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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이 시작됐을 때, 지금껏 경험해 보지 못한 이런 ‘신기한 전쟁’의 정체성을 보여준 사건이 하나 있었다. 바로 1952년 2월 18일, 그리스와 터키가 나토(NATO)에 가입한 일이다. 

 

(터키는 당시 나토에 가입하기 위해 한국전에 뛰어들어서, 

 

“씨바, 우리 잘 싸워! 우리 너네 편이야! 우리가 너네 편하면 몸빵 잘할 수 있어!”

 

를 몸으로 보여줬다. 한국전에서 피 흘린 덕분에 터키는 나토에 가입할 수 있게 됐다. 터키가 형제의 나라이고, 뭐고 말이 많은데 목숨을 바치신 군인 분들께는 당연히 감사해야하지만 국제사회라는 큰 판으로 봤을 때 ‘의리’ 따위는 없다. 오로지 ‘이익’만이 있다. 터키가 미쳤다고 주워 먹을 것도 없는데, 지구 반 바퀴를 날아와서 피 흘리겠는가? 당시 터키는 소련의 남하에 대한 절박감이 있었고, 이를 막기 위해서는 ‘나토’라는 든든한 뒷배가 필요했다. 이후 터키에는 미국이 전술핵도 배치하고 나름 어깨 힘 좀 주며 살 수 있었다)

 

 

앙숙 그리스와 터키가 나토에 동시 가입한 이유

 

그리스터키.jpg

 

그리스와 터키는 지역 내의 앙숙이었다. 영토분쟁부터 시작해서 소소한 충돌을 끊임없이 일으켜왔다. 이게 그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14세기 오스만 제국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이슬람 국가인 오스만 제국(현재 터키)은 발칸 반도에 뿌리를 박고, 그리스 땅을 지배했다. 

 

시기별 오스만 제국 영토.PNG

시기별 오스만 제국(현 터키) 영토

 

그리스가 이 ‘이슬람 세력’에게서 독립할 수 있었던 건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였다. 1차 대전 당시 그리스는 연합국으로 참가했고, 오스만 제국은 독일 쪽에 붙었다. 1차 대전(1914년 발발) 바로 직전에도 오스만 제국과 그리스는 1912~1913년 동안 ‘발칸 전쟁’을 치렀다. 여하튼 복잡다단하다. 핵심은 그리스와 터키는 제대로 전쟁을 치렀고, 서로 앙숙이란 거다. 

 

그런데 이들이 동시에 나토에 가입한 거다. 이유는 간단하다.

 

“서로 싸우다가 소련이란 불곰에게 먹힐 수 있다.”

 

라는 위기감 때문이다. 이런 위기감의 정점을 찍은 게 1955년 5월 9일 서독의 나토 가입이다. 서독의 나토 가입은 국제정치학적으로 기념비적인 사건이다. 

 

그동안 2차 대전 전범 취급받으며, ‘보통 국가’로서의 권리를 제한받아온(대표적으로 ‘군대’ 보유 같은 것) 서독을 다시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인 것은 물론이고, 공식적으로

 

“소련 생퀴들 모가지 딸 사람 여기 붙어라!”

 

라고 대놓고 선전포고를 한 모양새가 된 거다. 이제 과거는 필요 없고, 소련의 목을 딸 의향이 있는 모든 이들을 받아들이겠다는 거다. 그리고 나토에 점점 많은 국가들이 가입하면서 나토의 경계선은 점점 소련 국경선으로 다가갔다. 

 

 

나토는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애초 나토의 시작은 ‘중부유럽’의 소소한(?!) 모임이었다. 까놓고 말하자면, 스탈린의 ‘욕심’으로 시작된 것이 바로 나토이다. 이야기는 베를린 봉쇄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독일은 동과 서로 나눠지게 됐고, 수도였던 베를린은 미, 영, 프, 소련이 나눠서 관리하게 됐다. 여기서 문제는 소련이 이대로 쉽게 넘어갈 나라가 아니었다는 거다. 동독에 공산정권을 세운 소련은 서독마저도 그렇게 만들고 싶어 했다. 그 시작점이 베를린이었다. 

 

여담이지만, 이 당시 소련의 행보는 서방세계를 ‘경악’하게 만들었다. 

 

동독 서독.PNG

출처-<orbi.kr>

 

1946년 소련은 동독 지역에 독자적인 총선거를 실시했다. 이때 소련의 행보는 ‘예술’ 그 자체였다. 언론을 장악하고, 정치집단의 참여를 제한한 상황에서 전광석화처럼 총선거를 실시해 꼭두각시 공산주의 정당을 세운 거다. 그 다음? 바로 공산화로 들어갔다. 산업과 재산은 국유화되고 완전한 공산주의로 나아간 거다.

 

“아니, 씨바 동독이 순식간에 빨갱이 나라가 됐네? 동독 다음엔 서독일 테고, 서독 다음은 프랑스고, 프랑스 다음은?”

 

이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스탈린은 서독에도 공산정권을 세우고 싶어 했다. 그래서 서독이 총선거를 치를 때 사회주의 정당을 후원하고, 이들을 뽐뿌질 해서 뭔가를 해 보려 했는데, 서방 세계는 또 당할 바보가 아니었다.

 

“빨갱이가 서독까지 먹으면 안 돼! 당장 돈 풀어!”

 

마셜플랜의 ‘은혜’가 서독 땅에 뿌려졌다. 이 무렵 소련은 가열차게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었고 실제로 1949년 8월 29일 소련 최초의 핵무기 RDS-1의 실험이 성공하게 된다. 

 

이 무렵이었다. 스탈린은 서독은 못 먹어도 베를린은 다 먹자는 생각을 하게 된 게, 서베를린에 마르크화를 통용시킨 문제가 소련의 심기를 건드렸다느니, 경제통합 때문에 스탈린이 빡쳤다느니 하는 건 부차적인 문제였다. 스탈린은 그냥, 

 

“베를린 다 먹고 싶다스키. 냠냠”

 

이라고 생각했던 거다. 그리고 그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온건한(!!!) 방법인 베를린 봉쇄를 시작했다. 1948년 4월 1일 소련은 서베를린과 서독을 연결하는 도로와 다리를 완전히 봉쇄했다(그 이전부터 징조는 있었다). 스탈린은 아주 상식적(?)으로 생각했다.

 

“지금 당장 우리가 핵이 없는 상황이니까 전면전은 좀 그렇다스키. 그리고 2차대전 끝난 지가 겨우 3년이다스키. 우리가 2천 만 명이나 갈려나간 게 엊그제인데 또 미국과 싸우라고? 안 돼! 그냥 적당히 협박하고 삥 뜯는 방법으로 베를린 얌얌하자스키.”

 

베를린 봉쇄는 누가 봐도 소련이 이기는 게임이었다. 4월 1일 도로를 막았고, 6월 24일에는 전기를 끊었고, 그동안 겨우겨우 이어지던 철도, 수로 길마저 다 끊어버렸다. 

 

“이제 어쩔스키? 석탄이 못 들어가면 얼어 죽을테고, 식량이 안 들어가면 굶어 죽을 텐데. 그냥 앉아서 죽느니 서베를린 넘겨! 어때스키?”

 

스탈린.jpg

저 봐. 저 봐. 곧 넘어오겠구만스키. 우헤헤~

 

스탈린의 배짱 장사였다. 이 당시 서베를린 시민의 숫자가 220만 명. 소련이 봉쇄에 들어갔을 당시 식량은 36일 치, 석탄은 45일 치가 고작이었다. 

 

여담이지만, 당시 서방세계의 군사 전문가 대부분의 판단은 ‘베를린 포기’였다. 베를린은 동독 땅 한가운데 있었고, 이 주변을 소련군 50만 명이 포위하고 있었다. 게다가 동독에 주둔 중인 소련군과 소련에서 증원할 병력까지 생각한다면 ‘전쟁’으로 해결할 문제가 아니었다. 그럼 이걸 공중수송으로 해결한다면? 

 

“서베를린 220만 명 인구가 평시에 쓰던 물자가 하루 평균 8천 톤 정도입니다.”

 

“그 물자를 다 어떻게 움직였는데?”

 

“전부 철도였죠.”

 

“그걸 지금 공중수송으로 대체하겠다고?”

 

“8천 톤을 다 공중수송으로 채울 순 없죠. 필요 최소 물자. 그러니까 생존에 필요한 최소 물자를 계산하니까 3,600톤 정도 되더라구요. 이걸 공중수송으로...”

 

“그걸 누가 해?”

 

그렇다. 상식적으로 생각한다면 누구나 불가능하다고 판단할 일이다.   

 

쇼미더머니 끝판왕과 나토의 라이벌 탄생 

그때 등장한 인물이 그 유명한 ‘커티스 르메이(Curtis Emerson LeMay)’였다. 2차 대전 당시 독일과 일본을 전략폭격으로 불태워버렸던 신화적인 존재. 이 인간이 공수작전을 진두지휘했다.

 

커티스 르메이.PNG

커티스 르메이

 

“나 커티스 르메이가 말한다. 전 세계의 C-54 조종사들에게 전한다. 지금 즉시 독일로 날아오도록!”

 

그 유명한 베를린 공수작전이 시작된 거다. 스탈린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씨바스키... 이러면 안 되잖아. 진짜 쇼미더머니를 찍으면 어쩌란스키. 진짜!”

 

상식적으로 미국이 베를린을 포기하는 게 정상인데, 미국은 돈을 처발라서 베를린을 구했다. 이와 동시에 발 빠르게 조직을 구성하기 시작했다. 

 

“소련 생퀴들 계속 내버려 두면 안 되겠다. 우리 저놈들 뚜까 팰 조직 하나 만들자.”

 

베를린 봉쇄를 시작하고 사흘이 지나지 않은 1948년 4월 4일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가 만들어졌다. 이 당시 회원국이 

 

미국, 캐나다,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이탈리아, 노르웨이, 덴마크, 아이슬란드, 포르투갈 

 

등이었다. 딱 봐도 중부유럽에서 약간 서쪽의 느낌이다. 동쪽으로는 넘어갈 생각을 안 했다. 이게 지정학적으로 생각해 봐야 하는 게, 제1차 세계대전, 제2차 세계대전을 비롯해서 19~20세기 유럽에서 대규모 전쟁이 일어난 이유는 ‘독일’ 때문이었다. 중부유럽에 독일이란 패자가 등장했고, 이 독일이 자기 국력에 걸맞는 ‘위치’를 차지하겠다고 나서면서 사단이 벌어진 거다. 문제는 그 독일이 반쪽이 났고, 그 반쪽이 소련 편에 붙었다는 거다. 역으로 말하자면, 동독이 서독을 넘는 순간, 바로 프랑스란 소리다. 

 

냉전 시대 가장 무서웠던 게 드넓은 중부유럽의 평원을 수천 대, 수만 대의 소련 탱크들이 밀고 나오는 기갑웨이브였다. 서독이 괜히 40만 이상의 상비군을 준비하고, 탱크들을 찍어낸 게 아니다. 소련의 기갑웨이브를 막기 위해 전술핵을 쏘겠다는 작전계획을 준비한 이유가 다 있는 거였다. 냉전 시절 내내 서독에는 미국의 최정예 기갑 부대인 5군단과 7군단이 있었다(7군단은 걸프전이 돼서야 사우디로 차출됐다). 

 

자! 문제는 베를린 봉쇄로 서방 세계가 ‘어마 뜨거워’를 외치며, 자기들의 조직을 만든 것까지는 좋은데, 1955년 5월 9일 서독을 나토에 가입시킨 거다. 

 

이게 뭐냐면, 이제 딱 경계선이 그어진 소리다. 동서독이 냉전의 최선봉이 된 거다. 

 

(웃기는 게 스탈린이 죽고 난 뒤 소련이 나토에 가입하겠다고 했다는 거다. 물론, 거절당했다)

 

서독이 나토에 가입하자마자 소련은, 

 

“씨바스키, 우리도 뭉쳐! 저쪽이 쪽수로 나오면 우리도 쪽수로 나가스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게 바르샤바 조약기구다. 서독이 나토에 가입한지 딱 5일만인 1955년 5월 14일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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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국면, 소련의 붕괴

 

동서독을 경계로 나토와 바르샤바 조약기구가 서로 으르렁거린 거다. 그런데 이게 1991년 7월이 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우리 망했다스키.”

 

소련이 망하고, 러시아가 됐다. 

 

(동독과 서독의 통일 당시, 나토 가입국을 더 이상 동쪽으로 늘리지 않겠다는 약속이 있느니, 없느니는 중요치 않다. 그 ‘동쪽’의 해석이 동독인지 동유럽인지, 약속을 했는지, 아닌지 따위도 필요 없다. 왜? 국제사회 작동 원리는 ‘힘’이니까. 조약이나 약속은 ‘힘’을 배경으로 지켜지는 거다. 즉, 설사 그런 약속이 있었다 치더라도, 그걸 문서화했더라도, 그걸 강제할만한 ‘힘’이 없다면 결과는 똑같다)

 

결국 소련이 망하면서 당연히 1991년 7월 1일, 바르샤바 조약기구도 공식적으로 해체했다.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본부는 폴란드의 바르샤바에 있다. 그런데 지금 폴란드는 나토의 일원이 됐다. 한때 나토의 라이벌이었던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본부가 있던 나라가 나토 가입국이 된 거다. 이 하나의 이야기만으로도 지금 러시아의 상황을 확인할 수 있다)

 

추신: 후아. 어째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를 설명하려다보니 이야기가 길어진다. 러시아 이야기를 하는데 나토랑 바르샤바 얘길 안 꺼낼 수도 없고. 뭐 이 정도는 교양으로 가지고 있어야 국제관계를 이해하기도 쉽고 앞으로의 이야기도 더 재밌을 테니 함께 계속 가보자.  

 

<계속>