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12월 12일 운명의 밤이 지나갔다. 그리고 이틀 뒤인 1979년 12월 14일, 정오 보안사 참모 식당에 모였다. 그리고 샴페인을 터트렸다. 모두 34명이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12.12 자축사진이다.
전두환이 남긴 영상을 보면, 유독 ‘파티’ 영상이 많다. 그리고 술을 많이 건넸다. 심지어 자신의 전용기 기장에게까지 술을 건넨다.
12.12 사태 직후에 보안사 과장급 이상의 가족들을 불러서 파티도 열었다.
그는 월급을 털어서 부하들에게 술을 샀고, 장군들의 지갑을 털어서 부하들에게 ‘용돈’을 건네준 인물(국방브리핑 46편: 전두환의 인생이 바뀐 날은 언제일까 참고-링크)이다. 그에게 권력이란 술자리의 친목에서 시작됐다는 ‘경험칙’이 있었다. 그는 유달리 ‘파티’를 많이 열었다.
파티피플, 세조와 전두환
그런 전두환를 보면서 늘 떠오르는 인물이 바로 세조다
임금이 창덕궁(昌德宮)에 거둥하여 노산군(魯山君)을 알현(謁見)하였다. 개국(開國)·정사(定社)·좌명(佐命)·정난(靖難)의 4공신(四功臣) 등이 맹족(盟簇 : 동맹을 맺고 그 명단을 적은 족자)을 임금 및 노산군에게 바치니, 임금이 공신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명하고는 이어서 잔치를 베푸니, (중략) 양녕 대군 이제(李禔)는 비파(琵琶)를 잡고, 권공(權恭)이 징[錚]을 잡았다. 이리하여 여러 공신이 차례로 일어나서 춤을 추었다. 음악이 장차 마치려고 할 때, 임금도 역시 일어나 춤을 추었다. (하략)
- 조선왕조실록 세조 1년(1455년) 8월 16일의 기록 중 발췌
세조는 파티를 많이 연 인물이었다. 여러모로 보아 전두환과 세조는 비슷한 구석이 많다. 세조 역시 몇 안 되는 동네 날건달들을 모아서 김종서를 제거했고, 그 여세를 몰아 정권을 장악했다. 5.16 쿠데타는 직접적으로 군대를 동원해 밀고 들어간 ‘쿠데타’ 느낌이 나는 쿠데타 였다면, 12.12는 정승화를 체포하는 순간 반은 먹고 들어간, 그러니까 김종서를 치고 나서 손쉽게 권력을 장악한 수양대군의 느낌과 비슷했다.
수양대군은 자신의 권력 기반이 되는 공신들과의 ‘술자리’를 특히나 즐겼다. 아니, 이건 생존을 위한 자구책이었을지도 모른다. 명분 없는 쿠데타, 기반 없는 권력 앞에서 세조는 자신의 집권 기반인 공신들과의 유대관계를 돈독히 해야겠다는 강박이 있었던 듯하다. 그는 유달리 술자릴 많이 가졌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술자리’에 관계된 기사가 974건이 나오는데 이중 절반 가까이 되는 467건이 세조 시절에 있었다.
세조는 자신의 경호원이라 할 수 있는 내금위(內禁衛) 인원들에게까지 살뜰히 술을 챙겨줄 정도로 술에 대해서는 관대했다. 아니, 관대한 게 아니라 술로 주변을 포섭했다. 그는 세세하게 공신들을 챙겼고, 또 의심했다.
이러다 보니 술을 잘 마시는 경우와 그렇게 못한 경우 때문에 생기는 ‘불상사’도 많았다. 술을 잘 마셔서 행운이 찾아온 경우는,
(상략) 이때에 어효첨이 침취(沈醉)하였는데도 대답에 실수하는 말을 하지 않으니, 임금이 말하기를,
"어효첨은 참으로 낙지군자(樂只君子 : 도를 즐기는 군자) 이다. 내가 본시 그 사람됨을 아니, 판서(判書)를 삼아 쓸 만하다."
하고, 인하여 어효첨에게 이르기를,
"너를 판서(判書)로 삼겠다."
하니, 어효첨이 즉시 배사(拜辭)하였다. 임금이 묻기를,
"어느 조(曹)를 하려 하느냐?"
하니, 어효첨이 아뢰기를,
"명하여 신(臣)을 판서(判書)로 삼으시면, 명(命)에 복종함이 마땅하지, 인신(人臣)이 어찌 자점(自占)하는 이치가 있겠습니까?"
하고, 머리를 흔들고 눈을 감아 말을 하지 않으니, 임금이 크게 웃으며 말하기를,
"박원형(朴元亨)을 대신하여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삼음이 가하겠다."
- 조선왕조실록 세조9년(1463년) 3월 10일의 기록 중 발췌
술에 취하도록 마셨는데도 실수를 하지 않는 모습이 좋아서 장관 자리를 내놓은 거다.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상략) "성상께서 어찌 과도하게 근로(勤勞)하기를 이와 같이 하십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군주(君主)는 만기(萬機)를 모두 다스리고 있으니, 어찌 근심하고 부지런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하였다. 양정이 대답하기를,
"전하(殿下)께서 임어(臨御)하신 지가 이미 오래되었으니, 오로지 한가하게 안일(安逸)하심이 마땅할 것입니다."
- 조선왕조실록 세조 12년(1466년) 6월 8일의 기록 중 발췌
양정이 누군가? 계유정난 당시 김종서 제거의 선봉에 섰던 공신 중의 공신이었다. 그러나 이 공신이 술자리에서 ‘그동안 고생 많았으니 이제 전하도 쉴 때 되지 않았습니까?’라고 말한 거다. 이 때문에 양정은 그 목숨을 잃게 된다.
재미난 건 전두환 역시 비슷했다는 거다. 노태우가 평생 전두환 곁에 있다가 대통령 자리까지 올라갈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술’ 때문이었다. 전두환이 노태우를 좋아했던 이유 중 하나가,
“노태우는 술 먹고 실수를 하지 않아. 참 맘에 든단 말야.”
어이없지만 그런 이유가 있었다.
술을 아는 형님? 전두환 & 윤석열
전두환은 육사 시절에 공부와는 거리가 멀었다. 육사도 보결로 입학했고, 학과도 쫓아가기 힘들었다. 전두환은 12시 이후에 판초우의를 뒤집어쓰고 손전등으로 공부를 쫓아갔지만...공부머리는 힘들었던가 보다. 졸업등수도 156명 중 126등이었다(노태우는 67등). 하나회에서 실질적으로 두각을 나타낸 건 손영길과 김복동이었다.
전두환 이전에 권력과 가장 가까웠던 건 손영길이었다. 셋 다 같은 11기였는데, 손영길이 30대대장(청와대 외곽을 경비하던 수경사 30대대. 권력의 가장 큰 핵심이었다)을 먼저 했었다. 이 당시 육영수가 손영길을 살뜰히 챙겼고, 박정희도 손영길을 아꼈다. 그런데 손영길이 육군대학으로 가게 될 때 물망에 오른 전두환 중령, 김복동 중령 중에서 전두환을 밀었다. 이게 운명의 갈림길이 됐다.
툭 까놓고 말하겠다. 육사 11기 중에서 만약 대통령이 될 만한 인물이 나와야 했다면, 그러니까 권력에 가장 가까웠던 인물이 누구냐면... 1970년 당시에는 손영길이었다. 전두환? 김복동? 글쎄, 야망은 있을지 모르겠지만, 핵심은 손영길이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하나회를 만든 것도 손영길이었다. 뒤이어 박정희가 5.16 쿠데타를 일으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됐을 때 전속부관으로 2년 반을 쫓아갔던 게 손영길이었다. 이후에는 청와대를 경비하던 30대대장을 맡은 것 또한 그였다. 그러다가 당시 권력의 핵심이자, 박정희의 오른팔이었던 윤필용에게 간다. 윤필용이 수도경비사령부 사령관이 됐을 때 그 참모장이 손영길이었다. 정말 실세 중의 실세인 셈이다.
즉, 11기의 에이스는 전두환이 아니라 손영길. 그러나 1973년 윤필용 사건(양정이 세조보고 물러나라 한 것과 똑같은)이 터진 거다. 윤필용이,
“각하께서 연로하시니 이후를 생각해야 한다. 형님이 후계자가 되어야 한다.”
라고 이후락에게 말했다가 쿠데타로 몰리게 된다. 손영길도 참모장이었기에 세트로 묶여 나가게 된다. 당시 손영길은 전두환이 자신을 올가미에 몰아넣었다 주장했다(하나회는 숙청당할 뻔했는데, 살아남아서 계속 승승장구했고 자신은 이렇게 됐으니 말이다).
1973년 3월 당시 윤필용 수도경비사련과
손영길 수도경비사령부 참모장(앞중 오른쪽부터) 등
군인들이 쿠데타 모의 혐의로 군사재판을 받고 있다(출처 - <경향신문>)
전두환의 라이벌이라 할 수 있었던 인물들이 하나둘 제거되기 시작했는데, 이는 따지고 보면 전두환의 인맥 관리 승리라고 할 수 있다. 전두환이 하나회 회장을 하던 시절, 육사 총동창회인 북극성회의 회장도 같이하고 있었다. 이때 같은 하나회이자 나름 야심 있었던 김복동이 덤벼든 거다. 북극성회 회장 자리에 도전했지만, 하나회를 배경으로 차근차근 인맥과 술로 밀어붙인 전두환에게 다시 밀린 거다.
김복동 전 육군 중장 (출처 - <오마이뉴스>)
김복동이 하나회 출신 중에서 나름 먹어줬던 게 전두환이 ‘몸’으로 움직이는 인물이었다면, 김복동은 ‘머리’로 인정받은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11기 156명 중 13등을 한 게 김복동이었다. 하나회 중 가장 똑똑했다. 이 덕분인지 나중에 육군사관학교장 자리에까지 오른다. 얼마 전 윤석열이 전두환에 대해 ‘평가’했던 적이 있는데, 나는 그 말을 들었을 때
“아...역시 살아온 궤적이 그 사람의 성향을 만드는구나!”
라며 고개를 끄덕거렸던 적이 있다. 윤석열은 사시 9수를 했고, 그 결과 동기들과의 접촉면이 달랐다. 8~10살 차이가 나는 상황에서 윤석열이 자기 정체성을 찾는 방법은 하나였다.
“큰형님”
전두환도 마찬가지였다. 전두환은 1931년생으로 11기 동기들에게는 ‘형님’이었다. 친구인 정호용, 노태우는 1932년생이다. 그런데 김복동은 1933년생이다. 전두환은 자기 나이가 많은 걸로 은근히 자기가 11기 중 선두이며 ‘큰형님’ 노릇을 해야 한다는 정당성을 밀어붙였다. 사석에서 전두환보고,
“형”
이라고 말하던 11기생이 꽤 있었다. 33년생 동기들의 경우는 십중팔구 그를 형이라 불렀다. 그런데, 김복동은 절대 그를 형이라 부르지 않았다. 그는 하나회 중에서 가장 똑똑하고, 군번도 빨랐다. 이걸 가지고 스스로
“11기의 선두는 나다.”
란 자존심이 있었다. 그의 마지막 ‘실세’ 직책은 1979년 10월 26일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김복동이 전두환에게 밀리긴 했지만, 나름 끗발이 있었던 게 그가 청와대 경호실 차장보의 자리에 있었다(전두환과 노태우가 거쳐 갔던 그 자리). 그런데 덜컥 10.26이 터졌다. 대통령이 죽었는데, 그를 경호하던 이가 그 자리에 계속 있을 수 없어서 전방으로 가게 된다.
이때 하나회 쪽에서 김복동에게 12.12를 할 건데 같이 합류하자고 말했지만, 전두환이 쿠데타의 주모자인 걸 알자 이를 거절한다. 보통의 경우라면 이 경우 그의 인생은 꼬여야 했는데, 그는 육사 11기이며, 하나회였고, 노태우의 매제였다. 결국 그는 12.12가 끝나고 육사 교장 자리로 물러나게 된다. 그래도 동기들이 그를 챙겨줘서 중장 승진을 시킨 다음 1982년 1월에 예편을 시켜준다. 한때 육사 11기의 선두 다툼, 하나회의 수장 자리를 놓고 다퉜던 3명의 신성이 있었는데, 최후의 승자는 월급을 다 인맥 관리에 쏟아부은 전두환의 승리로 끝이 났다.
12월 3일 오늘, 윤석열과 이준석, 김종인을 보며 다시 한번 세조, 전두환, 윤석열, 그들이 가진 어둠의(?) 용인술을 떠올려본다.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으려면 누군가가 권력을 잡아가는 방법을 기억해두는 것도 좋을지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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