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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인을 중국인으로 만드는 방법

 

1997년 주권 반환 이후, 중국 정부는 홍콩인 다시 만들기 작업을 진행했다. 홍콩 ‘시민’을 중국 ‘국민’으로 만드는 과정이다. 2020년 국가보안법 발효 이후로는 강도가 더 세졌다. 올해(2022)부터는 홍콩의 모든 초중등학교에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기인 오성홍기가 게양된다. 매주 1회 게양식을 하고 국가를 제창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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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기간 ‘다시 중국인 만들기 프로젝트’는 다양한 트랙으로 실행되어왔다(자세한 내용은 지난 기사에서, 링크1 / 링크2).

 

방법 1: 프로파간다를 활용했고 

방법 2: 역사 교육을 활용했고 (교과서 개정) 

방법 3: 박물관을 개편했다.

 

진행 과정에서 홍콩인들과 전면적인 충돌이 빚어지기도 했다. 우리나라에도 유명한 조슈아 웡이 이끌었던 중고등학생 단체인 ‘학민사조’도 2012년 국정 교과서 반대 운동을 계기로 결성되었다.

 

이 외에도 중국 정부는 다양한 방법을 시도했다. 

 

 

방법 4 : 유전자(DNA) 소환 

 

생생한 기억만큼 생생한 거짓말은 없다고 한다. 우리는 자신이 겪은 개인사를 자기중심적으로 왜곡한다. 명분과 실리 사이에서 우리의 뇌는 과거를 재편한다. 개인사뿐 아니다. 역사적인 사건도 마찬가지다. 생생한 거짓말을 생산하기 위해 권력이 개입한다. 권력은 국민 두뇌 속의 역사에 대한 왜곡을 수시로 획책한다.  

 

최근 큰 진전을 이루고 있는 두뇌의 ‘가소성’에 대한 연구를 보면, 두뇌는 매우 탄력적이기에 개인의 성격과 사고방식은 변화될 수 있다고 한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세대를 거치지 않아도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현재 홍콩인의 정체성도 바뀔 수 있고, 그것을 추진하는 중국 정부는 실현 가능한 목표를 가진 것이다. 그 방법으론 국가와 민족이라는 명분을 꾸준하게 소환하며, 실리 중심 홍콩인들의 기억을 지우려 노력한다.

 

홍콩에도 분명히 ‘중국’을 ‘조국’으로 인식하는 역사가 있었다. 잠깐 시간을 돌아가보자. 

 

1963년 중국어로 강의하는 중문대학이 설립되고, 중국어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1967년 ‘67폭동’ 이후엔 홍콩(중국)인에 대한 대우 문제가 제기되었고, 더불어 중국어 운동이 관심을 받았다. 1971년 홍콩의 각 대학 학생회는 ‘조국을 인식하고, 사회에 관심을 가지자’는 인중관사(認中關社 인식 조국, 관심 사회) 운동을 전개했다. 

 

마침내 1974년 중국어는 영어와 동등한 법률적 지위를 얻었다. 조국을 인식하는 방편으로는 우선 중국관광단을 조직했다. 일본과 벌어지고 있는 조어대의 영토 분쟁에도 뛰어들었다. 일본이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조어대의 주권을 지키자는 운동이었는데, 홍콩의 대학생들은 일본대사관과 일본문화관에 가서 시위했다. 

 

(주권 반환이 된 이후, 여러 갈등이 생기고 충돌하며 현실 정치면에서 많은 반감이 생겼지만, 홍콩인들은 여전히 한편으론 중국을 민족적 뿌리로서의 조국이라고 생각했다. 우리가 북한에게 갖는 양가적인 감정과 같은 결이다. 그래서 중국이 성과를 발표하고 성장할수록 응원하고 자랑스러워하는 마음이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친중국 마인드의 홍콩인뿐 아니라 2014년, 2019년에 대규모 시위에 나섰던 민주 계열 홍콩인도 마찬가지다) 

 

2003년엔 중국이 유인 우주선 발사에 성공했을 때는 중국의 우주 비행사들이 홍콩에 와서 카퍼레이드를 하고 홍콩 스타디움에서 군중대회를 열었다. 중국 정부는 위대한 조국을 중국인들에게 대대적으로 홍보했음은 물론, 홍콩인들에게도 보여주고 싶었다. 당시 홍콩인들은 정말 ‘중국’을 자랑스러워하며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듯했다. 분위기를 보면 정말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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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저우 5호. 2003년 10월 15일,

성공적으로 발사된 중국 최초의 유인 우주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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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첫 우주인 양리웨이(楊利偉) 당시 공군 중령.

후에 인민해방군 소장까지 역임했었다.  

 

(중국의 첨단기술은 이미 세계적인 수준이라고 널리 알려져 있었지만 유인 우주선 발사에 성공했을 때 세계는 상당히 놀랐다. 중국은 첨단기술 개발에 굉장히 투자를 많이 하는데, 근대 일본을 비롯한 제국주의 열강으로부터 수모를 당한 주요한 원인으로 군사 무기를 비롯한 과학기술의 후진성을 꼽기 때문이다. 그렇게 중국 정부는 역사적 원한을 풀기 위해 핵무기를 비롯한 첨단기술 개발에 매진하여 왔다. 1950년대에는 원자폭탄, 1960년대에는 수소폭탄, 1970년대에는 대륙간 탄도 미사일을 개발했다. 우주를 향한 계획도 추진해왔다) 

 

홍콩인들은 중국에 지진이 발생하면 지진 피해 돕기 운동을, 수재가 발생하면 수재 돕기 운동을 벌였다. 2008년 원촨(汶川) 지진 때는 모든 홍콩인이 모금에 동참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언제나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표어가 함께 했다. 혈통적으로 같은 정체성을 지녔다는 의식의 흐름이 실재했다. 중국 정부로서는 그 지점을 놓치지 않고 잡아야 했기에 주권 반환 이후, 수시로 같은 ‘피’를 강조했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이 열렸다. 중국 정부는 올림픽을 유치한 것과 성공적으로 개최했다는 사실을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베이징올림픽을 국가의식 함양의 장으로 삼았다. 올림픽 스타들을 홍콩으로 보내 조국의 영광을 홍콩인들의 집단기억으로 정착시키는데 노력했다. 2008년은 이미 중국과의 갈등이 꽤 벌어진 이후였지만, 양가적인 감정을 전술했듯 홍콩인들은 성공적인 베이징올림픽 개최를 굉장히 뿌뜻해했고 자랑스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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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베이징 올림픽 폐막식.

 

중국은 이 부분을 지속적으로 공략했다. 2017년엔 ‘주권 반환 20주년’ 기념행사의 하나로 특별히 중국가극원이 홍콩체육관으로 와서 민족 무용극 ‘공자(孔子)’를 공연했다. 홍콩의 중국적 정체성을 회복시키기 위해 중화민족의 가장 대표적인 밈(문화적 유전자)인 공자에게 도움을 청한 것이다. 

 

공자는 청 말부터 도마에 오르기 시작해서, 54신문화운동부터는 천고의 죄인이 되었다. 유교 반대, 공자 반대라는 광풍은 20세기 중국을 지배했다. 그런 공자가 21세기에 부활했다. 아니, 개혁개방 이후 돈만을 밝히는 사회 분위기를 바로잡기 위해 중국공산당이 부활시켰다. 

 

2011년에는 천안문광장에 거대한(높이 8미터) 공자상을 세우기도 했다(비록 얼마 못 가 여론에 밀려 그 옆 중국역사박물관 뒷마당으로 옮겼지만).

 

 

방법 5 : 보통화 교육

 

홍콩은 보통화(중국의 표준어)를 주로 쓰지 않는다. 광동어와 영어를 주로 쓴다(썼다). 중국 정부는 보통화를 쓰도록 통일시키기 위해 교육에도 꾸준히 노력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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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착한중국어>

 

1984년 홍콩의 주권을 중국에 반환한다는 ‘중영공동성명’이 체결된 후, 홍콩 정부는 아래와 같은 단계로 중국의 표준어인 ‘보통화’ 교육을 추진해왔다.

 

-1986년 교육부는 보통화 수업을 정식으로 초등학교(4-6년) 과정에 독립 과목으로 추가하고, 각 교육대학에 보통화 교사 훈련과정을 설치함.

 

-1988년 보통화 수준 측정 시험의 규칙을 공포함.

 

-1989년 교육부는 보통화 확산을 위해 교재 등을 학교에 지원함.

 

-1990년 초등학교(4-6년) 보통화 수업 요강을 공포함.

 

-1992년 중등학교(1-3년) 보통화 수업 요강을 공포함.

 

-1993년 홍콩 총독은 시정보고에서 중국어와 영어 수준 제고를 위한 기금 계획을 발표함.

 

-1995년 홍콩 총독은 시정보고에서 학교의 보통화 교육 강화를 약속함.

 

-초등학교(1-6년), 중등학교(1-5년)의 보통화 수업 신과정을 발표함. 

 교육부는 보통화 수업을 초중등학교 핵심과정의 하나로 추가할 것을 건의함. 

 

-1997년 초등학교(1-6년), 중등학교(1-5년)의 보통화 수업 요강을 모든 학교에 하달함.

 

2006년 중국 교육부의 언어정보 국장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최근 홍콩인 중 보통화 구사자가 꾸준히 늘고 있지만, 아직은 외국과 다름이 없다. 중국인으로서 경제나 문화 공감대 확산을 위해서는 표준어 구사가 필수적이다. 그것을 홍콩인들이 알아야 한다.”

 

중국 정부는 우선 2010년까지 전 국민이 기초 보통화를 구사하고, 건국 1백 주년이 되는 21세기 중반까지는 소수민족에게도 보통화를 보급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영국 통치 시기, 홍콩에서는 당연히 영어가 법정 용어이자 교육언어였다. 일본 통치 시기에는 일본어가 영어의 지위를 대신했다. 일본 통치 시기, 초중등학교에서 매주 네 시간의 일본어 교육을 했으며, 일본어가 영어를 대신하여 법정 용어가 되었다. 

 

국민당은 대만으로 후퇴한 이후 대만에서 대대적으로 표준어를 사용하자는 ‘국어운동’을 전개했다. 그런 점을 상기하여 본다면 언어와 통치 주체와의 상관관계는 매우 직접적이다. 보통화는 중국 정부의 통치이념과 일체라고 할 수 있다. 

 

주권 반환 이후엔 보통화가 강조되기 시작했다. 대중매체에서도 그런 분위기를 볼 수 있는데, 2011년에 나온 『너와 함께一路有你』라는 영화에서 중국인은 홍콩 운전기사에게 ‘표준어부터 배우고 말해’라며 소리치는 장면이 나온다.  

 

중국의 관리들이나 관방학자들은 수시로 보통화를 강조하거나 광동어를 폄하하는 발언을 해 홍콩인들의 자존심을 자극했다. 대륙의 학자들조차 홍콩 출신으로 홍콩 정체성을 연구하며 미국에서 활동하는 저우레이(周蕾)를 보통화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비난했다. 

 

중국으로부터 아래와 같은 이데올로기는 밤낮으로 홍콩인들의 귀속을 파고들었다.

  

①보통화를 많이 말하고 많이 듣게 되면, 조국을 더욱 열애할 수 있고, 중화민족의 우수한 문화를 흡수할 수 있다. 

②문화가 없는 상인은 큰 사업을 할 수 없다.

 

역사학자 홉스봄은 같은 언어를 쓰는 인간들을 친구로, 다른 언어를 쓰는 인간들을 적으로 보는 관념은 극히 최근에 만들어졌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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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우산 운동

 

주권 반환 이후, 홍콩의 보통화 환경이 갈수록 열악해지고 있음을 느끼고 있다. 내가 보통화로 주문을 하거나 길을 물으면, 돌아오는 반응이 심상치 않다. 

 

2014년, 우산 운동 직후에는 심지어 살기를 느끼기도 했다(모르는 사람의 눈에서 살기를 느껴본 적이 있는가). 식당이나 길에서 보이는(보통화를 사용하는 사람들에 대한) 홍콩인들의 적대적인 태도는 상상을 초월했다. 홍콩사람들은 그만큼 절박했다. 적대적인 눈길들 사이에서 나는 보통화 사용을 가급적 피하고 영어를 사용했다.   

 

류영하(백석대학교 중국어학과 교수)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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