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뜬금없이 무속 논란이 대선을 강타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무속은 고대 이래로 꾸준히 민중에 영향을 미쳤고, 최근 특정 후보 손바닥과 캠프에 나타나면서 정치까지 영역을 넓힌 듯 보인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이번 기회에 우리나라 역사 속 무속과 정치에 대해, 임팩트 강한 사건을 훑어보도록 하자. 

 

 

1. ‘무당왕’ 남해 차차웅

 

아주 먼 고대, 잉여 생산물을 독점하면서 왕과 지배계급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그들은 자신이 누리는 권력의 명분을 하늘(신)에서 찾았다. 피지배층을 억압하는 무력행위와 더불어 제사 행위를 독점함으로써 민중 위에 군림했다. 이때 최고 통치자는 정치적 지배자 겸 제사장이었다. 고조선의 첫 번째 임금 ‘단군왕검(壇君王儉)’도 앞의 두 글자 ‘단군’은 ‘박달나무 임금’이라는 뜻으로 박달나무를 신봉하거나 혹은 ‘밝다’는 뜻이다. 아무튼 제사장에 가깝고, ‘왕검’은 정치적 지배자에 가깝다고 학자들은 본다. 

 

이후 정치 체제가 차츰 발전하면서 왕의 역할과 제사장의 역할이 분리되었고, 왕은 제사장을 국정 파트너로 삼으며 그들에게서 정통성을 인정 받고, 제사장 세력은 독자적인 영역과 정권의 지분을 분배 받으면서 공생하는 관계로 나아갔다. 적어도 임금의 호칭에 ‘단군’처럼 제사장 성격의 이름이 쓰이지는 않았다. 왕과 제사장이 공생하는 관계였지만, 엄밀하게 따지면 그래도 왕이 제사장 보다는 높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다 딱 한 번, 제사장 칭호를 받는 왕이 나타났으니 바로 신라 2번째 임금인 남해 차차웅(南解 次次雄)이다.

 

남해차차웅.png

느그 독자 한반도 살제?

내가 응! mbc 드라마에도 나오고 응! 

어제 낙동강에서 오리알도 묵고 응! 다했으!

 

그는 신라 시조 박혁거세와 왕비 알영의 아들이다. 이름을 풀어보면 아버지의 성을 따랐다면 박남해, 왕이 된 후 왕의 호칭이 차차웅이다. 차차웅의 뜻은 무엇일까? 신라시대 학자 겸 정치가인 김대문에 의하면 “차차웅은 국어로 무당(巫)을 뜻하는 말로 세상 사람들이 무당은 귀신을 섬기고 제사를 숭상하므로 그를 외경하여 마침내 존장을 자충이라 했다고 한다”고 한다. 한 마디로 무당 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남해 차차웅만 유일하고, 이후에는 신라 왕의 호칭을 ‘이사금’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이(齒)가 많은 사람, 즉, 연장자로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뜻이다.

 

무당왕 남해 차차웅은 즉위부터가 어수선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남해 차차웅이 왕위에 오르기 직전 서기 3년 9월에 “용 두 마리가 금성(金城. 경주시내)의 우물 안에서 나타났다”는 기록이 있다. 용은 옛날부터 최고 통치자를 상징하는 동물이다. 그런데 용이 2마리였다는 것은 곧 쿠데타가 일어났다고 볼 수 있다. 다음해 4월 신라 시조인 박혁거세와 왕비 알영이 죽었다. 누군가에 의해 신라를 오랫동안 통치해 온 왕과 왕비가 죽었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리고 왕위에 오른 것이 남해 차차웅이다. 

 

하지만 남해 차차웅은 왕위에 오른 직후 이상한 말을 한다. 박혁거세가 죽고 석달 후 낙랑의 군사가 신라를 공격했다. 이때 남해 차차웅은 “두 성인(박혁거세와 알영)이 나라를 버리시고 내가 나라사람들의 추대로 왕위에 그릇되게 오르게 되어 위태롭고 두렵기가 마치 하천의 물을 건너는 것 같다. 지금 이웃 나라가 침략해 온 것은 나의 부덕이라 하겠으니, 어찌하면 되겠는가?”라고 묻는다. 대놓고 ‘내가 왕위에 잘못 올랐다’라고 말하는 것으로 사실상 자신의 정통성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말을 한다. 보통 왕이 국난을 당하면 ‘내가 미흡하고 부덕해서 백성이 고생이다’라고 자조를 하곤 하지만 스스로 ‘왕위에 잘못 올랐다. 내가 왕이 된 것은 잘못된 일이다’라고 하는 경우는 없다. 이는 누군가에 의해 억지로 바지사장으로 왕위에 올랐다고 보여지는 대목이다. 

 

‘바지사장’ 남해 차차웅을 뒤에서 컨트롤 하는 이는 누구일까? 여러 설이 있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석탈해일 가능성이 크다. 남해 차차웅은 왕위에 오른 지 5년 뒤 석탈해가 현명하다고 하여 사위로 삼았고, 얼마 후 대보(大輔)로 삼아 군국(軍國)의 정사를 맡겼다고 한다. 대보는 삼국시대 초창기 나오는 직위로 총리 급 이상의 최고위 관직이다. 그리고 아예 ‘군국(軍國)의 정사를 맡겼다’고 한다면 거의 모든 권한을 넘겨준 것이나 다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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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탈해왕릉.

소나무가 절하는 듯한 모습으로 유명하다.

출처-경주시청 

 

그럼 남해 차차웅은 뭘 했느냐? 왕위에 오른 지 3년 후인 서기 6년에 시조묘를 세우고 여동생 아로에게 제사를 맡겼다. 시조묘는 당연히 자신을 낳고, 신라를 세운 박혁거세에 대한 묘를 세운 것이다. 이 외에는 21년간 재위했음에도 그 행적이 드러나지 않는다. 필자 생각으로는 정치는 석탈해에게 맡기고 제사장의 직분에 충실하지 않았나 싶다. 결국 석탈해는 남해 차차웅의 아들 유리이사금 때에도 권력을 쥐고 있었고, 유리이사금이 죽자 결국 박씨가 아니라 석씨로서는 최초로 신라 왕이 되었다.

 

2. 권력에서 밀려난 무속

 

이후 유학과 불교 등 ‘고등 종교, 사상’이 유입되면서 차츰 무속의 영향력은 줄어갔다. 이미 서기 300년대 후반에 백제 왕인 박사가 일본에 천자문과 논어를 전달하고, 고구려에서는 372년 태학을 설립하는 등 불교 뿐 아니라 유학도 통치사상으로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불교와 유학의 전래가 비교적 느렸던 신라에서도 진흥왕대(재위 540년~576년)에 이르면 점치는 술사가 17관등 중 12관등으로 이미 중하위직으로 밀려났다. 

 

이렇게되자 더는 영향력을 빼앗길 수 없다고 여긴 무속세력은 6세기 후반에 귀신신앙공동체를 결성하고 불교에 맞섰으나 패배한다. 과거 무속의 신성지역이었던 소도지역에 불교 사찰이 들어서는 굴욕까지 맛봐야 했다.

 

이렇게 무속은 왕이나 왕과 다름없는 위치에서 불과 수백 년 만에 완전히 권력에서 밀려나는 신세가 되었다. 사회가 발전하는 과정에 발맞춰 이에 맞는 철학이나 사상을 제시했어야 하지만 이에 실패해 밀려나게 된 것이다. 고려시대 시인이자 철학자인 이규보(1168년~1241년)는 무당들이 신당에 제석신, 칠성신 등의 그림을 그려놓고 춤을 추면서 굿을 하다가, 이들이 개경에서 쫓겨나자 기뻐하는 시를 쓰기도 했다. 이미 1000년 전 합리주의를 강조하는 지식인의 눈에도 무속은 납득하기 힘든 것이었다.

 

고려 중기부턴 무당들을 수도 개경에서 금지하는 음사금지령이 시작되었지만 뇌물을 바쳐 완화하는 일이 되풀이 되기도 했고 그러다 이것이 무속인에 대한 세금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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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거 하면 관청에 신고하세요!!

... 그러나 뇌물 주면 괜찮아...?!?

라는 게 당시의 사회 분위기 

 

조선은 성리학을 국가이념으로 하기에 불교의 탄압과 더불어 무속은 더더욱 권력에서 멀어졌다. 조선은 거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무속을 뿌리 뽑기 위해 한양 내에서 무당의 거주와 출입 및 무속행위를 금지하고, 세금을 부과하고, 의료기관인 활인서에 무당이 의무적으로 봉사하게 하는 등의 탄압을 실행했다.

 

이렇게 우리나라 역사에서 무속은 민간에서는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으나 최소한 정치 및 국정에서는 완전히 밀려나게 된다. 

 

3. 명성황후와 박창렬(진령군)

 

조선시대 내내 왕실에서 불교 신앙을 믿는 것에 대해 논란이 있었고, 무속행위가 발각될 경우, 논쟁이 일어나기는 했으나 기본적으로 불교나 무속이나 정치에 개입할 여지는 거의 없었다. 그러다 조선 말기 체제가 흔들리면서 조선 철종 시대, 무속인들이 불안한 정세를 틈타 한양 곳곳에 진출했다. 하지만 흥선대원군이 집권한 이후, 이들을 모두 한양 밖으로 내쫓았다. 그런데 흥선대원군이 물러나자 우리 역사에서는 보기 드물게 무속이 국정에 영향력을 미치는 일이 있었는데, 그 주인공은 명성황후와 진령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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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픽션이 많이 섞였지만

진령군은 의외로

드라마에서 묘사된 적이 많다. 

출처-KBS드라마, 장사의 신

 

명성황후는 1882년 구식군대의 반란인 임오군란으로 충주 장호원 민응식의 99칸짜리 집으로 피신해 있었다. 그때 무녀 박창렬이라는 사람이 명성황후 앞에 나타났다. 황후가 “나는 언제 환궁하느냐?”고 물었고, 박창렬은 “8월 보름에 환궁합니다”라고 답했다. 명성황후는 청나라 군대가 흥선대원군을 끌고 간 후 8월 1일 환궁했다. 박창렬의 예언과 보름 차이가 났지만 상관없었다.

 

그에 대한 고종 황제와 명성황후의 신임은 깊었다. 세자(훗날 순종)가 병을 얻었을 때에도 어김없이 박창렬이 굿을 했는데 나았다. 그리하여 고종과 명성황후의 신임은 더더욱 깊어졌다. 박창렬은 명성황후 아버지인 민치록의 묘를 4번이나 이장시켰다. 명성황후는 박창렬을 사적으로는 ‘언니’라고 부르고, 여자 무당에 불과한 그에게 ‘진령군’이라는 군호를 내렸다. 군호는 아무에게나 내리는 것이 아니다. 왕족이나 왕비의 아버지(부원군), 정도전·한명회 같은 최고 공신들에게나 주는 작위다. 진령군을 당시 고종과 명성황후가 어떻게 여겼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박창렬은 사실상 궁에 상주하다시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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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타.

진령군의 삶과 매우 유사한 분이

최근에 있었더랬다.

 

 

아무리 조선이 무너져가던 때였지만, 왕실에 무녀가 상주한다는 것은 상식 이하였다. 어쩔 수 없이 고종과 명성황후는 서울 명륜동 흥덕골 인근에 북묘'(北廟)'라는 사당을 짓고 박창렬을 거주하게 했다. 그곳을 당시는 ‘관황사’라고 부르기도 했다. 박창렬은 스스로 관우의 귀신이 들었고, 관우의 딸을 자칭했기 때문이다. 고종과 명성황후는 이곳에 자주 들러 점을 보고 굿을 했다. 지금도 국립중앙박물관 동쪽 마당을 보면 고종과 명성황후가 세운 ‘북묘묘정비(北廟廟庭碑)’가 남아 있다. 

 

궁궐에는 박창렬의 아들 김창열이 당상관(정3품 이상)의 관복을 입고 활개쳤다. 물론 무당의 아들은 천민이라 벼슬은 할 수 없었지만, 그와 비슷한 지위로 대우해 준 것이다. 

 

나라가 박창렬 판이 되자 관황사에는 온갖 탐관오리가 들끓었다. 박창렬 말 한마디에 벼슬이 오가니 조병식(동학농민운동의 발단이 된 고부군수 조병갑의 사촌. 하지만 쳐 먹기로는 조병갑 보다 몇 배나 더 쳐 먹은 사람), 윤영신(1869년 광양민란 당시 광양현감), 정태호, 이유인(박창렬 양아들이라 쓰고 내연남)이 대표적이었다.

 

박창렬의 양아들 이유인은 고종과 명성황후에게 “금강산 1만 2000봉에 각각 쌀 한 섬과 돈 10냥, 무명 1필씩 바치면 나라가 평안해진다”고 했고, 명성황후는 그대로 따랐다. 그 재물은 박창렬 것이 되었다. 이용직이라는 사람은 박창렬에게 무려 100만 냥을 바치고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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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당에게 화끈하게 국고를 때려 박으신 분...

출처-명성태황후 어진  

 

박창렬이 하루는 “관우가 여포에게 당했으므로 여씨 성을 가진 여규형 같은 이를 멀리하라”고 간하자 고종 황제 부부는 그대로 따랐다. 여규형은 글재주가 매우 빼어나 고종도 이를 인정했으나 박창렬의 모함 이후 승진이 매우 느렸고, 사소한 글로 고종이 꼬투리 잡아 번번이 유배를 보냈다. 여규형은 시문 뿐 아니라 음율, 기하학, 산수, 초목, 충어(벌레와 고기), 성력(별과 달력) 등 전 분야에 걸쳐 매우 뛰어난 천재였다. 그러나 잦은 유배로 집안이 매우 가난해 이틀에 한 번 겨우 군불을 떼어서 밥을 지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결국 일본에 빌붙었고, 친일정권이 들어선 이후 겨우 가난을 벗어날 수 있었다.

 

박창렬은 사실상 이조판서와 병조판서나 다름 없었다. 관찰사(도지사) 및 지방 수령, 지방군 사령관인 병사, 수사(수군 사령관, 이순신이 맡았던 전라좌수사 등)는 그가 임명하다시피 했다. 이들 자리는 모두 지방에서 다른 이의 간섭 없이 마음껏 백성들을 착취할 수 있는 자리였다. 앞서 언급한 박창렬과 양아들 관계를 맺은 이유인은 양주목사, 함경남도 병사, 법부대신(법무부 장관), 경무사(경찰청장), 경상북도 관찰사를 지냈다. 

 

조선의 선비들은 박창렬 앞에 무기력했다. 아주 가끔 박창렬을 탄핵(?)하는 상소가 올라오기도 했다. 시일야방성대곡을 쓴 장지연과 훗날 독립운동에 투신하는 안효제가 ‘요망한 계집의 목을 베어야 한다’고 간했으나 도리어 먼 섬으로 유배형에 처해졌다. 종두법으로 유명한 지석영도 박창렬을 멀리하라는 상소를 올렸다 유배당했다. 잘 보이면 요직이 나오고, 비판하면 유배형이 떨어지는데 누가 나서겠는가? 사실상 박창렬을 견제할 방법이 전무했다.

 

박창렬을 멈춰 세운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이었다. 1894년 김홍집을 수장으로 하는 친일 개화파 정권이 들어서자 고종과 명성황후의 권한이 크게 줄어들었다. 덩달아 박창렬의 권한도 줄어들었다. 이후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당하고 그 이후 행적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다.

 

우리 민족 역사에서 몇몇 시기를 제외하고 무속이 정치적 영향력을 크게 발휘하지는 않았다. 무속은 민간에는 확고히 뿌리를 내렸으나, 통치의 영역으로 오면 합리적 의사결정을 방해하는 미신으로 치부되었기 때문이다. 명성황후를 제외하고 우리 조상들도 그 정도 선은 지킬 줄 알았다. 2022년이면 역사적으로 보면 ‘21세기 중반’에 이른다.

 

필자가 지금 이 시점에 왜 이런 글을 써야 하는지 모르겠으나, 최소한 무속이 국정을 좌지우지하는 시대는 오지 않을 거라고 믿으며 글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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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개명한 이름은 너무 티나게 받으셨다... 

무슨 영혼의 쌍둥이도 아니고...

출처-열린공감t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