딴지에 리뷰노예로 납치된 불가사리. 거액의 제작비로 복수하겠다 다짐했지만, 딴지가 던져준 주제는 온통 싸구려들. 편집장 죽지않는돌고래(이하 죽돌)는 ‘맛집 리뷰’를 하라고 불가사리를 설레게 했으나, 굳이 ‘돈까스’라는 주제를 제시한다. 불가사리는 실망했지만 막상 돈까스를 먹으니 맛있어서 남산 돈까스까지 가겠다면서 인질극을 시작한다. 과연 불가사리는 성공적으로 딴지의 등골을 빼먹을 수 있을까?
불가사리의 소비 대모험, 기대하라구!
불가사리 대(對) 박기태 변호사
불가사리: 기사식당 돈까스라면, 역시 남산이죠. 남산, 다녀오겠습니다.
죽돌: 아니 얼마나 더... 대체 몇 곳이나?
불가사리: 조사해 보니, ‘남산 돈까스 거리’에 돈까스집이 9곳 있더군요, 후후.
죽돌: ...그걸 다 드시겠다구요?
불가사리: 당연하죠. 그리고 동반 1인 돈도 내 주시는 거죠? 설마 혼자 거길 다 돌아다닐 수는 없잖아요.
죽돌: 하긴 그 비주얼로 혼자 돈까스 9개씩 먹고 다니면 경찰에 신고가 들어올지도 모르겠네요(지는...). 그렇다면 제가 다른 필진을 소개해 드릴 테니 같이 다니시죠.
불가사리: 아니, 돈까스 9개씩 먹을 수 있는 필진이 딴지에 저 말고 또 있나요?
죽돌: 있습니다. 하하. 박기태 변호사라고. 촬영도 해 주실 겁니다.
박기태 변호사(이하 박변), 익히 알고 있다. 불가사리가 글을 쓰면 그 주제를 날름 가져다가 뻔한 이야기를 하면서 폼만 잔뜩 잡고 글을 쓰는 자. 지난번에는 믹스커피 글을 가져가더니 이번에는 돈까스 글을 가져간 자. 변호사라면서 왜 먹는 주제만 날름 따라오는지, 대체 뭐 하는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돈까스 배틀이라면 환영이다.
남산 돈까스, 무엇이 원조인가?
12월의 어느 화창한 평일 아침, 불가사리는 남산을 찾았다. 시간은 불과 9시 반. 벌써 연 집이 있을지나 모르겠지만 일단 남산 돈까스 거리, 케이블카 타는 곳 옆을 찾았다. 그리고 앞에서 박변을 만났다. 처음 만났지만 과연 돈까스 9개 정도는 쉽게 먹을 만한 대단한 풍채였다. 미리 봐 둔 프로필이 사기임을 직감하여 어색한 인사를 나누고, 길게 이야기할 것도 없이 바로 돈까스를 먹으러 출발했다.
화창한 날, 남자와 돈까스라니...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남산 하면 돈까스, 돈까스하면 남산이라는 이미지가 생길 정도로 남산은 돈까스의 성지가 되었다. 불가사리가 좀 더 어릴 때는 남산보다는 명동이나 다른 곳이 더 유명했던 것 같은데, 과연 언제부터 이렇게 남산이 성지가 된 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리고 근래는 어떤 유튜버가 제기한 원조 이야기, 즉 1992년부터 시작된 원조 남산 돈까스가 영업하던 곳(소파로 101)의 건물주가 역사를 도용하여 프랜차이즈 사업까지 하고 원조는 밀려나 있다는 이야기 때문에 다시금 화제가 되고 있다.
해당 유튜버가 제시한 ‘원조 돈까스’라고 주장하는 집의 1992년 사진
그러나 남산 앞에 선 불가사리의 궁금증은 다른 곳에 있다. 소파로 101에 있었다는 그 가게가 정말 원조 남산 돈까스집은 맞는 것일까? 그리고 그 가게 덕에 현재 남산 돈까스가 유명해진 것일까? 그리고 원조라면 그 이름에 걸맞을 만큼 맛있을까? 어쩌다 남산이 돈까스의 성지가 된 것일까?
조금 이상했던 점은 1992년이라는 시기이다. 지난 기사(링크)에서 성북동이 어째서 기사식당의 성지가 되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자연스럽게 기사식당에서 돈까스를 팔게 되었는지 이야기했다. 중산층의 형성, 식용유, 밀가루, 돼지고기의 가격 하락, 도시가스의 보급, 그리고 무엇보다 88 올림픽을 계기로 폭증한 택시 수로 인해 기사식당이 늘어났고, 돈까스는 그곳의 대표 메뉴가 되었다. 지난 시간 리뷰한 성북동 금왕, 서울, 오박사 돈까스 3집의 시작 시기는 자연스럽게 모두 1987년이었다.
그런데 1992년이라면 성북동 돈까스가 시작된 지 5년이 지난 시점이다. 말이 5년이지 당시 엄청난 변화의 속도를 고려하면 긴 차이다. 1987년은 전영록과 주현미가 최고 히트 가수였고, 1992년은 신승훈과 서태지가 최고 히트 가수였다는 점만 생각해도 그 차이가 느껴질 것이다. 특히 돈까스의 경우 1990년부터는 ‘엘머하우스’, ‘굿 후렌드’, ‘뉴월드’, ‘버거프라자’, 이타리아물산‘ 등의 돈까스 프랜차이즈가 우후죽순으로 생겨나고, 냉동 돈까스가 시장을 장악하기 시작한 시기이다. 즉 5년 만에 돈까스는 ‘고급 경양식 음식’에서 ‘집에서도 쉽게 먹을 수 있는 매우 일반적인 음식’이 되었다.
1991. 2. 26. 돈까스 체인 ‘엘머하우스’의 광고
1991. 10. 15. ‘매일경제신문’의 기사. 기사에도 나왔듯 1990년부터 냉동 돈까스가 판매되기 시작하였다
1992. 6. 29. 동아일보의 ‘굿 후렌드’ 프랜차이즈 전문 광고.
기사 형식의 전문 광고를 낼 정도로 돈까스 프랜차이즈가 성업했고,
‘전문기술 필요 없어 초보자 가능’이라고 광고를 하고 있다.
즉 남산돈까스가 시작된 1992년에 돈까스란 그닥 특별한 것 없는 흔한 메뉴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남산돈까스의 스타일을 보면 얇고 넓적한 고기에 소스를 부어 팔고, 깍두기와 고추 등을 제공하며, 육개장이나 국밥 등 다른 음식도 판다는 점에서 성북동 돈까스집과 완전히 같다. 어차피 기사식당인데 왜 5년이나 지난 시점에 돈까스가 시작된 것인지 의문이 든다. 이를 넘어서 이미 성북동 스타일이 5년이나 지나 엔간한 곳에 퍼질 만큼 퍼진 시점에 똑같은 스타일을 남산에서 팔았다고 해서 이것이 ‘원조’로서 의미가 있는 것일까?
왜 남산에 돈까스가?
남산 돈까스에 대해 이해하려면 이곳이 왜 기사식당의 성지가 되었는지 그 역사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일제 강점기 이전부터, 남산은 일본인들의 거주지였다. 1894년 동학농민군의 봉기를 구실로 서울 남산에 군대를 주둔시킨 일제는 남산 북쪽의 땅을 임차해 남산대신궁(1898, 이후 ‘경성신사’로 이름을 바꾼다), 통감부(1905) 등을 설치한다. 이후 일제는 남산식물원부터 숭례문에 이르는 30만 평의 땅을 영구 무상으로 임대받아 ‘한양공원’이라는 공원을 조성하였다. 이 공원의 중심에 고종이 친필 비석을 보내기도 했다. 이 비석은 현재도 남아 있는데, 그 위치가 남산 케이블카 승차장이 있는 곳 바로 근처이다.
후암동 해방촌 108계단.
지금은 엘리베이터가 생겼지만,
왜 여기에 이런 계단이 있는 지, 뜬금없다는 생각을 한 적 없는가?
이 계단은 원래 경성신사로 올라가는 계단으로,
이 계단 위에는 ‘도리이(신사 문처럼 생긴 것)’가 위치했던 곳이다
남산 한양공원비.
케이블카 승차장 인근에 있다.
고종의 친필 휘호지만 불행했던 역사를 상징하는 탓인지
사람들이 거의 찾지 않는다
일제가 조선을 완전히 병합한 이후인 1918년, 일제는 한양공원에 총면적 12만 7,900여 평이라는 엄청난 규모의 ‘조선신궁’을 지었다. 조선신궁의 위치는 현재의 남산도서관 근처이다. 조선신궁으로 가는 길은 현재의 백범광장 앞쪽부터 긴 계단으로 이어져 있었다. 계단으로 된 메인 참배로 이외에도 차나 말 등이 오갈 수 있는 길을 동서로 따로 낸다. 이 중 동쪽의 길이 현재의 ‘소파로’이다. 당시만 해도 포장도로 자체가 드물었다. 특히 산에는 포장도로가 없는 것이 너무나 당연했던 시기인데, 어엿한 포장도로가 생긴 것이다. 참고로 신궁에서 숭례문으로 향하는 길인 ‘소월로’는 당시 기준으로 가장 넓고 가장 잘 포장된 길이었다.
조선신궁의 사진
조선신궁으로 가는 포장도로.
숭례문으로 향하는 이 도로는
현재도 거의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도로로 ‘소월로’의 일부이다.
여기서 말하는 ‘소파로’는 사진 속에 있는
도리이(문)의 동쪽에 있는 도로이다.
조선신궁의 위치를 현재 지도에 그린 것
서울에 사는 모든 학생이 월 1회 조선신궁 참배를 해야 할 정도로 조선신궁 참배는 강요되었다. 많은 사람이 드나들다 보니 자연스럽게 소월로(숭례문으로 향하는 길)와 소파로(케이블카 옆, 현재의 돈까스 거리가 있는 곳)에는 이들을 상대하는 가게, 식당 등이 들어섰다. 원래 조선 신사 위, 현재의 팔각정 위치에는 국사당(國師堂)이 있었기에 해당 길에는 무당과 점쟁이들의 집들도 함께 빼곡하게 들어섰다. 자연스럽게 마차나 자동차가 쉽게 드나드는 길이 되었다.
광복 이후 조선신궁은 철거되었다. 1956년 해당 위치에는 당시 동양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이승만 동상이 들어선다. 당연히 소월로와 소파로는 국가적으로 잘 관리되는 잘 닦인 길의 지위를 잃지 않았다. 남산공원은 창경원과 함께 서울 제일의 공원이었다.
1956년 8월 15일, 남산공원의 이승만 동상 제막식과 축하 비행
이후 이승만 동상이 철거되었다. 이 장소는 남산 유람을 위해 사람들이 드나들기 쉬운 곳이었다. 서울의 남부나 동, 서부로 갈 때 남산을 통과할 수 있는 좋은 길이기도 했다. 원래부터 공원으로 조성해 둔 길이었고, 1962년 남산 케이블카가 설치되었다. 1975년에는 남산 서울타워가 개장했다. 당시까지도 남산은 서울 최고의 관광지였다. (당시에는 없었지만) 현재 돈까스 거리가 있는 소파로는 남산을 관광하는 관광객들이 자동차로 방문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길이었다.
1970년대 이후 자동차가 늘어났다. 1980년대가 왔을 때 소파로는 성북동 길과 마찬가지로 좋은 교통과 접근성을 가지면서도 한적하다는 조건을 가진 곳이었다. 이래서 운전기사들, 특히 택시 운전사들이 이 장소에서 밥을 먹기 시작하였다. 자연히 소파로에는 운전기사들을 위한 식당, 세차장, 카센터 등이 들어선다. 1970년대 후반 케이블카 승강장 바로 옆(현재 ‘1번지 남산왕돈까스’가 있는 위치)에 ‘남산설렁탕’이 들어섰고(이 가게는 2017년까지 영업한다), 그 근처에 선짓국밥, 우거국, 순두부, 돼지불백 등을 파는 기사식당들이 우후죽순 들어서기 시작한다.
'원조'논쟁, 뭣이 중헌디?!
1970년 후반 남산 서울타워에는 돈까스를 파는 경양식집이 있었지만, 가격에 비해 맛이 좋지 않다는 이야기도 많았다. 이에 소파로에는 경양식집들이 생겼다 없어지곤 했는데, 그중 하나가 1978년 개장한 ‘촛불’이라는 레스토랑이었다. 처음에는 돈가스와 오므라이스를 파는 경양식집으로 8개 테이블의 작은 집이었다. 다만 여기서 파는 돈까스는 당연하게도 기사식당식 돈까스가 아니었다. 슈니첼에 가까운 전형적인 경양식 돈까스였다. 기사식당 돈까스보다는 살짝 두껍고 프라이팬에서 얇은 빵가루에 '지져 내었다(Shallow Frying)'. 그리고 밀가루를 버터에 볶아 루(Roux, 밀가루를 버터에 걸쭉하게 볶은 것으로 서양 요리를 할 때 루를 만드는 것은 기본 중에 기본)를 만들어 스프와 소스를 따로 내었다. 1993년 장경순 대표가 이 가게를 인수한 후부터 좀 더 기사식당 스타일에 가까운 돈까스를 팔기 시작하였다. 장경순 대표와 가족이 2000년 바로 옆 건물에 연 ’산채집‘에서는 '촛불'의 돈까스를 가져가 팔기도 했는데 이에 대해서는 후술하겠다.
경양식집 촛불의 2011년경 모습.
현재는 건물 자체를 새로 지었는데,
이 상태가 1978년 지은 상태 그대로라고 한다.
이 ‘촛불’을 비롯한 남산타워의 경양식 레스토랑들이 영업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와 별개로 1980년대 말이 되자 기사식당들에서 돈까스를 튀겨 팔기 시작한다. 1987년 성북동 기사식당들의 등장, 강남 ‘스낵카’의 등장 등과 거의 비슷한 시기이고, 성북동에서 확립된 ‘기사식당식 돈까스’의 스타일을 따랐던 것으로 보인다. 마침 1990년부터는 냉동 돈까스도 출시되어, 기존에 순두부 등을 파는 기사식당들이 돈까스를 파는 것에 문제가 없었다.
그리고 돈까스가 기사들의 메뉴로 인기를 끌게 되자, 원래는 특별히 대표 메뉴가 없거나 아니면 순두부, 국밥 등을 메인으로 하던 가게들도 ‘돈까스’라는 이름을 달고 영업하기 시작한다. 1992년부터 ‘남산 돈까스의 원조’라고 주장하는 ‘남산돈까스(구 소파로 101, 현 소파로 23)’도 처음부터 이 이름은 아니었다. 아마도 ‘남산식당’이라는 이름의 기사식당이었던 것으로 보인다(사진을 보고 추측한 것으로, 같은 장소에 ‘남산식당’이라는 별개의 식당도 있었을 가능성도 없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1992년부터 ‘남산돈까스’라는 이름으로 영업하기 시작한 뒤에도 여전히 이곳은 ‘기사식당’임을 내세웠고 ‘주문진 초당순두부’를 팔았다. 그리고 주변의 가게들도 마찬가지다. 예컨대 현재 ‘남산돈까스’가 이전한 자리인 소파로 23에는 원래 ‘남산기사식당’이라는 가게가 있었는데, 여기서도 우거지탕과 돈까스를 팔았다.
남산돈까스(현 소파로 23) 카운터에 있는 사진을 불가사리가 직접 찍어온 것.
‘남산돈까스’ 간판 위에 연식이 좀 더 되어 보이는 ‘남산식당’ 간판이 보인다
역시 카운터 사진.
남산돈까스 간판 아래에 ‘기사식당’, ‘주문진 순두부’라는 이름이 보인다
즉 이 가게에서 주장하는, ‘남산 최초’라는 말은 어떤 의미에서는 사실이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사실이 아니다. 만약 남산 최초로 돈까스를 팔았던 집이라는 의미라면 당연히 사실이 아니다. 바로 근처에 1978년부터 돈까스를 팔았던 ‘촛불’ 경양식집도 있었고, 1990년대 초 비슷한 시기 기사식당들에서 돈까스를 팔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반면 가게 이름에 ‘돈까스’라는 이름이 들어간 최초의 가게일 가능성은 크다.
그리고 ‘원조’를 주장하는 다른 가게들도 이런 식이라면 원조라 주장할 만한 이유가 한둘씩은 있다. 우선 ‘원조남산왕돈까스(소파로 107)’의 경우 77년부터 운영했다고 주장하는데, 비록 오랫동안 순두부집이었으나 어쨌든 ‘촛불’보다도 먼저 운영했으니 ‘원조’라는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돈까스의 원조’라고 보기는 힘들지만. 순두부집과 비슷한 시기 생긴 ‘남산설렁탕’ 위치에서 운영하는 ‘1번지 남산돈까스’도 같은 이유에서 ‘원조’라는 말을 하는 것이 영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우리나라의 음식촌 다수, 즉 너도나도 ‘원조’를 붙이고 있는 가게들이 난립한 음식촌들의 사정도 비슷한 경우가 많다. 어느 한 가게가 딱 원조이고 이를 따라 하려는 가게들이 들어선 경우(신당동 떡볶이 타운의 경우)도 있지만, 비슷한 시기에 몇 가게가 생겨났고 점점 확장되었거나(장충동 족발집들, 신림동 순대집들의 경우), 아니면 한 가게에서 다른 가게가 갈라져 나오는 경우도 많고(오장동 함흥냉면집들의 경우), 대개 이런 요인들이 혼합된 경우가 많다. 게다가 원조라고 해서 최초의 레시피를 그대로 지키고 있는 것도 아니다. 많은 경우 근처에 등장한 가게들의 레시피를 참고하고 경쟁하면서 더 맛있는 집이 되기도 한다. 즉 원조라고 해서 그 집이 도덕적 우위에 있다고 보기 어려운 경우가 대부분이고, 원조라고 해서 그 집이 더 맛있는 것도 아니며, ‘원조가 아닌 집’이 음식촌 성공에 기여한 경우도 많다. 즉 ‘누가 원조인지’가 중요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그렇다고 해서 ‘원조’가 누구인지를 찾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원조가 아닌 이가 ‘원조’를 참칭하면서 이득을 얻는 예도 있고, 역사를 제대로 밝히는 것은 그 자체의 의미도 있기 때문이다. 유튜브발 남산 돈까스 원조 논란의 경우, 2011년부터 영업을 시작한 업체가 ‘남산 최초의 한국식 수제 돈까스 전문점’이라 이야기하고 92년부터 영업을 시작한 세입자의 역사를 가져다 쓴 것이 문제였던 것이다. 이러한 행위는 욕먹어도 싸다. 다만 이로 인하여 원조집 외의 다른 가게는 무언가 문제가 있거나 떨어진다는 식의 태도를 보이는 것 또한 그 나름대로 문제이므로 주의해야 한다.
요약하자면, 남산의 돈까스집 중 가장 먼저 생긴 곳은 '촛불'이었고, 대부분의 돈까스집들은 원래 기사식당으로 돈까스를 팔게 된 집들로 비슷한 시기에 돈까스집화 되었다. 현재 원조로 알려진 '1992년 남산돈까스'는 가장 먼저 이름에 '돈까스'라는 이름을 넣은 집일 뿐, '남산 최초로 돈까스를 판 집'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남산 돈까스의 스타일은 '촛불'스타일과도 무관한 성북동 기사식당 스타일로, 남산만의 새로운 스타일이 있다고 하기는 애매하다. 결국 원조 논쟁보다 중요한 것은 지금의 돈까스가 얼마나 완성도 높은지일 것으로 생각한다.
림 돈까스
잡설이 길었다. 어쨌든 이른 아침 남산에 도착한 불가사리와 박변은, 당연하지만 오전 10시에 연 가게가 없다는 현실에 직면한다. 박변은 양복을 풀로 입고 온 주제에 배고프다면서 불가사리에 인상을 쓰며 무섭게 항의했다.
박변: 아니, 기사식당이라 아침부터 열 거라고 했잖아요. 고소합니다.
불가사리: 고소하다니 제가 무슨 참깨도 아니고... 죄송합니다.
그리고 황급히 연 가게를 찾아보는데, ‘림 왕돈까스’라는 집이 연 것을 발견했다. 케이블카 승강장 기준으로 하여 두 번째의 가게다(소파로 91-1). 춥기도 하고 박변에게 고소당할 것이 두려워 황급히 가게도 들어갔다. 가게 간판에 ‘돌솥, 새싹, 산채, 묵사발, 멍게(응??)’라는 글자가 쓰여 있어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다는 느낌이긴 했다.
들어가니 꽤나 큰 규모의 가게이다. 안에는 만국기가 걸려 있다. 돈까스의 가격은 12,000원(!)으로 꽤나 비싼 가격을 자랑하고, 이외에도 우동, 설렁탕, 멍게비빔밥(음?), 삼계탕(엥??), 평양냉면(뭐라고?) 등 메뉴가 많다.
림돈까스의 메뉴판
이 림돈까스는 사실 돈까스집을 운영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2010년경 까지만 해도 ‘N쿠치나’라는 이름의 레스토랑이 있었고, ‘꽃보다 남자’의 구준표와 금잔디가 찾은 곳으로 나름 유명했던 곳이다. 당시에는 정통 레스토랑에 가까웠는데 어떻게 돈까스집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N쿠치나 이전에는 어떤 가게가 있었는지도 확실치 않다(그전에도 ‘림돈까스’였던 것 같은데, 그 이름으로 언제부터 운영했는지는 불분명하다). 다만 ‘45년 전통의 비빔밥’이라는 홍보물이 붙어 있던 것을 보면 과거 산 주변에 흔히 있던 비빔밥집이 아니었나 짐작만 가능할 뿐이다.
2008. 8. ‘N쿠치나’의 모습과 2021. 6. ‘림 왕돈까스’의 모습 비교
어쨌든 돈까스가 나왔다. 이번에도 역시, BDM(Bulgasari Don-ggassu Method)의 방식을 통해 분석하며 먹었다.
1. 수프 및 가니시(곁들여 나오는 것)
평범한 오뚜기 스프 맛인데, 일반적인 경우보다 묽었다. 특이한 점은 12,000원이라는 고가에도 불구하고 스프와 반찬이 셀프였다.
2. 고기의 두께와 맛
고기는 얇게 두드려 0.5cm쯤 되는 두께였다. 그동안 먹었던 기사식당식 돈까스집 중에서도 압도적으로 얇은 두께였다. 부드럽기는 했으나 너무 얇은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림돈까스의 돈까스
3. 튀김옷과 빵가루, 기름
문제는 튀김옷과 빵가루였다. 고기가 얇으면 그만큼이나 튀김옷이 더 얇아야 균형이 맞다. 그런데 이 집의 튀김옷은 꽤나 두꺼웠고, 그 튀김옷이 고기와 붙어 있지 않고 떨어져 겉돌았다. 튀김옷과 고기가 떨어지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두께에 균형이 없는 상태에서 붙지도 않으면 식감마저 유쾌하지 않다. 또한 빵가루는 일본식의 굵은 빵가루고 기름도 제대로 빠지지 않았다. 온통 기름 맛에 고기 맛이 가려질 정도였다. 게다가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기름 냄새가 심하게 났다.
돈가스 단면
4. 소스의 맛과 어우러짐
소스는 브라운소스 계열이었는데, 어딘가 특이하면서도 익숙했다. 구수한 계열의 브라운소스로 단맛이 적고 약간의 산미가 있었다. 그런데 돈까스에 기름이 많이 들어가 있으면 소스 맛이라도 강해야 그나마 먹을 만 한데, 구수하고 맛이 약한 소스였다. 기름 맛을 전혀 가리지 못했다. 어우러짐 부분에서도 합격점을 주기 어려웠다.
이렇듯 전체적으로 돈까스 자체가 맛있다고 평가하기는 어려웠다. 그런데도 가격은 성북동이나 다른 남산 돈까스집들보다 20%는 비쌌다. 스프와 반찬이 셀프였다는 점에서 서비스도 좋지 않았다. 게다가 아침이어서인지 어수선한 주방에는 냉동 생선가스 박스가 보였다. 생선가스의 경우 냉동을 쓰는 경우가 많다는 것은 알지만 그래도 14,500원짜리 메뉴인데 냉동을 튀겨주나 싶어 기분이 좋지 않았다.
냉동 생선가스 박스
이 가게는 케이블카 바로 근처(두 번째 가게)인 것을 이용하여, 주로 호객을 통하여 고객을 유치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남산 케이블카 입장권을 제시하면 1,000원을 할인한다거나 음료수를 무료로 준다면서 호객을 하는데, 바로 옆 산채집보다 2,000원이 비싼 것을 감안하면 혜택을 받아도 더 비싸다고 여겨진다. 게다가 맛도 전혀 만족스럽지 않았고 기름 냄새와 맛이 너무 많이 나서, 한 끼에 원래 돈까스 4개는 먹는다고 들은 박변도 하나를 채 다 먹지 못했다.
굳이 좋게 평가하자면 하나만 먹어도 든든할 것이고, 기름 맛이 많이 나니 ‘돈까스를 먹는다는 느낌’은 강하게 줄 것 같다. 일반적인 식사 시간보다 훨씬 일찍 방문해 제대로 된 맛을 내지 못한 것일지도 모른다. 다만 불가사리의 돈까스 리뷰 기간 중 가장 유쾌하지 않았던 시간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총체적 난국, 남산돈까스가 다 이런 건 아니겠지?”
불가사리와 박변이 돈까스집을 나온 시점은 이제 10시 반 정도였다. 남산 돈까스 전체에 대한 강한 실망에 빠져 리뷰를 그만둘까 생각도 했지만 굳이 온 김에 포기할 수 없었다. 아직 돈까스 네 개는 더 먹어야 한다는 박변의 주장을 무시할 수도 없어서 다른 집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그러나 아직도 대부분 가게는 열지 않았다. 그래서 도저히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 간판이 영 이상한 가게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불가사리는, 여기서 깜짝 놀라게 된다.
죽돌: 아니, 이번에도 원고를 여기서 끊어서 주면 어떡합니까.
불가사리: 이제야 전화를 하시는군요.
죽돌: 어디를 가신 건데요?
불가사리: 일단 남산 돈까스 8개 집에 커피집, 주유비까지 영수증 처리해 줄 때까지 안알랴줌.
죽돌: 허허.. 그걸 본인 맘대로... 아니, 같이 간 박변님은 뭐랩니까. 그 양반은 갔으면 좀 말릴 일이지 부추기고 있...
불가사리: 박변님이랑 저의 혈관에는 이제 피보다 진한, 같은 돈까스 소스가 흐르고 있습니다. 감시인으로 붙인 모양인데 이제 법까지 저의 편입니다만? 여튼 영수증 처리해주삼.
죽돌: (뭔가 작게 욕하는 소리가 들린다)
과연 불가사리의 돈까스 인질극은 성공할 것인가?
불가사리의 소비 대모험, 남산 돈까스 최고를 찾아서 2편, 기대하라구!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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