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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영월에는 600년 된 소나무가 있다. 이 나무가 80살이던 먼 옛날, 그루에 걸터 앉아 하염없이 시간을 보내던 소년이 있었다. 그의 이름 이홍위. 세종의 장손이자 문종의 장남. 조선의 여섯 번째 왕, 단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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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는 관음송이라 이름 지어졌다. 산골짜기 계곡, 작은 섬안에 갇혀있는 어린 군주의 참담한 모습과 애달픈 울음소리를 나무가 보고 들었다는 뜻이다. 영월에는 이처럼 단종이 유배 온 길을 따라 그의 이야기가 얽혀있는 공간들이 많다. 그가 앉아 쉬던 곳, 물을 마신 곳, 시를 읊은 곳, 숨을 거둔 곳 등등. 도시 전체가 그를 기억하고 있다.

 

짧은 생애 아무것도 해보지 못했던 왕. 80살의 소나무가 600살이 되는 그 긴 세월 동안, 사람들이 그를 이토록 마음을 다해 추모하는 이유는 그의 비참한 삶이 그저 애처로워서만은 아니다.

 

사람들은 수양대군의 야만을 기억하는 것이다. 역사는 승자의 것이며 권력은 본디 잔인한 것일지라도, 조카를 죽이고 충신들을 도륙하며 인륜을 저버린 그의 삶은, 틀렸다고 말하는 것이다. 세조가 유능한 군주였을지는 모르나 그 야만의 기록이 성성하게 남아있기에 세조는 수양대군에서 벗어날 수 없다. 한 발자국도. 

 

전家의 금수저

 

어느 번화한 곳에 가면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는 도시전설들이 있다.

 

“저 빌딩이 원래 누구 거였는데, 5공 때 군인들이 뺏어갔지.”

 

“저 시장에는 전두환 동생 누구 허락 없이는 손바닥만 한 좌판도 못 깔았다고.”

 

전두환에게 흔히 분개하는 것은 ‘전 재산 29만 원’이라는 그의 뻔뻔함이지만, 사실 그의 재산 목록보다 더 분개할 일은, 다른 이름으로 둔갑해 영영 찾을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다.

 

그가 청와대를 나온 지 33년이 더 흘렀다. 그의 부하가 5년을 더 권좌에 앉았고, 그에게 세배 다닌 자들이 수십 년 동안 권력을 잡았다. 광주의 피가 묻은 권력과 재산은 어느 계좌의 주식으로, 어느 수장고의 미술품으로, 누군가의 회사로, 땅으로, 건물로, 아파트로 흘러내려가 안전하고 합법적인 것이 되기에 충분한 시간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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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충동 신라호텔에서 열린 손녀 전수현씨 결혼식에 참석한 전두환/ 출처 -<뉴시스>

 

그 견고한 윤택함 안에서, 그와 그의 자식들은 아들손자며느리를 건실하게 길러냈다. 몇 대에 걸쳐 번성한 그 집안 사람들은 유복하고 구김살 없이 자라 교양 있고 넉넉한 마음씨를 가지고 있을 것이며, 그의 지인들은 그들과 가깝다는 게 큰 자랑거리로 여기고 살지 모른다. 그들의 금수저가 박종철과 이한열의 피로 제련된 것인지 모른 채. 혹은 알고도 모른 척 한 채.

 

전두환이 평온하게 살다 갈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주변에 그러한 윤택함이 넉넉하게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윤택함에 가까이 있는 사람들과 가까이 오고 싶은 사람들에게 전두환은, 전과자도 아닌 살인자도 아닌 악마도 아닌 그저 대부이다. 누군가 전두환의 삶에 공과 과를 애써 꼽으며 ‘그래도 정치는 잘했던’ 대통령이란 말을 꺼낼 수 있는 건 단지 무식해서가 아니라, 그 윤택함을 탐하는 스스로에 대한 변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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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jtbc>

 

초라한 초상

 

그런 시대가 있었다. 그 윤택함을 만끽하는 게, 부러워하는 게, 부끄럽지 않은 시간이 있었다. 무척 길었다.

 

박종철 열사가 목숨으로 지켰던 선배는 그를 모질게 고문한 자들이 만든 정당에서 세 번이나 출마했다. 전일빌딩에서 헬기 사격의 상흔이 발견되어도, ‘광주사태’는 간첩의 소행이라고 날조하는 확성기 소리가 광화문에 가득 울렸다. 가는 날까지 전두환은 조비오 신부의 명예를 훼손했고 민주화운동의 희생자들을 능욕했지만, 망언 가득한 그의 자서전을 들고 전두환을 에워싸던 무리들은 계속 우리 주변에 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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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어이 천수를 누리고 그가 갔다. 대통령도, 대통령 후보들도 역사의 이름으로 조문을 가지 않았다. 명절에 연희동으로 세배를 다니던 정치인들도, 초상집에 들렀다는 소식이 들리지 않는다. 간다 만다 하더니 결국 안갔다. 가지 못했다. 전과자이자 직위를 박탈당한 그를 아직도 전직 대통령이라 부고를 날리는 신문들이 있었지만, 아직도 떼어먹을 밥풀때기가 남은 자들이 주변을 웅성대긴 했지만, 차마 누구도 고개를 들고 초상집을 드나들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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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계승하겠다던 한 대통령 후보마저 결국 초상집 문턱을 넘지 않았다. 도리를 다하겠다더니, 이내 손절했다. 생각해보니 그의 영정 앞에 고개를 숙이는 게 앞길에 좋을 게 없다는 계산이 섰을 것이다. 윤석열 캠프가 지금까지 내린 결정 중 가장 명석한 판단이었다.

 

역사가 야만을 기억하는 방법

 

그의 초라한 초상을 지켜보며, 이제야 부끄러운 게 부끄러운 줄 모르는 시대가 마무리되어감을 느낀다. 어쩌면 그것은 역사의 속성인지도 모른다. 제아무리 욕망이 들끓는 인간이라도, 한 인간의 삶이 어떠했는지, 그것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어떻게 남을지 직감한 거다.

 

사과할 자세가 되어먹지 않았던 자에게 공허한 사과를 듣지 못한 것은 그리 애석한 일이 이니다. 역사는 야만을 좌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역사는 승자의 것이 아니다. 전과자 전두환에 대한 역사의 단죄는 지금부터 시작이다. 아주 오랫동안, 아주 많은 사람들이 전두환과 전두환의 삶을 기억할 것이다. 금남로의 가로수가 600년이 되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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