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인터뷰는 기사화 과정에서 텍스트로 보기 좋게 편집을 거쳤다. 내용은 같다.
본 기사는 몽골 현지인의 시선으로 해당 국가의 모습을 말하고 알림이 취지다.
이번 편에선,
“몽골은 주로 어떤 국가들과 교류하며, 그들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을까? 국제적으로 몽골이 처한 상황은?”
이라는 질문이 중심이다. 물론 그외에 몽골의 아픈(?) 역사도 다루지만.
러시아, 중국 딱 두 국가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기사에서 경향에 대해 말할 때는 ‘대체로 이런 경향이 짙다’는 일반적인 모습을 알기 쉽게 다룬 것이니, 모든 내용을 절대적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은 지양하길 바란다. 같은 모습일지라도 누구를 통해 듣는지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인터뷰 대상자는 현지에서 약 20년간 거주한 교민이다. 몽골 관련 기사를 보도하는 교민 소식지 기자로 활동했으며 취재 경력이 풍부하고 현지에서 다양한 직업을 경험했다. 현재는 몽골에서 여행사(컬쳐노마드 투어)를 운영하고 있다. 포털 사이트 다음(DAUM)에서 몽골 관련 카페(링크)도 운영 중이다(딴게이로도 활동 중이라는데, 닉네임은 '하늘과구름'이다).
해당 기사는 여러 몽골 교민과의 부분적인 인터뷰를 취합 또한 이해를 돕기 위해 몽골에 관한 여러 공식적인 자료를 덧붙였으나 중심이 되는 내용은 '하늘과 구름'과의 인터뷰임을 밝힌다.
자. 그럼, 5번째 여행을 떠나보자.
Q47 : 몽골의 외교 관계가 궁금하다. 이웃 국가이기도 하고 세계 최강대국이기도 한 중국, 러시아와의 관계가 단연 중요할 것 같다. 두 국가 사이에 줄타기도 잘 해야 할 것 같다. 몽골은 어떤 포지션을 잡고 있나?
A : 대외적으로 표방하는 방향은 다음과 같다.
“러시아에도 치우치지 않고 중국에도 치우치지 않는다. 중-러 어떤 국가와도 척지지 않는다. 그러나 서방 국가들과는 자유롭게 교류하겠다. 다른 뜻은 없다. 같은 민주주의 국가끼리 활발한 교류일 뿐이다.”
몽골이 추구하는 외교의 방향을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영세 중립국’이다. 몽골은 지정학적 위치는 좋지 않지만, 인구나 국가 영향력이 크지 않기 때문에 중립국의 지위를 인정받는 것이 불가능하진 않다. 2021년 6월 새로 취임한 후렐수흐 대통령도 영세 중립국 정책을 유지하겠다고 발표했다.
대통령 취임식에서, 후렐수흐 대통령.
몽골은 늘 중국과 러시아 사이에서 등거리 외교를 하며 균형 큐를 맞추려 한다. 나름 외교를 잘하는 부분이 많이 있다고 본다. 다만, 약 10년 전, 큰 정책적 실수를 하여 운신 폭이 많이 좁아진 아쉬움이 있다.
Q48 : 10년 전 큰 실수? 운신의 폭이 어떻게 좁아졌다는 건가?
A : 지금의 몽골 경제는 중국에 상당히 많이 종속된 상태다. 중국의 경제적 식민지가 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을 느낄 정도다. 그러다 보니 중-러 사이 제대로 된 등거리 외교의 폭이 넓지 않다. 약 10년 전에 벌어진 사건으로 인해 그동안 중국에 경제적으로 너무 많이 의존했기 때문이다.
지난 3편(링크)에서 몽골의 정치에 대해 말하면서 좀 나왔던 이야기인데, 배경을 설명하자면 이렇다.
몽골에는 석탄, 철광석, 구리 심지어 석유 등 여러 자원이 많다. 2000년대 후반, 몽골은 폐쇄적으로 운영하던 ‘자원 개발권’을 개방했다. 그때부터 외국 자본 투자가 많이 들어왔다. 급격한 경제성장을 맞이했다. 경제성장률은 쭉쭉 올라 2011년에는 17.5%까지 올라갔을 정도였다.
2011-2020년 몽골 경제성장률 추이.
출처-<몽골 통계청>
그런데 2012년 몽골 민주당이 이상한 정책을 추진했다. 당시 민주당은 대통령(엘벡도르지, 4대)과 의회 다수를 장악하고 있었다(이름 때문에 오해할 수 있지만, 몽골 민주당은 한국의 민주당과는 다른 계열로 보수 정당이다).
몽골 민주당은 이러한 내용의 외국인 투자 관련법을 통과시킨다.
“외국 기업은 자원을 비롯해 미디어·금융 등 전략산업에 49%까지만 지분 투자를 할 수 있다.”
투자를 해도 지분율 49%를 넘길 수 없어 사업 결정권과 우선권을 가질 수 없게 되니 기존 외국 자본들은 몽골에 손을 떼기 시작했다. 새로 들어오려던 자본들도 멈췄다. 당시 세계 경제는 2008년에 터졌던 미국발 금융위기(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아직 회복이 안 되었던 때라 몽골이 많이 수출하던 석탄, 구리 등 자원의 국제 시세도 엄청 떨어져 있었다. 몽골 경제는 더욱 늪에 빠지게 되었다.
경제성장률은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고 결국 국가 부도 위기에 빠졌다. 2017년 IMF에서 55억 달러(당시 약 6조3천억 원)를 구제금융 받기까지 이르렀다. 아직까지도 상환 중이다.
외국 자본들은 몽골에 한 번 당한(?) 상태라 다시 투자하려 하지 않고, 국가는 부도 위기상황이니 결국 몽골이 선택한 게 중국 자본의 도움을 받는 거였다. 중국은 쭉쭉 경제 성장하던 시절이니 여건은 충분했다.
많은 국민적 반대에 부딪혔지만 몽골 정부(4대 대통령 엘벡도르지 2기 정부)는 광산 개발권 등 많은 사업권을 중국 기업에 허용했다. 몽골과 붙어있던 우방국(?) 러시아도 중국이 몽골에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을 원치 않았지만, 당시 러시아 경제도 좋지 않아서 달리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몽골 4대 대통령 엘벡도르지(임기 2009-2017)와
시진핑 중국 주석.
나는 중국이 몽골에 공격적인 투자를 했던 이유가 청나라 때 자신들의 땅이었던 몽골 지역을 이제 물리적으로 정복하기는 어렵지만, 경제적으로 종속시켜 ‘고토를 회복’하겠다는 일념이었다고 본다.
Q49 : 미국과의 관계는 어떤가? 지리적으로 붙어있는 국가는 아니지만, 세계 곳곳에 영향을 미치는 국가이고, 몽골 입장에서도 러시아와 중국의 영향력을 견제하려면 미국과의 관계가 중요할 것 같은데?
A : 미국과는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려고 한다. 그 시작이 된 사건이 있는데, 스토리가 흥미롭다.
아마 기자님이 의아했을 수도 있다. Q47에서 내가 몽골의 외교에 대해 큰 실수로 인한 아쉬움이 있긴 하지만 나름 잘한다고 했는데, 지금까지 이야기를 들어보면 ‘도대체 어디가 잘하고 있다는 거지?’라고 생각할 것 같다. 미국과의 우호 관계가 시작된 에피소드를 들으면 내 말이 이해될 거다.
소련이 붕괴하고 사회주의 국가였던 몽골은 1992년 민주국가로 새로 태어났다. 그 후 외교부 장관은 미국을 제일 먼저 찾아갔다(참고로 몽골이 제일 먼저 수교한 나라는 우리나라다). 외교부 장관은 미국에 제안했다.
“미국아, 우리가 너네한테 굉장히 필요한 위치에 있다고 생각해. 너네가 제일 견제하는 두 국가 사이에 있잖아. 너네 우리랑 친하게 지내면 너네도 쟤네 견제하는데 상당히 편하지 않겠어?”
“대신 우리가 원하는 것만 좀 들어주라. 너네한텐 큰일 아니잖아. 우리 원조 좀 해줘. 지금 구걸하는 게 아니라 우리의 지정학적 장점으로 너네랑 거래하는 거다?”
그냥 도와달라고는 못 하니 자신들의 지정학적 장점(?)을 내세우며 원조를 요구했다. 당시 몽골은 자력으로 일어설 수 있는 경제력이 없었다. 소련이 붕괴하면서 당시 몽골의 1인당 GDP, GNI는 세계 최빈국 정도까지 떨어졌다. 아래의 통계표를 보면 소련이 붕괴한 1991년 이후 몽골의 국민총소득(GNI)이 급격하게 떨어진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몽골이었지만 당당하게 미국과 거래를 틀었다. 이후 미국과는 친한 관계를 잘 유지해오고 있다.
(오른쪽부터) 1989-1995년까지
몽골의 1인당 국민총소득(GNI).
(표 클릭하면 확대)
2020년 몽골의 대한민국 대사관에서 열린
한몽 수교 30돌 축하 겸 2020년 국경일 기념식.
‘오치르바트’ 몽골 초대 대통령(좌)과
‘곰보수렌’ 몽골 초대 외교부 장관(우).
Q50 : 현재 미-중이 패권 경쟁 중인데, 몽골은 포지션은 어떠한가?
A : 역시 영세 중립국 포지션이다.
“어느 한 쪽에 쏠리지 않겠다.”
내부적으로, 물밑으로, 어떤 게 오갔는지는 모르지만, 대외적으로는 이렇게 발표했다. 그러다 보니 미국과 중국도 표면적으로는 자기편을 들라 압박하지는 못하고 있다.
Q51 : 이웃 국가인 중국, 러시아. 이들을 견제하기 위한 우방국 미국. 이 세 국가에 대한 국민감정은 어떤가?
A : 답변을 하기 전에 하나 말할 것은 우리도 그렇듯, 어떤 나라든, 외교 정책과 국민감정에는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외교는 국익, 실익을 따라가는 거지 않나. 이 부분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미국부터 말하면, 상당히 호의적이다. 미국뿐 아니라 유럽도 그렇고 서방국가에는 호의적이다.
중국은 극도로 싫어한다. 일례로 보통 중국 사람들이 여행을 하다 보면 다른 나라 사람들 기준에서는 좀 목소리가 크다고 느낀다든가 할 때가 있지 않나? 몽골에선 그런 중국인들을 찾아보기 힘들다. 자칫하다가는 몽골인들한테 린치를 당할 수도 있으니 각별히 조심한다. 중국인들도 몽골인들의 반중감정이 심하다는 걸 알고 있는 거다.
러시아에 대해선 대체로 우호적인 감정을 갖고 있다. 나도 처음엔 이 부분에 대해서 이해가 잘 안 갔다. 러시아는 소련 체제가 붕괴할 때까지 약 70년간 식민지급으로 몽골을 지배하에 두었던 국가다. 많은 자원을 수탈했고, 몽골의 역사를 지웠다. 몽골 문자도 없앴고, 지식인들을 죽이고 민족성을 말살하려는 등 몹쓸 짓을 많이 했다.
근데 대부분의 몽골인은 표면적인 부분만 생각한다. 소련이 학교, 병원도 지어줬고 도시도 이렇게 만들어 주고 아파트도 지어줬는데 고맙지 않냐고 한다. 소련 지배하에 있던 시절, 자신들이 어떤 피해를 입었는지 잘 모른다.
몽골 수도 울란바토르의 건물들.
소련 스타일의 아파트 디자인을 볼 수 있다.
소련 지배하에 있던 시절 역사를 공부하지 못하게 했던, 그래서 역사를 중요하게 취급하지 않던 관성이 계속 이어진 것이라 본다.
몽골인들은 대체로 역사에 대해 우리만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지식인이 아닌 이상, 역사에 크게 관심도 없고 잘 모른다. 오죽하면 내가 몽골의 한 대학교에서 요청을 받아 대학 신입생들 대상으로 ‘칭기스칸 리더십’에 대해서 강의를 했겠나. 외국인이 몽골인들에게 다른 사람도 아닌 ‘칭기스칸’을 가르쳤다.
Q52 : 소련 지배 시절에 어떤 일들이 있었던 건가?
A : 우선 소련 지배하에 들어가게 된 과정부터 간단하게 설명하는 게 좋겠다. 몽골은 원래 청나라에 복속된 후 중국 지배하에 있다가 1921년이 되어서야 중국군을 격퇴하며 독립했다. 중국으로부터 독립하는 과정에서 소련 지원을 받기 시작하며 점점 소련 세력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1924년에 소련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사회주의 국가가 되었다.
몽골인민공화국(사회주의) 시절 독재자 허를러깅 처이발상.
몽골의 스탈린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사회주의 국가로 거듭난 뒤엔 소련의 말을 잘 듣는 ‘허를러깅 처이발상’이란 인물이 지도자가 되어 1952년 사망할 때까지 수십 년 동안 독재를 했다. 그동안 소련의 영향력은 더욱 공고해졌고, 소련 붕괴 전까지 소련의 강력한 영향력 하에 있었다.
이렇게 몽골을 지배하게 된 소련은 몽골인의 민족성 말살 정책을 쓴다. 대표적인 몇 가지만 말하면,
첫째, 역사 교육을 금기시했다. 어느 정도였는지 일례를 들어보겠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몽골에서도 민족주의적 움직임이 조금씩 생겼다. 민족주의적 성향을 갖고 있던 일부 선생님들은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칭기스칸 등 자신들의 역사에 대해 설명한 적이 있었다. 바로 숙청당했다. 그 정도로 몽골의 역사는 금기였다.
둘째, 몽골의 문자를 없앴다. 몽골은 원래 문자가 없었는데, 칭기스칸이 문자를 만들라 명을 내려 위구르 문자를 자신들의 말에 맞게 변형했다. 이것이 몽골 문자의 탄생이다. 이후 그 문자를 사용했다.
그런데 소련은 그 문자를 쓰게 못하게 했다. 소련의 키릴문자를 들여와 쓰게 했다. 몽골은 현재도 키릴문자를 쓰고 있다(중국 내몽골에선 몽골 문자를 사용한다). 현재 실용적 측면에서는 몽골문자보다 키릴문자가 낫지만, 암튼 키릴문자를 쓰게 된 배경은 이렇다.
셋째, 족보를 없앴다. 정확하게 말하면, 성 씨를 없앤거다. 성을 없애고 이름만 있게 한 건데, 예를 들면 이렇다. 말똥이가 결혼해서 소똥이를 낳았으면 소똥이의 풀네임은 말똥이 소똥이가 되는거다. 아버지의 이름이 자식의 성이 된다. 이렇게 되면 할아버지와 손주는 이름상으로 연관성이 없어진다.
그래서 당시의 시대물 영화를 보면, 서로 좋아했던 연인이 알고보니 사촌간이었다든지 하는 내용이 종종 나온다. 그 때의 시대상을 반영한 거다. 당시 기형아 출산도 상당히 많았다고도 한다.
족보를 없앤 것 때문에 지금 몽골에는 우리나라의 김 씨만큼이나 칭기스칸의 성 씨인 보르지긴 씨가 많다. 몽골이 소련 지배에서 벗어나고 민주화되며 성 씨 되찾기 정책을 추진했는데, 사람들이 약 70년 동안 성 씨를 모른채로 살았다보니 자기 족보가 실제로 어떻게 되는지를 모르는 거다.
그래서 너도 나도 제일 좋아보이는 성 씨를 자기 성 씨로 지었다. 단연 몽골에서 최고의 성 씨는 칭기스칸의 성 씨였다.
넷째, 당시까지 몽골의 국교와 같았던 티베트 불교를 말살했고 승려, 정치인 등 지식인들을 대거 숙청했다.
몽골 승려들
출처-<아주경제>
Q53 : 1937~1939에 일어났던 대숙청 때이지 않나? 당시 몽골의 지식인 중엔 승려가 굉장히 많았다고 알고 있다. 그 이유가 몽골인에겐 아픈 역사던데?
A : 기자님 말대로 당시 몽골의 지식인들 중엔 승려가 굉장히 많았다. 이는 중국과 관련이 깊다.
청나라는 건륭제 때 몽골을 완전히 정복했다. 그리고 민족 말살 정책을 추진했다. 그 일환으로 최대한 남자들을 결혼하지 못하게 했다. 군대에 입대시켜 전쟁에 내보내든가 그게 싫은 사람은 승려가 되도록 했다. 그리고 (남자에 한해) 한 가정에 한 명은 무조건 승려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승려가 되면 결혼을 못하지 않나. 당연 애도 낳을 수 없고.
대신 승려가 되려면 공부를 열심히 해야한다. 티베트 유학도 갔다오고. 승려가 되는 과정에서, 또 승려가 된 이후 계속 공부를 하다보니 자연스럽게 이들은 몽골의 지식인층을 형성하게 되었다(현재도 몽골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믿는 종교가 티베트 불교다. 티베트 불교는 16세기에 몽골로 전파되었다).
당시 승려들은 저술작업에도 많은 힘을 썼고 몽골 역사에 대해서도 정리하며 많은 책으로 남겼다.
≫임권산의 코멘트 (몽골의 역사에 더 궁금한 분들만 보시라)
앞서 몽골이 1921년에 중국으로부터 독립했다고 했다. 그러나 몽골이 청나라 시절부터 1921년까지 계속 중국에 지배당한 것은 아니다.
1911년 중국에서 신해혁명이 일어나 청나라가 확실하게 힘이 사라져갈 때 몽골은 독립을 선포했다. 청나라에 복속되며 없어졌던 칸(황제)도 부활시켰다. 그 후, 청나라를 멸망시키고 중국에 새롭게 들어선 위안스카이의 중화민국 북양정부와 러시아 제국, 몽골 3국이 협정(캬흐타 협정)을 맺어 1915년 몽골의 자치권을 인정받았다. 물론 그렇다고 중국의 영향력이 아예 없어진 건 아니었다.
다음해 1916년 위안스카이가 죽었다. 그 다음해인 1917년엔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나 러시아 제국이 멸망했다. 캬흐타 협정은 무효가 되었다.
2년 후, 1919년 중화민국 북양정부가 몽골에 쳐들어와 다시 몽골을 손아귀에 넣었다. 칸을 다시 없애진 않았지만 형식적으로만 둔 채로 학정을 펼쳤다. 그리고 다시 청나라 때 하던 몽골 승려 장려 정책을 추진했다(중화민국 북양정부는 장제스에 의해 1928년 멸망했다).
Q54 : 이 승려들이 정치인 등과 함께 소련 지배 시절 대거 숙청당했다고?
A : 그렇다. 기자님이 말한 1937~1939년의 대숙청 때이다. 당시 몽골의 지도자는 아까 이야기했던 소련의 말을 잘 듣는 ‘처이발상’이었다.
당시 소련의 최고 권력자 ‘스탈린’.
처이발상과 쿵짝이 잘 맞았다.
조금이라도 스탈린에 대해 비판적인 인사들을
모조리 숙청했던 소련의 대숙청(1937-1938)과
몽골의 대숙청이 거의 같은 시기에 진행됐다.
소련의 말을 잘 듣지 않는 정치인들과 수많은 승려들이 대거 죽었다. 처이발상을 앞세워 소련은 지식인층에 대해 대규모 숙청을 하였고 티베트 불교 말살 정책을 행했다. 사원들도 수없이 파괴되었다. 승려들의 경우, 지식인층 탄압과 티베트 불교 말살 정책 모두에 해당하다보니 정말 많은 수가 죽었다. 보통 당시 숙청당한 규모를 3만 ~ 3만 5천 정도로 말하는데, 일부에선 10만 명 정도로 보는 시각도 있다.
승려는 세 부류로 나뉘어 지식인층은 총살, 비지식인층은 시베리아 수용소, 젊은이들은 재교화 후 귀가시켰는데, 총살당하지 않았던 비지식인층도 당장 교화가 불가능한 것으로 판단하여 시베리아 수용소 10~20년형이 선고되었다. 그들 대부분은 혹독한 수용소 환경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지식인들에 대해 강력하게 탄압했던 건 아무래도 더 쉽고 강력하게 지배하는데 걸림돌이었기 때문이다. 북한의 경우도, 소련이 김일성과 박헌영 중 지도자로 김일성을 낙점한 것에는 박헌영이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이었다는 점이 큰 영향을 끼쳤지 않나.
분서갱유처럼 사람 뿐 아니라 책도 싸그리 불태웠다. 그 때 몽골의 과거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역사서가 거의 불태워졌다.
Q55 : 이 정도로까지 민족성 말살 정책을 쓴 이유가 단지 더 쉽게 지배하기 위함이라고 보나? 뭔가 다른 이유가 더 있을까?
A : 일명 ‘타타르 콤플렉스’. 그러니까 역사상 러시아가 유일하게 외세에 정복된 적이 있다. 바로 ‘몽골’에 의해서다.
러시아는 13세기 중반 ~ 15세기 후반까지 약 240여년 간 몽골에 지배를 당했다. 정확히 말하면 칭기스칸의 첫째 아들 주치의 후손들이 러시아를 지배했다. 그러다보니 당시 소련 입장에서 ‘이것들을 그냥 둬선 나중에 화근이 될 수도 있다’, ‘확실하게 지배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놔야 한다’라는 일종의 경계심(?) 같은 게 있었다고 본다.
Q56 : 오케이. 그럼 이제 같은 민족인 중국의 내몽골과의 관계 그리고 미중러 외 다른 국가들과의 관계에 대해 들어가 보겠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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