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 보좌진들은 서로 늘 싸우는 사람들이지만, 사석에선 의외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지내는 경우가 더 많다. 운동선수들이 경기장에선 서로 이기기 위해 다투지만 사석에선 농담도 주고받고 잘 지내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나 역시 민주당 보좌진이지만 국민의힘 보좌진들과도 자주 밥도 먹고, 커피도 마신다.
야당의 보좌진과 여당의 보좌진은 생활하는 사무실은 다르지만, 국회라는 공간에서 함께 직장 생활을 하고 서로가 공감하고 공유하는 부분들이 많다. 그런데 의외로 정치적 사안이나 현장의 감각에서 여야 보좌진 사이에 온도 차가 클 때가 있다. 그 간극을 가장 크게 느꼈던 것이 바로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이었다.
서서히 X되는 느낌
지금 돌아봐도 박근혜 탄핵은 대한민국 정치사에서 손꼽히는 가장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세계일보의 국정농단 의혹에 대한 단독 보도 이후 점점 박근혜 정부의 지지율은 꺾이고 있었다.
그 후 박관천 대통령공직기강비서관실 행정관의 내부고발이 등장했다. 청와대 권력서열 1위가 최순실이라는 인물이라는 것. 그녀가 대통령의 연설문을 직접 수정했다는 jtbc 보도까지 나오면서 정계는 극도의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다.
출처 - <연합>
되돌아보면, 일부 의원들은 몇 년 전부터 그녀의 존재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 엽기적인 실체에 대해 적나라하게 알게 된 시점은 국회 보좌진이나 일반 시민들이나 비슷했다. 영화처럼 뭔가 극적인 포인트가 있었다기보다는, 국회 내에서 뭔가 서서히 X되는 느낌이 감지된다 정도.
아무튼 최순실이라는 이름이 등장한 이후, 야당이었던 민주당의 파상공세는 엄청났다. 이를 수비하고 막아야 했던 여당인 새누리당은 여간 곤혹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놀랍게도, 새누리당 보좌진들을 사석에서 만나면 그런 긴박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다들 알면서도 침묵하는 그런 분위기였다고나 할까. 폭풍전야였다.
그때의 민주당 : 야당은 위기에 기민하다
대통령 탄핵안 국회 표결을 앞둔 2016년 11월 즈음이었다. 최순실이 미르재단, K스포츠재단 설립에 관여하고 정유라 이화여대 입시 비리 등 선출되지 않은 비선 권력이 국정을 농단한 사례들이 하나둘씩 계속 드러나고 있었다. 거의 모든 여론조사에서 박근혜 정부 국정지지율은 4~5%로 곤두박질치며, 연일 최저치 신기록을 세우고 있었다.
당시 민주당 보좌진들은 의원들과 광화문 집회에 참석해 촛불 시민들과 직접 호흡하고 현장의 분위기를 체감했다. 평일에는 최순실 관련 어떤 뉴스가 또 터질지, 야당으로서 어떤 메시지를 내고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논의했다. 단독 과반 의석이 안됐던 민주당은 당시 국민의당, 정의당, 무소속 의원들, 새누리당의 이탈표까지 끌어모아야 했다. 긴박한 상황이었다. 보좌진들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이 사태를 즉각 대응하기 위해 초긴장 상태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출처 - <연합>
국회에서 대통령 탄핵안을 표결에 부치면 과연 찬성표가 얼마나 나올지 반대표는 얼마나 나올지 모두가 극도로 신중하게 표 계산을 했다. 당시 민주당 우상호 원내대표가 가장 골치 아팠을 것이다. 국회의 대통령 탄핵 가결 핵심 키맨이었다. 우상호 의원은 특유의 전략가적인 면모로 혼돈의 정국을 돌파하고 있었다(우상호 의원의 이런 면모는 아직 대중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런 점에서 매우 저평가된 정치인이다).
그때의 새누리당 : 여당은 위기에 둔감하다
국회 탄핵안 표결을 앞두고, 새누리당 보좌진들의 분위기가 궁금했다. 평소, 친하게 지내던 새누리당 보좌관 형님을 찾아갔다.
"광화문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보이던데, 새누리당에서 어떤 식으로 대응을 할 건지 계획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
그때, 새누리당 보좌관 형님의 말이 잊히지 않는다. 그분은 태평한 톤으로 이렇게 말했다.
“임기 말엔 원래 레임덕이 있고, 야당은 원래 작은 일도 부풀리는 것 아니냐. 별일 없을 것이다”
미국을 비롯한 외신에서도 연일 한국의 촛불집회를 보도하던 시기였다. 무려 AFP통신에서는 “탄핵 가결 여부와 상관없이 박 대통령이 민주 선거로 당선됐지만 5년의 임기를 마치지 못한 첫 번째 대통령이 되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라고까지 보도하던 시절이었다.
새누리당 보좌관의 말을 들으며, 같은 지붕 아래 근무하면서 어떤 사안을 받아들이는 온도차가 정말 극명하게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당의 보좌진이 되면 그런 걸까?
실제로 며칠 뒤, 이정현 새누리당 대표는 의원총회를 마치고 나오며, 그 유명한 장지짐 발언을 한다.
“(탄핵안에 대해) 실천도 하지 못할 일들을 함부로 한다. 그 사람들이 그걸(탄핵안 가결) 실천한다면 제가 뜨거운 장에 손을 넣고 지지겠다”
이정현 당 대표의 발언은 그냥 실언이 아니다. 그는 실제로 탄핵안이 가결되리라 결코 생각 못 했던 것 같다. 새누리당의 많은 보좌진들도 얼추 비슷하게 느끼고 있었다. 사태 파악을 못 했던 건 박근혜 청와대는 말할 것도 없다. 훗날, 박근혜 청와대가 계엄령을 검토하고 있었던 것만 봐도 세상물정에 대해 어느 정도 아둔했는지 알 수 있다.
출처 - <연합>
추미애와 비박계
여담이지만, 당시 추미애 대표의 ‘대통령 계엄령 준비’ 주장은 박근혜 청와대가 실제로 계엄령을 이행하지 못하도록 막는 역할을 했다. 추미애 대표의 발언으로 광화문의 많은 촛불 시민들에게 안전을 보장했고, 대혼돈의 시기에 세계사에 유례 없는 피 한방울 흘리지 않은 K-혁명의 문을 열었다.
그렇다면, 당장이라도 끓어넘치기 직전, 광화문의 뜨거운 함성이 여당에는 전달되지 않았던 것일까? 꼭 그렇지는 않았다. 분위기를 파악했던 새누리당의 의원들도 있었다. 그것은 바로 비박계.
비박계 의원들의 기민한 민심 파악(?)은 탄핵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위대하신 탄핵 찬성 비박계 의원님들의 면면을 다시 살펴보자.
김무성, 심재철, 정병국, 김재경, 나경원, 유승민, 주호영, 강석호, 황영철, 강길부, 경대수, 권성동, 김상훈, 김성태, 김세연, 김영우, 김용태, 김종석, 김학용, 김현아, 박성중, 박순자, 박인숙, 송희경, 신상진, 안상수, 여상규, 오신환, 유의동, 윤한홍, 이군현, 이명수, 이은재, 이종구, 이진복, 이철규, 이학재, 이현재, 이혜훈, 장제원, 정양석, 정용기, 정운천, 정유섭, 하태경, 홍문표, 홍일표, 거기에 김문수, 오세훈, 원희룡, 남경필 (박근혜 키즈였던 이준석 당 대표도 탄핵 찬성론자였음)
이들이 현재 어떤 스탠스로 국민의힘에서 어떤 발언을 하고 있는지도 함께 살펴보면 흥미롭다. 비박계가 지금까지 단일대오를 유지했다면, 지금 야당에 합리적 보수를 지향하는 사람들의 지지가 모일 공간이 확보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김무성 전 대표와, 유승민 의원이 그럴만한 승부사는 아니었던 걸로.
유능한 보좌진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다시 이야기로 돌아와보자.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를 두고 여당과 야당 보좌진의 온도 차는 이렇게 극심했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현실 감각의 차이는 보좌진들의 실력 차이가 된다. 야당의 보좌진은 진보 보수 할 것 없이 필연적으로 현재의 정부를 비판하고 못하는 지점을 후벼파고, 시끄럽게 떠들며, 대중을 선동하는 역할을 한다. 아주 합리적이고 설득력 있는 비판을 해야 대중들도 알아준다.
야당의 보좌진이 되면, 정부의 사소한 문서도 허투루 읽지 않는다. 눈에 불을 켜고 꼬투리를 잡아야 하기 때문이다. 밤을 새우고 문서를 쌓아두고 각종 참고서를 동원하여 읽고 또 읽는다. 그리고 비판 논리를 개발해야 한다. 이명박 정부 초기에 야당인 민주당으로 국회 보좌진을 시작한 사람이라면, 박근혜 정부 말기까지 그런 생활을 하면서 트레이닝을 한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국회는 밥그릇 싸움이다. 국회에서 의석 수가 늘어난다는 것은 곧 보좌진들의 일자리가 늘어난다는 뜻이다. 또한, 국회 보좌진이라는 자유계약 시장에서 자기 몸값을 키우고 국회에서 계속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공부하고 공부한다.
반면, 이명박 초기에 여당인 새누리당에서 국회 보좌진을 시작한 사람은 어떨까? 이명박근혜 시절 9년간 야당의 비판에 대해 ‘실없는 꼬투리를 잡는 게 야당의 역할’이라는 정도로 받아들이는 게 일상이었을 것이다. 자신들의 정부를 수비하고 비호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전례에 없다’, 혹은 ‘법과 원칙에 따라 한 것이다’ 등으로 야당의 비판을 대충 퉁 치고 넘어갈 수 있다. 뼈아픈 지점은 그냥 모른 척하면 된다. 그들은 그렇게 박근혜 정부 말기까지 보좌진으로 길러졌다.
아주 극명한 예시는 박근혜 정부의 메르스 대응이었다. 코로나19 보다 전파력이 약한 메르스에 대해 박근혜 정부는 ‘낙타와 접촉하지 말 것’과 같은 황당한 대응책을 내놓았다. 당시 보건복지부는 메르스 관련 병원 명단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이에 대해 수수방관했던 당시 여당 새누리당은, 야당이 되자 문재인 정부의 코로나19 방역 대책에 대해 사사건건 걸고넘어지고 욕을 하고 있다.
이명박근혜 정부의 9년은 어느 진영의 보좌진들을 유능하게 만들었을까? 당연히 당시 야당인 지금의 민주당 보좌진들이었다. 야당의 경험은 이래서 중요하다. 그렇다면, 이명박근혜에서 문재인 대통령으로 정권이 교체되고 하루아침에 야당이 된 새누리당은 어떤 퍼포먼스를 보여줬을까.
왜 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던, 난데없는 황교안 대표의 ‘삭발 퍼포먼스’, 뜬금없는 아굴창으로 끝난 김성태 대표의 ‘단식쇼’, 이은재 의원의 기승전 ‘사퇴하세요!’, 각종 수많은 헛발질은 야당으로서 어떻게 정부를 견제하면서 대여투쟁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몰이해의 결과물이라고 보면 된다. 대여 투쟁의 경험이 없는 새누리당, 자유한국당 국회의원들과 보좌진들의 대환장 콜라보였다. 그런 걸 하라고 부추기는 사람이나 하겠다는 사람이나 필터링이 전혀 안된 것이다.
민주당의 진짜 리스크
시점을 지금으로 돌려보자. 문재인 정부 초기에 들어온 민주당 보좌진들은 지금 어떻게 성장하고 있을까. 감히 말하지만, 야당의 비판에 점점 무감각해지고 있다고 본다. 최순실 사태 때 새누리당의 보좌진들처럼.
여당인 민주당은 21대 총선에서 유례없는 압도적인 승리를 거뒀다. 성장이란 자신이 발 디딘 곳의 상황에 맞춰가는 거다. 민주당의 국회의원이나 보좌진들은 자기계발의 스트레스를 상대적으로 덜 받고 있다. 민주당의 미래 리스크는 여기에 있다. "여당 보좌진 오래 하면 바보 된다”라는 말은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반면, 국민의힘은 빠르게 쇄신의 길을 걷고 있다. 영원히 넘을 수 없을 것 같던 ‘탄핵의 강’도 어느 정도 넘은 것으로 보인다. 30대 당 대표를 배출했고, 태극기 집회와 선을 긋고, 전두환과 거리 두고, 청년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노력을 한다. 합리적 보수의 외피를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청년 남성들을 중심으로 국민의힘 지지세가 강해지고 있는 것은 그냥 넘길 일이 아니다. 국민의힘 국회의원들과 보좌직원들의 치열한 밥그릇 투쟁이 그들을 공부하게 만들고, 치밀한 논리를 개발하고, 민심을 읽는 능력을 키우도록 만드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출처 - <연합>
지금의 국민의힘을 이름만 바꾼 수구 세력, 구시대적 독재 잔당, 시대에 동떨어진 안보팔이 정당, 낡은 정당 정도로 쉽게 취급해선 안된다. 정치는 생물이다. 진화하고 성장한다. 세대가 교체되고 지금도 새로운 보좌진들이 풍운의 꿈을 안고 국회 보좌진에 도전하고 있다. 오늘도 국회 사무실에서 밤늦게까지 토론하고 서류를 뒤지며 칼을 갈고닦고 있는 이들이 국민의힘을 어떻게 바꾸게 될지, 그들의 에너지가 대한민국 보수 정당을 어떻게 변화하고 진화하게 만들지 관심을 두고 지켜봐야 한다.
지금은 여당과 야당의 실력 차이가 눈에 띄게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최근까지 대부분 여론조사에서 윤석열 후보가 이재명 후보에 앞서고 있는데도 ‘아무리 그래도 설마 윤석열한테 지겠어?’라는 민주당 내 분위기는 여전히 존재한다. 여당 보좌진의 안일한 현실 인식은 서서히 민주당을 변화와 혁신에 뒤처지는 정당으로 만들게 되는 요소가 될 것이다. 최순실 때 새누리당처럼, 위기는 갑자기 파도처럼 덮치는 게 아니다. 서서히 X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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