 아니라면, 그가 권력을 잡던 순간인 1979년 12월 12일? 사람마다 생각은 다르겠으나 나는 전두환의 인생이 뒤바뀐 순간은 1958년 1월 24일이라고 생각한다. 

 

가난한 집안의 4남으로 태어나 가진 것 없이 육사를 들어간 전두환. 그는 '주위로부터' 의리 있고, 주먹 세고, 리더십이 강하다는 평을 듣는다. 그러나 '주위에서만'. 딱 거기까지인 인물이었다. 만약 그가 1958년 1월 24일의 일이 없었다면, “적당히 살다가 어디 공기업 사장으로 예편했을 팔자” 라는 생각으로 살았을 것이리라 본다. 만약 그랬다면, 역사에서 12.12나 5.18은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렇다. 1958년 1월 24일은 전두환과 이순자가 결혼한 날이다.  

 

1981년 3월 제12대 대통령 취임식장 전두환 이순자 사진_출처 한국일보.jpg

대통령 취임식장 (출처 - <한국일보>)

 

 

박정희와 같은 육사 2기, 이규동 

1951년 미국 웨스트포인트를 모방해서 만든 한국의 육군사관학교. 웨스트포인트처럼 4년제 육사를 만든다는 것 자체가 당시로서는 모험이었다. 전쟁이 한창이던 시절, 4년을 기다리며 장교를 육성하겠다? 당시로서는 대단한 투자였다. 

 

한국 육군사관학교 탄생의 뒤에는 당시 미8군 사령관이 있었다. 밴 플리트 장군의 지원이 결정적이었다. 그는 한국군의 발전을 위해 웨스트포인트와 같이 장교를 육성할 학교가 필요하다고 믿었고, 미 육사에서 교관으로 근무한 경력이 있는 맥 킨니(McKinney) 대령에게 이 임무를 맡겼다. 

 

그 혜택을 본 인물이 육사 11기 전두환이다("정규 육사" 첫 기수가 전두환이다). 우여곡절 끝에 1951년 경남 진해에서 4년제 육사가 문을 열었다. 이때 들어온 11기 중에 전두환이 있었는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게 당시 육군사관학교 참모장으로 있었던 이규동(李圭東) 장군이다. 

 

이규동 장군은 육사에 있으면서 축구부 주장을 하던 전두환을 눈여겨봤다고 한다. 자, 그럼 이규동은 누굴까? 이 사람, 이력이 화려(?)하다. 1911년생으로(공교롭게도 이 분도 90세에 유명을 달리한다. 전두환처럼) 경북 고령 출신인데, 일제강점기 시절 만주군 경리관으로 활약한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이 생각날 거다. 우리가 생각하는 그 사람. 그렇다. 박정희와도 인연이 깊은 인물이다. 이규동은 박정희와 같은 육사 2기 출신이다(박정희보다 6살이나 나이가 많지만, 같이 동기 먹었다. 뭐 같은 만주군 출신이니까...).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하는 게 육사 2기의 ‘힘’이다. 

 

“쪽수에 당할 사람 없다.”

 

육사 1기가 겨우 40명이었던 것에 반해 육사 2기는 총 263명이 입교해 196명이 소위로 임관했다. 이들 중 40명이 6.25 한국 전쟁 중에 전사하거나 실종됐지만, 살아남은 156명 중 79명이 별을 다는 그야말로 ‘별들의 기수’가 육사 2기이다. 

 

이규동 집안은 그 혼자로 끝나지 않았다. 그의 동생인 이규승(李圭昇)은 육사 7기 출신으로 육군 대령으로 예편했다(이규승은 간도특설대 출신이라는 논란이 있는 인물이다). 그 아래 동생인 이규광(李圭光)도 육사 3기로 준장으로 예편했다. 보면 알겠지만 군인 집안이다. 

 

일제강점기 시절부터 대한민국이 기틀을 다지던 시기, 나름 ‘야망’이 있었던 집안이다. 이규동의 동생 이규광은 나중에, 그러니까 5.16 쿠데타 직후인 1963년에 쿠데타 음모 사건에 연루돼 사형 선고까지 받았다.

 

(결국 징역 15년으로 형이 확정됐지만, 2년 뒤에 췌장염으로 형집행정지, 그냥 풀려났다. 이게 웃기는데, 1963년 3월에 박정희는 자기랑 같이 ‘혁명’을 했던 김동하를 제거하게 된다. 만주군관학교 1년 선배였던 김동하를 비롯한 만주군관학교 출신들을 1차로 제거한다. 툭 까놓고 말해서 박정희가 권력을 잡기 위해서 얼굴마담으로 내세웠던 '장도영'계... 즉, 평안도 출신 그룹과 김동하, 박임항으로 대표되는 함경도 계열을 다 숙청한 것이다. 여기에 이규광도 끼어있었던 거다)

 

장도영과 박정희_출처 정부기록사진집.jpg

장도영과 박정희 (출처 - <정부기록 사진집>)

 

전두환은 이런 대단한 인맥의 한 가운데로 뛰어든 거다. 

 

어떻게? 

 

여고생 이순자와 중위 전두환  

1955년 전두환은 육사를 졸업하게 된다. 여기서 주목해 봐야 하는 게 육사 시절 전두환과 이순자의 관계이다. 80년대 여성지 속 둘의 연애담은 이러했다.

 

“전두환이 여고생이었던 이순자에게 민족과 국가에 대한 생각을 말했다.”

 

개소리다(실제로 정말 그랬다면 할 말이 없지만). 까놓고 말해서 이 당시 전두환은 이규동 장군의 관사를 들락거렸고, 이때 이순자는 중학생이었다. 당연히 이순자가 전두환에게 했던 호칭은, “아저씨”였다(8살 차이다). 전두환이 28살, 이순자가 20살이었을 때 둘은 결혼을 하게 된다. 

 

전두환과 이순자의 인연은 전두환이 육사 3학년 때부터였다. 이때 이순자가 진해여중 2학년이었다. 이때만 해도 그냥저냥 나이 많은 아저씨와 꼬맹이였다. 그러다 전두환이 막 중위를 달았을 무렵 다시 만나게 된다. 이때 이순자가 경기여고 3학년이었다. 이 무렵 전두환은 탈모전으로 좀 ‘생겼다’는 것과 운동 잘하는 것 빼고는 내세울 게 없는 가난한 집안 아들이었는데, 이순자는 당시 이화여대 의과대학을 갈 정도로 똑똑했다. 그런 그녀가 ‘전두환’에게 인생을 걸었던 거다. 아버지를 비롯한 친정의 ‘힘’을 생각한다면 파격적인 투자였다. 이순자는 이화여대 의대를 포기하고 덤벼들 정도로 전두환에게 푹 빠져있었고 이는 결혼으로 이어진다. 

 

이순자_출처 미국 국방부.jpg

이순자 (출처 - <미국 국방부>)

 

전두환과 박정희의 첫 인연

결혼과 동시에 이규동은 사위를 위해 자신들의 인맥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1959년 7월 박정희가 제6관구 사령관에 부임하게 된다. 제6관구 사령관은 당시 서울 지역을 관할하던 부대로 오늘날로 치면 수도방위사령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때 이규동은 사위인 전두환을 6관구 사령부가 있던 영등포로 부른다. 그리고 이곳에서 박정희를 소개한다. 

 

“이 녀석이 내 사위야.”

“아, 그래?”

 

박정희는 전두환을 유심히 살펴보더니 대뜸, 

 

“자네, 내 전속부관을 하게.”

 

라고 말했다. 전두환은 이 자리에서 넙죽 전속부관 자리를 받지 않고, 완곡히 거부의 의사를 밝힌다. 박정희는 이를 더 강요하지 않았다. 

 

많은 이들이 박정희와 전두환의 인연을 5.16 쿠데타 직후의 육사 퍼레이드부터 시작된 걸로 아는데 그 이전부터 박정희와 전두환은 인연을 맺고 있었다. 자, 다시 결혼했을 무렵의 전두환으로 돌아가보자. 

 

전두환의 월급은 어디로 갔는가 

전두환은 결혼 직후 처가에 들어갔다. 즉, 이규동 장군 집에 들어가 처가살이를 시작한 거다. 그렇게 11년을 처가살이를 하게 된다. 전두환은 돈이 없었다. 이규동 장군은 전두환에게 팁을 덧붙였다.

 

생활비는 우리 먹는 거에 숟가락 몇 개 더 얹으면 된다. 네 월급은 이제부터 밖에 나가서 동기들, 후배들 만날 때 써라.”

 

이규동은 군의 생리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하나회의 관리와 주변인들의 인맥 관리를 위해 돈을 쓰라는 거였다. 전두환은 장인의 말을 철저히 따랐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장인인 이규동이 1988년 10월10일 국회 국정감사 증인으로 출석하고 있다 _ 출처 연합뉴스.jpg

이규동 1988년 10월 10일 국회 증인참석 때 모습 (출처 - <연합뉴스>)

 

그가 대통령이 되고 나서 농담처럼 던진 말, 

 

“내가 잘난 게 뭐 있어. 부하들 잘해 주다 보니 대통령까지 됐지.”

 

를 잘 생각해 봐야 한다. 그는 결혼하고 나서 중령이 될 때까지 자기가 가진 돈을 털어서 술값과 회식비를 댔다. 

 

(당시 부대 부식비나 기름을 빼돌려 돈을 만드는 걸 한심하게 여겼던 게 전두환이었다. 그는 자질구레하게 먹는 것보다 크게 한 방을 노리는 타입이었던 듯하다. 결국 그는 나라를 집어삼키지 않았던가)

 

장군들과 어울릴 수 있는 계급이 되자 부대 회식을 할 때쯤이면 친분이 있는 장군들을 술자리로 불렀다. 그리고 장군들의 지갑을 뺏어서 부하들에게 돈을 나눠주는 짓을 했다. 원래부터 넉살이 좋았던 그는 그런 식으로 주변의 인심을 잡아갔던 거다. 

 

그럼 집안 생계유지는? 이순자가 다 해결했다. 전두환이 군에서 인맥 넓히기에 목숨 걸던 시절, 이순자는 가정 살림을 책임졌다. 전두환이 중령 시절, 그녀가 미용사 자격증을 따 부업으로 미용실을 했다는 이야기가 두고두고 회자되는 이유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가정은 언제든 재미있는 법이다. 전두환과 이순자가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그의 장인이 이규동이 아니었더라면, 해서 11년 처가살이도 하지 않고 박정희와도 만나지 않았더라면, 한국 역사에 존재하지 말았어야 할 많은 일들이 사라졌을지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